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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목사는 꼭 교회 안에 친구를 가져야 하는가? 정말로?
by Jeremy Todd2022-07-04

교회 안에서 만드는 우정은 목회자와 그 가족에게 종종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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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토론: 목회자에게 ‘친구 같은 교우’는 가능한가? 적절한 질문이기는 한가?]


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두 편의 글이 여러분의 생각을 자극하고 넓히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우리 교회의 현실을 천착한 반응과 기고가 복음과도시에 쇄도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 분의 글(“우리의 글”)을 환영합니다.  



팟캐스트, 블로그 시대가 열리기 전에 라디오가 있었다. 폴 하비는 라디오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60년 가까이 하비는 편안한 목소리와 분명한 전달력으로 청취자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에는 뉴스와 논평과 흥미로운 인간사가 섞여 있어 정보와 함께 재미도 선사했다. 


내가 특별히 재미있게 청취한 그의 라디오 방송 중에는 5분짜리 방송 “나머지 이야기”도 있었다. 그가 들려주는 (주로 유명인사와 관련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소소한 역사적 사실을 듣고 놀랄 때도 자주 있었다. 그는 늘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이 말로 끝을 맺었다. “자 이제 그 이야기의 나머지를 여러분은 알게 됐습니다.”


내가 전에 쓴 “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를 아내와 함께 다시 살펴보다가 폴 하비의 이 멘트가 떠올랐다. 앞서 쓴 글에서 내가 밝힌 입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나머지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목회는 외로울 수 있다


그렇다. 목회자에게는 또 목회자 부부에게는 교회 안에 가까운 친구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저절로 가까운 친구가 생기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말은 문장으로 쓰기도 어렵거니와 현실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교회 안에서 우애를 나누기란 목회자와 목회자 가족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일 때가 많다. 외로움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과 그가 하는 일을 떼어 놓고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외로움은 목회자과 교인들이 사람을 그의 지위와 (종종 의도하지 않게) 떼어 생각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될 때가 많다. 이런 현실은 목회자 아내의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모든 우연한 만남, 점심 약속, 커피 모임 및 교회 밖 행사가 목사와 교인이라는 관계의 우산 아래에서 일어난다. 이런 만남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교회 이야기로, 다시 말해 교회의 사역, 프로그램, 또는 교회 정치 관련한 이야기로 회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벽돌과 모르타르가 되어 결국 여리고를 둘러싼 성벽처럼 단단한 담장을 만들어 진정한 우정을 가로막는다. 


교회를 화제로 나누는 대화를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 사람들, 택함 받은 사람들, 그리고 양자로 입양된 사람들을 주제로 나누는 대화와 혼동하면 안 된다. 교회의 사업에 관해 토론하는 것과 예수님과 그의 신부에 대해 토론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단지 교회라는 기관에 관해서만 논의하는 것도 때때로 필요하지만, 그런 대화는 우리 영혼을 고갈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지위라는 이분법을 설정함으로써 진정한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교인들에게, 목사는 있는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대로의 한 사람이 아니라 직책을 맡아 할 전문가로 보일 수 있다(친구가 훨씬 적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한 대화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역은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영적 친밀감을 키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일치를 돈독하게 한다. 이러한 진실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는 목회자의 전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세워진 우정의 기초를 제공한다.


교인의 눈에 목사가 (꼭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목회자라는 직책을 맡은 전문가로만 보일 수도 있다. 반면에 예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대화는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영적 친밀감을 키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일치를 돈독하게 한다. 이러한 진실들에 중점을 두고 나누는 대화는 목회자라는 직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세워갈 우정의 기초가 된다. 


깊은 우정은 보장된 게 아니다 


우정에는 다양한 수준의 친밀감이 따른다. 단지 표면에서 노는 수준이 있고, 또 어떤 우정은  공통의 이익과 바람, 상호 신뢰에 터하여 자라기도 한다. 모든 우정이 다 나름 중요하지만 우리 목회자가 바라는 깊은 수준의 우정은 매우 드물다. 


목회자가 섬기도록 부름 받은 교회가 깊은 우정을 바라는 목회자 가족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교회 안에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교인들이 당신이 바라는 수준의 우정에 대한 개인적인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설혹 그렇다고 해도, 목회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좌절감을 그들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우정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주님께 말씀드리되,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주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마도 하나님은 당신이 은혜로 허락하신 수준에서 우리가 자족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관계가 좀 더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려는 것이다. 깊은 우정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한두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인 전체라는 집단을 통해 충족될 것이다. 


예수님이 더 가까운 친구이시다


잠언의 저자가 쓴 것처럼, 예수님이 이런 친구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알고 또 채워주는 친구다. 분명하고 단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 되시기에 충분하다.


잠언 저자의 이 말을 기억하라. “친구를 많이 둔 사람은 해를 입기도 하지만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친구도 있다”(잠언 18:24) 예수님이 바로 그런 친구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아시고 또 채워주시는 친구이시다. 이건 분명하고 간단한 사실이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욕심 부리지 말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을 의지하는 관계의 벽을 세우고 싶은 우리의 죄성에 맞서 싸우자.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친밀함과 인정을 교회가 줄 수 있다고, 교인이 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사람과의 우정이 살고 죽는 것도 결국은 다 예수님과 맺는 수직적 관계에 달려 있다. 




원제: Pastors Should Have Friends in Church. Do The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교인들이 당신이 바라는 수준의 우정에 대한 개인적인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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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eremy Todd

제레미 토드 목사는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주에 있는 Harvest Pointe Community Church에서 교육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