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교회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11세기의 개혁자
by Burk Parsons
2018-11-15
전승에 따르면, 1066년에 노르만족이 영국을 정복한 후, 노르망디의 공작인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의 왕좌를 차지했다. 그 결과로 영국의 황태자 에드가는 영국의 왕권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망명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 헝가리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에드가는 누이 마가렛과 함께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그러나 폭풍이 불어 배는 북쪽으로 밀려갔고, 스코틀랜드의 바위투성이 연안에 도착했다.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3세는 그곳에 도착한 영국 가족을 크게 환대했고, 시간이 지나 에드가의 누이 마가렛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에드가가 영국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계속 고투하는 동안, 마가렛은 남편과 스코틀랜드 백성을 위해 헌신했다. 스코틀랜드의 왕후 마가렛(1045-1093년)은 교회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1세기 스코틀랜드에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자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동안, 동방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동안, 안셈이 마가렛의 고국인 영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마가렛은 남편인 스코틀랜드 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전설에 따르면, 왕후 마가렛은 한밤중에 왕궁을 조용히 빠져 나와 근처의 동굴에서 남편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남편의 왕국에 대한 반역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의심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말콤이 기독교로 회심하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마가렛은 다행히 혐의를 벗게 되었다. 말콤의 회심으로 그의 왕궁에 변화가 불어왔고, 궁극적으로 스코틀랜드 민족 전체의 변화가 이어졌다. 마가렛은 하나님이 크리스천의 성품과 거룩함, 그리고 예배의 본보기로 제시하신 경건한 여인이었다. 왕궁의 여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많은 여인들은 마가렛을 매우 존경하고 섬겼으며, 그녀를 겸손과 기도의 본보기로 삼았다. 마가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한 ‘말씀’의 여인이었다(마가렛이 읽었던 복음서는 오늘날까지 영국의 가장 위대한 보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으며, 옥스퍼드대학의 보들리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다). 마가렛은 여덟 명의 자녀들을 낳고,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하여 양육했다. 또한 교회에 대한 대단한 열정으로 수없이 많은 교회의 건축과 사역에 사재로 후원했으며, 특히 무너져가는 교회들을 찾아 활력을 불어넣었다. 마가렛은 주일 예배와 안식일을 지켰으며, 이에 감동받은 왕과 왕궁은 결국 그 예를 따랐다. 덕분에 그들에게 일요일은 예배와 안식 및 섬김의 날인 주일이 되었다. 마가렛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였다. 그녀는 정의롭게 살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n 11th Century Reformer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역사
중세교회
11세기
개혁자
왕후
마가렛
회개와 개혁
by R. C. Sproul Jr.
2018-11-14
개신교 종교개혁은 좋은 뜻으로 ‘그’ 종교개혁(the Reformation)으로 불린다. 마치 종종 일어나는 일에 1차, 2차를 붙이듯이 1차 종교개혁이나 2차 종교개혁과 같은 식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종교개혁을 언급할 때 “당신은 어떤 종교개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종교개혁은 경우에 따라 교회 역사에서 일어나는 갱신이나 부흥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개혁은 단 한 번 일어났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일으키기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또 하나의 종교개혁을 갈망하는 우리는 그 개혁을 출범시킨 불꽃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마틴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보름스 의회에서 연설할 때 시작되었는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그보다 이른 때인 루터가 성경을 연구할 때, 곧 칭의에 관한 핵심 본문을 주석했을 때 시작되었는가? 이 역시 맞는 답일지도 모른다. 또는 루터가 자신의 파문을 선언하는 교황의 칙서를 불길 속에 던져 넣기 전에 불보다 더 뜨거운 연설을 했을 때 시작되었는가?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일로 기념한다. 위에서 언급한 날 가운데 어느 한 날이 아니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재한 날을 기념일로 삼는다. 95개조 반박문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종교개혁 출범을 알렸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종교개혁을 바란다면, 이 반박문의 첫 번째 목소리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첫 번째 반박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시 개혁을 성취할 것이라면,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여기 있는 우리의 교회가 변화될 때, 비로소 이 세상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음이 변화될 때, 여기 있는 우리의 교회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변화는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종교개혁의 큰 복 가운데 하나는 세상을 둘로 갈라놓는 관점을 파괴시킨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세상을 초월적 영역과 자연적 영역으로 갈라놓았다. 초월적 영역은 선하고, 자연적 영역은 기껏해야 중립적이었다. 종교개혁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과 우리의 모든 삶이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부각시켰다. 성경은 우리 선조들에게 영혼이 구원을 얻는 법만이 아니라 문화를 정당하게 다스리는 법, 노동을 이해하는 법, 경건한 자손을 양육하는 법 등에 관한 지혜의 원천이 되었다. 창조적인 영을 가진 필그림과 청교도는 광야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대양을 건넜다. 이후에는 아브라함 카이퍼, 프란시스 쉐퍼와 같은 믿음의 영웅들이 더 넓은 영역에서 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우리는 이 모든 복에 대해 감사해야 함과 동시에 조심해야 한다. 