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교회

예배의 규범을 정하는 원칙
by Derek Thomas2020-06-07

간단히 말해서, 예배의 규범을 정하는 원칙(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지시사항이 있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 왜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이 원칙에는 반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예배뿐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 전체가 다 성경이 정해 준 규칙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자신을 성경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예배에 대해 성경이 정한 원칙을 더 소중하게 가슴에 간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와 예배 자유주의에 문을 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말러(Mahler) 교향곡을 어떻게 들어야 한다든가, 우표 수집을 해도 좋다든가, 흰족제비를 애완동물로 키워도 된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더라도,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성경중심주의 기독교인 중에는 교리주의에 빠져서 그런 모든 취미가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환경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시대와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에 기꺼이 동의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가장 기초가 되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적 권위가 이 시대 상황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성경은 몇몇 특정한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주님의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노동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벌어야 한다. 그에 덧붙여, 모든 가능한 환경을 다 포함하는 아주 일반적인 원칙을 성경은 제시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실로 우리의 모든 삶은, 그게 명령이든, 금지 사항이든 아니면 일반적인 원칙이든지 간에 다 성경에 의해서 규제 받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한마디로 모든 삶을 통제하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존 칼빈(John Calvin)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과 17세기 청교도를 대표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원의 경우 회중 예배를 진지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예배와 관련해서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일반적인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예배를 받으셔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에 따라 회중 예배에 대한 특정 요구사항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거기에서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이 구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장 일반적인 설명을 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명백하게 인정하지 않은 모든 숭배 방식을 승인하지 않으신다”(‘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그리고 1689년 두 번째 런던 침례교 고백서(‘Second London Baptist Confession’)에 따르면, “예배 방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 그러므로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이나 창작, 사탄이 주는 연상이나 눈에 보이는 그림 또는 조각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22.1)


그렇다면 성경은 어디에서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성경 구절이 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성막을 세우는 것과 관련해서 엄격한 규범을 설명한 출애굽기는 “네게 보인 양식대로”(출 25:40) 하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 또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채우기에 부족하다고 암시하고 있다(창 4:3-8). 그리고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은 예배와 관련한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담고 있다(출 20:2-6). 황금 송아지 사건과 관련한 가르침은 예배가 단지 인간이 생각하는 가치와 취향에 맞춰 드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레 10)로 분향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라고 하시며, 제대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사울의 예배를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마 15:1-14)에 따르는 바래새인의 예배를 거부했다. 이 모든 사례들은 성경이 분명하게 정해주지 않은 다른 방식과 인간이 중시하는 가치에 따른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중요한 사례는 골로새와 고린도에서 드려지던 잘못된 예배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다. 바울은 골로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자의적 숭배”(ethelothreskia, 골 2:23) 또는 “스스로 만든 종교”라고 규정했다. 골로새 교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를 예배에 도입했다(그들은 그 원천을 천사라고 주장했다. 골로새서 2장 18절의 “천사 숭배”가 그런 의미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과도한 방언과 예언이었고, 그로 인해 바울 사도는 회중 예배의 규범을 정했다. 바울은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숫자와 순서를 “모든 삶”에서 다 적용되지는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규정했다.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못하게 했고(고전 14:27-28), 두세 명만이 예언을 하게 했으며, 그것도 순서대로 하게 했다(29-32). 적어도 고린도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가르침은 회중 예배가 규제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방식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예배의 특정 요소가 부각되었다. 성경 읽기(딤전 4:13), 말씀 선포(딤후 4:2), 찬양(엡 5:19; 골 3:16), 그 중에서도 말씀 전체뿐 아니라 시편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탄생-삶-죽음-부활-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전개를 드러내는 찬양 부르기와 말씀을 중심으로 한 기도(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 마 21:13)다. 그리고 교회가 담당해야 할 두 개의 성례인 세례와 성찬식을 통해서 말씀을 바라보기(마 28:19; 행 2:38–39; 고전 11:23–26; 골 2:11–12)다. 거기에 추가해서 가끔씩 들어가는 요소인 맹세, 서원, 극한 금식 그리고 감사도 말씀 속에서 인정되고 부각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5 참고).


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부적절함과 어리석음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주 예배에 광대가 나와서 성경 말씀을 마임으로 공연할 것이라고 광고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모든 예배가 다 성례만 치르는, 공장에서 나온 똑같은 모양의 과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누릴 수 있는 엄청난 다양성이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은 영역에서 그렇다. 따라서 찬송가를 부를 것인가 가스펠송을 부를 것인가, 또는 성경을 세 구절 읽을 것인가 아니면 세 장을 읽을 것인가, 기도를 한 번에 길게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번에 나눠서 할 것인가, 성찬식 때 쥬스를 마실 것인가 아니면 진짜 포도주를 마실 것인가 등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적용되거나 언급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이것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그러나 누군가가 예배 시간에 춤을 추거나 드라마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성경 어떤 구절이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설교자가 강대상 위를 다니면서 목소리를 연기자처럼 하는 것도 드라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논의에서 벗어난다). 이 두 가지 사례는 모두 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려는 시도며, 이것이 성경적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동시에 이 논의의 핵심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명령은 고사하고, 여기에 관한 그 어떤 언급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성경적 해석 규칙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 한, 시편의 내용을 가지고 또는 법궤 앞에서 분명히 벌거벗고 춤을 춘 다윗의 사례를 갖고 지금 이런 문제를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런 식의 논쟁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이 바로 신앙 양심의 역할이다. 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없는 경우, 우리 모두는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 회중을 향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며 공격하는 “예배 인도자” 또는 강력한 목사의 지시를 받으며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이런 공격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문장은 이것이다. “하나님만이 양심을 주관하시는 주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 말씀에 위배되거나 말씀에서 이탈된 인간적인 교리나 계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따라서 양심을 떠나 그런 인본적인 교리를 믿거나 그런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맹목적인 신앙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참된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0:2). 하나님이 주신 명백한 지침인 경우,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다 속박이고 율법주의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

번역: 무제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Derek Thomas

데릭 토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콜럼비아에 위치한 First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이다. 또 애틀랜타에 위치한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과 목회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Ligonier Ministries의 작가이며, 저서로는 한국어로 번역된 '웰린 강해 신서' 시리즈와 How the Gospel Brings Us All the Way Home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