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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올인”하는 다섯 가지 이유
by Thom S. Rainer
2022-08-28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데이터가 많다. 출석률이 떨어지고 있다. 새 신자가 줄어들고 있다. 문을 닫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고, 많은 교회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Church Answers에서는 지난 2006년부터 Know Your Church라는 설문 조사 도구로 여러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우리는 수백만 건의 데이터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많은 것이 정말이지 우리를 실망에 빠트리기도 한다.그러나 교회의 미래가 어둡고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핵심 교인들 사이에서는 더 높은 헌신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높은 헌신 수준이 궁극적으로는 핵심 교인을 넘어 모든 교인으로 확장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헌신적인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낙관한다.그래서 우리 연구의 일부 역량을 이러한 핵심 교인에게 쏟아 보았다. 왜 그들은 꾸준히 헌신할까? 왜 그들은 더욱더 헌신하고 싶어 할까? 그들의 응답이 우리 모두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인터뷰에서 그들은 교회에 “올인”하는 다섯 가지 주요 이유를 말했다.1. 교회에 대한 헌신은 철저히 성경적이다.우리가 인터뷰한 핵심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리스도에게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에서 나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직관적으로 그들은 사도행전 2장부터 요한계시록 3장까지의 신약 성경이 지역 교회에 관한 기록이거나 적어도 지역 교회의 맥락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명목상 교인, 곧 헌신 없는 교인으로서는 그리스도께 기쁘게 순종할 수 없다.2. 교회에 대한 헌신은 책임을 낳는다.예루살렘에서 첫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누가는 그들의 첫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행 2:42). 초기 교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 홀로 행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교제”에 힘썼다. 이 교제는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서 함께 나누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이 교제는 서로를 돌보고 서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적대적인 문화 속에서 살았으며, 그래서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살았다(엡 6:10-17). 그들은 서로가 필요했다.헌신적인 핵심 교인들과 인터뷰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똑같은 생각을 그들에게서 들었습니다. 헌신은 일관된 책임감에서 나오면, 그러한 책임감은 꾸준한 교제에서 나온다. 3. 교회에 대한 헌신은 충실하고 깊은 성경 공부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인터뷰한 헌신적인 핵심 교인들은 성경 공부에 대한 헌신을 통해 헌신된 교인으로 성장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세 가지 공통된 성경 공부 방법을 들었다. 첫째, 그들은 개인 연구와 경건의 시간을 가진다. 1년 안에 성경을 통독한다는 계획이 가지고 있다. 둘째, 교회 안의 성경 공부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셋째, 매주 설교에서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우리는 이 핵심 교인 중 다수에게서 팬데믹 기간의 디지털 교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을 이구동성으로 성경 공부는 대면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4. 교회에 대한 헌신은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전도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교회가 쇠퇴의 길에 들어서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헌신된 교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일관된 열정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순종은 혼자서 하면 산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온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기로 약속할 때 힘 있는 전도가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계획과 책임이 체계를 갖추게 된다. 우리의 연구는 교회에서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성장하고 있는 전도 운동을 확인했는데, 하나님은 헌신된 교인들을 그 운동에서 촉매로 활용하고 계신다.5. 교회에 대한 헌신은 가족들에게도 유익하다.우리는 핵심 교인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가족에 대한 얘기를 꺼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들은 건강한 교회는 결혼생활과 자녀에게 유익하다고 말했다. 일부는 헌신적인 교인일수록 건강한 가정생활을 한다는 기사를 언급하기도 했다.우리는 교회에 대한 헌신과 가정생활 사이의 상호 이로운 상관관계를 계속 연구하면 더욱 희망적인 데이터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연구의 방향을 잡았다.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우리가 아는 가장 기쁨이 넘치고 사심 없는 사람들은 지역 교회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이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퍼트릴 것이라 우리는 확신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원제: 5 Reasons to Be ‘All In’ at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헌신
교회생활
가정생활
성경공부
책임
지상명령
전도
가난의 문제다
by 고상섭
2022-08-19
영화 ‘기생충’은 경제적 양극화를 다룬다. 같은 비라도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된다. 영화는 단순히 영화로 끝나지 않고 2022년 오늘의 이야기로 다시 등장한다. 수도권에 100년 만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빌라에 거주하던 발달장애인과 십대 여학생 등 일가족 3명이 빗물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시에서도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고, 교회와 여러 단체가 수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는 손길을 펼치고 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면 폭우의 문제와 안전의 문제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가난의 문제가 그 뿌리에 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가 신림동 반지하까지 사람들을 몰아갔기 때문이다. 교회는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역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사역 중에서 이웃에게 경제적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정의 사역’이라 명명하며 강조한다. 왜 정의 사역인가? 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선은 경제적, 물리적 필요를 채워주는 실제 원조이어야 하고, 이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라 말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단지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오늘을 사는 잠언, 43).왜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이 불의한 일이 되는가? 구약성경에서 ‘정의’ ‘공의’라는 단어는 ‘미쉬파트’이다. 미쉬파트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2백 번 이상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이다.“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4:22에 나오는 ‘법’이라는 말이 바로 ‘미쉬파트’이다. 이 단어는 ‘동일하게’ 법을 집행하라는 의미이다. 즉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그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이다. 특히 4대 취약 계층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의미로 ‘미쉬파트’가 사용되었다. 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런 집단을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한 사회의 미쉬파트(정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어떤 식으로든 취약 계층에 속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처사는 자비와 자선의 부족이라는 차원을 넘어 정의, 곧 미쉬파트를 짓밟는 행위로 규정해야 마땅하다”(정의란 무엇인가, 36).