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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에 관한 열 가지 사실
by Kevin DeYoung
2018-11-13
1. 모세는 실제로 ‘십계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출애굽기 20장 1-2절은 가장 유명한 성경 말씀 중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전 세계가 가장 중요한 종교 문헌이라고 여기는 십계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실제로 ‘십계명’이라고 불리지 않았다.구약성경(출 34:28; 신 4:13; 10:4)에서 세 번 등장하는 ‘십계명’의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 의미로 ‘열 가지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출애굽기 20장이 자주 십계명(decalogue)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즉, 데카(deka)는 헬라어로 ‘10’을 의미하고 로고스(logos)는 ‘말씀’을 의미한다. 이를 해석하면,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 가지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십계명이 과거를 넘어 현재에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말씀임을 강조하고 싶다.2. 십계명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 준다율법은 제정자의 마음과 특성을 표현한다. “율법에는 관심 없어”라고 말하기 전에, 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발끈하기 전에, 우리는 율법을 만드신 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그 계명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영광, 가치, 왕권에 관해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우리에게 말해 준다. 율법의 제정자를 무례하게 여긴다면 그 율법을 존중할 수 없다.3. 십계명은 세상과 우리를 구별한다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다(벧전 2:9).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었으며,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 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법규를 따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항상 거룩한 사람들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부르셨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즉,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다.4. 십계명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제공한다우리는 종종 십계명이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노예처럼 가두고, 우리의 꿈과 잠재성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삶(요 10:10)과 진정한 자유(요 8:32)를 주시기 원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요한일서 5장 3절은 그분의 법이 무겁지 않음을 분명히 말한다.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도록 묶거나 규율들로 짓밟으려고 하지 않으신다. 십계명은 감옥 창살이 아니고, 길을 터주는 교통법규와 같다. 교통법규가 없으면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운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호등의 변화에 따라 길을 건넌다. 학교 근처에서 운전할 때 속도를 줄이며, 학교 버스가 지나가면 일단 멈춘다. 교통법규가 없다면, 식료품점에 차를 몰고 갈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가파른 산길을 운전할 때 죽음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가드레일을 저주하는가? 아니다. 가드레일을 산 위에 가져다 두기 위해 큰 비용을 들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안전장치가 자유롭고 보호받는 여행을 하도록 돕기 때문이다.십계명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한 지시사항이 아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은 백성이 이 세상에서도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법률이다.5. 십계명은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기독교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야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율법이 생긴 이유는 구원을 위함이 아니다. 당시 애굽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가 너희의 외침을 듣고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므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그렇게 너희가 구원을 얻어 자유와 용서를 받게 되면, 나는 너희가 살아갈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구원은 순종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구원은 순종할 이유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계명을 순종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켜 행하는 하나님의 모든 법은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실천 가능하다.6. 십계명은 우리의 직관이나 문화적 코드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이다이 시대의 정신은 주관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 법은 지키지 않으며, 남을 정죄하는 행위에 거침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에 관하여 상당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성과 관련된 도덕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더 이상 성에 개방적인 모습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적 자유를 외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격적인 비방과 모욕적인 말들로 쉽게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다툼을 일으킨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신들만의 도덕적 코드를 지니고 있다.그러나 성경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잠 9:10). 우리는 마음속의 외침을 따를 때 도덕적 가르침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참된 도덕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알기 원하고, 선한 삶을 살기 원하며, 친구나 이웃과 함께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을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한다. 7.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은 십계명에 근거해 있다교회는 역사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의 중심에 십계명을 두었다. 특히 어린이와 새신자들을 위한 교육에 십계명을 활용했다. 여러 세기 동안 교리 교육은 세 가지를 기본으로 삼았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칠까요? 새신자들이 기독교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그 대답에는 늘 십계명에 대한 강조가 포함되어야 한다.8. 십계명은 구약의 나머지 율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성경이 십계명을 유별나게 강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십계명이 가진 특별한 위치를 저평가해서는 결코 안 된다. 먼저 십계명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대면하여 주신 말씀으로서(신 5:1-5),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계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신 5:22-27). 출애굽기 20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문학적으로나 영적으로 높은 자취를 남겼다. 이 율법이 쓰인 돌판이 만나 및 아론의 지팡이와 함께 언약궤 안에 놓인 것은 당연한 이치다(히 9:4).구약성경에는 많은 법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십계명이 나머지 법들의 근본이 된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헌법과 같으며, 구약성경의 다른 법들은 그 뒤를 잇는 일반 규율이다.9. 십계명은 신약 윤리의 핵심이다예를 들어, 마가복음 10장 17절을 생각해 보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다. “영생을 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계명들을 네가 알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신 후, 우리의 이웃과 관련 있는 계명들을 나열하신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19절).