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교회

교회와 SQ
by 최창국2022-09-03

한국 교회가 깊이 던져야 할 질문은 교인 수도, 예배당 크기도, 현란한 설교도, 권력도 아니다. 교회가 깊이 성찰하며 던져야 할 질문은 SQ라고 할 수 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녀가 살던 시대 속에서 ‘영적이지 않아도’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영적이지만’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더 나은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영성이 없는 지도자보다 지성이 없는 지도자가 더 위험하다는 그녀의 말은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진술이었다. 그녀의 말은 영성이 있다고 하면서 지성을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녀가 영적 지도자들의 지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역으로 지성의 홍수 속에서 영성을 갈망하는 시대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리 스트로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1)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들(Churched Christians). (2) 교회 다니는 비그리스도인들(Churched Non-Christians). (3) 교회 다니지 않는 그리스도인들(Unchurched Christians). (4) 교회 다니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Unchurched Non-Christians)이다(Lee Strobel, Inside the Mind of Unchurched Harry and Mary 참조).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보다 영적 의미와 가치에 더욱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님은 진, 선, 미의 궁극적 실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생동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의 길, 선함의 길, 그리고 아름다움의 길을 추구하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헨드릭스는 교회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서 성장을 가져오도록 안내하기보다는 많은 프로그램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하였다. 영적으로 굶주린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이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찾기 위해 떠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William Hendricks, Exist Interviews: Revealing Stories of Why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9). 


요즈음 한국 교회의 본질적 문제는 SQ(Spiritual Quotient, 영성 지능)의 문제와 깊게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Q는 우리로 하여금 선과 악을 질문하게 하고, IQ와 EQ를 통합하며, 제한된 조건을 초월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게 하는 인격이다. IQ가 낮으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EQ가 낮으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이방인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SQ가 낮으면 존재 자체가 불구가 된다. SQ가 빈약하면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인습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물질주의와 편협한 자기중심성에 빠져 버리게 된다. 한국 교회가 깊이 던져야 할 질문은 교인 수도, 예배당 크기도, 현란한 설교도, 권력도 아니다. 교회가 깊이 성찰하며 던져야 할 질문은 SQ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어느 목회자가 감옥에 가보니 믿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자신의 독자 외아들만 믿을 수 있다고 외치면서 세상보다 못한 방식으로 세습을 주장하고, 성도들을 무기 삼아 교회 부동산에 대한 과도한 재개발 비용을 받아내어 사회의 혐오 대상이 되어도 성령의 역사라고 외치고 있다. 교회를 정치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도 하다. 교회는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보수적이어야 하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에는 개혁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으로 세상을 끊임없이 개혁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영적 의미와 삶을 추구하다 소천하신 목사님도 있다. 바로 엄두섭 목사님이다. 엄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졸업 후 나주 공산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엄 목사님이 목회를 시작했을 때, 당시 산중파 지도자였던 이현필 선생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교회 내에 팽배했다. 이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던 대부분의 성도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끝까지 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다가 죽음의 위험에 처한 미국 여선교사가 있었다. 이때 어려움에 처한 여선교사를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이 구출하였다.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삼십 리 길을 맨발로 오가면서 궤짝에 여선교사를 숨겨서 지게에 지고 번갈아 가면서 구출하였다. 엄 목사님은 가장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삶 속에서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고민하게 된다. 그 후 서울에서 목회하시면서도 나주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여정 속에서 엄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먼저 자신의 영적 성숙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찰을 위한 장으로 한국 개신교 최초로 경기도 포천에 은성수도원을 설립한다. 평생 청빈의 삶과 기도와 순전한 영적 삶을 실천하다가 소천하였다. 엄 목사님은 은성수도원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신학생들의 영성 훈련을 위해 모 신학대학원에 기증하셨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소개된 두 목사의 본질적인 문제는 신학적 지식이나 종교의 정치 이데올로기화도 아니다. 바로 SQ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SQ가 결여된 종교적 행위는 오만, 야망, 지적 교만 등과 같은 무신론의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이러한 무신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우상화하고 섬기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날처럼 어떤 신상을 만들어 놓지는 않지만, 우상 숭배 자체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상 대신 돈, 권력, 지위, 지식, 종교 등에서 신을 만들어 낸다. 하나같이 다 우리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것들이지만, 이는 흔히 관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깊은 차원에서 신앙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SQ와 관계된다고도 할 수 있다. SQ는 삶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게 하는 지능과 인격을 말한다. SQ는 종교와 우리의 삶의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의미와 본질적 영혼과 깊이 관계된 지능과 인격과 관계된다. SQ가 높은 사람은 종교 생활과 삶에서 편협함, 배타성, 아집, 편견에 메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SQ가 높은 사람이 종교적이지 않으면서 영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오스 기니스가 설명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신자’와 ‘비신자’의 구별이 아니다. 진짜 구별해야 할 것은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신경을 쓰는 사람이냐, 아니면 그런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이냐다”(Os Guiness, Long Journey Home: A Guide to Your Search for the Meaning of Life, 24).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간다는 뜻인가? 하나님에 대해 입술로 노래를 하는 것인가? 정규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인가? 성경을 읽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뜻인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신앙이 일상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을 변화시키기까지 한다는 의미인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단순히 신학적 IQ나 EQ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떤 종교적인 행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SQ가 필요하다. SQ는 의미 추구와 관계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다. 영적인 것은 어떤 세련된 교리 체계나 종교적인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와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영적으로 둔하다는 것은 근본적인 가치, 즉 지구와 사계절, 하루 24시간, 우리 생활의 수단과 일상의 의례들, 몸과 그 변화, 성, 노동과 그 열매, 삶의 여러 단계, 죽음 등에 결부된 근본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도나 조하·이안 마셜, SQ, 44). 