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교회가 베풀어야 할 자선이 아니라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정의 사역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은혜이며, 우리는 세상의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교회의 정의 사역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 사역의 동기 정의 사역의 동기는 가난한 사람을 향한 긍휼이 아니라 은혜이어야 한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요구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를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이 흘러나와야 한다”(여리고 가는 길, 82).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순종하느냐 아니면 순종을 통해 원하는 복을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어떤 보상이나 공로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일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인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을 때 분노하며 들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버지의 명을 다 지켰는데 보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을까? 바로 자신에게 있을 유익과 복 때문이었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첫째 아들이 품은 마음의 동기를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아들은 그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선함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다. 첫째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벽을 만드는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도덕적 삶이었다. 그의 악행이 아니라 의로움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다”(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45).교회의 정의 사역은 교회가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돕는 자선의 의미가 아니라 마땅히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의미이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이며 그것을 나눠주어야 할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은혜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공로로 사람을 돕게 되면 정의 사역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가난하기는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집에 가보면 다 살만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태도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문제라면 벼랑 끝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든 손을 쓰려고 하면서, 왜 이웃에게는 굶어 죽을 지경이 돼야 도움을 주려고 하느냐”(정의란 무엇인가, 116).또 “나누고 자시고 할 여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네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굴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누군가를 도와줄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상대방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하신 것처럼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그 이웃의 몫을 나누는 것이다. 정의 사역의 실천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지역 공동체로 관심의 원을 넓혀가야 한다. 직계 가족을 포함한 근친 중에서 장애인, 노인, 만성질환 환자가 있다면 그들을 돌보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역사회를 섬기면서도 혈연에게조차 자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다음은 교회이다. 먼저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조사해서 다각도로 섬겨야 한다. 때로 교회에서 기금을 조성해서 전달하거나 비공식적인 통로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웃이나 지역 공동체이다. 슬픔, 상실, 이혼, 질병, 장애, 개인 문제 등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은 없는가? 이주민 가정이 눈에 보이거나,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섬길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노력하면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원을 확대하라(여리고 가는 길, 170).또한 정의 사역은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 장기적인 사역의 계획이 필요하다. 한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단순 후원금 이상이 필요하다. 자립할 수 있게 도와야 하고, 위협적인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약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를 소개한다. 첫째. 구제의 단계이다. 구제란 말 그대로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으로 시급한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을 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해 주고 회복 기간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구제 활동을 펼쳤다. 수해를 만난 사람들에게 물품을 기부하거나,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눠주거나, 최소 비용이나 무료로 병을 고쳐주거나 상담을 해주는 식의 섬김은 흔히 할 수 있는 구제 사역이다. 둘째, 개발의 단계이다. 개발은 개인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여 구제 단계의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을 보면 종의 부채를 면제하고 해방해 줄 때는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넉넉히 제공하라고 주인들에게 명령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종의 해방, 이삭줍기, 희년에 관한 갖가지 율법 규정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집 마련을 돕는 작업뿐만 아니라 교육, 일자리 창출과 직업훈련, 취업 정보, 재정 자문과 같은 항목들이 들어 있다. 물론, 개발은 구제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며 복잡하고 비용부담도 큰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구제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개발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은 단순히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회복이었다. 셋째, 개혁의 단계가 있다. 개혁은 즉각적인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의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하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던 사마리아인이 여리고를 갈 때마다 강도 난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범을 강화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구조적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사회 개혁의 문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회 시스템과 직접 맞닥뜨린다는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이 변하다 보면 언젠가 사회 전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죄를 외면한 채 개인적으로 구제 활동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구제의 일이다. 또 개발의 단계에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헌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교회가 맡아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기에 개발의 단계에서는 지역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 한 교회가 세 가지 단계를 모두 하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발과 개혁의 단계는 교회뿐 아니라 지역사회 단체들과 연관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좋고, 교인들에게도 비영리 조직과 연합해서 개발과 개혁에 동참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쉽게 말해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교인들을 훈련하여 복음의 영향력이 담긴 작품을 만들게 할 수는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영화를 찍는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구체적인 적용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 주권이란 개념을 이야기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이 있다. 