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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자리는 어디인가
피터슨, 하라리, 홀랜드의 ‘인권’
by Derek Rishmawy
2024-03-05
THE KELLER CENTER 학부 때 수강한 인권의 도덕성에 관한 강좌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대부분의 철학 강좌와 마찬가지로 그 강좌도 명백하고 복잡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강좌 전반부는 인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왜 인권이 규범적이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를 칸트, 공리주의, 실증주의, 사회적 구성주의 등으로 설명한다. (신학적 이유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예 시작점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21세기에 들어서 더 이상해진 서구인 대부분이 인권이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여긴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권리는 “양도할 수 없으며” “자명”하다. 하지만 인권에 관한 공부가 다 끝나고도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사실은 딱 하나에 불과했다. 그 어떤 세속 철학도 인권의 근거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주장은 서로를 향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들이밀었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도 현대 도덕 담론과 국제법에서 인권이라는 중요한 개념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철학 수업에서야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도 어깨를 으쓱하고 얼마든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누구나 당연시하는 국제 도덕 질서 전체의 기초가 사실은 벌거벗은 임금님에 불과하다는 게 알려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거기에 실상은 “거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이 질문은 대학 강의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개 포럼에서도 논의된다. 공공 지식인이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역사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의 인권 논평을 둘러싼 최근 논란을 한번 살펴보자. X(과거 트위터)를 통해서 유포되는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인권은 천국, 신이랑 비슷하다. 인권도 우리가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주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다. 믿고 싶은 매력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현실이 아니다. 해파리, 딱따구리, 타조에게 권리가 없듯이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인권이란 없다. 인간의 배를 가르고 속을 살펴보라. 거기에 피, 심장, 폐와 신장은 있겠지만, 인권은 없다. 인권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에만 존재한다. 정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라는 것도 인권, 신, 그리고 천국처럼 이야기일 뿐이다. 진짜는 무엇인가? 산이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심지어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매우 강력한 이야기. 그래서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은 실제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이런 주장과 관련한 논란을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탈 기독교 문화의 도덕적 의식에 발생하는 몇 가지 중요한 균열을 만난다. 그 속에는 창조의 하나님을 모르기에 구원의 하나님은 아예 알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훈이 들어있다. 그냥 이야기라고? 하라리가 무신론자이자 자연주의자인 점을 감안할 때, 그가 비교적 표준적이고 철학적으로 정교하지 않은 형태의 과학주의, 즉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비과학적 신념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에게 유일한 “실제”는 산, 벌레, 피와 같은 생물학적 현실이다. 즉, 테스트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물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 천국, 지옥, 국가, 심지어 ‘인권’조차도 진짜가 아니다. 그냥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멋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결코 사물을 만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췌장 왼쪽이나 DNA나 염색체 구조와 같은 물리적 존재에는 인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관된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를 관찰할 뿐이다. 세상은 거기 있으니까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있기를 바란다고 해도,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어떤 절대적인 의무가 기록된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런 식의 주장이 마치 만화 속 악당이 자신의 마스터플랜(기후 변화 등을 피하기 위해 지구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폭로하기 위한 전주곡처럼 들린다는 사실이 하라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 같다. 상황이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합리적으로 대하려면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거기’에 있는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진실이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역사가 톰 홀랜드의 획기적인 책, 도미니언에서 언급한 요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권의 개념은 특정 시대와 장소(12세기 이탈리아), 특정 인물(교회법 변호사), 특정 교리(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특정 이야기(창조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 서사)를 기반으로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 인권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기독교 개념이 세속화한 결과이다. 홀랜드가 단언했듯이, 인권은 “가령 삼위일체보다도 객관적인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이 두 가지 다 기독교 신학의 작용에서 파생되었다. 이 둘을 다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홀랜드는 인권과 그 원천이 진리임을 확인함으로 그 “도약”을 이룬 것 같다.)어떤 측면에서 홀랜드와 하라리는 서로 동의한다. 예를 들어서, 인권에 관해서는 준수해야 할 목표가 없다. 그냥 단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홀랜드가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하라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홀랜드는 하라리의 경험론적 전제, 즉 “객관적”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것은 맛보고, 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권과 관련해서는 진짜로 ‘그게’ 있다고, 인권이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이야기와 관계없이 거기에는 ‘그게’ 있다주목할 만한 답변이 하나 더 있다. 홀랜드와의 부분적인 의견 차이를 보이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은 인권에 관한 한 거기에는 “객관성”이 없다는 공유된 전제에 이의를 제기했다.인권에 관한 교리는 의미 네트워크가 파생시킨 의미론적 냉혹한 결과임이 곧 드러날 것이다. 즉 인권은 단지 단어와 언어적 개념뿐만 아니라 이야기와 행동 패턴 사이의 관계에 걸쳐서 암묵적으로 인코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인간 존재의 구조 아니, 인간의 존재 자체에도 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즉, “인권”은 지속 가능하고 상향 지향적이며 상호 이타적인 인간 상호 작용을 특징짓는 전형적인 현실의 의미론적 표현이다. 전혀 임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피터슨의 언어는 확실히 비잔틴적이고 복잡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감각이 사물, 존재 또는 존재 자체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존재는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나아가서 아무런 사회적 구성이나 뿌리도 없이 서구의 양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이데올로기적 괴물이 아니다.물론, 피터슨이 지향하는 형이상학과 신학의 모호함을 고려할 때(그의 견해는 발전하는 진화 심리학 분야의 일부 발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추가한 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비유신론적 그리고 준종교적 혼합처럼 보인다), 그가 그 가치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건 별로 놀랍지 않다. 단지 이 진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든 검증이 가능해지고, 정량화가 될 거라는 일종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합리적인 정당성이나 설명이 없는 단순한 신념으로 보인다.자연법, 자연권, 양심: 억압인가, 지지인가?이런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이야기”는 지금과 같은 혼란에 어떤 빛을 비출 수 있을까? 기독교 인류학의 기본 형태를 이해하면 옳고 그름의 다양한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 및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제시할 수 있다.우리 마음에 새겨진 법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지식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한다(1:18-23). ‘자연신학’과 ‘자연법’이다. 우리의 도덕적, 인지적 특성이 올바르게 기능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숭배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라는 피조물에 적합한 요구를 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요구 중 하나가 다른 피조물을 존엄성과 존경심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즉, 학대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성관계를 가지거나 살해하거나 비방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24-32절).더 나아가서, 존중해야 할 대상이 단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방인, 즉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계시를 모르고 받지도 못한 비유대인도 포함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이 이방인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율법이 없어도 그들 자신에게 율법처럼 행하며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2:14).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5절).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감각, 즉 모든 시대, 문화,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 존재에는 법의 개념이 심겨 있다. 이것이 바로 C. S. 루이스가 “도”(Tao)라고 불렀던 것인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준수해야 하는 명령이 있음을 안다. 따라서 비록 창세기 1장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명확한 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성경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며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올바로 대하지 않는 경우에 거기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이성과 이데올로기사회 내부와 사회 간의 도덕적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한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영웅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무질서하고 부당하다고 반대할 수 있을까?비도덕적인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회는 자신이 가르치고 뿌리내리고 질서를 정하는 포괄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 사실은 세상에 타고난 보편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인류의 자연적 지식이 죄로 인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질서의 특징을 분별하는 인간이 능력이 하나님과의 소외된 관계로 인해 깨졌다. 인간의 도덕적 나침반은 더 이상 정북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점을 드러낸다. 거짓 신을 만들어 창조의 특징을 우상화하고 도덕법을 우리 자신의 왜곡된 형상으로 개조한다. 하라리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연주의는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으로 인해서 받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만들어 낸, 스스로를 속이는 멋진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보유한 진실 억압 무기고에서도 이데올로기는 가장 정교한 도구 중 하나이다. 일관성, 물질주의, 진리 파악이것이 바로 합리화되고 진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인 하라리의 기술생물학적 자연주의의 정체이다. 그래도 거기에는 최소한 일관성이라는 가치는 있다. 실제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자, 진화 심리학자, 자연주의 철학자는 도덕성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규범적 설명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는 데에는 다 동의한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와 폴 네델리스키가 쓴 Science and the Good’을 참고하라.)