우리는 나머지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그 젊은이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깨닫도록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명백하게 지키지 못했던 한 가지 명령이 바로 예수님이 아무 말씀 없이 넘어간 명령, 즉 탐내지 말라였기 때문이다(20-22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웃에 대한 의무를 가르치실 때, 바로 십계명을 거론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10. 십계명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적절하다우리가 그 계명들을 충분히 혹은 완벽히 지킬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죄를 알게 하고 십자가로 인도하는가? 물론이다. 동시에 그 계명들은 살아가는 방법,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오늘날에도 시내산에서 전해 내려온 이 열 가지 말씀이 여전히 필요하다. 이 십계명은 구약 시대에도, 그리고 신약 시대와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에게 십계명은 의무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분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 14:15).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Ten Commandments번역: 정은심
신학
구약성경
십계명
모세
하나님
자유
구원
율법
신약윤리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 아홉 단계 화해법
by John Piper
2018-11-12
하나님의 은혜는 오랜 인내와 즉각적인 실행, 그리고 꾸준함으로 나타난다. 화해를 시도할 때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는 그 방법에 대해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먼저 사과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하면 마치 사과의 기회가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생명력 있는 결혼생활은 골로새서 3장 13절 말씀을 실제의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이 구절에는 "서로 용납하여"와 "용서하되"가 함께 있다. 이 두 가지가 결혼생활에서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배우자와 화해에 이르는 방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마음이 죄로 가득한 나머지, 진심을 담아 배우자에게 사과를 건네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다음의 아홉 단계가 유용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실제 자주 일어나는 상황을 기초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잘 기억해두고 활용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배우자의 입장에서도 다음의 단계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1단계배우자가 당신의 말이나 행동의 잘못된 부분 또는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지적한다. 2단계그 말을 들은 당신은 화가 난다(순간 당신이 화를 내야 하는 대여섯 가지의 이유들이 떠오른다). 3단계그러나 그 분노가 경건한 반응이 아니며, 지적 때문에 화를 낸 것은 사과해야 할 일임을 머리로 먼저 깨닫는다. 4단계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미 화가 났기 때문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기 어렵다. 마음은 다정하지 못하고,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미안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미안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침묵보다는 낫다. 이런 행동은 은혜의 부분적인 결과이다.5단계배우자는 당신이 화가 나 있는 상태를 느끼게 되고, 진심이 아닌 사과에 만족하지 않는다. 6단계하루이틀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은 당신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화내기를 멈추게 하신다(약 1:19-20). 그리고 복음의 진리들을 다시 상기시키신다(엡 4:32). 또한 부드러운 마음을 허락하신다(겔 36:26). 이 같은 성령의 사역은 말씀을 읽거나 친구와의 대화 중에, 또는 책을 읽다가, 혹은 예배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 그동안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궁금해 하고, 기도하며, 화해를 소망하게 된다. 7단계이제 화는 누그러진다. 다정함이 솟아나며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또한, 죄에 대한 반성과 슬픔이 자라난다. 8단계당신은 배우자와 마주보고 대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 했던 사과는 당신의 죄성으로 인해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였으며, 충분하지 못한 사과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배우자를 어떻게 느끼는지 다정하게 말해 주며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 9단계자비로운 마음으로 배우자는 당신을 용서하고 모든 상황은 나아지게 된다. 나는 당신이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 아홉 단계의 화해법에 대해 배우자와 함께 나누길 원한다. 그리고 이 방법을 어떻게 두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길 원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상대방을 함부로 몰아붙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분노를 절제할 수 있을 때, 화가 잠잠해지기 전까지의 단계(1-6단계)가 두 사람에게 너무 큰 절망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A Possible Marriage-Saver in Nine Steps번역: 매일배움
가정
결혼
지적
분노
성령
사과와용서
자비
분노절제
화해법
오늘날 리더십의 모형으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을 사용하지 ...
by Timothy Paul Jones
2018-11-12
한 권의 책을 저술하고 편집하는 일은 꽤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심지어 이미 저술한 책을 완전히 새롭게 편집할 경우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사실 작년에 내가 바로 그 일을 했다.번거롭기 그지없는 작업을 시도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개혁 교회 리더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는 패턴인–리더십의 모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3중직 (Munus Triplex)대략 십 년 전 즈음의 일이다. 당시 교회를 개척하려던 사람들을 통해 ‘왕 같은 리더’(kingly leader) 혹은 ‘제사장적인 유형’(priestly type)이라는 식의 표현을 듣게 된 적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두 유형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런 리더십의 모형이 있음을 알게 됐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저는 목양하는 일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제사장보다는 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목사가 된다면 상담과 심방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또 어느 목회자 후보생은 비슷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저는 선지자적인 교사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사역의 전략과 비전을 다루면서 제 리더십 스타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왕 같은 리더를 찾고 있습니다.”저는 이들과 깊이 교제할수록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델로 삼은 리더십의 근거가 성경에 있다고 확고히 믿고 있었다. 즉 예수님과 같은 리더가 되는 일은 예수님이 성취하신 구약성경의 직분들 가운데 한 가지 이상을 모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3중직은 그들에게 자신만을 위한 리더십의 모형을 제공해 주었다. 이 모형을 주창하는 사람에 의하면, 선지자적 리더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불타는 열망을 가진 대언자’이다. 반면, 왕적 리더는 ‘어떻게 비전을 수립하고 조직하며 실행하는지를 아는 지도자’이다. 더 나아가 제사장적 리더는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고 대인 관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역자’라고 할 수 있다.지난 수십 년에 걸쳐 이러한 리더십 모형은 개혁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 개척자들 사이에서 점점 더 대중화되었다. 내가 아는 교회 개척자들은 존 프레임(John Frame)과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의 삼중관점적 접근(the triperspectival approach)이 교회 개척 컨퍼런스에서 듣게 된 리더십 모형 이론을 강화한다고 주장했다.