경건주의의 위험—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관점—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경건의 복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개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바로 경건이라는 확고한 진리를 놓치고 말았다. 여기서 개혁을 이끄는 경건은 종교개혁의 경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단순히 춤을 안 추거나, 술을 안 마시거나, 수다를 떨지 않거나, 데이트를 하지 않는 등 외양에 몰두하는 태도가 아니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참된 회개의 정신을 불어넣는 경건이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낙타를 삼키고 하루살이를 걸러 내는 성향, 곧 우리가 자신의 죄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의 죄는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행동을 거부한다. 대신 우리는, 루터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은혜로 덮어 주시기를 충분히 오랫동안 부르짖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은혜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결국 교회를 종교개혁으로 이끈 것은 믿음이었고,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또 다른 종교개혁으로 이끌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변화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만이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거룩해지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 분명 종교개혁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구원에서 끝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온갖 문제를 향해 달려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종교개혁의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에서 거룩하게 되는 믿음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회개하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때 하늘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예수님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런저런 일로 괴로워하거나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불신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키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회개와 믿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참된 길이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소유하느냐의 문제다. 우리가 그 의를 소유하여, 다른 모든 것에 관해 끊임없이 걱정하거나 생각하는 일을 멈출 때, 비로소 길이 열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회개와 믿음의 삶,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전략’이 되어야 한다. 회개하고 믿으라. 그러면 개혁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루터도 그렇게 말했다.“우리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출처: www.ligonier.org원제: Repentance and Reformation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역사
종교개혁
회개
오직믿음
하나님의은혜
전략
부르심
경건
천국
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와 놀라운 성취
by Keri Folmar
2018-11-12
린다(Linda)와 코니(Connie)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에 규칙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고, 꼬박꼬박 숙제를 했다. 그러나 성경 공부의 형태가 기존보다 더 집중적이고 복잡하게 바뀌자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됐다.그러던 중 반가운 변화가 생겼다. 린다와 코니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 공부를 위해 매일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더 많은 것을 깨닫기 위해 참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성경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깊어질수록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늘어났고, 더불어 성경 말씀 자체에 무척 집중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영적 성장으로 이어졌고, 궁극적으로는 전 교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는 무척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바른 성경 공부에 필요한 세 가지 유의점을 살펴보겠다. 1. 교회 중심이 되라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여성들은 강해설교를 통해 영혼의 양식을 얻는다. 그들은 교회에서 공급하는 신학을 통해 하나가 되며, 서로에게 힘을 주는 언약 관계에 속하게 된다. 교회 중심의 성경 공부는 여성들의 모임이 원활하도록 돕는 동력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돕는다. 나아가 교회 내 여성들은 교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감에 따라 전 교인을 세우는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처럼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가 개교회를 중심으로 정착할 때, 교회에는 여러 긍정적인 효과들이 일어난다.우리 교회는 성경 공부에 참석하는 여성들에게 교회의 다른 모임에도 참석하도록 권면한다. 우리는 그들을 교회에 초대하고 함께 헌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함께 설교를 듣고,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며, 환영의 마음으로 섬기고 또한 섬김을 받도록 한다. 이는 대규모 강연뿐만 아니라 소규모 토론과 일대일 대화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여성들과 그녀의 가족들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성장한다.공동체, 직장, 학교 등에서 벌어지는 봉사 모임 성격의 성경 공부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는 훌륭한 사역이 될 수 있다. 특히, 요즘에는 외부에서 진행하는 초교파 성경 공부 모임들이 많다. 그러나 여성들의 바른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성경 공부를 교회의 권위 아래 두는 것이 좋다. 2. 비디오를 끄라성경을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물론 일부 비디오 성경 공부는 신학적으로 확실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비디오들은 종종 성경 말씀을 이해하도록 인도하기보다는 감정적 반응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두기도 한다. 화려한 언변을 가진 강사들은 청중을 웃고, 울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 말씀보다 그들이 말한 예화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면, 성경 공부의 본질을 잃은 것이다. 