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의 진정한 가치를 부인하는 죄로 물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점점 악화시키는 현실에 대해서 일관되게 잘못된 해석만을 계속해서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피터슨은 한동안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놓고 씨름했다. 자연법과 자연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리를 명령하고 부여하는 하나님, “원형적 현실”을 저술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존엄성과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결과 또한 타락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모순 덩어리일 뿐이다. 신앙의 도약?홀랜드의 반응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인권 교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지만, 자연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견해는 매우 신앙주의(fideistic)와 역사주의에 치우쳐 있다. 홀랜드에게 있어서 “인권”에 대한 논의가 복음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특별한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권”이 “객관적인” 현실로서 자연에 내재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대부분의 윤리가 올바른 이야기를 믿기로 선택하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맞서 신학자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다음과 같이 썼다.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수 없다. 역사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은 정반대의 점을 지적하기 마련이다. 역사가 모든 의미와 가치에 대한 범주적 매트릭스로 만들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이야기라면,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다. 오도노반의 주장은 복음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바깥쪽에 있는 현실에 관한 서사라는 것이다. 현실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특정한 방식에 의거해 특정한 모양으로 만든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법과 자연권은 자연의 현실에 종속되거나 부과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에도 불구하고 확증하고, 명확히 하고, 정화하고, 또 중요한 경우에 확인시키는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계시는 자연계시에 대한 인간의 타락하고 죄악된 인식을 바로잡는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제공함으로써 계시를 완성시킨다.자연적 도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 피터슨은 옳다. 그 부분을 자연 너머로부터 오는 확증과 명확한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인식한 홀랜드로 마찬가지로 옳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이런 측면에서 사실일 때에만 그 이야기는 인간 존엄성을 확증함으로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도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우리가 뼈속 깊이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이해하고, 확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실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감자,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도 없고 복음도 없다면 하라리가 어느 정도 옳은지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단지 고기이며, 그 속에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주장할 합리적 근거는 없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만큼이나 오래된 주장이지만, 아무리 하라리가 이 문제에 관해서 틀렸고 대부분의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주장을 지금 현실과 관련이 없고 또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본성의 존엄성에 대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꺼려한다. 극도로 세속적인 사람이라도 피터슨과 같은 본능을 갖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기독교는 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 이성적 힘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한 그에 관한 정당화를 제공한다. 성경의 진리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에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확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복음과 함께 오는 더 큰 존엄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죽으시고, 같은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와 죄, 불의의 대가까지 치르시고, 그들을 예정된 영광으로 회복시키셨다. 할렐루야!둘째, 이 결과에는 반직관적인 부분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와 진리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기적이 진짜냐의 여부가 아니라 도덕성과 관련이 있다. 즉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자연 질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 특히 결혼과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독교의 믿음과 이해에 관한 반대 때문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은 뒷걸음질 치며 후방을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기독교의 관점이 사랑과 정의라며 스스로를 옹호하기에만 바쁜 모습처럼 보인다.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덕적 질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진리를 위해 변증적 이점을 강조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다. 세속적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서기에 점점 더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럴수록 기독교는 세상과 비교해서 더 확고하게 대조를 이루며 다른 이데올로기가 고작해야 희미하게 제시하는 소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우리가 항상 믿어왔던 것을 단순히 확증하는 역할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우리 양심의 진실을 억압해 온 모든 세상의 방식에 대한 시정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위로와 격려를 주는 말씀뿐만 아니라 심판을 약속하는 말씀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대량 학살, 강간, 인종 차별, 편견 등 이웃에 대한 인류의 폭력적인 범죄와 죄악,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다른 영역의 진실까지도 억압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성생활, 성적 취향, 성 정체성에 관해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하신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릴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강조할 때,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로서 다른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에게 말한다. 그렇기에 겸손하고 자신감 있게 말해야 한다. 불의로 진리를 억압하는 모든 방식에 대해 정기적으로 말씀으로부터 교정 받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나아간다. 그렇다고 겸손이 나태함이나 절망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만이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접근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증거를 남겨 두셨다. 율법은 그들의 마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들도 지금 양심을 누르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사모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심판으로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있다(롬 2:16).원제: Is There a ‘There’ There? Peterson, Harari, and Holland on Human Righ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물인터넷 시대의 목회
by 전재훈
2024-03-04
나는 식물에 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다. 화분을 선물 받으면 100퍼센트 죽게 된다. 그래서 교회 안에 식물은 이미테이션만 존재한다. 꽃꽂이도 싫어한다. 무엇인가가 내게로 와서 죽어가는 것이 너무 싫다.시대는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꽃의 정보를 내가 알아보고 관리해야 했지만, 이제는 일방 소통의 시대가 종식됐다. 꽃을 파는 사람이 꽃에 대한 정보를 화분에 팻말 형태로 전달한다. 꽃 주인의 배려로 꽃의 이름과 물 주는 시기, 관리 방법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이 시대는 스마트한 시대이다. 화분에 팻말이 아닌 태그가 붙어있고 거기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꽃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스마트링크 기능을 통해 스케줄화 시킬 수 있으며, 알람 기능을 통해 물 주는 시기와 흙갈이 시기를 통보받을 수 있게 된다. 시기를 놓쳐 식물을 말려 죽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더욱 광범위한 소통의 시대가 된다. 즉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다자간 소통이 가능해진다. 화분에 심어둔 센서가 꽃의 특성에 따라 흙의 상태를 파악해 주인에게 알려주게 된다. 물이 필요한지, 비료가 필요한지 즉각적인 안내를 해 준다. 가끔 교회에서 물을 이중으로 주어 꽃을 죽게 만드는 일 따위는 없어진다. 어느 정도의 물이 필요한지, 화분 온도는 어떤지, 앞으로는 화분이 내게 말을 거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사물인터넷 시대의 다자간 소통은 화분이 스프링클러에게 대화하고, 전기스토브에게 말을 걸게 된다. 스프링클러는 화분의 요구에 따라 물을 정확하게 줄 것이고, 전기스토브는 온도를 조절해 줄 것이다. 나는 화분의 꽃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물인터넷 시대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상용화되어 있어서 비닐하우스 농장에서는 현재 사용 중이다. 예전처럼 일일이 하우스마다 들어가 온도를 체크하고 습도를 조절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심어 두고, 때가 되어 거두기만 하면 된다. 꽃에 말을 거는 친구들을 4차원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사물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사물의 인격화 놀이를 많이 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사물과 대화하는 날이 오고, 사물 간에 소통하는 일이 생겨난다. 밤이 되면 장난감들이 상자에서 나와 서로 놀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상자 속으로 숨어 버리는 상상이 더 이상 상상만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신학적인 생각 속에는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믿음과,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믿음까지 있었다. 자연은 우리가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은혜를 받고 나면 자연 속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고 찬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런 사상은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과 종이 한 장 차이로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사물인터넷 세상이 온다면 자연 숭배 사상이나 범신론 같은 것은 더 이상 그 의미를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어 다자간 소통이 일어나면 신의 능력보다 과학의 능력을 더 많이 신뢰하게 될 것이고, 영적 영감보다는 객관적 데이터를 가진 빅데이터가 그 빛을 더 크게 발휘하게 된다. 이럴 때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은 모든 사물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과학을 생각하게 되고, 기도에 의지하기보다 정보에 의지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 이는 분명 신학의 큰 도전이 될 것이고, 시대에 맞게 신학을 재정립해야 할 때를 맞게 될 것이다. 분명 과학의 발달은 인류를 윤택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쓸데없이 고민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고, 천형 같았던 많은 질병도 극복하게 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과학에 의지해 살아갈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고, 이런 현실들을 직시하여 목회를 다시 점검해 봐야 할 시기가 되었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 교회의 현장에서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의자에 앉기만 해도 당일 출석수를 예배 중에 실시간으로 인지하게 될 것이고, 주차장의 효율성을 높이게 될 것이며,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는 등 아주 효과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과 목회를 미리 정립하지 않으면 과학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절약하듯 교인 수도 절약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은득의 ‘카이퍼 통신’
by 김은득
2024-03-03
카이퍼 통신 1 한국 교회의 후배들에게! 카이퍼 통신 2 위기의 시대, 참된 리더십을 바라며카이퍼 통신 3 직장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카이퍼 통신 4 미국형 칼빈주의를 극복하라카이퍼 통신 5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주권카이퍼 통신 6 도대체 칼빈주의가 뭐길래?카이퍼 통신 7 영역 주권의 역사적 배경카이퍼 통신 8 영역 주권은 신정주의적인가?카이퍼 통신 9 영역 주권은 세속주의를 부추기는가?카이퍼 통신 10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도와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신앙을 해체하고 있어요.