그럴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방식으로 예술, 과학, 교육, 언론, 영화,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인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인을 길러내지만, 지역교회가 자체적으로 특정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는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했다. 제도적 교회는 교회의 기관으로 공동체 안팎의 식구들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복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도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감당한다면, 유기적 교회로서 교회는 개발과 사회개혁 활동을 위해 다양한 기관, 단체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정의 사역은 극도의 정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지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꾼들을 통해 말씀과 행동, 양면에 걸쳐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구제와 개발, 사회 개혁에 뛰어들어야 한다. 빈곤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단순히 총과 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그 종류가 다르다.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가 함께 교회와 지역사회를 도와야 하지만, 또한 개혁의 차원에 눈을 뜨고 동참하며 활동해야 한다. 단지 구제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또 복음을 제쳐 두고 사회 개혁만을 부르짖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개인과 사회구조 모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 개발과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여길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가난한 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는 일이기에 기꺼이 나설 뿐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흡족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정의란 무엇인가, 170-200).이러한 자세는 구제를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좌절하지 않게 우리를 도와준다. 결국 교회가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고 정의로워지라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에 먼저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이라는 이 땅의 번영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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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t Smethurst · Rebecca McLaughlin
2022-08-07
아래 인용한 글들은 레베카 맥클러플린의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Confronting Christianity: 12 Hard Questions for the World’s Largest Religion)에서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은 것들이다_맷 스미서스트.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비종교인으로 자란 미국인 중 40퍼센트가 성인이 되어서 종교인(보통은 기독교인)이 되지만, 개신교 교인으로 자란 사람 중에서는 20퍼센트만 비종교인이 된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내가 나중에 비종교인이 될 아이 한 명을 기르는 동안, 내 친구 중에 종교가 없는 친구들은 나중에 기독교인이 될 아이를 두 명 기를 듯하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지닌 종교적 신념은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서 자주 보는 ‘공존’이라는 개념에 수월하게 들어맞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북미에서 순수한 기독교가 신학적 자유주의 신앙보다 번성하는 것은 일정 부분 이민자 신자들 덕분이다. … 다음 세대에 물어야 할 질문은 “종교가 얼마나 빨리 소멸할 것이냐”가 아니라 “기독교냐, 이슬람이냐?”이다. (13, 15)물론 우리는 신문을 펼쳐 보기만 해도 종교 신앙이 해를 끼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당신에게 해롭다고 말하는 것은, 코카인을 생명을 구하는 약과 구별하지 않고서 “약은 당신에게 해롭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통은 종교 활동이 건강과 행복에 유익해 보인다. 이 자료를 뒤집어 보면, 미국의 세속화 경향은 곧 보건의 위기다. (24)기독교가 서양 문명을 독차지한 반면에, 서양 문명은 한 번도 기독교를 독차지한 적이 없다. 사실상 기독교를 ‘서양적’이라고 일컫는다면, 문자 해득(literacy)을 ‘서양적’이라고 일컫는 것과 마찬가지다. … 기독교가 다양성을 반대하는, 서구 백인의 특권 종교라는 생각은 신약 성경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다. (43, 45)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성경적 기독교를 백인 중심적 국가주의와 결합시키려는 것은 고양이를 쥐와 결혼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하나가 상대를 사냥하게 되어 있지, 짝이 되지는 않는다. (58)다양성에 신경을 쓴다면 기독교를 외면하지 말라.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다민족적이며 다문화적 운동이다. (60)의견 차이는 존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다. 사실 내가 무척이나 존중하는 사람들과 아주 열띠게 토론하는 까닭은, 그러한 이들의 생각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는 친구 간 토론의 기술이 사라지고 있는 듯하며, 대신에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있다. … 우리가 다양성에 대해 피상적인 다짐 이상을 하려면, 우리와 완전히 의견이 다르지만 현명한 사람들과 깊이 사귀어야 한다. (65, 66)일부 종교는 서로 일치시키기가 가능할지 몰라도, 기독교는 엉뚱한 세트에서 나온 퍼즐 조각 같아서, 가장자리를 아무리 구부려도 맞지 않는다. (76)십자가에서, 이제껏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을, 힘없는 자들을 위해 달게 받으셨다. 기독교는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폭력을 수치스럽게 한다. (131)종교가 폭력의 원인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이 신앙에 이끌려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섬긴다. 그리고 특히 기독교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거름 역할을, 정의를 위해서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치유를 위해서 권한을 위임받는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가 없다면 세상에 폭력이 더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면,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32)합리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과학적 진취성의 최초이자 최고인 토대가 나온다. … 무신론은 윤리적 신념의 기반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정당성도 입증하지 못한다. (157, 159)에베소서 5장은 결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의 근거를 성별 심리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에 둔다. … 결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여성에 대한 남성 우월주의나 학대나 폄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206, 209)처음 기독교인들은 [그 당시 나는 사도행전을 읽고 있었다] 온갖 고난에 처하고 돌에 맞아 죽기도 했지만, 그들이 맞닥뜨리지 않은 싸움이 하나 있었다. 바로 고독이었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를 성적 관계나 핵가족으로 축소해 버린다면, 성경의 윤리를 전혀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234)우리가 깨어진 죄인으로 오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을 수 없고,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심지어 정죄받기까지 한다. 깨어진 죄인으로 온다면, 다정한 포옹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적인 죄를 무섭게 정죄하시는 반면, 성적인 죄를 짓고서 회개한 죄인들은 마찬가지로 놀랍게 시종일관 환대하신다. (243)현대 서구 사회는 내게 가르치기를, 진짜 자아를 찾는 일을 가장 우선시하라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양파껍질 같은 내 정체성을 벗겨 내고 거기에서 발견한 것에서 떠나 살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누구인지가 내 진짜 자아이다. 