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도 처음에는 그 모형이 적용되는 방법들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했다. 특히 이 모형으로 인해 나는–‘제사장적 역할’이라고 간주되는–돌봄의 사역을 타인의 손에 맡길 수 있었다. 또한 일부 목회자 후보생들은 상담이나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돌보는 일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당신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The God Who Goes before You)이라는 리더십 서적을 공동 저술하기 시작할 때 세운 목표가 있었다. 이는 교회 리더들이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고정된 카테고리에 집착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일이었다. 그리고 책의 저술을 끝마칠 때 도달한 결론은 이러했다. 바로 새 언약 시대의 리더들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적용해 온 모형 이론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두에 거론한, 책을 거의 처음부터 다시 쓰게 된 이유이다.3중직을 사용할 때 수반되는 문제들물론 3중직은 그 자체만으로 성경적인 배경을 띠고 고대사회로까지 소급되는 기원을 가진 훌륭한 구조이다. 그러나 선지자, 제사장, 왕이 다른 지위에 있는 서로 다른 리더들의 역할을 묘사한다는 개념은 비성경적인 현대 사상이다.이제 내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이끌어 준 수많은 성경의 진리들 가운데 세 가지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1. 구약성경에서 왕직은 조직적 리더십이 아니라 언약적 신실함과 관련되어 있다이스라엘 왕의 주요 임무는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따르는 일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특별히 모세가 향후 등장하게 될 이스라엘 왕들에게 전한 명령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율법책을 기록하라”(신 17:18).이 명령은 각 왕들로 하여금 백성을 판단할 때에 정의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했다. 또한 적이 백성의 안전을 위협할 경우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과의 언약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비전을 조직화하는 전략들은 이스라엘 왕의 필수 자격 요건에 해당되지 않았다.즉 왕의 리더십과 조직화를 위한 전략을 동일시하는 것은 리더십에 관한 현대 서구사회의 개념을 구약성경의 언약적 왕직을 이해하는 일에 삽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2. 새 언약에서 왕직과 제사장직은 개별적인 역할들이 아니라 공동의 직분이다 하나님은 새 언약의 백성들을 완전한 대제사장이자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임명하셨다(벧전 2:9; 딤후 2:12; 계 5:9-10).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모든 민족과 나라의 형제자매들이 단일한 제사장 직분을 얻게 되었다.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왕같이 되거나, 더 제사장처럼 될 수 없다. 그리스도가 가진 왕적 제사장 직분(Christ’s royal priesthood)의 모든 측면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공동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여러 구별된 은사들을 서로 다른 교회의 리더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유의할 점이 있다. 제사장과 왕의 직분이 어느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뚜렷하게 지니고 있는 개별적인 역할을 가리킨다고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이해다. 제사장과 왕의 직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는 모든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이유로, 고린도 교회의 몇몇 교인들이 각각 ‘왕 노릇’을 하고자 했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자리로 돌아가 자신과 같이 종으로 섬기는 삶을 본받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고전 4:1, 8, 16절).3. 가르치는 일은 선지자보다도 제사장과 훨씬 더 뚜렷하게 연관된 사역이다이 모형에 따르면, 유능한 교사는 선지자적 리더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경은 가르치는 일을 반드시 예언과 연관시키지는 않는다. 사실 가르치는 일은 선지자보다도 제사장과 관련된 사역으로 빈번하게 나타난다(레 10:10-11; 왕하 12:2; 대하 15:3; 17:7-9; 35:3; 스 7:6-10; 느 8:7-9; 사 28:7-10; 렘 18:18; 겔 7:26; 22:26; 미 3:11; 말 2:7-9).선지자들은 기록된 계시를 해석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일은 앞서 주어진 다른 계시들이나 또는 그들의 선포에 뒤따르는 사건들에 비추어 검증되었다(민 12:6-8; 신 18:19-22).심지어 3중직이 서로 다른 리더십의 유형들을 묘사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다 치더라도, 예언이 가르치는 일에 직접 연관된 사역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더욱이 신약성경에서 예언은 1세기의 모든 성도들이 받을 수 있는 은사로 묘사된다(행 2:17; 고전 14:1-5, 31-39).결국 선지자, 제사장, 왕이 다양한 직분에 있는 서로 다른 리더들이 가진 역할이라는 개념은 최근의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내가 발견한 최초의 언급은 1967년에 출판된 R. B. 카이퍼(Kuiper)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The Glorious Body of Christ)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목회 리더십에 관한 책을 쓰며 성경을 연구한 결과, 이 모형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수개월을 들여 완성했던 책을 다시 저술하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3중직은 분명히 우리의 리더십을 구체화한다. 하지만 그 직분들은 일종의 리더십 모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어 그와 연합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기능으로써 다루어질 때 우리의 리더십을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n’t Use Prophet, Priest, and King as a Modern Leadership Typology번역: 장성우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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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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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
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와 놀라운 성취
by Keri Folmar
2018-11-12
린다(Linda)와 코니(Connie)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에 규칙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고, 꼬박꼬박 숙제를 했다. 그러나 성경 공부의 형태가 기존보다 더 집중적이고 복잡하게 바뀌자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됐다.그러던 중 반가운 변화가 생겼다. 린다와 코니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 공부를 위해 매일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더 많은 것을 깨닫기 위해 참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성경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깊어질수록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늘어났고, 더불어 성경 말씀 자체에 무척 집중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영적 성장으로 이어졌고, 궁극적으로는 전 교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는 무척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바른 성경 공부에 필요한 세 가지 유의점을 살펴보겠다. 1. 교회 중심이 되라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여성들은 강해설교를 통해 영혼의 양식을 얻는다. 그들은 교회에서 공급하는 신학을 통해 하나가 되며, 서로에게 힘을 주는 언약 관계에 속하게 된다. 교회 중심의 성경 공부는 여성들의 모임이 원활하도록 돕는 동력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돕는다. 나아가 교회 내 여성들은 교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감에 따라 전 교인을 세우는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처럼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가 개교회를 중심으로 정착할 때, 교회에는 여러 긍정적인 효과들이 일어난다.우리 교회는 성경 공부에 참석하는 여성들에게 교회의 다른 모임에도 참석하도록 권면한다. 