by Alisa Childers·Tim Barnett
2024-02-29
“우리 딸이 믿음을 버리고 있어요. 우리와도 더 이상 말을 안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해를 끼치는 신학을 가지고 있어서 안전하지 않은 존재라는 편지까지 썼어요. 부모로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슬프게도 이건 해체와 관련해서 듣는 아주 흔한 이야기다. 기독교 신앙의 해체와 관련해서 우리는 부모, 형제자매, 배우자, 목회자들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도대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그들은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어떻게든 그들과 다시 소통하고 연결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해체 이해하기오늘날 문화에서 ‘해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의가 아니다. 정의를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해체하는 사람이 없으면 해체도 없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 해체는 하나같이 다 독특한 경험을 가진 사람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해체라는 단어가 없지만, 성경은 신앙 해체에 대해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성경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한다. 따라서 지금 해체 과정을 겪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과 더 나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성경이 그들을 묘사하는 다섯 가지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로서 해체자믿음을 해체한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왜냐하면 그건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이, 인종, 성별, 성적 매력, 사회 지위와 관계없이 해체자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창 1:27).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고 사랑, 존엄,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2. 죄인으로서의 해체자죄는 인간의 관계, 욕망, 감정, 심지어 믿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죄성이란 게 우리가 죄를 짓고 싶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그냥 선반에 앉아서 멍하니 기다리고만 있지 않다. 죄성은 우리 곁을 떠나는 법이 없다. 따라서 해체는 결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다. 좋든 싫든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행실을 죽이라”(롬 8:13)고 상기시킨다. 3. 구도자로서의 해체자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롬 2:6-8). 바울이 사람들을 자기 추구자와 진리 추구자의 두 그룹으로 분류한 것에 주목하라. 대제사장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하라”고 말했다(막 15:32). 그건 증거를 볼 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믿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보증할 만한 많은 증거를 이미 제시하셨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 모든 증거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4. 포로로서의 해체자성경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뜻을 행하게”(딤후 2:26)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사탄이 사용하는 올무 중 하나가 속임수이다. 그래서 바울은 경고했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골 2:8).안타깝게도 해체주의 온라인 공간에는 잘못된 생각이 많이 전파되고 있다. #deconstruction 및 #exvangelical 태그가 붙은 수십만 개의 게시물을 스크롤해 보라. 예를 들어, 한 해체론자는 “#EvangelicalismIsUnreformable, 이걸 어떤 식으로 파악하든지 어린이 희생이 세상을 구했다는 게 주된 믿음이다”라는 글을 게시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것은 기독교에 관한 완전한 오해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진리로 반응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1, 14).5. 반역자로서의 해체자해체자 대다수가 거짓 사상의 포로인 반면에 일부는 단순히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롬 1:18)을 묘사한다. 이 사람들은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억압한다. 같은 편지 뒷부분에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함이니라”(롬 8:7)고 말한다.많은 사람들에게 해체는 자기 통치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주권자이신 주님께 무릎 꿇기를 거부한다. 하나님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들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주지 않는다. 어느 한 솔직한 인스타그램 게시글은 해체를 이렇게 요약한다. 내가 해체를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기대가 내 자존감, 내 선택 또는 내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정의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찾지 않는다. 내게는 하나님도 사람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그냥 나만 있으면 된다. 해체자를 사랑하자사랑하는 사람 중에 지금 해체의 과정을 겪는 이가 있다면, 일단 분류부터 해야한다. 그게 바로 고속도로에서 큰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응급실에 몰려들 때 병원에서 하는 일이다. 의사는 각 부상을 평가하고 긴급한 순서대로 치료한다. 천공된 폐는 부러진 손목보다 더 먼저 치료를 받는다.증거만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면, 그들이 마음을 바꿀 거라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해체자들에게는 증거가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다. 따라서 해체의 과정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가장 긴급한 상황부터 먼저 대응해야 한다. 해체주의 공간에서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원죄, 형벌적 속죄, 지옥 교리 등)가 유해 것으로 치부된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안전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건 당신이 해체자의 삶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매우 짧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가장 긴급한 필요는 관계의 유지일 수도 있다. 일단 소통의 문이 열려 있다면 해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해체자를 묘사하는 다양한 방식, 즉 형상 소유자, 죄인, 구도자, 포로, 반역자를 기억하라. 이 중에서 어떤 측면이 그로 하여금 해체를 주도하도록 하는지 분별하라. 해체자의 관점을 이해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서 그에게 진리를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결코 기도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 어떤 굳은 마음도 열어주실 수 있다. 기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무력하지 않다. 관계를 추구하고, 복음의 아름다움을 실천하며, 기도에 시간을 쏟는 것이야말로 해체자를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그리고 소망을 가지라! 사도행전 16:14은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셨다고 말한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똑같이 하실 것이다. 원제: Help! My Loved One Is Deconstruc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Alisa Childers·Tim Barnett알리사 차일더스는 싱어송라이터 가수이다. 동시에 변증가로 활약하고 있다. 팀 바넷은 강사이자 Stand to Reason(STR) 강사이자 변증가이다
기도하기 위해 설교하라
by 최창국
2024-02-28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어떻게 실행돼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설교자에게뿐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연설 형식의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형 교회에서는 연설식 설교가 행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소수의 성도가 예배하는 상황에서도 연설식 설교만을 지향하는 설교자나 목회자가 많다. 이는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문화에서 연유한 측면도 있다. 설교는 원래 일방적 연설식 설교 방식이 아니라 대화가 있는 설교, 호밀리아(homilia)였다. 따라서 설교와 관련된 용어들을 통해 설교의 여러 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첫째, 설교를 지칭하는 최초의 용어는 호밀리아이다. 이 단어는 ‘서로서로 이야기하다’라는 뜻을 가진 호밀리엔(homilein)에서 파생된 명사로 2세기경 폴리캅(Polycarp)에게 보내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신에서 처음 발견된다. 호밀리아로서 설교는 ‘회중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지칭하는 전문어’로 형식적으로는 성경 본문을 순서대로 강론하는 강론식 설교(homily)에 해당한다. 호밀리아로서 설교는 주로 교훈의 말씀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 이단의 발현으로 인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설교와 관련된 또 하나의 용어는 프래디카치오(praedicatio)이다. 이 용어는 4세기에 이르러 라틴어가 예배의 공식 언어로 확정되면서 호밀리아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의해 프래디카치오라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용어는 ‘공적으로 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때부터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회중 설교를 지칭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설교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는 프리칭(preaching)은 ‘프래디카치오’로부터 연유되었다. 셋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설교와 관련해 등장한 용어가 세르모(sermo)이다. 이 용어로부터 파생된 설교가 오늘날 주로 행해지고 있는 연설식 설교(sermon)이다. 연설식 설교는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 예배 참여 인원이 많아지면서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보다 연설식 설교가 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중세에 이르러서는 연설식 설교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행해지기보다는 설교자의 관심과 회중의 흥미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주제 설교가 주로 행해졌다. 넷째,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설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종교개혁자들의 말씀 이해에 근거해 새롭게 제시되었는데, 바로 콘치오(contio)이다. 이 용어는 예배에서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와 관계된다. 콘치오 형태의 설교는 예배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중세 교회의 공 예배에서 성찬 예식에 비해 이차적인 위치에 있었던 말씀 예전이 다시 중요한 위치를 되찾게 되었고, 설교자들의 관심과 회중을 만족시키는 데로 흘러갔던 설교를 다시 성경 말씀에 근거해 행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다섯째, 설교의 내용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나오는 단어로는 케리그마(kerygma)를 들 수 있다(롬 10:17; 16:25; 고전 2:4; 골 3:16). 복음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설교의 가장 근본적 그리고 원형적 개념으로 예수의 생애, 고난, 죽음, 부활로 인해 인간에게 가능하게 된 부활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여섯째, 케리그마와 함께 선포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는 단어가 디다케(didacke)이다. 이 단어는 케리그마와 함께 예수의 마지막 분부를 포괄하는 것으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은 이중적인 것으로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는 것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것이다. 디다케는 회당적 의미에서의 교육(마 4:23), 선교(행 4:2), 기독교 교리의 요약(딤후 4:3)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설교가 추상적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인간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차원이어야 함을 내포한다. 일곱째, 설교와 관련하여 또 다른 용어는 세례받은 회중 가운데서 행해지는 말씀을 지칭하는 파라칼레오(parakaleo, 고후 5:20)이다. 이 용어는 신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삶의 실천과 관련한 의지와 행동으로서 ‘권고’(롬 12:1)와 신앙의 토대로서의 확신을 근거한 ‘위로’의 의미가 있다(고전 1:6). 설교는 말씀을 통한 위로의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의미 있게 논의되고 있고 상담 설교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실행할 필요가 있다.물론 케리그마와 디다케와 파라칼레오는 기독교 초기에 설교가 어떤 내용을 주된 메시지로 취급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용어들은 설교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보다는 설교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용어들을 통해 설교의 주된 방향과 기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기독교 역사에서 광의적인 차원에서 설교는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와 연설식 설교가 주로 행해져 왔다. 따라서 두 유형의 설교의 목적과 구조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설교자들에게 중요하다. 이 두 설교 유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연설식 설교와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의 목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나누는 데 있다. 둘째는 하지만 설교 실행의 구조적 차원에서 차이가 있다. 연설식 설교는 좀 더 구조화된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강론식 설교는 비형식적이고 대화적일 수 있다. 셋째는 연설식 설교는 듣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거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강론식 설교는 성경 텍스트를 설명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석하는 데 있다. 강론식 설교는 대화를 통한 말씀 이해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강론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토론 또는 대화를 통해 어떤 주제나 내용을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강론식 설교란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일방적으로 전하며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 형식의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조셉 피츠너는 설교를 “기독교적 삶에 관한 대화”로 설명하면서, 설교와 대화를 서로 연결하였다. 