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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남은 권위마저…
by 전재훈2024-01-02

예전에 독서 모임을 할 때였습니다. 그 모임을 이끌어 주시던 분이 중년의 아주머니셨습니다. 직업이 논술학원 원장님이십니다. 학원을 운영하기 전에는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합니다. 그 원장님께 제가 “학교 교사를 하시다가 학원을 하시니까 무엇이 제일 좋으세요?”하고 여쭤봤습니다. 원장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셨습니다. “아이들을 가려 받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학교 교사를 할 때는 아이들이 맘에 안 들어도 내보내지 못하고 일 년은 끌어안고 있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힘드셨답니다. 학원을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학원에서는 실력이 있는 아이들만 모집할 수도 있고, 맘에 안 드는 학생이나 말썽을 피우거나 사고를 치는 학생은 학원에 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서 너무 좋으시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야단치고 화내고 하는 일이 많았어요. 아무리 잘 가르치고 싶어도 따라오지 못하는 몇 명 때문에 더 많은 걸 가르칠 수도 없었고요. 그런데 학원을 하니까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서 너무 좋아요. 마음껏 가르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교사로서 권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맘에 안 들면 내보낼 수 있으니, 아이들에게 제 말이 먹힙니다.” 


‘군사부일체’라며, 선생님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을 만큼 선생님에게 권위가 있던 시절이 있었지요. 한 동네에 배운 사람이 별로 많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내 아이를 나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은 존경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잘못하면 아버지도 아이의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아이들은 스승님께 함부로 대들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스승의 권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인지 ‘스승의 은혜’를 부르다 보면 자꾸 ‘어버이 은혜’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권위는 학부모들의 학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학력의 학부모들이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선생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해서 선생님에게 맞기라도 하면 학부모가 찾아와서 항의하는 시대이니 선생님의 권위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만 갑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을 체벌하는 것조차 금지되면서부터는 선생님들의 의지도 점점 없어지고 아이들도 선생님 말씀을 따르려고도 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가 된 것입니다.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라도 선생님들의 권위를 세워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점차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제도가 상벌 제도입니다. 직접 체벌은 금하고 상점이나 벌점을 주어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점점 전문인으로 육성하여 특정 분야의 권위자가 될 수 있게 하려고도 합니다. 선생님의 최종학력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권위도 교사의 권위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목사님의 권위는 선생님의 권위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님보다 더 많이 배웠고 인품도 더 훌륭해 보였지요. 실제로 부모님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목사님께 가져가면 척척 해결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작게는 글을 모르는 분들에게 편지를 읽어주거나 읍사무소에 함께 가는 일부터 크게는 아이들 결혼식에서 부모님 장례식까지 목사님께서 척척 해결해 주시니 그 권위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목회는 권위주의로 할 수 있었지요. 권위주의로 목회하던 시절의 가장 큰 장점을 뽑자면 성도들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가 수월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교황처럼 ‘우리 목사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아’ 하던 시절은 이단이 함부로 교인을 미혹해 갈 수 없었지요.


그러나 목사의 권위도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학력 수준도 높아졌고 목사님께 말해서 해결될 일도 별로 없어지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점점 대학 갈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학교로 인식되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비인가 신학교”가 난립하면서 오히려 성도보다 무식하고 무능한 목사들이 많아지고 말았지요. 더불어 일반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목사님들이 많아지면서 목사님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클릭이나 터치 한 번으로 더 좋은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시대이니 우리 목사님의 권위에 순종해야 할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하여 포스트모더니즘도 한몫 거들었지요.


목사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교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교회를 옮길 수 있고 그렇게 옮겨간 이들을 다른 교회들이 환영해 주었습니다. 제자훈련과 큐티가 오히려 성도들의 마음에 또 다른 자만심을 심어 주게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와 내 큐티가 다르면 목사님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는 이단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호와증인이 와서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서 유혹하는 말에 홀랑 넘어가고, 제칠일안식교인이 와서 성경을 들이밀며 ‘안식일은 주일이 아니고 토요일이다’라고 말하면 또 홀라당 넘어가 버립니다. 이제는 대놓고 성경공부하자면서 교인들을 빼가는 시대가 되어서 교회마다 ‘신천지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경고문까지 붙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목사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생겨나는 또 다른 폐단은 그 권위를 세워보겠다고 무리수를 두며 거짓 학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미국에 한 달 다녀와서 박사 학위 받았다고 하는 목사님들이 참 많았습니다. 목사 가운인지 박사 가운인지 헷갈리는 정체불명의 가운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영어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박사가 목사 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권위가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지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권위를 세워보겠다고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이 난무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성령 집회를 한답시고 안수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술 담배 안 하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이라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죄인 취급하기도 했고요. 심지어는 임파테이션이라는 것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베드로처럼 수건만으로도 병을 고친다고 하고 금가루를 떨어지게 한다고도 하고 아말감을 금니로 바꾼다고 생난리를 쳤습니다. 목사의 권위에 도전하면 나병이 생긴다면서 협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목사님 돈 떼먹고 죽었다는 성도 이야기나 목사님께 대들고 사업이 망했다느니 불치병에 걸렸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목사의 권위를 세워보겠다는 대부분의 시도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최근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은 천주교는 급성장하고 있고 불교도 유명 스님들의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꽤 성장하고 있습니다만,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그룹이 목사 그룹이 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었지요.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기독교는 그야말로 “개독교”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권위논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하시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군중의 환영을 받고 입성하신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어 쫓으셨지요. 그리고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 모든 일은 당시 권위를 독점하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성전에 들어가 이제는 가르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도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지 따져 묻기에 이릅니다. 말하자면, 교사 자격증이 있냐는 것이지요. 당시에는 공인된 랍비만이 성전에서 가르칠 수 있었거든요. 이 권위논쟁은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는 좋은 흉계가 됩니다.