우리는 그들을 교회에 초대하고 함께 헌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함께 설교를 듣고,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며, 환영의 마음으로 섬기고 또한 섬김을 받도록 한다. 이는 대규모 강연뿐만 아니라 소규모 토론과 일대일 대화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여성들과 그녀의 가족들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성장한다.공동체, 직장, 학교 등에서 벌어지는 봉사 모임 성격의 성경 공부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는 훌륭한 사역이 될 수 있다. 특히, 요즘에는 외부에서 진행하는 초교파 성경 공부 모임들이 많다. 그러나 여성들의 바른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성경 공부를 교회의 권위 아래 두는 것이 좋다. 2. 비디오를 끄라성경을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물론 일부 비디오 성경 공부는 신학적으로 확실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비디오들은 종종 성경 말씀을 이해하도록 인도하기보다는 감정적 반응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두기도 한다. 화려한 언변을 가진 강사들은 청중을 웃고, 울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 말씀보다 그들이 말한 예화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면, 성경 공부의 본질을 잃은 것이다. 또한 비디오를 통한 학습은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경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해 자신감을 잃게 만들 수 있다.두바이기독교교회연합에서는 기존에 시행하던 비디오 성경 공부를 멈추었다. 이를 대신해 보다 면밀하게 성경을 이해하고 여성의 삶에 직접 적용할 수 있도록 몇몇의 질문들로 구성된 교재를 채택했다. 우리 교회는 캐서린 닐슨(Kathleen Nielson)의 ‘살아 있는 말씀 연구’(Living Word Bible Studies)를 읽고, 신학에 기반을 두되 특별히 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직접 교재(최근 마가복음에 대하여 쓴 두 권의 책)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책들은 여성들이 보다 친근하게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 신학적 논제와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자료가 성경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여성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재여야 한다. 이제 비디오 성경 공부를 멈추고, 스스로 성경 말씀을 깊이 공부하길 권한다.3. 자격을 갖춘 지도자를 찾으라과거 대부분의 성경 공부는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 자원하는 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교재를 사용해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식이었다. 그중 일부 지도자들은 심지어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교회 장로들의 가르침이나 감독을 받지 않았고, 신학적으로 통일된 내용을 가르치지도 않았다.우리 교회의 어떤 지도자는 신앙이 구원의 필수요건임을 믿지 않기도 했다. 그 지도자가 진행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는 40여 명의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힌두교인과 무슬림도 있었다. 모임에 참석하는 여성들 중 유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참된 복음이나 진실된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다.리더십의 변화는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우리 교회는 여성 지도자들에게 조직신학을 배우도록 돕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관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독려하였다. 주로 과거에 성경 공부를 지도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교육도 실시했다. 또한 성경 말씀을 좋아하며 교회에 헌신적인 여성들을 새로운 지도자로 양성하였다. 우리는 교회 전체의 문화를 변화시킴과 동시에 리더십의 구성원과 방향에 대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변화를 이끌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건강한 신학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성경 공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진지하게 적용한다. 그들은 이집트, 가나, 호주, 인도, 케냐, 부룬디, 아일랜드, 카자흐스탄,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지도자들이다. 눈에 띄는 공통점이 없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 사역의 가치하나님의 은혜로, 여성들을 위한 특별한 성경 공부가 전 교인들의 협업 속에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중심의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과 지도자들은 신학적인 깊은 지식을 점차 쌓아가고 있음은 물론, 자신이 아는 것을 함께 공유한다. 성경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이 만남을 특별히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이 시간을 통해 점차 삶 속에서 주님을 알아 가고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교회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이제 다른 사람들을 제자 삼기 원하고 있다.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를 강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과 마찰이 생길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모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규모의 성경 공부든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에너지를 가치 있게 사용하여 삶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ot All Women’s Bible Studies Are Created Equal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사역
여성
성경공부
성취
교회중심
자격
지도자
가치
몸에 대한 열망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by Kendra Dahl
2018-11-11
건강, 운동, 다이어트는 새해 결심의 최상단을 장식하는 키워드로 매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몇 년 전까지 잘 맞던 청바지를 움켜쥐고 이 옷을 다시 입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피트니스 연간 회원권이나 요가복의 세일은 우리의 결심을 더욱 부추긴다. 또한, 페이스북에는 몸매와 운동에 대한 게시물이 넘쳐난다.나 역시 살을 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어린 시절, 수영장에 가면 남자 아이들의 놀림이 두려워 항상 헐렁한 티셔츠로 몸을 가렸다. 그러다 열두 살 즈음에 다이어트에 성공했고, 친구들로부터 그토록 원했던 선망의 눈빛을 받을 수 있었다.그 이후로 내 몸매를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리라 마음먹었다. 식이 조절과 운동, 심지어는 일부러 구토까지 하면서 이 모든 과정을 줄기차게 따랐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몸매에 대하여 늘 부족함을 느꼈다. 거울 속의 나를 볼 때면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친구들보다 빠른 임신과 출산의 경험은 몸에 대한 불만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젊고 늘씬한 친구들의 몸에 비하면 나의 몸은 처지고 모양새가 없어 보였다. 물론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끊어질 수 없는 그분과의 관계가 내게 자신감을 주었고, 사랑하는 남편과의 강한 유대감이 마음에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내 안에 지속되어 온 몸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 후로 여러 해가 지나고 사랑스러운 두 아이도 더 갖게 되었다. 그러나 거울 속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불평하는 자아와 크리스천으로서의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여러 신학자들은 로마서 8장을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손꼽는다. 이 장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의 풍부한 교훈은 추상적이거나 서로 동떨어진 개별적 개념이 아니다. 하나의 크고 원대한 통찰로서 우리의 몸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잘 알려 준다. 이제부터 로마서 8장을 통해 하나님이 몸에 관해 알려 주시는 세 가지 진리를 살펴보려 한다. 이 교훈들이 당신의 내년 새해 다짐에 분명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1.