헬라어 호밀리아(homila)에서 파생한 호밀리(homily)는 ‘익숙한 대화’(familiar conversation)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걸어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과 같은 대화이다(Joseph Fichtner, To Stand and Speak for Christ: A Theology of Preaching, 124).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진행되는 대화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누가복음 24:14에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나눈 대화와 사도행전 24:26에서 바울과 벨릭스 총독 사이의 대화를 사례로 든다. 설교를 대화로 보는 사람들은 이 두 사례에 근거하여 호밀리아는 때로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연설이나 강의보다는 대화에 더 가깝다고 이해한다. 그러한 대화의 목적은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거나 상대방의 태도나 행동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이전에 갖고 있던 지식이나 태도를 더욱 명백히 나타내거나 강화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 앞에서 함께 신자로서의 공통의 정체성을 공유한다.조지 스웽크는 대화식 설교는 1세기 유대인들의 설교로부터 그 역사적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유대인들의 설교에는 회중이 함께 참여할 수 있었고, 질문과 웃음, 돌연적인 비평과 다른 여러 형태의 개입이 가능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신약성경에 기록된 설교는 마치 논쟁과 비슷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누가복음과 특별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설교의 대화적 패턴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결론한다. “기독교 설교가 시작되는 첫 단계에서부터 설교는 모든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활동으로 여겨졌었다. 당시 설교는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업무였다”(George W. Swank, Dialogic Style in Preaching, 23, 46-49).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의 대화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설교자와 회중의 연대감, 즉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그리고 만인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분별하고 함께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로 이해한다고 해서 예배 중에 설교자뿐 아니라 예배 참가자들이 모두 다 말하거나 선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좌담 설교(dialogue sermon)나 상호 대화 설교(interactive sermon)는 대화 설교를 위한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지만, 대화 설교가 좌담 설교 같은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대화 설교는 설교자가 신앙과 삶의 문제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회중과 동등한 동료의 관점에서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지속적인 대화를 키워가면서 이를 반영하는 설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화 설교가 추구하는 핵심은 교회 공동체의 대화를 촉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대화 설교가 촉진하는 중심적인 대화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뿐 아니라 교회와 그 안의 여러 구성원 간의 대화,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상호 대화, 그리고 설교자와 회중과 하나님 삼자 간의 대화이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연구해 설교문을 작성하여 일방적으로 회중에게 연설식 설교로 마치는 것은 바람직한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교회는 설교의 원래 의미와 방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설교는 원래 대화를 통한 복음 이해와 나눔 성격이 강하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 회중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 대화로 이끌지 못한 설교는 진정한 설교라고 할 수 없다. 헤셀은 설교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인식했다. “기도하기 위해 설교하라.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설교하라. 참된 설교를 판별하는 것(test)은 그 설교가 기도로 전향되게 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Abraham J. Heschel, Man's Quest for God: Studies in Prayer and Symbolism, 80).설교자는 연설식 설교 시간을 5-10분 정도 줄이고, 설교 후에 전한 메시지를 가지고 설교자와 회중이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해야 한다. 메시지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 공동체는 설교를 들은 후에 다양하게 기도를 실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성도들이 설교를 듣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주중에 목장이나 구역별로 모여 들은 메시지를 함께 나누며 기도할 수 있다. 목장별 설교 적용 기도 실천을 위해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질문이나 내용 요약 형식으로 작성하여 주보에 게재하여 예배 전에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다. 성도들이 설교 시간에 주보에 있는 질문이나 내용에 따라 설교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 한 후에 집으로 가지고 가서 설교 본문과 함께 묵상하며, 기도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개인이 실천한 후에 목장이나 구역 소그룹에서 함께 나누며 기도할 때 신앙 체험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이 공략할 상대는 무관심의 문화이다
by Glenn Wishnew
2024-02-27
책 이름에 교회 이탈(dechurching)이라는 말이 들어있지만,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은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인 어조로 쓰인 책이다. 저자인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이 갖고 있는 소망은 지난 25년 동안 교회를 떠난 4천만 명 중 대다수(51%)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낙관론에서 비롯한다. 그 51퍼센트는 나름 참작할 만한 상황 때문에 교회를 떠난 “일상적” 이탈자로 볼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22퍼센트는 새로운 공동체로 이사했기 때문에 떠났고, 16퍼센트는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리고 15퍼센트는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 출석이라는 습관”을 벗어던진 경우이다. 결국 종합할 때, 한때 신앙에 헌신했던 복음주의 교인의 53퍼센트가 평범한 이유로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하지만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주의를 꿈꾸게 하는 소망인 동시에 과거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평생 자유주의 주류 교회의 교인이었던 딘 켈리는 1973년에 발간한 Why Conservative Churches Are Growing(왜 보수 교회는 성장하는가)에서 보수 교회가 사람들에게 “고차원적 (large-scale)”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교회보다 더 많이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수준의 의미는 삶을 인도하고 죽음까지도 이겨내도록 한다. 보수 교회는 사람들이 자신감과 소망을 가지고 고통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우주적 진리를 선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주장하는 초자연주의를 부끄럽게 생각한 주류 교회는 진짜 위로를 제공하는 핵심 교리(부활 등)를 일반적인 도덕주의와 정의에 대한 권고로 대체했다. 켈리에 따르면 이것은 운명적인 변화였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도덕적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의 메시지와 주변 문화의 목소리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하품과 함께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켈리가 발견한 사실은 단순하다. 종교 공동체의 회복력은 그 공동체 외부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우주적 목적”에 따라 살도록 성도를 준비시키는 만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켈리의 통찰력과 탈기독교시대 교회를 결합할 때, 지금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교인들에게 교회 밖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차원적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별생각 없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경우, 그건 자신들의 삶을 인도할 대안이 되는 진리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냉담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우리 시대 영적 질병: 무관심우체 아니조르(Uche Anizor)는 Overcoming Apathy(무관심 극복하기)에서 현대인들은 “우리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들에는 미지근하다”라고 주장한다. 무관심이 반드시 하루 종일 이어지는 방황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아니조르는 수도승인 존 캐시안(John Cassian)의 말을 인용하여 무관심은 “가장 중요한 의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불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문화가 얼마나 무관심에 깊이 빠져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조르는 시트콤 Seinfeld를 사례로 든다. 아니조르 역시 90년대 시트콤의 팬이었지만, 이 시트콤은 “크고 의미 있는 일(예: 결혼, 가족, 종교, 사회적 관심, 심지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무관심과 삶의 일상적인 사소한 일(예: 좋은 주차 공간, ‘옆에서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주는 성가심, 오락기에서 높은 점수 받기)에 집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는 오늘날 중요하지 않은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인필드 사회의 시민이다.” 사인필드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은 내용이 아니라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이다. 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대상을 더 우선시하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는 우리는 조만간 그 차이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켈리의 언어를 빌리자면, 무관심한 문화가 양산하는 시민은 고차원적인 의미에서는 조금도 활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여행 축구, 골프, 오락기가 주된 관심사가 되고 전능하신 주님은 이제 부차적인 주제로 전락한다. 영적 무관심이 교회를 침범하는 지금, 교회 지도자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의 제자도 실천이 과연 주변에 만연한 무의미함이라는 독소로부터 성도들을 제대로 예방하고 있는가이다. 수백만 명이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는 사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금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치료제: 예배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잔소리가 아니다. 데이비스와 그레이엄의 연구에 따르면,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는 가톨릭이나 주류 교회의 교회 이탈 교인들에 비해서 정통 교리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의 신앙은 아직도 교회에 다니는 복음주의자의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에게 부족한 건 교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다. 즉, 무관심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게 과연 진리인가에 대한 확신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초기 목회 시절 버지니아 시골에서 상담했던 한 어린 소녀에 관해서 들려준다. 그녀는 영적으로 퍽 우울한 상태였는데, 켈러는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즉 어떻게 그녀를 용서하셨고, 당신의 피로 그녀를 사셨으며, 또 그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확증하셨는지 일깨워 줌으로써 그녀를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예, 목사님, 그거 다 알아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고 또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거, 다 압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한테 관심 있는 남자애가 하나도 없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요?” 켈러는 그녀의 영적 곤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학교에서 잘생긴 남학생이 주는 관심 또는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격려였고, 더 중요한 기쁨의 원천이자 자기 가치를 느끼게 하는 원천이었다.”그 소녀에게 부족한 것은 복음이 그녀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더 아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알고 있는 신앙 교리를 마음의 갈망과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연결은 오로지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일 예배, 주중 소그룹, 매일의 묵상 등 다양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에 새긴다.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회복하려면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한 “정문”을 여는 건 당연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다시 새어나가지 않도록 “뒷문”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삶의 모든 초점을 우리 가운데 계신 거룩하신 분에게 맞춰야 한다. 기독교를 사람들의 입맛에 더 맞게 맞추려고 노력했던 20세기 주류 교회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들처럼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교회 이탈 경향을 뒤집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날 만연한 무관심 문화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는 대응적 실천을 오히려 두 배로 늘려야 한다.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서 더 큰 만족을 맛볼 것이다. 복음만이 제공하는 고차원적 의미만이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왕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원제: Why Discipleship Must Target Apath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그리스도인이 가장 힘써야 할 일
시편 84편 묵상
by 고명환
2024-02-26