또한 비디오를 통한 학습은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경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해 자신감을 잃게 만들 수 있다.두바이기독교교회연합에서는 기존에 시행하던 비디오 성경 공부를 멈추었다. 이를 대신해 보다 면밀하게 성경을 이해하고 여성의 삶에 직접 적용할 수 있도록 몇몇의 질문들로 구성된 교재를 채택했다. 우리 교회는 캐서린 닐슨(Kathleen Nielson)의 ‘살아 있는 말씀 연구’(Living Word Bible Studies)를 읽고, 신학에 기반을 두되 특별히 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직접 교재(최근 마가복음에 대하여 쓴 두 권의 책)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책들은 여성들이 보다 친근하게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 신학적 논제와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자료가 성경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여성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재여야 한다. 이제 비디오 성경 공부를 멈추고, 스스로 성경 말씀을 깊이 공부하길 권한다.3. 자격을 갖춘 지도자를 찾으라과거 대부분의 성경 공부는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 자원하는 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교재를 사용해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식이었다. 그중 일부 지도자들은 심지어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교회 장로들의 가르침이나 감독을 받지 않았고, 신학적으로 통일된 내용을 가르치지도 않았다.우리 교회의 어떤 지도자는 신앙이 구원의 필수요건임을 믿지 않기도 했다. 그 지도자가 진행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는 40여 명의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힌두교인과 무슬림도 있었다. 모임에 참석하는 여성들 중 유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참된 복음이나 진실된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다.리더십의 변화는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우리 교회는 여성 지도자들에게 조직신학을 배우도록 돕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관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독려하였다. 주로 과거에 성경 공부를 지도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교육도 실시했다. 또한 성경 말씀을 좋아하며 교회에 헌신적인 여성들을 새로운 지도자로 양성하였다. 우리는 교회 전체의 문화를 변화시킴과 동시에 리더십의 구성원과 방향에 대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변화를 이끌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건강한 신학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성경 공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진지하게 적용한다. 그들은 이집트, 가나, 호주, 인도, 케냐, 부룬디, 아일랜드, 카자흐스탄,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지도자들이다. 눈에 띄는 공통점이 없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 사역의 가치하나님의 은혜로, 여성들을 위한 특별한 성경 공부가 전 교인들의 협업 속에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중심의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과 지도자들은 신학적인 깊은 지식을 점차 쌓아가고 있음은 물론, 자신이 아는 것을 함께 공유한다. 성경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이 만남을 특별히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이 시간을 통해 점차 삶 속에서 주님을 알아 가고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교회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이제 다른 사람들을 제자 삼기 원하고 있다.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를 강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과 마찰이 생길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모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규모의 성경 공부든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에너지를 가치 있게 사용하여 삶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ot All Women’s Bible Studies Are Created Equal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사역
여성
성경공부
성취
교회중심
자격
지도자
가치
교회를 변화시키는 법
by Mark Dever
2018-11-11
종종 목사들이 내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교회를 변화시키다가 분란을 조성한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다. 해임당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로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변화를 이끌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이 여기 있다. 가르치라, 지속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말씀을 가르치라 먼저, 교회의 변화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설교는 교회의 변화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방편은 꾸준한 강해설교임을 기억하라. 당신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교인들의 마음에 변화의 필요성을 심어주시도록 기도하라. 안타깝게도, 종종 목사들은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도 전에 해결하기를 원한다. 회중에게 설명을 시도할 때 변화를 강요하는 목사들이 많다. 그런 행위를 리더십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목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때릴 것이 아니라 먹여야 한다. 그들을 바른 방법으로 가르치라. 설령 당신이 제시하는 변화가 옳더라도, 시기가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옳다고 해서 곧바로 실행해야 하는 건 아니다. 변화를 지속하라 일터에서나 가정에서, 한 분야에만 헌신한다는 개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모델은 제한된 경로로만 올라가도록 이미 정해진 사다리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무한히 펼쳐진 월드 와이드 웹의 모자이크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기를 추구한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높이 평가해야 하며, 각각의 경험이 서로를 보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라고 교육 받는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이와는 다른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이 부부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교회이든, 이웃이든 간에 서로에게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올바른 우선순위를 찾도록 회중을 돕는 일은 장기적인 (즉 때로는 여러 달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인내의 견지에서만 가능하다. 