예수님은 권위논쟁에서 세례 요한의 권위를 근거로 저들의 흉계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큰아들은 대답만 하고 순종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 하고 나중에 순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권위는 순종과 관계된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케 하지요. 즉 하늘로서 받은 권위라도 순종하는 자에게나 그 권위가 통한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권위논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뒤에 두 개의 비유가 더 등장합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의 공통점은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진멸한다는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징계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마 21:27) 하셨습니다. 뒤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권위가 어떤 것인지 설명한 것입니다. 즉 권위는 순종을 기반으로 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징계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논쟁을 이해하려면 좀 더 넓은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권위논쟁에 앞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가의 기록을 참조하면 성전에 들어가기 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사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다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게 되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마 21:21-22)


이 말씀은 기도할 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기도는 믿고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받은 줄로 믿고 미리 헌금을 한다고 해서 ‘선불집사’라는 희한한 단어까지 등장했었지요. 한국 교회이기에 가능한 코미디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성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를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며 성도를 정죄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산 옮기기 기도로 믿음 테스트를 하면 과연 누가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말들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화과나무 저주에서 나오는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는 말씀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성전이 있던 시온산더러 들려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해 바다에 던져지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거든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신 것처럼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시온산을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심판하실 수 있는 그 시온산에서 재판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들’ 중에 시온산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권위로 징벌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손에 죽으시면서 그들을 위한 변호를 하셨습니다. ‘악함’ 때문이 아닌 ‘알지 못함’ 때문이니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위는 하늘로부터 부여된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에 바람과 파도가 순종했고 군대 귀신도 꼼작 못했습니다.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도 그 권위에 순종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놀라운 권세를 가진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권위로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들을 불러 시온산을 불바다로 만드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 권위논쟁을 벌이던 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고 아들마저 죽인 이들을 포도원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저들은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마 21:41)라고 답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권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악한 농부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왕의 혼인 잔치를 비유로 다시 권위를 설명하십니다. 왕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 왕은 그의 권위로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7)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복을 입지 않아도 손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지게 됩니다. 권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저들의 권위논쟁에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이 보내신 권위임을 말씀하셨다면 저들의 결말은 ‘진멸당함’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스스로 권위 없는 자가 되어 권위 있다는 자들의 손에 붙들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저들이 당해야 할 ‘진멸당함’을 본인이 대신 당하셨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아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이 쓰신 거룩한 두 돌판을 깨뜨립니다. 비록 그 일로 다시 40일을 금식하며 십계명을 다시 받아 와야 하는 수고로움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깨지 않았다면 우상숭배한 이스라엘은 그 돌판에 쓰인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에 의거해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모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온유함이 승하신 분이십니다. 물론 권위도 훨씬 더 크신 분이셨지요. 예수님이 권위논쟁에서 답을 회피하신 이유가 바로 그 권위 앞에 진멸당할 저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권위를 앞세우면 저들은 심판의 대상이지만 사랑을 앞세우면 저들은 ‘변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탈권위의 시대입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보다 친구같은 아버지가 대세입니다. 선생님들도 권위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아이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분이 존경받는 시대입니다. 교황도 예전의 알던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스스로를 낮춰 아기들하고도 눈높이를 맞춤으로써 존경을 받고 있고, 스님들도 절에만 머무르기보다 법륜스님처럼 산에서 내려와 즉문즉설을 하며 민초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권위를 내세우면 시대를 역행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한국 기독교가 권위를 세우려다 도리어 망한 케이스입니다. 


권위는 스스로 내려놓기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에 새로운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어차피 땅에 떨어진 권위입니다. 누더기가 된 권위를 다시 주워 입으려 하지 말고 이참에 예수님을 본받아 조금이라도 남은 권위마저 내려놓고 성도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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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