1 꾸준하게 기독 모임에 참여하여 조용히 여러 일로 섬기는 한 대학생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늘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해내는 그 친구가 기특해서 격려라도 해 주고 싶던 터에, 서로 기도해 주는 순서의 짝으로 맺어져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평소 학교생활과 기독 활동에 성실한 모습을 보아 왔기에 주님과 보내는 시간을 견실하게 지켜왔을 거라는 믿음 아래, 기도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지는지 물어보았다. 헌데, 형제에게서 들려온 응답은 기대와는 달랐다. 당황한 듯 머뭇머뭇하며, 그 친구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다고 힘겹게 대답했다. 아마도 주님과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생활화하지 못하는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일에 드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열심과 성실함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주님을 알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주님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한 모임의 워크숍 시간에 어떤 선교단체의 스태프들과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르신 사명을 따라 묵묵히 헌신하는 전임 사역자들이었다. 그 헌신의 삶을 익히 알던 차라, 한 분 한 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지하고 순수한 열정의 증거들이 기대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기도와 경건 생활에 대한 나눔의 시간에 들려온 그분들의 힘없는 고백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구동성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마음은 가져 보지만 실제로 기도 생활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바쁘다 보니 기도 생활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무엇에 바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사역이 바쁜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은 자명했다. 주님을 위한 일로 인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러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목까지 나오는 이 말을 눌러야 했다. 2시편 84편은 총 150편으로 편집된 시편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시이다. 수사나 기교가 뛰어나거나 짜임새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소박한 언어로 주님을 향한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성도의 공감을 쉽게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84고라 자손의 시, 지휘자를 따라 깃딧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1만군의 주님,주님이 계신 곳이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2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내 마음도 이 몸도,살아 계신 하나님께기쁨의 노래 부릅니다.3만군의 주님,나의 왕, 나의 하나님,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제 집을 짓고,제비도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4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복됩니다.그들은 영원토록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5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마음이 이미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복이 있습니다.6그들이‘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가을비도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7그들은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시온에서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8주 만군의 하나님,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야곱의 하나님,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9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돌보아 주십시오.10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다른 곳에서 지내는천 날보다 낫기에,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더 좋습니다.11주 하나님은태양과 방패이시기에,주님께서는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정직한 사람에게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12만군의 주님,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복이 있습니다. (새번역)시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4절),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5절),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12절)을 언급한다. 그들 모두 주님을 가까이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사람들이다. 주님 계신 성전에서 살며 수종 드는 선별된 사람들이나, 주님을 가까이하겠다는 열망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의인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시편 15편). 언제나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사는 시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진정 복 받은 사람들이 분명하다(1-2절). 성전에서 일하며 “영원토록 찬양하는” 레위인들은 복된 사람들이다(4절). 시인의 눈에 “만군의 주님”이 계신 곳에 살며, 섬기고, 항상 찬양하는 특권을 가진 그들이 누구보다 복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으로부터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그들이야말로 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성전에 둥지를 튼 새들도 주님을 곁에서 뵙고 싶은 시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3절). 이에, 성전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주님의 제단 곁에 집을 지을 수 있고 새끼 칠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조차 흠모함으로 바라본다. 그토록 주님을 바라고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성전이 자리 잡은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 시온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역시 복 있는 사람들이다(5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만군의 주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경배하고 싶을 따름이다. 주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뗀 순례자들에게 앞길의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5-7절). 주님께서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샘을 내어 갈증을 해결해 주시며, 먼 길에 기진하지 않도록 힘을 주신다. 결국,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올라가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이다.” 놀랍게도 “만군의 주님”은 그분을 찾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거절치 않는다(“만군의 주님”은 네 번 반복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빈부귀천,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 누구든지,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올 때 그 길의 모든 장애물을 없애 주실 뿐만 아니라 힘을 주셔서 반드시 만나게 하신다(5-7절).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12절). 그는 은혜와 영예를 주님으로부터 받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얻는다(11절). 이런 사람에게 주님을 떠나 행복이란 없다. 주님과 떨어진 먼 세상에서 천 일의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주님 계신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만 못하며, 악인과 함께하는 편안한 장막의 삶이 주님 집의 말단 문지기의 생활만 못하다(10절). 제사장이 아니었던 시인이 들어가 지낼 수 있었던 성전의 장소는 지성소도 성소도 아닌 ‘주님의 궁전 뜰’(the court of the Lord)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이면 어떠한가. 주님의 장중이고 동일한 영광이 머무는 곳인데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는 그곳은 시인에게 지성소와 다름없는 장소이다. 주님의 성전 뜰에 머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행복하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시편 73:28).3주님께서 자녀들의 삶에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만든 열심과 충성심으로 그분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업적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아니면, 그분이 기뻐하실 거라 배우고 공부한 것을 곱씹고, 고민하며, 전력으로 성취해 내는 삶은 아닐까. 그럴듯하나, 주님을 오해한 빗나간 대답들이다. 주님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사원들이 최대한의 실적을 올리기를 바라는 회사의 CEO가 아니다. 알아서 각자 매뉴얼 대로 움직여서 그분이 고대하는 목표를 이루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큰 업적을 들고 오는 것을 반기는 세상의 경영자와는 다른 분이다.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시면 언제라도 능력으로 그분의 목표를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녀가 해낸 일이나 업적보다 자녀 한 명 한 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다. 참다운 부모가 자녀의 성공이나 그들에게서 받는 혜택보다도 그들 자체에 더 관심을 갖듯이, 주님은 자녀라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신다. 그들은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고서 찾은 사랑의 대상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으로, 그들이 목적이고 이유인 존재로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자녀들과의 교제를 기뻐하신다. 교제를 통해 그분의 심오한 사랑을 알려 주기 원하신다. 그래서, 자녀들이 사랑을 깨닫고 성장하여 그분을 투영하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신비로운 사랑의 수혜자였던 사도 바울도 성도들이 무엇보다 주님께 다가가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에베소서 3:18-19). 사도가 표현했듯 그리스도의 사랑은 입체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온전히 헤아릴 수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는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그분을 생각의 영역과 시간의 영역 속에 모시고 살 때 그 사랑의 힘은 삶에 작용하게 되고, 비로소 그분을 나타내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를 도외시하거나 소홀히 한 채 본인의 원함과 스스로 만들어 낸 열심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면 어쩌면 그날에 자취 없이 타버릴 공력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린도전서 3:13-15). 그것이 십자가를 높게 들어 올린 기념비적인 예배당을 지어 봉헌했든지, 선교지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했든지, 수많은 병자를 고친 기적을 행했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냈지만 정작 주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 결과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지인 자녀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5:5).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엄청난 일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떠나서 이룬 일들은 받으실 만한 “열매”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불법”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7:22-23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등장할 저주받은 사람들을 언급하신다. 그들은 주님을 거듭 부르면서(“주님, 주님”),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적법자들임을 주장한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실로 이들은 능력을 행한 사람들이다. 예언, 축사, 여기에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그야말로 ‘능력의 종들’인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들과 방법은 칭찬받고 보상받아야 마땅한 선한 일이다. 어떤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불법”으로,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로 규정하셨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 덧붙여,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선언을 들려주신다. 실제로, 전지의 능력이 있으신 주님이 그들이나 그들이 한 일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주님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행한 업적이 아무리 성스럽고 선한 일일지라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심판의 날에 인정받지 못할 허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주님을 떠나서 자신들의 마음을 따라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쌓은 어떤 업적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나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신 일이 아니라 어두움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음도 몰랐다. (주님이 불의한 자들의 일을 위해 조종당하실 리 없다.) 계시록의 서두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각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책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책망을 받은 교회들의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데 기인한다. 그들이 사명을 잊고 일하지 아니하거나 가시적인 선교적 성과를 내지 못해 책망받은 것이 아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간직해야 할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불신앙의 요소들을 용납하는 등,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질 때 파생하는 결과로 책망을 받은 것이다. 4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주님의 일(ministry)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을 적당히 하라, 혹은 주님은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 아니다. 삶에서 우선순위의 문제와 더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잘 대접해 드리기 위한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예수님 홀로 오신 것도 아니고 일행이 들이닥쳤으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부산했을지 충분히 이해된다. 