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아름다움의 기준은 문화마다 다르고, 유행의 흐름에 따라 제각기 변화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풍만한 하체를 아름답게 본다. 반면,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날씬함을 넘어 가느다랗고 마른 다리를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이 갈망해야 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은 이상적인 몸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 몸의 형태가 아닌 마음의 상태, 즉 우리에게 부족한 영의 모습에 대하여 가르친다. 멋진 몸매를 향한 열망은 결국 자부심에 대한 목마름이다. 늘어난 몸무게, 또다시 실패한 다이어트, 등록만 한 채 가지 않은 헬스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을 정죄하는 점점 더 많은 조건들이 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이 정도면 자부할 만하다고 평가하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기준을 세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고군분투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로마서 8장 1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주시는 이러한 자유는 나의 겉모습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그토록 바라는 신체적 화려함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타인의 눈을 사로잡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가 아름답고, 섹시하고, 자신만만하고, 강하게 보이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의 눈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갈망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변치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그 사랑의 뿌리가 우리의 외양이나 행위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사람들의 찬사나 사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쉽게 변하기 마련이다. 이상적인 몸매를 만드는 것과 그 결과인 타인의 선망은 결코 자아를 만족시킬 수 없다. 몸에 대한 욕구라는 주제 아래 영적인 문제와 죄성에 관하여 논할 부분들은 충분히 많지만 그중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두려움이나 욕망의 외피를 벗어 던질 자유를 얻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껍질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 정죄함이 없는 그 사랑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몸매는 눈에 보이는 모습이다. 우리는 늘 거울 속 자신의 몸매가 자부할 만한 모습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보혈의 은혜는 그 모든 정죄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를 자유롭게 한다. 타인으로부터의 정죄는 물론이요, 약한 자아가 스스로를 정죄하려 할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2.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이 말하듯,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선(善)을 위하여 모든 일에 역사하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이룬다 함은 우리의 성품이 변하여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심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 잘 알려 준다. 멋진 몸매 만들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혹은 거룩하지 못한 삶)과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에서 우리의 몸과 거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가꾸고 훈련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한다. 바울은 외양이 아닌,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가꾸는 데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멋진 몸매를 만드는 시간 속에서 종종 반복되는 좌절에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황조차도 우리 영혼의 성숙을 위해 사용하신다. 당신은 식이 조절과 피트니스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오갈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우상을 보게 하시고, 자만을 뿌리뽑으시며, 진정한 거룩을 이루도록 인도하신다. 이는 우리가 몸을 위하여 애쓰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내가 무려 354번째 다이어트에 실패했을 때이다. 하나님은 이날의 실패를 내가 주님의 자녀로서 한걸음 더 성숙해지는 데에 사용하셨다고 확신한다. 그분은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이다(빌 1:6).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몸로마서 8장 23절은 연약한 몸 때문에 마음으로 탄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에 이르기를 열망하고 기다린다. 더욱이 우리는 장차 받을 영광과 아프거나 죽지 않을 영원한 부활을 이미 약속 받았다. 하지만 육체는 여전히 약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아직 부활하지 않은” 세상 속의 육체로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육체의 노쇠를 경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다.고린도교회를 향한 서신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을 멋지고 강하게 만들라고 권하지 않는다. “너희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 오히려 그는 교회인 몸으로 죄짓는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 몸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고전 6:19-20). 그런데 매일 운동을 하는 것, 유기농 제품을 챙겨 먹는 것, 주님이 아닌 타인의 찬사를 갈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몸을 헌신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가?몸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이루어가는 매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힘으로 성취하실 목적 때문에 창조되었다. 그렇기에 크리스천은 흙으로 빚은 연약한 몸 안에 복음이라는 보화를 담고 다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러한 모습으로 만드셨을까? 우아하면서도 충격에 강한 값비싼 도자기처럼 만드실 수는 없었을까? 왜 하필 약한 질그릇의 형태로 만드셨을까? 그 이유는 몸의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원대한 힘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 4:7).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몸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한 친구가 내게 당부했다. 만약 몸을 관리의 대상으로 본다면, 좀 더 강하고 멋진 신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육체는 연약하지만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물리적, 외양적 차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을 관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겉모습이 아닌 역할에 있음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몸을 준비해야 한다. 즉, 우리 몸을 살아 있는 희생제물로 드리도록 관리하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특별하게 창조하셨다. 크리스천은 한낱 풀과 같이 시들어질 외양을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며몸을 대하는 방식은 곧 영혼의 상태를 대변한다. 음식에 대한 강박, 인정에 대한 욕구, 멋진 몸매가 만족을 완성한다는 환상까지,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영혼의 상태이다. 물론 신체를 강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건강과 멋진 몸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도, 육체는 여전히 연약할 수 밖에 없다. 크리스천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 육신을 넘어 영원히 다시 살아날 그날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고전 15:42). 우리는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질 그날을 소망해야 한다. 그 소망 안에서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롬 8:24).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s You Start that Diet: 3 Truths About Body Image번역: 정새롬
생활
건강
몸
정체성
정죄
영혼의성숙
성령의전
질그릇
부활
꾸준히 기도하라!