나는 내 심리 깊숙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자아를 발견한다. 그분이 우리를 ‘자녀’, ‘사랑하는 자’, ‘친구’라고 부르실 때,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며,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와 친구와 같은) 다른 모든 정체성은 거기에서 흘러나온다. (254)부활할 때, 성적 만족감보다 예수를 선택한 이들 중에 아무도 누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 관계에 비하면 인간의 결혼은 테슬라 옆에 있는 장난감 자동차처럼, 또는 연인의 포옹이 아닌 편지 봉투에 하는 키스처럼 보일 것이다. (256)신약은 포셔가 안토니오의 죽음을 반대하던 방식으로, 즉 노예제도를 완전히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노예제를 반대한다. 예수께서는 노예의 역할 안에 거하셨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일컫고, 도망 노예를 자기 심장처럼 사랑하며, 노예와 자유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신약은 우월성이나 착취나 강제의 여지 없이 그저 형제애와 공통 정체성만으로 구조적인 긴장을 만들어 냈으며, 그 긴장이 마침내 노예제 폐지에서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270-271)우리가 기독교를 백인 노예 소유자와 관련짓기를 그만두고 수세기 내내 울려 퍼진 흑인 신자들의 피 묻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세대의 신실한 흑인 신자들이 미국에 있어야 하는가? (285)우리고 고통에 대해 늘 던져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이 고통이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을까? 당혹스럽게도 예수께서 주장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분이 그 가치다. (298)고통은 기독교 신앙에 골칫거리가 아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 삶에 꿰매 넣는 실이다. (306)예수가 생명의 떡이며, 예수를 잃으면 굶어 죽는다는 뜻이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면, 예수를 잃으면 어둠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선한 목자라면, 예수를 잃으면 홀로 헤매다가 실종된다는 뜻이다.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면, 예수를 잃으면 영원한 죽음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당하셨다면, 예수를 잃으면 그 대가를 우리가 치른다는 뜻이다. (325-326)예수의 세계에는 과학 진리와 도덕 간 결합 조직이 있다. 인간은 모두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말할 근거와, 다양성을 넘어 사랑하라는 나직한 부르심이 있다. 악을 일컫는 이름이 있고, 용서의 방법이 있다. 현재 우리 마음이 품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사랑의 모습이 있고, 우리의 연약한 몸이 지금껏 경험할 수 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진정한 친밀이 있다. 죄로 가득 차 있지만 은혜로 속량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단이 있다. 가난하고 압제당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라는 명령이 있는데, 그 명령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생겨났으며 그 바탕에는 언젠가 모든 눈물이 닦이고, 모든 배가 채워지며, 모든 버림받은 사람이 받아들여지리라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번지르르한 대답이나 쉬운 길은 없다. 그 대신 와서 죽으라는 명령이 있다. (331)원제: 20 Quotes on the Hardest Questions Christians Fa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
세속화
비종교화
무신론
다양성
종교다원주의
폭력
결혼
개인주의
공동체
인종차별
가을에 들어선 교회는 어떻게 문화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
by Michael Keller
2022-08-05
오늘날 세속 문화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과 겸손과 사려 깊은 태도로 사회 문제를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약 중독이 죄라는 것을 믿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마약 중독자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매춘이 부도덕하다고 믿는 데에서야 다 동의하겠지만, 동시에 성매매에 휘말린 남성과 여성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못하도록 아예 가두는 게 중독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아니면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을까?진실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 다 세상의 어떤 문제에 관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기에 그의 특정한 도덕적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도 동의하라고 요구한다. 당신이 어떤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대신에 “누구라도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특정 도덕,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도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견해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떤 특정한 도덕에 관해서 의견을 표출하는 순간에 그 자체로 바로 강요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도덕적 비전을 성경에 기초하지만, 이러한 성경적 도덕을 입법화한다고 할 때, 어떤 것을 추구하고 비준해야 할까? 또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 십계명이 분명히 금지하는 도둑질을 막기 위한 도덕적 의무를 입법화하는 데에는 누구나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어떤가? 성경은 우상숭배를 죄라고 명시하지만,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그중 대부분은 우상숭배를 불법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왜 어떤 성경 원칙은 입법화하길 원하지만, 동시에 또 어떤 원칙에 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이 가진 복잡성이야말로 해답을 찾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겸손한 자세를 갖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정치 소셜 미디어에서 만나는 적지 않은 비판이 왜 일어나는지까지도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회 문제를 감당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복음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복음의 가치를 알고, 또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로 그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도 우리의 태도는 따뜻한 겸손과 소망이 될 것이고, 나아가서 성숙한 시민다운 상호작용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복음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심각한 죄인이며, 그럼에도 무한히 사랑받고 있다고 가르친다. 복음이 알려주는 이런 사실만으로도 교만과 자기혐오를 없앨 수 있다. 복음은 또한 성경을 세상에 적용하는 방법에 있어서까지 우리를 주의 깊고 겸손하며 사려 깊게 만든다. 글로벌 관점편견과 문화적 맹목, 잘못된 직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외 없이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별생각 없이 피상적으로 성경을 읽게 될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신에게만 지극히 상식적인 적용에 빠지기 쉽다. 그런 식의 적용이 단지 자신에게만 말이 되는 이유는 누구나 자신이 사는 사회가 만들어낸 특정한 문화의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의 하나는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한 바울을 곡해한 것이다. 그 말씀을 읽은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제도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이런 과거의 실수를 통해서 행여 미래의 그리스도인이 현재 우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또 다른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나 않을지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앞에 놓인 복잡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많은 국가의 정치 상황을 생각해 보라. 독일의 경우 다양한 정치 기반을 가진 여러 정당이 있다. 그러나 그중 어떤 정당도 모든 기독교 가치를 완전히 하나로 통합하지 않는다고 할 때, 독일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할까? 중국에는 아예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대표하는 정당이나 민주주의 제도가 없다. 