손이 열 개라도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형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긴급상황에서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침내,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만을 터뜨렸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0:40). 마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중대사에 마리아가 동참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 톤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직접 마리아를 책망하고 일어서게 한다면 무례한 일일 수 있지만, 마르다의 언사는 부탁이 아닌 불평이었고 주님을 향한 원망이 묻어 있다.)의당, 마리아를 일으켜 부엌으로 보낼 줄 알았던 마르다의 불평은 효과는커녕, 가르침으로 바뀌어 돌아왔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Martha, Martha, the Lord answered,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but few things are needed or indeed only one.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41, 42절, NIV) 주님은 마르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거나,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그녀가 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마르다를 두 번이나 부르신 뒤(개인의 이름을 두 번 부른 예는 드물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NIV)”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안정되지 못한 영혼을 지적하셨다. 여기서, “마리아가 ‘좋은 몫(what is better)’을 선택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유의하고 싶다. 마르다가 주님을 위한 일에 최선으로 종사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하는 일이 더 좋은 선택(the better choice)이었다.혹여, 강단에서 이 본문이 여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마르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외침을 위해 인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교회에 많은 충성스런 일꾼이 필요한 것은 이해되나 다른 본문으로도 목적에 부합한 설교를 풍부하게 해낼 수 있다. 주님은 마리아의 편이셨다.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마르다의 열심을 부각하는 것은 주제를 비껴간 주관적 해석 이상이 될 수 없다. 최선보다 차선이 더 좋다고 강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록은 마리아를 조명하고 있다. 명백히, 주님은 그분을 위한 일에 바쁜 사람보다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죄와 인생의 무게 아래 지친 세상의 모든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내게로 오너라”는 초청은 오직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구도 죄와 사망으로 대표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오라’고 인생들을 부른 적이 없었다. 아니, 부를 수 없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석가도. 모두 죄의 저주 아래 놓였던 사람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 사람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주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람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서 죄인을 향한 정당한 표현은 ‘가라’가 되어야 한다. ‘가까이 오지 말라’가 되어야 한다.(출애굽기 3:5, 19:12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분의 경계를 모두 허물어 버리셨다. 무거운 짐을 벗고 그분을 안식처로 삼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오라’고 적극적으로 손짓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지치고 마음이 병든 영혼들을 일깨우는 빅뉴스가 아니겠는가?그분의 초청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선언을 통해 더욱 적극성을 띤다. 지친 영혼을 부르는 호스트는 마음이 온유하고(gentle)하고 겸손하다(humble). 어떤 형편의 사람이라도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고 편안한 쉼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인격을 가지신 분이다. 바로 그분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쉬러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잠시 쉬게 한 다음 목적을 위해 사용할 일꾼을 모집하는 초청이 아니다. 단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지치고 억눌린 영혼을 가엽게 여겨 쉬게 하시려는 사랑의 초대이다. 와서 할 일은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한테 배우는 것이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인생에 부과된 멍에는 구속을, 짐은 고통을 던져 줄 뿐이지만, 주님의 것은 마음의 쉼(rest)을 가져다준다. ‘오라’는 초청에 응하여 배우고 충분히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할 일이 있다면, 함께 메어 주시는 편한 멍에를 메는 것이다. (주님의 “내게 오라”는 초청은 원어의 뉘앙스 상 한 번으로 끝나는 일회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실천해야 할 반복 행동이다.) 주님께 다가가서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대신 자신이 만든 멍에를 메고 짐을 지는 생활에 의미와 목적을 두고 수고한다면, 그 멍에와 짐은 또다시 영혼을 피곤하게 하고 종래는 탈진해 버릴 것이다. 매일 주님을 찾고, 배우고, 주목하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편하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갈릴리 호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아침을 잡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셨다(요한복음 21:15-17). 그것도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왜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설교자들은 ‘사랑하다’는 세 가지 유형의 헬라어를 소개하며, 베드로의 대답이 최상의 사랑한다는 표현인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대답했기 때문에 세 번이나 물으셨다는 오래된 해석을 선호한다. 이와 함께 ‘내 양을 치라(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준엄한 명령으로) 강조해서 성도들의 헌신을 촉구하기도 한다. 왜, 주님은 세 번이나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을까?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대답했기 때문에 ‘아가파오’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일까? 그러다 마지막에는 베드로의 고백에 사랑의 마음으로 눈을 낮추시어 어쩔 수 없이 예수님도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물어보셨을까? (실제로 그렇게 설명하는 설교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용어를 가지고 의미를 두는 해석은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적절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여러 고대 문서는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했다는 걸 증명한다. (예수님도 두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질문하셨다.)무언가를 깊이 심어 주기 위해 주님은 같은 질문으로 세 번이나 묻고 동일한 부탁을 하셨다. 그 어떤 일보다도 그분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시려고 베드로를 세 번이나 불러 확인하여 강조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을 사랑해야 함을, 다음으로, 주님의 양을 돌봐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순서에 있어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시기 위해 ‘나를 사랑하느냐’는 전제조건을 거듭 확인하셨고, 그 뒤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주님의 부탁을 이루어 드리기 전에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 된다. 그분의 양을 치는 일에 앞서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일은 그분을 사랑하는 일, 그분 안에 거하는 일, 그분께 속하는 일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제쳐 두고 맡긴 사명을 좇아 열정을 불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든 예들 외에도, 그 어떤 일보다 주님과의 관계와 사귐에 힘써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는 성경의 근거는 많다. 이를 일일이 나열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서 충분할 듯하다. 5한국 교회로 대표되는 우리의 기독교는 통계가 말해 주듯 여러 면에서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다양한 전도 전략, 세분된 신앙 성장 프로그램, 새로운 형태의 소그룹 모임, 업그레드된 어린이 청소년 교육, 참여자를 배려한 예배, 편리한 시설 등 어느 분야 하나 빠짐없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 수는 줄고 있고 교회의 대외 이미지 또한 나빠지고 있다. 범부의 눈에도 과거와는 확연하게 가벼워진 우리 교회의 모습이 감지된다. 교회 건물 머리에 길게 늘인 유명 연예인 초청 전도집회 광고 현수막은 눈에 띄어도 말씀 사경회를 연다는 글귀는 자취를 감춘 것 같다. 김장 봉사, 급식 봉사 기회를 알리는 광고문은 보여도 기도회 참석을 독려하는 광고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껏 차려입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메운 무리는 보이지만, 침낭을 들고 기도처로 가기 위해 서성이는 성도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모니터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에 기웃거리는 일꾼들은 많으나, 세상의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일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의 콘서트를 방불하게 하는 수련회 집회 중 팔을 높이 들어 열창하는 청년들은 보이지만, 치열하게 주님을 찾다 예배당의 긴 나무의자에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을 밝히는 젊은이들은 사라진 것 같다. 복잡하게 얽힌 소셜 네트워크를 연신 체크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은 보여도, 세심하게 말씀의 장을 천천히 넘기는 손가락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가벼워지고 약해져 가는 현실에 대해, 단지, 시대의 변화로 원인을 돌리거나 내부의 한두 가지 이유로 설명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 전문가들의 크거나 세밀한 분석은 제쳐 두고, 내게 한 근본적인 이유를 끄집어내라 한다면, 이 땅에 진중하게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소중하게 여기며, 부단히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영적인 힘을 얻어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말씀을 직접 읽고 연구하여 그것이 주는 감동과 교훈을 얻기보다, 수고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설교나 성경해석, 간증을 듣는 것으로 영적인 양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용한 장소를 찾아 주님을 묵상하며 기도로 깊이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갖기보다, 여러 사람 속에 섞여 급한 마음으로 대충 기도를 쏟아 내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으로 기도 생활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충분한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 없이, 듣고 배운 지식 정도에 만족하며,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도들이 늘어남과 함께, 소리는 요란해졌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밝히고 선도할 내면의 힘을 기르지 못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본다. 진정한 내면의 힘은 지속적인 주님과의 진지한 교제를 통해서 길러진다. 끊임없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로 주님의 세계 속에 머무는 시간이 쌓여 감에 따라 그분의 능력과 형상을 드러낼 힘이 축적되는 것이다. 이는 그 분에 대해 듣는 것으로,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주목하고 그분의 세계에 몰입하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주어진다.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영혼을 돌보기 위해 성도를 만나는 시간, 공식적인 기도회에 참석하는 시간, 같은 뜻을 가진 동역자와의 교제의 시간이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고. 주님을 위한 일들이니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시간들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대체할 수 없다. 주님을 앞에 모시고 귀 기울여 듣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영적인 양식과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목사로서 주일 맞이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매번 긴장과 두려움이 따른다. 성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과 함께 그 시간에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로 드려져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런 긴장과 염려는 잘 된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으로 해소될 수는 없었다. 주님에게서 오는 자신감과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음에 아무런 가책이 없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가까운 관계가 준비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토요일은 온전히 주님과 개인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으로 떼어 놓았다. 그날을 사람을 만나는 일로, 행사에 참여하는 일로, 혹은 다음 날 설교문을 만드는 일로 보내지 않았다. 주일에 전할 말씀은 토요일 전에 준비했고, 한적한 장소를 찾아 묵상하고 기도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예배를 드릴 장소에 들러 성도들이 앉을 자리 하나하나를 붙잡고 한 분 한 분을 머리에 떠올리며 기도해 드렸다. 모두가 다음날 주님 앞에 나와, 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얻어 돌아가기를 위해 기도했다. 고백이 난무하고 표어들이 이곳저곳을 장식해도 주님과의 교제가 결핍되면 개인이나 교회는 힘을 잃어버린다. 시편 기자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라고 표현했듯이 그리스도인의 힘은 주님과의 교제에서 온다. 각자에게 주어진 성도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갈 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할 만한 생명력 있는 삶의 힘은 끈질기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든든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독교도 본래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고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만을 주목했던 마리아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깊이 경청하라! 세계 선교를 상상하라!