한국 교회는 그동안 영적인 의미를 예배, 기도, 말씀 묵상과 같은 행위와만 관계시켜 온 경향이 있다. 영적인 것은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관계된다는 것을 간과해 왔다. 깊은 차원에서 보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영적인 의미도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되기보다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방향과 관계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에서 영적 의미도 삶과 관계된다(롬 12:1-2). 영적 예배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마음 또는 의식의 변화(renewing of the mind)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마음의 변화는 사고(thinking), 가치(value), 동기(motive), 삶의 방법(method)과 관련이 있다. 바울이 언급한 ‘변화’는, 폴 와쯜라위크(Paul Watzlawick)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차 변화와 비견될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연구했다. 이들은 사람들이 두 가지 변화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일차 변화(first order change)와 이차 변화(second order change)다. 일차 변화에서 사람들은 현 상황에 맞게 기능하거나 적응한다. 즉, 상황에 더 잘 기능하는 것을 배우지만 삶의 의미, 가치, 믿음, 태도, 행동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차 변화는 삶의 의미, 가치, 믿음, 태도, 행동 전체가 바뀐다(Paul Watzlawick·John Weakland·Richard Fisch, Change: Principles of Problem Formation and Problem Resolution, 10). 


영적으로 건강해지면 삶의 근본적인 의미,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변화되고 성숙해진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추구해야 할 것은 교회의 IQ나 EQ가 아니라 SQ라고 할 수 있다. SQ가 결여되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불구로 되어 버릴 수 있다. 교회의 SQ가 낮을 때 교회는 자신을 희화화하고 존재 자체가 제한되고 분열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추구해야 할 것은 교회의 IQ나 EQ가 아니라 SQ라고 할 수 있다. SQ가 결여되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불구로 되어 버릴 수 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최창국

최창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학위(MA, PhD)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제자들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현재는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삶의 기술』, 『실천적 목회학』, 『영혼 돌봄을 위한 멘토링』, 『해결중심 크리스천 카운슬링』, 『영성과 상담』, 『기독교 영성신학』, 『기독교 영성』, 『중보기도 특강』, 『영성과 설교』, 『예배와 영성』, 『해석과 분별』, 『설교와 상담』,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 『영혼 돌봄을 위한 영성과 목회』 등이 있다. 역서는 『기독교교육학 사전』(공역), 『공동체 돌봄과 상담』(공역), 『기독교 영성 연구』(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