그럼 중국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도덕적 비전을 문화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그들에게는 명확한 답이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다른 수많은 나라의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도덕 가치를 얼마든지 정치에 적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정치 지형에 접근하는 미국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다.몇 년 전 영국에서 일할 때, 한 젊은 여성이 내게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므로,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기꺼이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이다. 또한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과 관련해서 가장 정통적인 이해를 고수하는 스코틀랜드의 많은 장로교인을 만났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에 아예 텔레비전도 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 해석에 근거해서, 문화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가장 좋은 길이 최소한 국가의 책임에 관련해서만은 나라가 보다 더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많은 영국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미국인처럼 더러운 단어로 생각하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나 공산주의와 동일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내가 그들에게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진정한 신자들이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광범위한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이렇게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1. 정치적 접근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첫째, 모든 문화는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어느 것도 기독교 가치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즉, 믿음을 적용하는 방법에 관해서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건전한 판단과 성경적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와 매우 다르게 사물을 보는 그리스도인이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그들이 가진 다른 견해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들을 기꺼이 잘라내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겸손을 보여야 한다. 명확히 말하자면, 모든 정치 시스템이 다 똑같이 좋다거나 또는 외국의 다른 정치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서 지금처럼 잘 작동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똑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녀 삼으신 그들을 우리가 하나님의 집 밖에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신학적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얼마든지 동의하지만, 정치적으로 또는 실천하는 방식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의 도덕 규범에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지만, 그 도덕이 세속 문화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방법론에 있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미국 정당은 일반적으로 성적 자유가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영향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이 다르다. 세속 문화에서 금욕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게 더 나을까, 아니면 피임 방법을 제공하는 게 나을까? 일부 그리스도인은 모든 형태의 산아 제한 또는 피임 홍보를 반대한다. 그게 결국은 혼외 성관계로 악용되어 소비주의적인 성행위와 문화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더 잘 반영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한편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피임 도구를 쉽게 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성적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방지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차라리 피임 도구를 적극적으로 써서 성병과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정당에 투표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혼외 성관계가 제7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데에는 도덕적 합의가 있지만,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문화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하는 최선의 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동의하는 도덕적 영역이 있지만, 동시에 정치 정책의 적용에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는 영역이 많다. 따라서 미국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투표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한다. 가난한 사람과 이민자를 사랑해야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성경이 가르치는 도덕을 모두 지지하는 정당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특정 정당과 자신의 가치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절대적 도덕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하지만, 또한 동시에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문화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도덕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도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런 식의 구분은 그 어떤 문화에서도 신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사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주의 깊게 적용하기 위해서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 각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모두가 성경적 영감에 근거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 주장만이 성경의 절대적인 보증을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도덕적 명령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그 도덕을 문화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관해서 건전한 (심지어 열렬한!) 토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교회에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가? 서로를 향해 배려와 겸손, 호기심으로 충만할 때, 토론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다. 2. 정치적 참여가 우리의 복음전도의 사명을 전복시킬 수는 없다.둘째, 정치적 참여가 전도의 문을 막지 않도록, 우리에게는 복음이 주는 겸손이 필요하다. 복음은 특정한 정치적 의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복음이 하나의 불가피한 정치적 의제를 포함한다고 설교한다면, 교회는 결국 교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 된다.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이 특정 정당에 유권자 등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에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더한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특정 정당의 비전을 통해서 세상의 문제로부터 “구원” 받는 것 이상을 포함하는 전인적 사명(holistic enterprise)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 모든 잘못을 바로잡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죄와 사망, 그리고 심판의 권세를 내리시는 예수님과 동역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류를 대표해서 거룩한 위임을 받은 존재이다. 창세기 3장 속 아담과 하와의 소외로 시작하여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저지르는 아벨 살인, 그리고 결국 창세기 11장 속 모든 민족의 분열로 이어지는 분열의 죄를 일부 해소하는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사 66:18). 마태가 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마 25:32)라는 말을 들어보라. 