목사로서 회중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강압적인 성격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친 신실하고 끈기 있는 가르침에서 나온다. 올해에 일어나지 않는 변화들이 내년이나 10년 후에는 가능할 수 있다.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전략을 지혜롭게 세우고, 어떤 변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지 주의 깊게 선택하라. 지금 가장 필요한 변화는 무엇인가? 또한 연기할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목사들은 성숙하면서도 장기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목사 임기를 고려한 사역에도 도움이 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2, 3년 안에 결과를 도출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목사 임기가 길수록 현실적 안목이 더 향상되며, 이는 목사 자신과 회중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변화를 위한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한 교회에 충분하게 오래 머물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이 오래 머물 계획이 아니라면, 변화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후임자가 그 일을 끝내야 한다는 조건을 신중히 고려하기를 바란다.젊은 신학생일 때 나는 세 분의 성공회 목사들을 모델로 삼았다. 세 분 다 여러 해에 걸쳐 핵심적인 위치에서 강해설교를 했다. 리처드 시베스는 캠브리지와 런던에서 30여 년 동안, 찰스 시므온은 캠브리지에서 50여 년 동안, 그리고 존 스토트는 런던에서 50여 년 동안 사역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들 모두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세울 수 있었고, 오랫동안의 신실함으로 후배 목사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변화를 사랑하라 올바른 변화를 꿈꾸고, 이를 위해 가르치며, 그 과정을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사랑해야 한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고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는 회중 위에 자신을 높이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마음을 낮추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라고 말했다. 회중을 거듭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끈질긴 보살핌은 오로지 사랑에서 나온다.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례도 있다. 회중이 그를 해임했기 때문에 그는 오랜 기간 목회할 수 없었다. 이처럼 어떤 이들은 짧지만 신실하게 목회직을 감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을 이 짧은 지면에서 논의할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면 가르치고, 지속하며, 사랑함으로써 회중을 성경적인 변화로 인도할 것인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다.출처: www.9marks.org원제: How to Change Your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교회사역
교회의변화
성경의가르침
지속하라
사랑하라
에드워즈
강해설교
장기적방식
실신함
헌신
나의 소그룹을 교회로 볼 수 있을까?
by Sam Allberry
2018-11-09
소그룹 사역을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통상 열 명 가량의) 소그룹은 성경 토론을 위해서, 또 서로에 대해 기도하며 섬기기 위해서 적합한 모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일 예배에서는 서로가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소그룹은 ‘서로’(one another)에 대해 행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활발하게 적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소그룹에서는 서로 간에 신뢰를 형성하고, 통찰을 공유하며, 삶의 여러 문제와 어려움을 논의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소그룹이 신앙생활의 구심점이 되기 쉽다. 더 나아가 간혹 소그룹 자체가 교회로 여겨지기도 한다.그런데 이런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만일 소그룹이 우리의 교회가 되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교인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는, 교회가 소그룹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작을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문제는 건강한 교회가 소그룹을 대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물론 대신할 수 있다). 반대로 소그룹이 교회를 대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물론 대신해서는 안 된다).왜 안 될까?첫째,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가족을 통해 당신을 누구와 화목케 하셨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그룹은 교회 전체 구성원의 다양한 연령층과 배경을 반영하지 않는다. 반면에 주일의 공예배는 그 요소들을 반영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둘째, 소그룹이 할 수 있는 사역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교회는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몸이며, 각 지체는 저마다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교회의 전체 가족 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은사와 사역이 소그룹에는 없다.셋째, 소그룹은 교회 리더십의 지도를 받지 못할 수가 있다. 따라서 어떤 교리나 행동의 문제가 발생할 때 소그룹 내에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소그룹에서는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성찬식을 거행하기도 힘들다.그러므로 소그룹은 교회의 공적 예배를 ‘보완’하는 방안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그룹을 지닌 교회이지 소그룹이 대신하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 생활의 중심은 소그룹이 아니라 전체의 모임이다.출처: www.9marks.org 원제: Can I View My Small Group as My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목회
모임
소그룹
구심점
제한적
보완
대체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by 안환균
