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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②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2022-10-09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선언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면해 주신다)보다는 주로 변형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하심)로만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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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칼뱅의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하나님의 해결책이 인간 본성의 변화에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그의 모든 표현은 궁극적으로 그 해결책을 변화(transformative)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고후 3:18)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현대 개신교인이 특히 놀라는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한 변화를 구원이라는 단어가 아닌 칭의라는 용어와 더 자연스럽게 연결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데에는 특정한 언어적이고 주석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성경에서 칭의와 관련해서 사용되는 라틴어 용어를 “의롭다고 선언된”(declared righteous)이 아니라 “의롭게 된”(made righteous)으로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대 라틴어 성경은 그리스어 ‘디카이오오’dikaioō를 정당화하다iustifico로 번역했으며, 그는 이 용어를 문자 그대로 사용했다.[11]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라틴어 번역에 철저하게 의존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불의한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made)라고 말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12]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과 편지’(Spirit & Letter)에서 칭의iustificatio와 관련해 로마서 4:5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의롭게 되었다’가 아니라면 ‘의롭게 되다’에서 무슨 의미가 가능한가? ‘그가 의롭게 하셨다’는 말은 결국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닌가?”[13]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용어인 디카이오오를 오해했고, 그 결과 칭의를 선언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면해 주신다)보다는 주로 변형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하심)로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영혼과 편지’의 같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에 대한 다른 의미, 즉 “의롭게 여김을 받음‘(counted righteous)을 인정한다.[14] 그는 칭의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이렇게 제시한다. “그들이 의롭게 여겨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의롭다고 간주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의롭게 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려는 것(눅 10:29)은 결국 의롭다고 여겨지고 또 그렇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자들이 죄를 씻어내다(sanctify)라는 단어를 “거룩하게 만들다”(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와 “거룩하다고 선언하다”(마 6:9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를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그 용어에 대한 이해 방법을 비교한다. 그의 요점은 sanctify라는 단어가 ‘만들다’와 ‘선언하다’를 모두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런 구분을 왜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또한 그 의미를 발전시키거나 성경의 다른 구절과 연결한 추가적인 설명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 속에 선언적 의미까지 들어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만, 그가 가진 칭의에 대한 일차적 이해는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심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는 데에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만일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가 “의롭게 되는 것”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11.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아우구스티누스가 iustificare를 “의롭게 된”이라는 변형적인 의미로 해석한 이유에 대한 추가적인 언어학적 이유를 지적한다. 여기에는 이 용어가 오로지 라틴 서부의 기독교 저자들이 사용하는 “탈고전적”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가 iustificare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고전 작가들을 참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4판 참조.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46-47. 


12. Robert Dodaro, “Justice,” in Augustine Through the Ages: An Encyclopedia, ed. Allan D. Fitzgerald (Grand Rapids: Eerdmans, 1999), 481?83.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에서 “의롭게 하고 정당화하는”이라는 문구를 설명하면서 iustificare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읽는다: Sicut vivificans vivum faciens, sicut salvificans salvum faciens, sic et iustificans iustum faciens. 여기서 라틴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독서가 지닌 문자주의를 보여주지만 영어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한 번역가는 그것을 이렇게 번역한다. “생명을 살리는 자가 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또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안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의인이 된다는 것은 칭의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See sermon 130A.3 (WSA 3.11:120n10). 


13. The Spirit & the Letter 26.45 (WSA 1.23:172). Quid est enim aliud, iustificati, quam iusti facti, ad illo scilicet qui iustificat impium, ut ex impio fiat iustus? 


14. 이 구절에서 “간주된” 또는 “전가된” 의인에 대한 설명 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5:2을 암시하거나 인용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는 의로 간주되었다.” 그 외에, The Punishment and Forgiveness of Sins and the Baptism of Little Ones 1.18; The Deeds of the Pelagians 14.34; Expositions of the Psalms 70(71).2.4.등을 참조하라.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법적 의미에서 전가의 개념을 설명하지 않으며, 창세기 15:12 또는 로마서 4:5와 같은 텍스트를 설명하면서조차 그 의미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진 칭의에 대한 일차적 이해는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심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는 데에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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