by John Piper
2018-11-11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비밀을 전하는 일로 매여 있습니다. 골로새서 4:2-4.본문은 지금 우리도 들어야 할 기도에 대한 다섯 가지 지침을 준다. 첫째, 꾸준히 기도에 힘을 써야 한다. 흔히 우리가 특별 기도 주간에만 보여주었던 부지런한 모습을 평소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꾸준한 기도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간청하는 벗’(눅 11:5-8)이라든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눅 18:1-8)로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꾸준함은 참된 성도의 삶을 검증하는 최고의 테스트이다. 나는 성도 가운데 60년, 70년, 혹은 80년을 꾸준히 기도해 온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들이 많은 교회는 얼마나 복된가! 둘째,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아마도 바울은 이 지침을 겟세마네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배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요청했지만 그들은 잠들고 말았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네가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7)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할 때 깨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산만하게 흐트러져 이런저런 생각으로 방황하지 않아야 하며, 헛되이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진부하고 의미 없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편협하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기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 나아가 무엇이 선한지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분명히 우리 안에 기도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면, 우리가 스스로 기도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경험하게 된다. 셋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기도하는 성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써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들을 때마다 놀라곤 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더욱 감사함으로 기도에 매진하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넷째, 말씀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기도할 수 있다. 먼저는 주일마다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주중에 우리가 복음을 나눌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 여자[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행 16:14). 이와 같은 일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일에도 주중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비밀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경건의 비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딤전 3:16). 이 비밀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다!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맡았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일은 개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 얼마나 내게 과분한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꼭 필요한 성경 말씀을 택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말씀의 진리를 사랑으로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다. 그리고 꼭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원제: Persevere in Pray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매일배움
인내
꾸준한기도
꾸준히기도하라
감사하는기도
깨어기도하라
교회를 변화시키는 법
by Mark Dever
2018-11-11
종종 목사들이 내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교회를 변화시키다가 분란을 조성한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다. 해임당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로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변화를 이끌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이 여기 있다. 가르치라, 지속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말씀을 가르치라 먼저, 교회의 변화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설교는 교회의 변화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방편은 꾸준한 강해설교임을 기억하라. 당신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교인들의 마음에 변화의 필요성을 심어주시도록 기도하라. 안타깝게도, 종종 목사들은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도 전에 해결하기를 원한다. 회중에게 설명을 시도할 때 변화를 강요하는 목사들이 많다. 그런 행위를 리더십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목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때릴 것이 아니라 먹여야 한다. 그들을 바른 방법으로 가르치라. 설령 당신이 제시하는 변화가 옳더라도, 시기가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옳다고 해서 곧바로 실행해야 하는 건 아니다. 변화를 지속하라 일터에서나 가정에서, 한 분야에만 헌신한다는 개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모델은 제한된 경로로만 올라가도록 이미 정해진 사다리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무한히 펼쳐진 월드 와이드 웹의 모자이크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기를 추구한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높이 평가해야 하며, 각각의 경험이 서로를 보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라고 교육 받는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이와는 다른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이 부부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교회이든, 이웃이든 간에 서로에게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올바른 우선순위를 찾도록 회중을 돕는 일은 장기적인 (즉 때로는 여러 달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인내의 견지에서만 가능하다. 목사로서 회중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강압적인 성격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친 신실하고 끈기 있는 가르침에서 나온다. 올해에 일어나지 않는 변화들이 내년이나 10년 후에는 가능할 수 있다.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전략을 지혜롭게 세우고, 어떤 변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지 주의 깊게 선택하라. 지금 가장 필요한 변화는 무엇인가? 또한 연기할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목사들은 성숙하면서도 장기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목사 임기를 고려한 사역에도 도움이 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2, 3년 안에 결과를 도출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목사 임기가 길수록 현실적 안목이 더 향상되며, 이는 목사 자신과 회중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변화를 위한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한 교회에 충분하게 오래 머물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이 오래 머물 계획이 아니라면, 변화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후임자가 그 일을 끝내야 한다는 조건을 신중히 고려하기를 바란다.젊은 신학생일 때 나는 세 분의 성공회 목사들을 모델로 삼았다. 세 분 다 여러 해에 걸쳐 핵심적인 위치에서 강해설교를 했다. 리처드 시베스는 캠브리지와 런던에서 30여 년 동안, 찰스 시므온은 캠브리지에서 50여 년 동안, 그리고 존 스토트는 런던에서 50여 년 동안 사역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들 모두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세울 수 있었고, 오랫동안의 신실함으로 후배 목사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변화를 사랑하라 올바른 변화를 꿈꾸고, 이를 위해 가르치며, 그 과정을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사랑해야 한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고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는 회중 위에 자신을 높이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마음을 낮추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라고 말했다. 회중을 거듭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끈질긴 보살핌은 오로지 사랑에서 나온다.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례도 있다. 회중이 그를 해임했기 때문에 그는 오랜 기간 목회할 수 없었다. 이처럼 어떤 이들은 짧지만 신실하게 목회직을 감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을 이 짧은 지면에서 논의할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면 가르치고, 지속하며, 사랑함으로써 회중을 성경적인 변화로 인도할 것인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다.출처: www.9marks.org원제: How to Change Your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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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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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보다 큰 사역을 담당하는 제자들
by Don Carson