2018-11-09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마땅히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진정한 믿음의 첫 번째 증거가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사람은 학교에 가고, 병을 치료받고자 하는 사람은 병원에 간다. 그렇게 해서 함께 어울려 공부하거나 좋은 의료 환경을 제공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거기에 있는 교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때 소정의 목적을 더 잘 이룰 수 있다. 이처럼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도 교회공동체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통로인 교회에 소속되는 것은 진실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한 요청에도 기꺼이 응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믿는데 교회는 나가기 싫다는 이들은 실제로는 그분을 온전히 믿기 싫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라는 사람의 믿음이 진짜라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교회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내 삶에서 더 중대한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이 그분을 만난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그런 만큼 그에게는 적어도 교회에 나가는 일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아야 상식적이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구도의 과정에서나 만난 이후의 신앙생활 여정에서 결정적인 축복의 통로이다.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출 수 있다면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너무 낮거나 좁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교하고도 복잡한 창조물들의 신비를 통해 지성적인 창조주의 존재를 의식하고도 그분의 간섭을 받기 싫어 별 생각 없이 그냥 무신론자로 남으려 한다. 신을 인정하게 되더라도 교회 참여만은 꺼리는 이유 역시 간섭받는 삶이 싫어서이다. 그러나 신을 이론적으로 인정하기만 하고 인격적으로 믿고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로 받아들이며 교제해나가지는 않겠다는 태도에는 진정한 구원이 없다. 일차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잃었던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를 회복한 개개인이 곧 교회이며, 동시에 그 개인들의 모임 또한 교회이다. 그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 받은 개인들이 서로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그 공동체의 관계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을 이뤄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나가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기독교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출발하지만 나와 이웃과의 관계로 완성된다. 하나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는 나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표현된다. 그래서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교회는 왜 나가냐?”라는 물음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잘 모르거나 오해한 탓으로 갖게 된 의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교회에서 이러한 건실한 공동체성을 올바로 경험할 때 사회의 각 영역에 나가서도 올바르고 건강한 공동체성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신자들을 지체로 삼은 한 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골 1:18).“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이러한 교회공동체에 한 지체로 참여하는 일은 각 신자가 경험한 구원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핵심 잣대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동일하게 그 사랑을 아는 다른 신자들과 사귀고 싶어진다. 공동체가 아쉽지 않다면 신앙의 진정성을 재점검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더구나 교회가 한 몸이라면 그 몸에서 떨어져나간 손은 손의 본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런 만큼 한 유기체의 한 지체인 신자가 생명력을 공급받으려면 그 본래의 몸체에 한데 붙어 있어야 한다. 여러 은사와 기질을 가진 다양한 지체들이 교회공동체로 함께 모여 서로 격려하고 용납하는 훈련을 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고 각자의 삶 속에서도 신앙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를 한 유기체로 고안하신 하나님의 배려는 사랑이지 짐이나 부담이 아니다.천국에 가기는 각 개인이 가지만 천국을 이루기는 혼자선 불가능하다. 천국에 갈 사람은 먼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의 방식을 훈련받아야 한다. 교회공동체를 무시하는 신앙생활은 목적지를 잃은 방랑생활과도 같다. 교회에 참여하기가 번거롭고 싫다고 해서 천국 훈련을 포기할 순 없다. 물론 무턱대고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자라는 건 아니다. 그 교회공동체를 통해 실제로 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영적 영양분을 흡수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키워가야 한다.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께 매일의 내 삶을 온전히 맡기는 데로까지 나아가야 성숙한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인격적인 관계는 상호간에 주고받는 영향력이 없이는 올바로 성립되지 않는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풍성하게 맛보게 해주는,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지체들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로 부여된 예배와 교제,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는 모두 공동체적인 활동을 전제로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4-25).한 공동체로 모이게 하는 교회라는 구심점이 각 지체들이 각자의 일상 가운데로 흩어져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삶을 지속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두세 사람은 증인의 최소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공동체를 염두에 두시고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증인공동체인 교회를 무시한 개인적인 신앙생활만으로는 세상에서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무력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개개인에게도 꼭 필요한 이유이다.