by Xiaoli Yang
2024-02-24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로잔운동의 지도부가 발표한 글로벌 공청회(global listening calls) 분석 보고서[1]를 읽고 난 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경청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경청하고 (재)상상해야 변혁적인 힘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가 담아낼 수 있는 깊은 경청과 (재)상상의 방법과 특징은 무엇인가? 삼십 년 전, 존 스토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상에 대해 ‘이중 경청’의 기술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2] 하지만 그는 경청하고 (재)상상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다각적인 변화를 이루는 기술적인 행위로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 글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언어, 육체, 침묵의 세 가지 중요한 수단을 다루는 방법을 통하여, 다른 무엇보다 성령의 은혜로 경청과 (재)상상하는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초대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함께 듣고 응답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깨지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세계 선교(Missio Dei)에 참여할 수 있다.다문화적 지혜다양한 전통에 나타난 고대의 지혜는 경청과 (재)상상의 기술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보물을 제공한다. 호주 원주민 공동체들은 앉는 것, 배우는 것, 아는 것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배우고 실천해 왔다. 탄다냐(Tandanya) 국제 원주민 문화 기관에서 ‘야바라(Yabarra)-빛 속에서 꿈꾸기’라고 불리는 예술 축제에 손님들을 환영하면서, 그들은 “당신은 우드리(Wodli)에 앉도록 초청되었고 당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것을 알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해의 길을 보고 들으십시오”라고 노래했다.[3]이런 종류의 경청은 단지 지식이 아닌 일상생활에 대한 지혜를 찾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앉기, 바라보기, 이해하기와 함께 완전히 구현된다. 2021년 올해의 시니어 호주인(Senior Australian)인 미리암 로즈 웅건머(Miriam-Rose Ungunmerr)는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샘을 두드리기”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속한 부족의 이름은 응강이쿠룽쿠르(Ngangikurungkurr)인데, 이는 ‘깊은 물소리’[4]를 의미한다. 이 부족의 구성원들은 내면에서 ‘깊은 샘물’이 솟아오를 때까지 귀 기울이는 자세를 취한다.고대 중국인들은 다섯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의 결합이 ‘경청’의 총체적인 구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배웠다. ‘Ting/청’(듣다, 聽)이라는 단어의 중국어 어원은 듣기에 필요한 다섯 가지 요소: 듣는 귀, 보는 눈, 생각하는 사고, 느끼는 마음, 그리고 온전한 주의를 위한 한 획으로 구성되는 건설적인 모델을 제공한다.[5]완전히 구현된 종류의 경청은 자신의 편견, 전제, 예상을 제쳐두고 상대를 향한 존중과 공경을 요구한다. 이해(understanding)를 얻으려면 상대방의 ‘밑에 서 있어야(stand under)’ 한다. 그러므로 경청은 겸손, 취약성, 인내의 행위이다.언어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개념에 익숙하다. 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규범적이고 권위가 있는 말씀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기독교의 전통은 우리의 상상력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말씀을 읽는 고대의 방법인 신성한 독서(Lectio divina)는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더 깊은 친교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사색적인 접근은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우리를 읽게 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에 응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팬데믹의 격동,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인종 차별, 기후 변화, 그리고 경제 침체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겪은 폭풍에 비유할 수 있다(막 4:35-41; 눅 8:23-25). 우리의 상상력을 활성화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바람과 거친 물살 한 가운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공황 상태에 빠져 미친 듯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 혹은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돌보지 않으시는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변화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동료, 협력 단체, 선교 협력 기관,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 등 다른 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도자인 우리는 듣기보다는 더 많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귀를 열고 듣는 것이 다른 사람들, 특히 취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며,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서 첫 번째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토착민 선교, 상황화 선교는 우리 자신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그 지역의 땅에서 듣고 상상하는 깊은 감각으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경청에 있어서 종종 간과되는 부분은 내면의 자기 대화이다. 혼잣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자라게 한다. 뒤에서 하는 혼잣말은 우리를 자기 부인이나 강박의 유혹에 빠뜨릴 수도, 혹은 생명을 주는 길로 끌어줄 수도 있다. 우리 내면의 소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이름을 부르고, 분별하며,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응답할 수 있다.육체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신성하고, 거룩하며, 그리고 전적으로 주님 안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고, 하나의 사람이자 하나의 주체이다. 마치 화가에게 캔버스, 시인에게 단어처럼, 육체는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수단이기도 하다.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존엄하게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의 진심 어린 통곡을 들으셨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알아보셨다(눅 5:18-20; 17:11-19).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고 있던 제자들의 육체의 언어(body language)를 들으셨고, ‘그들의 눈이 피곤함’을 보셨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연약한 육체를 알아보셨다(막 26:36-46). 또한, 예수님은 적대하는 자들의 육체의 언어를 들으시고, 그들 마음속의 문제를 알아보셨다(눅 5:17-26; 7:36-40).오늘날,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일하며 육체적인 피로, 탈진을 자주 경험한다. 만약 그들이 신체의 중요한 신호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많은 탈진(burnout) 현상들을 초기 단계에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역 사역 혹은 세계 선교에 참여할 때,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그들과 연결됨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를 통해 깊은 의식이 표면으로 나오게 되고 실재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험될 수 있다.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창조 전체로도 확장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성경뿐만이 아니라 나무, 꽃, 구름, 별에도 기록하신다고 주장했다. 토착민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각각의 영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물 전체를 위한 것임에 대해 많은 것을 일러준다. 복음주의의 전통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는 중요한 계명에 큰 강조를 두는 것이 맞지만(마 28:18-20),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위대한 극장 안에 앉아서 하나님의 창조물이 우리에게 설교하도록 둘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연계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대해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침묵많은 그리스도인이 침묵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들의 모임은 보통 소리, 말,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침묵은 매우 중요한 언어이며 사랑의 하나님이 소통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하나님의 침묵이 꼭 움직임이 없다거나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혹은 새로운 돌파구의 탄생 전 매우 의미심장한 멈춤의 시간일 수 있다. 사무엘상은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나, 그 말씀을 듣는 데 네 번이나 걸렸던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삼상 3:1-10). 구원자의 오심을 인내하며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들은, 오랜 멈춤 후에 하나님과의 교감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눅 2:26; 37-3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심문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시며, 침묵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요 8:3-11). 강력한 두 번의 멈춤(6절과 8절)은 고발자들이 죄로 물든 자신들의 삶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 자신들의 손가락을 거두도록 하는 침묵의 순간이 된다.지도자들이 모여 함께 들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기에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의 모든 질문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침묵은 모든 우리의 고통 가운에 함께 계시며, 우는 자에게 안식을 주시며, 극복해 나가는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처럼 그분의 계시를 알아볼 수 있는가? 때때로 가장 좋은 응답은 이야기, 시, 혹은 그림을 통해 모양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재)상상력이 솟아올라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침묵의 공간일지 모른다.일상속에서 성경의 날개가 높이 날기 위해서는 공간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회화나 건축물의 여백은 내용을 비우지 않고, 오히려 가득 채운다. 침묵의 공간은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찾고 해석할 수 있도록 표면에서 그들을 향해 흐른다. 시에서 발생하는 멈춤은 우리를 친숙한 세계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이 공간이 없이 우리는 형체도,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도 가질 수 없다. 내적인 침묵은 히브리어 성경의 시집에서 발견되는 ‘셀라’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칠십인역 성서는 이 단어를 구분점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은 멈추다, 가늠하다, 듣다를 가리키는 묵상의 멈춤, 중단을 의미한다.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주고 받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영향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신성함,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기 위한 멈춤은 우리가 메시지를 씹고 먹을 수 있게 해준다. 침묵의 케노시스(kenosis)[6]상태는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받을 준비가 된 비어 있고 부서진 열린 그릇이 될 수 있도록 해주며, 이는 우리의 ‘새로운 자아’가 거하는 곳이 된다(엡 4:24).결론로잔 운동의 세계적인 모임이 열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다중심적(polycentric)이고 다성적(polyvocal)인 사명 안에서 경청하고, 현명하게 분별하며, 그리고 창의적으로 (재)상상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자.거룩한 경청과 (재)상상의 기술을 발달시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추구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2024년 서울에서 열릴 제4차 로잔대회가 육체와 침묵이라는 수단을 통해 경청하고 (재)상상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을까?우리가 의도적으로 몸을 움직여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열린 자세를 취할 때, 성령의 바람이 더 강하게 불고, 희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들려올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희생이 요구되는데, 희생은 본래 ‘증인’(witness)을 의미하는 ‘순교자’(martyr)라는 단어와 종종 연관된다. 영원하시고 살아 계시는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귀를 기울이는 것을 통해 희생적인 사랑을 담아낼 때, 우리는 혼란스럽고 양극화된 세상 속에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힘을 볼 수 있게 된다.1. ‘The Evangelical Church Interacting between the Global and the Local: An Executive Summary of the Analysis of Lausanne 4 Listening Calls,’ Lausanne Movement, Dec 1, 2021, https://lausanne.org/l4/global-listening/the-evangelical-church-interacting-between-the-global-and-the-local. 2. John R. W. Stott, The Contemporary Christian: An Urgent Plea for Double Listening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2). 3. Dean Eland, ‘Eyes on the Street: See What is Around You,’ Loving the Neighourhood, August 17, 2020, accessed 30th Sept 2022, https://lyn.unitingchurch.org.au/2020/08/. 4. Miriam-Rose Ungunmerr, ‘Listening to Another,’ Compass Theological Review 22 (1988). 1. ‘5 Listening Insights from the Chinese Character for Listening,’ SkillPacks, accessed 30th Sept 2022, https://www.skillpacks.com/chinese-character-listening-5day-plan/. 6. ‘Kenosis’ meaning ‘self-emptying of Christ’. 원제: The Transformative Power of Deep Listening출처: lausanne.org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가?