이건 사실상 요한계시록 7:9과 같은 의미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하나님 나라가 만물을 회복하는 일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우리가 ‘만국’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의 일부를 감당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다른 ‘모든 민족’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현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했던 설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르스 언덕에서 그리스인에게 설교한 이유이다. 그는 언제나 설교를 듣는 청중이 처한 특별한 상황을 고려했다. 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사계절”을 활용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 봄-교회는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박해와 희생적 제자도의 결과로 성장하고 있으며(중국이 여기에 해당) 활력의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 여름-교회는 본질적으로 문화 그 자체이며 나라는 이제 기독교로 인해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대부분의 서구 문명과 현재의 남아메리카).• 가을-교회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교회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커진다. 기독교 가치와 정반대로 선한 삶을 사는 새로운 방법이 제시된다. 기독교 국가라는 맥락에서 손쉽게 전도하던 교회가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한다. • 겨울-교회는 공개적인 반대에 직면한다. 교회는 이제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인식되고, 여러 면에서 지하로 후퇴해야만 한다(이란, 이라크, 또는 아프리카의 많은 무슬림 통제 국가).교회에 관한 이 계절 비유는 도덕적 비전을 문화에 올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계절, 역사적 순간, 그리고 사회적 맥락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방식에 민감해야 한다. 최근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자세에 대해 그리스도인 사이에 흥미로운 내부 논쟁이 있었다. 마이클 그레이엄(Michael Graham)은 동일한 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복음주의자가 문화적 입장에 따라 어떻게 분열하고 있는지에 대한 글을 썼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지 굳건한 신학적 확신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문화에서 그 확신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관한 명확한 틀이라는 사실을 그의 글은 잘 보여준다. 뉴욕에 사는 우리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 미국 교회에게 계절은 더이상 여름이 아니다. 이미 한참 전에 가을에 들어섰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뉴욕에서 사용한 모델이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미국 나머지 지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적 자세 어떻게 해야 할까? 겸손하고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의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명확하지 않으면 서로 오해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항상 도덕적 신념을 지키도록 부름받았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덕적 신념을 실천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핵가족과 건전한 성을 지지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관여해야 하지만, 구원받으려면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반드시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결코 정치가 교회를 정의하는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떠야 한다. 신앙이 정치적 성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전도의 힘을 잃을 뿐 아니라, 교회를 책임질 다음 세대까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비극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도 원수를 구원하려고 발버둥 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방식을 우리 삶 속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이해는커녕 심지어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까지도 반문화적인 태도로 희생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설혹 거부당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며(마 5:10-11),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벧전 2:11-12) 것이다. 현실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바른 기독교적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나를 거부하는 사람조차 내가 거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온유하다고 하셨고(마 11:29),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온유와 두려움”(벧전 3:15)으로 살아야 할지를 상기시킨다. 단지 문화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또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친절하고 온유하며 또 오래 참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그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반영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빛이 절실히 필요한 문화에 복음의 빛을 가져오기 위해 함께 사역하자. 사려 깊고 은혜롭게 그리고 지혜를 가지고 단합하여 이 사회를 함께 변화시키자. 원제: The Autumn of the Church’s Influence on Culture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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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을 위한 전략(4-3)
by Tim Keller
2022-08-02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의 마지막 글입니다. 1부 주류 교회의 쇠퇴2부 복음주의의 쇠퇴3부 갱신의 길4부 갱신을 위한 전략[4-1] 갱신이 필요한 이유갱신을 위한 비전 [4-2]갱신 앞에 놓인 함정갱신을 위한 리더십[4-3]갱신 프로젝트부록: 클래펌 그룹갱신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 목록은 완성된 게 아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당신의 뜻에 맞게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제시하는 이 목록은 세 번째 기사에 이미 나와 있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1. 교회 개척과 갱신. 우리는 미국에서 새로운 교회 개척의 수를 현재 매년 3-4천 개에서 6-8천 개로, 그러니까 두 배로 늘려야 한다. 현재의 교회 개척 모델이 바뀌어야 한다. 첫째, 빈곤층과 노동계급 인구 사이에서 개척 자원이 너무 부족하지만, 조건이 좋은 지역에서는 개척 비용이 너무 비싸다. 전반적으로 교회 개척자에게는 (a) 훨씬 더 많은 코칭과 지원, (b) 사역에 필요한 보다 다양한 훈련과 교육, (c) 마케팅과 교회 이전을 통한 성장 모델이 아니라, 초신자 개종을 통해 성장하는 복음주의 모델에 대한 더 많은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2. ‘교리로 반격하는’ 제자도. 일반적으로 기독교 교육은 대대적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성인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 교리를 사용하여 교인들의 삶에 깊이 파고드는 기본 문화 내러티브를 전복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 자료를 모든 사람에게 널리 배포할 뿐 아니라, 지역 교회와 협력함으로 사회에 범람하는 기존 문화의 채널을 방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3. 탈 기독교 시대의 전도. 서구의 기독교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탈 기독교 시대가 주는 깊은 세속 문화에 직면해 있다. 교회는 아직까지 세속적인 사람과 “종교 없음”(none)을 천명하는 사람들을 전도할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그들을 전도하기 위한 내용과 수단을 모두 개발하는 것이다. 전도 수단은 초대 교회에서와 같이 전도에 평신도를 동원하는 것을 포함한다. 전도 내용은 기독교가 존경받을 만하고 바람직하며 믿을 만하다는 것을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담을 것이다(파스칼의 팡세, 187 참조).4. 사회 정의를 위한 네트워크. 우리는 네트워크(최소한 하나의 초교파 사역 또는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지역사회에서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조직하여 다양한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또한 지역 사회 수준에서 보다 더 공정한 사회 질서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규모가 있는 교회만이 사회 문제를 다루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해당 지역사회에서 가장 심각하고 만성적인 불의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에 제공할 것이다.5. 