더구나 교회공동체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로 다스림 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특권 또한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은 교회에 소속된 지체가 죄를 범하면 그를 판단할 최종권위를 교회가 갖는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려면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며 그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한 말씀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공동체는 늘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와 예배 공동체였다.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각자의 골방과 일상에서 드리는 개인 예배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데 모여 함께 드리는 공동체 예배는 더욱 귀하다. 무엇보다 혼자서도 신앙 생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사랑과 기쁨의 공동체성을 온전히 경험하기 어렵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과 같이 세상에 있는 신자들의 연합을 원하신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믿음 이후 공동체적인 신앙생활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게 올바로 강조되지 않으면 사람들마다 자기 취향을 따라 “교회가 뭐 그리 중요하냐?”며 뛰쳐나가도 말릴 도리가 없다.교회는 단순히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사원’ 같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관련하여 교회는 이스라엘과 연결되고, 이스라엘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했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와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나주신 에덴동산이 아브라함의 제단으로,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으로, 그리고 교회공동체로 발전했다. 이것이 장차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교회는 태생 자체가 종교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사의 시작과 맥을 같이한다. 그것은 당신이 모태에서, 아니 태초에 에덴동산의 흙으로 창조된 이야기와 연결되고, 현재 당신의 삶과 죽음에 속속들이 아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인 어떤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존재의 완성과도 깊이 관련된 존재의 정점이기도 하다.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전해져 온 각 나라와 민족마다 교회가 세워진 것 또한 예수님이 성경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라고 예언하신 그대로 이뤄진 선교의 역사이다. 교회를 통해 이 명백한 인류역사의 대로에서 이탈하지 않는 참된 믿음과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되길 바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하는 예수님의 몸 된 공동체, 즉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 하나를 얻기 위해 온 우주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주장해오셨음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가 그러하듯 인류 역사라는 대하드라마 역시 서로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의 혼인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이다.“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교회
교회생활
교회공동체
혼인잔치
천국복음
공예배
개신교인의 감소가 주는 역설적 희망
by Joe Carter
2018-11-01
상황최근 한 조사에 의하면, 지난 15년 동안 미국에서 각각의 종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특히,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밝히는 미국인의 수가 급격히 하락했다. 배경15년 전 미국인들의 절반은 개신교인이었다. 그러나 ABC뉴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실시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말하는 미국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 수준까지 하락했다. 그중에서 다시 절반이 약간 넘는 (약 56퍼센트의) 사람들은 자신을 ‘복음주의적인’ 또는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밝혔다. 2003년 이래로 이 '비율'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복음주의적인(evangelical) 혹은 비복음주의적인(non-evangelical) 크리스천이라고 밝힌 사람들의 '숫자'는 각각 7퍼센트와 6퍼센트 감소했다. ABC뉴스는 이 감소가 백인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현재 39퍼센트의 백인들이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2003년 이후 13퍼센트 떨어진 수치이다. 이는 히스패닉 개신교인이(22퍼센트에서 14퍼센트로) 8퍼센트, 흑인 개신교인은(64퍼센트에서 61퍼센트로) 겨우 3퍼센트만 떨어진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눈에 띄는 감소이다. 가톨릭이나 ‘다른 교파의 크리스천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신자들’은 그 숫자가 동일하거나 3퍼센트 이하의 수준으로 변동했다. 앞서 언급했던 개신교인 감소의 대부분은 더 이상 자신이 어떠한 종교와도 관계가 없다고 밝힌 기존 성도들에 의한 결과이다. 흔히 ‘무교인’(nones)으로 언급되는 이 사람들은 2003년에는 미국 전체 성인의 12퍼센트에 머물렀지만, 2017년에는 21퍼센트까지 급증했다. 이 무교인들에 대한 조사에서 16 퍼센트의 가장 큰 증가를 보인 연령대와 정치 계층은 각각 18에서 29세에 해당하는 청년층, 그리고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더 높은 연령대의 미국인, 공화당 및 보수정당의 지지자들, 그리고 흑인들은 4-5퍼센트에 머무는 작은 변화만 보였다. 이처럼 어떤 종교도 갖지 않는 현상은 유독 청년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18세에서 29세에 해당하는 이들 가운데 35퍼센트가 자신이 어떠한 종교와도 관계가 없다고 밝혔는데, 이는 50세 이상의 성인들 가운데 13퍼센트만이 무교라고 대답한 것과 크게 대조된다. 또한 남성이 여성보다(25퍼센트, 17퍼센트), 대학 졸업자가 비졸업자보다(25퍼센트, 20퍼센트), 그리고 백인 및 히스패닉이 흑인보다(22퍼센트, 20퍼센트, 15퍼센트) 높은 무교인의 비율을 나타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의 35퍼센트가 종교를 갖지 않았다고 밝혔는데, 이 비율은 중립파나 보수파가 각각 21퍼센트와 12퍼센트에 위치하는 것과 비교하여 높은 수치이다. 민주당원과 무소속 의원의 4분의 1도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이는 공화당원의 10퍼센트만이 무교라고 대답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분석1971년에는 단지 5퍼센트의 미국인들만이 무교라고 대답했다. 사실 1993년까지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8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종교를 버리는 일이 급격하게 증가하도록 영향을 주게 된 요인이 있었다. 