by 고상섭
2024-02-2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반대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문제 제기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는 의견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부분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본문에서 무리하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성경 본문의 주제가 흐트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배경에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설교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구약의 특정 본문에서만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저자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좁고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다 설교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1]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의에 대한 혼동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본문을 갈보리와 십자가상의 속죄와 연결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단순히 속죄만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레이다누스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 모두를 하나님의 옛 언약 약속들의 성취로 선포했으며, 또한 성령님을 통한 이 예수님의 오늘날의 임재와 그의 임박한 재림을 선포했다. 간단히 말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구속사의 전 영역이라는 문맥에서 전파하는 것을 의미했다.[2]즉, 그리스도를 설교함이란 단순히 모든 본문을 십자가의 구속으로 연결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사 전 영역을 포함한 설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정의하게 되면,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라는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저변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모든 본문에서 일대일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저자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의미는 회당에서 설교하는 것과는 달리 구속의 드라마 전체를 고려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의미한다. 본문을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 보는 것은 그것을 더 큰 문맥, 즉 계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목적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문이 주는 특정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만능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마무리를 써놓고 매주 필요할 때 골라가며 쓰라는 말이 아니다.[3]클라우니는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바라보는 더 큰 문맥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취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본문 안에서 인간의 한계 상황(FCF: The Fallen condition Focus)이 드러나면,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초청할 수도 있다.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말의 의미를 싱클레어 퍼거슨의 표현을 빌린다면,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며 그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순종이라는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다면 복음이 아닌 종교적 설교, 윤리적 설교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의 선행은 선행을 통해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 공로주의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선행이기에 모든 순종과 선행은 칭의라는 은혜가 동기로 작용한다.결국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쉬운 적용은 “칭의가 성화로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는 구절을 따로 떼어 설교하지 않겠지만, 굳이 이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하라고 하면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로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열심은 은혜의 만족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그것을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우리의 열심의 동기는 부족과 결핍이 아니라 은혜와 만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은혜의 감격이 열심의 동력이 되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게으름은 인간의 열심과 결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가 우리의 열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동기가 아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개미도 저렇게 열심히 일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서 늘 시작한 일을 끝마치지 못하십니까? 요한복음 13:1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그리스도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게으름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게으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열심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잠언 6:6이 포함된 본문을 이렇게 설교했다. 지혜로운 자는 누가 위험하지 않아도 내면의 동기만으로 스스로 알아서 일한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온갖 구실로 작아 보이는 일탈을 삼다가 빈궁이 닥쳐오면 깜짝 놀란다. … 이런 삶은 예수님의 삶과 크게 대비가 된다. 그분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삶에 당신이 일하지 않아 사라져버린 부분은 없는가? 우리는 일할 때도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4]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은 성경의 본문에서 무조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 본문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조망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찰스 스펄전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런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스펄전이 한 웨일즈의 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설교)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다”고 하자, 그 설교자는 “글쎄요. 성경 본문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에 있는 것을 설교해야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영국의 모든 자그마한 동네에도, 그게 어디 있든 런던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예, 그럼요.” 그러자 스펄전은 “성경의 모든 본문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수도로 통하는 길이 있다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일세, 사랑하는 형제여, 자네의 직무는 본문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로 통하는 길이 무엇일까?” 하고 말하고 곧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 거대한 대도시, 즉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달리면서 설교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만난 적이 없네. 만에 하나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어떡하든 길 하나를 만들 것이네. 담벼락을 넘고 도랑물을 건너서라도 나의 주님께로 나아갈 것이네. 설교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지.”[5]스펄전은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문 자체에서 그리스도를 무조건 연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팀 켈러도 이렇게 조언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희미하게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떠오르는 대로 무조건 덤벼서는 안 된다. 라합이 창문에 걸어 둔 붉은 줄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연상될 수는 있지만(수 2:18)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그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 설교가 끝나기 전에, 바로 그 길을 가리키고, 바로 그 길을 여행하라”[6]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는 팀 켈러의 표현처럼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1.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p.29.2. 같은 책, p.32. 3. 에드먼드 클라우니,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30.4.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p.28.5.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95. 6. 같은 책, p.96.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by Trevin Wax
2024-02-22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연구한 마이클 그레이엄과 짐 데이비스의 유익한 책,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를 계기로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교회 이탈(dechurching)의 원인과 영향에 대한 많은 논의가 최근에 있었다. 여기에는 떠난 이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에 대한 제안도 들어 있다. 나는 교회 이탈 현상을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내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Reconstructing Faith에 그레이엄과 데이비스, 라이언 버지를 초대해서 인터뷰했다. 왜냐하면 교회 이탈은 지금 미국 전역에서 화제가 되는 뜨거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교회 이탈을 논하려면 거기에 수반된 다른 질문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왜 교회에 가는가?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가에만 집중하다 보면, 물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인 왜 교회에 가는지를 까맣게 잊곤 한다. 사람들은 왜 교회에 갈까? 거기에 뭐가 있기에 매주 가는 걸까? 당신은 왜 교회에 가는가?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한 간단한 답이 없는 것처럼(The Great Dechurching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왜 다니는가에 대해서도 정답은 없다. 이 문제를 놓고 교인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다면, 아마도 다양한 이유 앞에서 놀랄 것이다. 교회 지도자라면 신자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게 하나 같이 고상하고 또 강력한 신학적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자극적인 예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거라는 사실을 안다. 예배를 위해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온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보다 현실적인 경우가 많다.습관적 참석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그건 순전히 습관 때문이다. The Lamp에 기고한 글에서 매튜 왈더는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가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거나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대접하는 것과 똑같이 미사가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식료품점이나 쇼핑몰, 동네 고등학교의 풋볼 경기에 가는 것처럼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는 이유가 그게 항상 하는 일이고 또 항상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아직도 교회 다니는 게 당연한 동네가 있다. 거기에서는 이웃에게 “어느 교회 다니세요?”라고 묻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전혀 불쾌감을 일으키는 질문이 아니다. 습관적 참석자(the regulars)는 교회에 가는 게 일상이고, 그건 사회적 결속과 가족 안정을 위한 중요한 일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시대를 고려할 때, 이런 사람은 점점 고령층이 되어간다. 여기에 해당하는 젊은이는 많지 않다. 습관적 참석자가 누구인가? 어머니날이나 아버지날에 자녀들과 손주들을 데리고 나타나 그들의 일상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길 바라는 부모와 조부모들이다. 책임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두 번째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책임자”(the Responsibles)라고 부른다. 안내자나 집사, 주일학교 교사거나 유아반 봉사자, 성가대 또는 주차 봉사 등, 가지 않으면 당장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소그룹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는 맡은 책임 때문이다. Everybody Loves Raymond의 한 에피소드에서 레이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 때문에 부모와 가족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국 그는 성당에 가기를 꺼렸던 과거를 반성하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성당에 열심히 참석하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그가 성당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건 아버지가 성당을 열심히 다닌 게 신앙 때문이 아니라 헌금 봉사와 헌금 계수하면서 사람들과 주고받는 잡담을 좋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존경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세 번째 이유는 가족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는 사회적 혜택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존경자”(the respectables)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도덕적 본능을 발전시키고 유지하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교회는 도덕적으로 존중받는 곳,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곳이다. 크리스챤 스미스와 에이미 아담스직이 쓴 Handing Down the Faith(신앙 전수)는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성공적으로 전달한 가족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담고 있다. 그들의 인터뷰에는 ‘토대’ ‘베이스’ ‘기초’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존경자는 교회 출석이 자녀에게 좋은 삶을 살도록 이끄는 도덕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그들이 선하고 도덕적이며 품위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무언가를 제공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기들은 가지 않았으면서도 부모들이 굳이 십대 자녀를 교회 청소년 모임이나 교회 캠프에 보내는 이유이다. 자기네는 이미 교회가 제공하는 도덕적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추구자교회에 가는 네 번째 이유로 진리를 찾기 위해서인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매주 미국 전역의 교회에는 영적으로 갈구하지만, 아직 신앙에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추구한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과 그 가르침에 관심이 있다. 대부분은 다른 부류에 해당하는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방문하지만, 일부는 스스로 교회를 찾아 다니거나 온라인에서 검색을 한 후 출석하기도 한다. 추구자(the reachers)는 규모가 가장 작다. 왜냐하면 교회 출석이 그들의 영적 여정에서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나중 단계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확신자마지막 부류지만 의미가 있는, 굳건함과 결단력으로 특징지어지는 믿음의 소유자가 있다. 이들은 가장 명백하게 중생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교회 출석자이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서 역사한다. 확신자(the resolute)의 열정과 헌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내가 처음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불신자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따라서 오로지 성경적인 이유만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확신자는 교회를 성경적 렌즈로 본다는 측면에서 가장 독실한 신자이다. 확신자는 신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백성을 사랑한다. 신약성경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또한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갈구한다. 그들은 또한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의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올바른 영성 형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가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교회 참석자의 대다수가 이 독실한 그룹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교인을 구상하는 건 다양한 수준의 영적 성숙도를 지닌 다섯 가지 범주의 사람들 모두이다. 또한 습관적 참석자인 동시에 책임자일 수도 있다. 교회 출석의 미래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이 교회 출석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습관적 참석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그건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으며 동시에 매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줄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자 그룹에서도 지속적인 쇠퇴를 예상할 수 있다. 교회 이탈이 계속되고 우리 사회가 더욱 고립됨에 따라 해결해야 할 요구 사항과 더불어 각종 서비스와 활동까지 줄어들기에 서로를 연결하고 의무를 이행할 장소까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존경자 사이에서도,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을 고수하다 보면 주류 사회와 보조를 맞출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교회 출석이 초래하는 사회적 대가가 너무 높으면 상당수가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 문화의 광기에 대응하여 신앙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교회를 도덕적 건전성의 원천으로 보며 더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다. 성 혁명은 필연적으로 치유가 필요한 사상자를 낳을 것이다.추구자 중에서는 영적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증가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존 신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따뜻하게 환영하는가에,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그들에게 어떤 지혜와 가이드를 제공하는가에 달려있다. 확신자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 변화가 계속된다면, 이 그룹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대다수를 차지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다음 세대에까지 자신들과 같은 확신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이다. 확신자가 과연 기독교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추구자를 더 많이 찾고 초대하려고 할까? 교회 리더들에게 좋은 소식이 모든 건 교회 출석과 관련한 하나의 시험적인 생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소개한 분류를 비판하거나 보강하려는 모든 의견을 환영한다. 목회자와 교회 리더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당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처음 세 가지 범주와 더 밀접하게 일치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도 긍정적인 면이 숨어있다.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나고 그들이 확신자가 되도록 인도하라. 이를 위해서는 복음의 능력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을 책망하고 강권하며 참된 회심을 가져온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순종을 단순한 의무에서 기쁨으로 바꾼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자유함으로, 그리고 자존심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으로 봉사하게 한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을 비웃을 때,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일어서게 한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를 성숙시키고 성화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이는 이유에 관해서 점점 더 그분의 뜻과 일치하게 된다.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의 향기를 더 많이 발산할수록, “교회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될 것이다. 원제: Why Does Anyone Go to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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