믿음의 사역 네트워크.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직업에 신앙을 통합함으로써 공동선에 봉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들의 직장에서 ‘빛과 소금’(faithful presence)[19]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조직하고 준비시키는 네트워크(기존 또는 새로운 사역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교회로 하여금 제자훈련 사역을 실행함으로 교인들이 교회 따로 직장 따로의 생활을 하지 않도록, 또한 직장에서 직업을 타인을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하지 않도록 훈련시킬 것이다. 6. “기독교 지성” 프로젝트.[20] 복음주의는 대다수의 인구에 대한 호소력을 잃지 않으면서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강력한 반지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한 목표에는 정통 개신교를 위한 강력한 지적 문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대학 교수진과 기독교 공공 지식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 포함된다. 이런 목표가 단지 기본적으로 (a) 대체로 진보적인 대학과 (b) 대체로 보수적인 싱크 탱크의 기존 지적 및 문화 경제 속에 더 많은 그리스도인을 키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거기에 더해서 학문과 지적 작업을 위한 일종의 대체 문화 경제를 만드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7. 새로운 리더십 파이프라인. 우리는 전국의 청소년 사역과 캠퍼스 사역을 갱신, 재창조, 확장, 그리고 크게 강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지역 교회 및 교단, 사역/신학 훈련 센터, 그리고 대학과 (과거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리더십 개발을 위한 일관되지만 매우 다양하고 유연한 경로를 형성할 수 있다(예: 개종, 학생 리더십, 인턴십, 직원 및 기타 리더십 직위). 이 모든 사역의 목적은 잘 갖추어진 기독교 지도자를 보다 더 많이 배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일곱 개의 프로젝트 뒤에는, 기독교 자선 사업이라고 부르는 여덟 번째 ‘메타’ 프로젝트가 있다. 강력한 재정 지원 없이는 교회를 새롭게 할 수도 없을뿐더러, 교회가 사회에 도움이 될 수도 없다. 이 자선 프로젝트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기부하고 부를 관리하는 방식에 변화를 요구한다. 그 결과 그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재정을 사역을 위해 헌신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결론: 예수님은 그 어떤 종잣돈도 없이, 그 어떤 조직이나 기관도 없이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을 시작하셨다. 그는 심지어 책이나 비전, 사명 또는 가치 선언문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가 남긴 것은 고작해야 몇 명의 사람이 다였다. 그들을 통해 동일한 가치와 경험을 공유한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우리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 우리의 눈을 열어 동일한 것을 보고, 진리와 열망으로 축복하고, 주님이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새롭게 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들로 만들어진 공동체가 필요하다(행 20:28).부록: 클래펌 그룹윌버포스. 1787년 28세 국회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두 가지 큰 목표를 내 앞에 두셨다. 노예 매매 금지와 사회 풍속 개혁이다.” 그는 불과 2년 전에 개종한 초신자였다. 노예무역 폐지는 그 가능성이 희박했다. 노예제도는 인간이 기억하는 한 인류 역사 속에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여론은 일반적으로 그런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대영제국의 경제는 노예제도에 완전히 묶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가 소속한 지역 대부분 유권자의 장기 소득과 번영이 크게 감소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누가 봐도 정치적 자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존 웨슬리는 죽기 열흘 전에, 젊은 윌버포스에게 편지를 썼다.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하여 당신을 일으키지 아니하시면,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과 마귀의 반대에 치여서 지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신다면, 누가 감히 당신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긴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요약하자면, 윌리엄은 그 후 46년이 흐르고 죽음을 딱 사흘 앞뒀을 때까지, 대영제국 내 노예무역 폐지의 성공 전까지 겪어야 했던 물리적 폭행을 포함한 각종 반대를 고스란히 모두 다 견뎌냈다. (참고: 노예를 해방시킨 노예 소유주 보상을 위해 그는 영국 국고를 열도록 했다. 실로 엄청난 액수였다!) 윌버포스가 도덕과 관련한 문화적 기준을 개혁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그의 놀라운 재능과 탁월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의 성공이 가능했던 건 클래펌 펠로우십이라는 흥미로운 기독교 공동체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이렇게 썼다. “윌버포스가 노예무역의 심장을 꿰뚫은 화살이었다면, 클래펌 펠로우십은 그를 날아가게 한 활이었다”(J. Hart, “Every Arrow Needs a Bow,” Regeneration, Fall 99).클래펌 모임의 형성 클래펌 런던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은행가이자 국회의원이기도 했던 윌버포스의 그리스도인 친구 헨리 손톤(Henry Thornton)이 윌버포스 가족에게 클래펌에서 큰 집을 하나 사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합의를 한 후, 손톤은 에드워드 엘리엇(Edward Eliot)과 찰스 그랜트(Charles Grant)가 임대한 땅에 두 개의 작은 집을 지었다. 그랜트와 나중에 테인머스 경(Lord Teignmouth)이 된 존 쇼어(John Shore)는 둘 다 인도에서 경력을 쌓았고, 나중에 강력한 인도 선교의 후원자가 되었다. 노예제도에 강력히 반대했던 또 다른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학자이자 활동가인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 그는 노예제 반대 협회(Anti-Slavery Society)의 회장이 되어 시에라리온 프로젝트(Sierra Leone Project)와 영국 및 해외 성서 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다른 한 사람은 고작 16세에 서인도 제도의 부동산 감독관이었던 자카리 마컬리(Zachary Macauley)였다. 그는 노예무역이 주는 피해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절감한 상태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클래펌 그룹에 합류했다. 스태포샤이어 욕살(Yoxall in Staffordshire)의 지주이자 더햄(Durham)의 성직자인 토마스 기스본(Thomas Gisborne)은 매년 일정 시간을 윌버포스와 함께 사역에 투신했다. 한나 모어(Hannah More)는 교육자이자 작가였다. 교구 목사인 존 벤(John Venn)은 직접적으로 종교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목사이자 교사였다. 그는 전체 지역 사회를 영적으로 양육했으며 그의 조언은 클래펌 모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783년, 존 벤은 존 뉴톤(John Newton), 찰스 시미온(Charles Simeon), 리차드 세실(Richard Cecil) 및 기타 여러 사람을 포함한 복음주의 성공회 성직자들과 격주 토론 그룹을 만들었다. 일렉틱 소사이어티에서 교회 선교 소사이어티(Church Missionary Society)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 무려 9,000명 이상의 남녀가 해외로 파송되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은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정기 간행물인 크리스천 오브저버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클래펌 회원이 향후 70년간 이 잡지가 계속 발행되는 데에 관여했다. 클래펌 펠로우십이 가장 중점을 두었고 또한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노예제 반대 사회 개혁이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들은 광범위한 이해관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노예제 폐지가 클래펌의 핵심 관심사였으며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지만 [그들은] 또한 다른 다양한 사회 운동 및 자선 사업에도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형법 개정, 기자단 폐지, 정신질환자 돌봄 개선 [특히 아동노동법 개혁], 굴뚝 청소 소년 돌봄, 공장 조건의 규제와 학교 및 기타 교육 사업의 진흥을 들 수 있다.”