공공종교연구소(PRRI)의 최고경영자이자 ‘백인 크리스천 미국의 종말’(The End of White Christian America)을 집필한 로버트 존스(Robert P. Jones)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백인 기독교인들의 두드러진 감소가 종교를 갖지 않는 미국인들의 계층을 증가시켰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들의 수는 이제 카톨릭 교인, 백인 주류의 개신교인, 복음주의적 개신교인보다 많다. 이들의 증가가 미국을 지난 10년 사이 백인 크리스천 중심의 국가에서 그 반대의 나라로 변화시켰다. 이제는 백인 크리스천들이 소수로 분류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기뻐해야 할 것이다. 2015년 에드 스테처(Ed Stetzer)가 한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이 큰 변화는 분명하게도 명목상의 교인들(the nominals)이 무교인들이 되고 있는 반면, 참된 신앙을 가진 교인들(the convictional)은 아직 헌신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달리 말하면, 그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던 미국인들이 그 이름을 던져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지지합니다. 물론 참된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들의 비율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이 이제는 신앙과의 관계를 끊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의 전체 비율도 하락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전반적인 하락이 앞선 조사가 보여 주는 결과이며 이 현상이 가속화되리라고 예상합니다.” 스테처가 옳았다. 지난 3년 동안 명목상 크리스천들의 숫자는 사실상 감소했다. 결국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미국 사회가 "기독교 이후"(post-Christian) 단계보다는, 러셀 무어(Russell Moore)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명목적인 기독교 이후”(post-pretend-Christian)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회 현상과 작금의 교회를 통찰력 있게 살펴본다면, 미국이 후기 기독교가 아닌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주 접하기는 하되 아직 복음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름뿐인 개신교인들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있다. 우리는 참 복음(the Good News)을 전하여 그들이 무엇을 버렸는지 알도록 돕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지금의 무종교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다시 희망(good news)이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the Decline of Protestantism May Be Good News for Christians 번역: 장성우
개신교
희망
복음주의
워싱턴포스트
근현대교회
역사
교회 개척과 기업가적 면모
by Matt McCullough
2018-11-01
“당신은 기업가적인 면모가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자 했을 때 자주 들었던 질문이다. 아마도 나의 배경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학위를 위해 장기간 공부한 것 외에는 교회 개척을 위한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거대한 학교 안 여러 학생 중 한 명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처럼, 나는 관심 분야의 범위 안에서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내가 만나는 인연들도 그 생활 안에서 한정되어 있었다. 교회 개척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든 간에 나는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했을 때, 우려 섞인 질문을 듣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타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교회 개척을 떠올렸을 때 목회적인 측면보다는 우선적으로 사업적인 측면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척을 위해서는 기업가 같은 면모가 있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가정이 과연 옳은 것일까? 기업가와 교회 개척자의 유사성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업가’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기업가를 "사업을 운영하는 자로서 이윤 추구를 위해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는 자"라고 정의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는 이를 "자원의 한계를 뛰어넘어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정의들은 비지니스 상황에서 유래했기에 지역 교회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왜 사람들이 교회 개척과 기업가적 면모를 연결지어 생각하는지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교회 개척자들은 기업가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이는 곳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교회를 개척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인적, 물적 자원의 부족분을 자신의 시간과 땀, 창의력과 유연성으로 채워가며 일해야 한다. 이처럼 만약 당신이 교회 개척자라면 필요한 모든 일을 기꺼이 해내야만 한다. 그저 잘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교회는 아직 안정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고 계획을 세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를 밟아야 한다. 이때 유의할 것은 교회 개척은 언제든지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 개척자는 이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매일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잔업무도 피할 수 없는 임무 중 하나이다. 교회 개척자가 기업가와 동일할 수 없는 이유 감사하게도, 나는 기업가적인 면모를 갖춘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개척 교회가 충분히 번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은 오로지 목회자 주위에 리더다운 리더들을 세우는 것이다. 교회에 장로들이 많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나의 경우 우리 교회 리더들이 내 부족한 경험과 성품을 많이 채워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경험이 핵심 비결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업가처럼 인적 자원을 풍부하게 연결하고 활용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가 정신은 성경이 말하는 개척의 자격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 개척을 위해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장점은 어디까지나 성경 기반의 필수요소가 아니다. 기업가적인 면모가 없더라도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 그러나 목자가 아니라면 교회 개척은 불가능하다. 