2018-11-0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예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분이 행하신 사역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큰’(greater)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목을 끄는 놀랄만한 일들을 행하게 된다는 것일까? 사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보다 더욱 이목을 끌 만한 기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분명 ‘더 큰’이라는 수식은 그런 내용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더 큰’이라는 표현이 ‘더욱 많은’ 또는 ‘더욱 넓은’ 사역을 묘사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라면, 실제로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들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전 세계에 말씀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일을 목격했다.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돕고, 교육했으며, 그들에게 식량을 전달했다. 이러한 발자취로 미루어 보았을 때, ‘더 큰’ 일들이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회심한 자들이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본문에서 예수님은 더 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설명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거쳐 승천하시는 일은 바로 제자들이 수행하게 될 사명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뜻이다. 즉, 그분이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교회는 사명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을 증언하게 하실 약속된 성령 강림에도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요7:39; 15:26; 16:7-11).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더 큰’ 일들을 수행하게 된다.이런 설명 자체는 옳다. 그런데 그 의도라면, 왜 예수님은 ‘더 많은’(more)이 아닌, ‘더 큰’(greater)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특권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살펴보며 도움을 받아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다른 이들을 비교하며 강조하신 점은 그가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자이지만 아직 천국에 참여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소명을 받은 시점은 구속 역사(the history of redemption)에서 그보다 이른 시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에 참여하는 특권을 가진 자라면 그가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는 ‘큰’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 ‘큰’이라는 개념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수식의 의미다. 곧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the already inaugurated eschatological age)에 들어가는 특권을 부여받은 상태를 가리킨다.이와 유사한 말씀을 요한복음 14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예수님은 구속 사역의 일환인 ‘아버지께로 가는' 사건을 통해 구속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밝아오는 종말의 시대를 위한 특수 사역을 수행하도록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사역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하신 일들이 아니었다. 물론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그 사역들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지만 이내 승천하셨으며 오순절 사건 후에는 (육신으로 함께하며) 그 사역을 수행하지 않으셨다.이는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이 이루신 사역의 결과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차원에서 제자들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보다 더 크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 행하신 모든 일들은 필연적으로 미완성 상태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완성된 이후에 펼쳐지는 새로운 상황에서 수행되었다. 즉 그들의 사역은 바로 그 성취의 시점(the moment of fulfillment) 이후에 수행되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쟁취하신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지다이와 같이 위대한 광경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고독한 지경에 몰아넣지 않는다. 아무런 열매도 확신할 수 없고 약속된 복이라고는 오직 미래를 위해서만 주어지는 자리에 우리를 두지 않는다.오히려 이와는 대조적이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이미 승리가 쟁취된 싸움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not yet consummated), 이미 시작된(already dawned) 종말의 복을 알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분이 부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사역을 완성하실 구주와 함께 새로운 무리를 불러내는 일에 미약한 노력을 더할 뿐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가진 소명의 진정한 측면을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사역들도 이러한 광범위한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결국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아버지께로 감”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사역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 사역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이루어졌다. 두 번씩이나 예수님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며 고통을 겪으셨다(요12:27; 13:21).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원제: How We Do Greater Things Than Jes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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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그룹을 교회로 볼 수 있을까?
by Sam Allberry
2018-11-09
소그룹 사역을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통상 열 명 가량의) 소그룹은 성경 토론을 위해서, 또 서로에 대해 기도하며 섬기기 위해서 적합한 모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일 예배에서는 서로가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소그룹은 ‘서로’(one another)에 대해 행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활발하게 적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소그룹에서는 서로 간에 신뢰를 형성하고, 통찰을 공유하며, 삶의 여러 문제와 어려움을 논의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소그룹이 신앙생활의 구심점이 되기 쉽다. 더 나아가 간혹 소그룹 자체가 교회로 여겨지기도 한다.그런데 이런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만일 소그룹이 우리의 교회가 되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교인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는, 교회가 소그룹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작을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문제는 건강한 교회가 소그룹을 대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물론 대신할 수 있다). 반대로 소그룹이 교회를 대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물론 대신해서는 안 된다).왜 안 될까?첫째,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가족을 통해 당신을 누구와 화목케 하셨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그룹은 교회 전체 구성원의 다양한 연령층과 배경을 반영하지 않는다. 반면에 주일의 공예배는 그 요소들을 반영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둘째, 소그룹이 할 수 있는 사역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교회는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몸이며, 각 지체는 저마다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교회의 전체 가족 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은사와 사역이 소그룹에는 없다.셋째, 소그룹은 교회 리더십의 지도를 받지 못할 수가 있다. 따라서 어떤 교리나 행동의 문제가 발생할 때 소그룹 내에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소그룹에서는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성찬식을 거행하기도 힘들다.그러므로 소그룹은 교회의 공적 예배를 ‘보완’하는 방안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그룹을 지닌 교회이지 소그룹이 대신하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 생활의 중심은 소그룹이 아니라 전체의 모임이다.출처: www.9marks.org 원제: Can I View My Small Group as My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목회
모임
소그룹
구심점
제한적
보완
대체
적용이 없다면, 당신은 설교하지 않은 것이다
by Michael Lawrence
2018-11-09