먼저 교회 개척, 다른 말로 ‘교회를 키우다’라는 말은 부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이 표현은 교회의 근본적인 존속 원리보다는 인위적인 성장의 측면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재와 성장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므로 개척을 위한 기업가가 필요하지 않다. 강조하지만 교회 개척을 위해서는 반드시 목자가 필요하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성도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사역을 위해 준비되도록 돕기 위해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바울처럼 여러 장소를 이동하며 교회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하더라도 바울의 우선 순위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위해 목자를 확보하는 일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행 14:23; 딛 1:5). 교회를 위해 목자를 구하는 동안, 바울은 성도와 직접 대면하거나 편지를 통해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두 가지 질문 당신이 도전을 즐기는 기업가적 기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가적 기질 때문에 교회 개척에 마음이 끌린다면, 위험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다음은 교회 개척을 시작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확인해야 할 몇 가지 질문 사항이다. 1. 당신은 왜 개척하고 싶은가? 기업가들은 틈새 시장의 기회를 엿본다. 그들은 수요 대비 충족되지 않은 공급의 차이를 포착하고, 이를 이윤추구에 어떻게 활용할지 구상한다. 기업가에 따라서는 어떠한 종류의 틈새인지보다 그 틈새로 인한 사업적 기회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포브스닷컴>(Forbes.com)의 한 작가는 기업가란 "제품, 서비스, 산업 또는 시장의 상황과는 무관한 본능적인 충동"에 이끌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즉, 그들은 제품 자체보다 아직 아무도 정복하지 않은 새로운 시장에서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에 이끌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는 건강한 교회 개척에 합당하지 않다. 당신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한다면 지역 교회에 대한 사랑과 교회를 이끄는 구체적인 사역에 끌려야 한다. 만일 당신의 주된 동기가 새로운 모험이 주는 긴장감이라면 재고해 보길 바란다. 그 교회가 지속해야 할 목회 사역의 본질을 잃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즉, 모험이 주는 긴장감을 중요시하는 교회 개척자는 매일 반복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장기적인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또 당신은 사람들의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당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권면에 순종하지 않아 당신을 화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건강한 교회에서도 마주하게 되는 목회 사역의 현실이다. 사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변화를 위한 오랜 시간의 인내야말로 당신과 성도들의 삶에 큰 열매를 맺는 길이 된다. 더불어 이 과정을 통한 인내는 당신에게도 큰 기쁨을 줄 것이다. 2. 당신이 개척하고자 하는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앞서 나는 기업가들이 시장의 틈새를 기회로 만든다고 언급했다. 기업가들은 시장에 없는 상품을 개발하고 이를 공급한다. 이는 교회 개척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세우고자 하는 교회가 지역 사회에 필요한 건강한 교회의 특성에 잘 부합하는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어느 특정 지역에 건강한 교회가 더 많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개척을 위한 좋은 이유가 될 것이다. ‘건강한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그 교회는 함께할 때 나타나는 삶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또한 서로의 신앙 성장을 위해 각자의 책임을 다한다. 더불어 공동체에 주신 비전을 공유하고 함께 이루기 위해 서로를 준비시키는 훈련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시, 공간을 뛰어넘어 건강한 교회들이 갖는 이와 같은 공통적인 특징들은 교회가 추구해야 할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들이다. 당신이 개척하고자 하는 교회의 방향이 이러한 ‘건강한 지역 교회’의 공통적인 특성과 다르지 않은가? 혹시 기업가처럼 혁신에 대한 갈망으로 교회 개척에 접근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 추구하는 방향은 성경이 규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하나님이 복 주시기로 약속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목표가 지역 교회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면, 이는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다. 당신 스스로를 상품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교회 개척을 하다 보면 또 다른 유혹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스스로를 교회 개척 시장이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독특한 상품, 수요를 일으킬 새로운 대상으로 보고자 하는 욕망이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 온라인 버전은 기업가의 정의에 대해 ‘상품기획자’(a promoter in the entertainment industry)라고 안내한다. 혹시 교회 개척자는 반드시 기업가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상품화하고 있는가? 개척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교회의 얼굴이자 상품이 되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교회 개척의 성공을 위해 선택한 상품이 목회자 자신이라면, 어느 쪽으로 보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뿌리내리지 못했을 경우, 당신은 매력 없는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신으로 인해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도 교회 공동체의 중심을 성경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실패한 목회이다. 이는 영광을 받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본인이 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교회 개척의 성공은 제로섬게임(zero-sum game)과도 같다. 충실한 교회 개척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말에 동의해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Church Plants Need Shepherds, Not Entrepreneurs 번역: 고갑균
교회개척
기업가
교회를키우다
목자
하나님의소명
사역의본질
긴장감
사랑과관심
건강한교회
상품화
처음
이전
31
페이지
32
페이지
열린
3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