도대체 강의의 요점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교실에 앉아 있었던 경험이 있는가? 나는 대학에서 미적분과 씨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수학 전공자라면 그 강의를 명확하게 이해했겠지만, 영문학 전공자인 나에게는 추상적인 내용의 지겨운 강의였다. 현실 세계에 미적분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추상적 세계를 왜 배워야 하는지 고민했다. 만일 당신이 수학 전공자라면,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대해 토론할 때 느낄 법한 기분을 한 번 생각해보라. 설명 ≠ 적용수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설교에 대해 논의하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매주 성도를 미적분이나 작곡을 배우는 신입생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교사처럼, 목회자는 맡은 과목에 대해 열정적으로 준비한다. 우리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동사 시제에 대하여 숙지하고 있다. 또한 고대 근동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성도에게 교차대구법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학식 있는 번역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의 독법이 옳음을 증명하도록 공부한다. 하지만 이처럼 지식을 풍부하게 준비하고 전달해도, 성도는 그 지식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적 지식을 충분히 설교하고, 성도 역시 그 지식을 흡수하지만, 정작 그 다음 우리는 회중에게 이와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여러분에게 달렸어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아내십시오.” 이러한 접근은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성도를 당황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영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친다면 이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목자라면 성도가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첫째, 적용은 힘든 일이다. 문법이나 문맥의 분석은 쉬운 반면, 서로 다른 인간의 마음과 각각의 상황을 두루 고려하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다. 둘째, 적용은 주관적이다. 문장을 올바로 해석하거나 동사를 적당하게 배치하는 일은 객관적인 검토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말씀을 일상에 올바르게 적용하는 방법은 수식이나 문법처럼 객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셋째, 적용은 복잡하다. 성경 본문은 요점이 있다. 그러나 적용은 여러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수많은 상황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건 힘든 일이다. 넷째, 적용은 개인적이다. 하나의 본문을 다양한 성도에게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할 때마다, 이내 포기하고 결국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고는 한다.이 모든 이유는 목회자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과 관계가 있다. 또한 능숙하지 못하거나 복잡한 일을 피하려는 습관과 연관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핑계에 대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회개이다.적용 ≠ 자각하게 함 적용은 성도의 몫이며 궁극적으로 목회자의 권한을 넘어선다는 시각이 있다. 이는 설교에서 적용을 무시하는 다섯 번째 이유로서 위의 네 가지 경우보다 조금 더 신학적으로 보인다. 본문을 사람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이 아닌가? 만일 설교자가 나서서 본문을 삶에 적용해 주려다가 실수한다면, 성도를 말씀의 갈고리에 거는 일에도 실패하는 것 아닌가? 또한 그러한 실패는 청중으로 하여금 적용의 책임을 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지 않는가? 만약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책임지고 적용의 자리는 그대로 남겨둔다면, 성령께서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 아닌가? 성령은 설교자보다 훨씬 더 적용을 잘 담당하실 것이다. 오늘날 매우 존경받는 설교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피력하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러한 논리는 비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이는 확신과 적용을 혼동한 예이다. 죄와 정의 및 심판을 자각하고 확신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요 16:8). 성령 이외의 그 누구도 참된 확신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확신은 심령(heart)의 문제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이 몫을 인위적으로 담당하려 할 때 종종 율법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 안에서만 무엇이 진리인지 자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진리의 근원이 하나님이기에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신념도 갖게 된다. 하지만 적용은 성령처럼 확신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적용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주해가 성경 본문의 문맥을 이해하게 돕는다면, 적용은 그 본문이 펼쳐지는 오늘의 실제를 탐구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적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는(골 3:16) 삶과 윤리를 만들고 알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경험한 틀 안에서 타인의 말을 이해하고 대입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목회자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적용에 대한 범위를 넓혀주고자 노력할 때, 성도는 자신의 틀을 넘어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범주까지 말씀의 적용을 확장시킬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들을 때마다, 곧바로 복음에 대한 나의 소명을 떠올린다. 내게는 그것이 자연적이며 거의 자동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넓고 교훈적인 적용을 통해 오늘의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실제의 삶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한 구절에 대한 적용의 범위를 이토록 깊고 넓게 확장시킴으로써, 비로소 말씀이 삶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적용은 성령의 사역을 침범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도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적용을 기피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적용을 기피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이들이 꼭 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 나타난 적용의 예는 다양하다. 신명기 6장 7절은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한다. 또한 느헤미야 8장 8절에서 에스라와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향해 율법책을 낭독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이가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말씀을 아는 지식을 넘어 말씀이 삶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이해시키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관심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계속된다.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확언하셨다. 또한 산상수훈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설교를 듣는 것에서 끝내지 말고 삶 속에서 행하라는 당부로 가득하다. 사도들의 서신 역시 실천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사도들은 장로에게 적용을 강조했으며, 장로나 다른 가르치는 자들은 실천적인 경건을 언급하는 동시에 모범을 보였다(딤전 2:2; 4장). 에베소서 4장 12절부터 13절은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와 교사를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을 어떻게 주님의 일꾼으로 준비시킬 것인가? 바울은 적용을 기피할 대상이 아니라 부단히 추구해야 할 목표로 생각했다. 몇 가지 예들 실제적인 적용의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살인을 저지른 후 이러한 죄를 덮고자 애쓰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이 본문은 성적인 부정과 살인에 대한 직접적인 적용에 적절하다. 하지만 간음이나 살인에 직면하지 않은 교인들은 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이 본문은 의미없는 말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윗의 죄를 통해 우리는 성도가 죄의 일반적인 패턴을 눈으로 확인하도록 도울 수 있다. 죄의 기만적이고, 우발적이며, 점진적인 특성을 보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엄마, 할머니, 대학생, 회사원, 사업가, 또는 퇴직자로서 '죄를 범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숙고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적용을 시도할 때, 목회자가 성도의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성도에게 해당 구절의 의미를 알려주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도록 방향을 이끌어 주면 된다.그 다음으로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4절을 읽어보자. 이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곧바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자녀가 없거나 더 이상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남의 이야기로 듣거나 주변의 부모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고만 해야하는가? 아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까지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도가 알도록 목회자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즉 본문 속 부모에 대한 존중을 통해 보편적 권위의 개념을 성도가 이해하고 삶 속에서 적용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피고용인, 장로와 성도 모두가 경건한 권위와 관련하여 분명 배울 것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제5계명에 있는 부모는 육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연령과 은사에 있어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보다 높은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제124문에 대한 답).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권위 아래 있으며, 동시에 삶의 다른 현장에서 권위를 행사하기도 한다. 사려 깊은 적용은 그 권위를 바르게 인정하고 행사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적용이 없는 설교는 결코 설교가 아니며 단지 강의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강의를 듣고서 그 요점을 혼동하도록 방치하여서는 안 된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말씀의 적용에 힘써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No Application? Then You Haven’t Preached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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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대요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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