[21]교훈클래펌 펠로우십이 문화적 갱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사회 정의에 집중했던 것만큼 개종과 선교를 통해 개인의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도 전념했다. 놀라울 정도로 균형 잡힌 그들은 단지 ‘한 가지 문제’만 파고든 편협한 단체가 아니었다. 교육과 문학 그리고 신학 저널과 교회 확장 및 정치적 대의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2) 그들은 종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물론, 핵심 종파는 성공회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서 성공회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종파는 말할 것도 없고, 노예제 반대 활동과 관련해서는 기독교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공동 전선을 구축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종파주의’가 아니라 복음 중심이었다. 3)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사역을 구축했다. 단순히 자신의 개인 경력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에게 헌신했다. 그들의 관계는 평생 이어졌다. 그들은 함께 예배하고,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하고, 또 함께 살았다.4) 그들은 단지 목표 추구라는 면에서만 그리스도인이었던 게 아니라,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었다. 윌버포스와 오늘날 우리 사이의 역사적, 문화적 거리는 상당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이미 이미지와 돈 그리고 동원된 유권자를 기반으로 한 정치공학이 만연했고, 거기에 더해서 야당에 대한 분노와 ‘우리가 남이가’(rally the base) 식의 선동적 수사가 넘쳐났다. 그러나 윌버포스가 택한 것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의 정치에는 단지 기독교적 내용(사회 정의)만 있는 게 복음이라는 형식(관계, 정직, 성실, 지속성)까지 함께 들어있었다. 5) 그들은 자신이 재능이 넘치고 헌신했기에 똑같이 재능 있고 헌신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의 “두뇌는 그들의 종교를 비웃는 사람들조차도 부정할 수 없었다. 백과사전 수준의 지식, 연구 능력, 번뜩이는 재치와 문학적 스타일, 사업적 현명함, 외교 정책의 전문성, 법률 능력, 웅변 및 의회 활동에서 보여준 실력 등 놀라운 범위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어떤 수상도 윌버포스가 도움을 요청해야 할 수준의 내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22]6) 마지막으로,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초점을 잃지 않았다. 핵심이자 구체적이며 전략적 목표는 단 하나, 노예무역의 종식이었다. 이 하나의 목표야말로 그들을 하나로 묶은 ‘접착제’였다.클래펌은 죄인인 인간으로 구성된 집단이었고, 따라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23] 그러나 클래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화를 바꾸었다. [주][19] See Hunter, To Change the World, for a description of the concept of “faithful presence”.[20] 나는 마크 놀(Mark Noll)의 획기적인 저작인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Eerdmans, 1994)을 기리기 위해 이 ‘기독교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21] Nigel Scotland, “The Social Work of the Clapham Sect: An assessment,” Themelios, Volume 18, Issue 1.[22] Garth Lean, God’s Politician, Helmers and Howard Publishers, 1987, 135.[23] 클랩햄 그룹의 사회 개혁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이전에 인용한 나이젤 스코틀랜드(Nigel Scotland)가 쓴 훌륭한 글을 참조하라.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가 아니라 단지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영국 상류층의 경우처럼), 클랩햄은 그런 면에서 분명히 시대를 앞서갔다고 지적한다. 클랩햄은 “샤프츠베리 경(Lord Shaftesbury),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그리고 수백 개의 복음주의 단체 속 여러 인물들을 포함해서 19세기 이후 수많은 자선 사업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빈곤하고 소외된 이를 위한 현대 국가의 원조와 지원 모델의 토대가 클랩햄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4-The Strategy for Renewal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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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을 위한 전략(4-2)
by Tim Keller
2022-08-01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의 마지막 글입니다. 1부 주류 교회의 쇠퇴2부 복음주의의 쇠퇴3부 갱신의 길4부 갱신을 위한 전략[4-1] 갱신이 필요한 이유갱신을 위한 비전 [4-2]갱신 앞에 놓인 함정갱신을 위한 리더십[4-3]갱신 프로젝트부록: 클래펌 그룹갱신 앞에 놓인 함정갱신의 가능성을 품은 운동에는 많은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위험을 미리 인식하고 피해야 한다. 교회 갱신으로 가는 길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 모든 교단과 기관이 과거에도 저질렀고, 지금도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실수를 피해야 한다.[4] 지난 수십 년 동안 주류 교회의 위축은 복음주의의 성장과 맞물려 있었다. 많은 이들의 눈에 그 사실이 주는 교훈은 단순했다. 종교에서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보수정통주의가 통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이제는 더는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복음주의 교회도 쇠퇴하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남침례교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교인을 잃었다.[5]교회 갱신의 길은 진보와 보수 교단 및 기관이 지금 현재 저지르고 있는 실수를 피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잘 알려진 비유를 사용하면 양쪽에 괴물이 있다. 선원들은 스킬라로부터 제대로 떨어져서 항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카리브디스의 손아귀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날 미국 교회에는 조심스럽게 피해야 하는 경쟁적인 “괴물”이 몇 가지 있다.괴물 스킬라 피하기첫 번째 글에서 나는 왜 자유주의/진보 기독교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지, 왜 교회 갱신 프로젝트에서 그 방향을 피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모든 세기와 문화에 걸쳐 보편적으로 믿어 온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거부한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것만이 현대 과학 시대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자유주의 개신교는 결국 현대 자유주의 세속주의와 하나 다르지 않게 되었고, 본질적으로 그들은 실재에 관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방식에 관해서,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서 세속주의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현대 문화가 결코 제공하지 못하는, 구별되는 뭔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할 능력은 이제 그들에게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보수 교회의 지독한 실패에 분개하는 많은 전-복음주의자(ex-evangelicals)가 복음주의라는 괴물 카리브디스를 피하려고, 오히려 다른 괴물 스킬라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완전히 ‘탈 회심’(de-convert)하지 않은 사람들은 (관점에 따라서 모호하다고 할 수도 있는) 교리적 자유와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 때문에 주류 개신교 교회로 향한다. 그러나 정치와의 긴밀한 연계는 주류 교회 자신을 쇠퇴시키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를 쇠퇴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다. 괴물 카리브디스 피하기두 번째 글에서 나는 복음주의의 쇠퇴에는 많은 뿌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19세기 초부터 반지성주의와 반엘리트주의 성향이 강했던 미국 복음주의는 고등교육과 학문, 과학을 크게 불신했다.[6] 물론 모든 보수 종교는 자연적으로 율법주의와 독선, 즉 “죽은 정통”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7]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대중의 눈에 세 가지 심각한 불신을 일으키게 하는 실수로 이어졌다.첫째, 상당수의 복음주의자가 기독교 신앙을 미국의 우익 포퓰리즘이라는 특정 정치적 의제와 결합시켰다. 많은 젊은 성인들, 특히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 복음주의자는 기독교를 단순한 파워 블록으로 격하시키는 존재로 비췬다.[8]둘째, 복음주의자는 현대 문화를 향해 날카롭고 가혹한 발언을 함에 따라 사람들을 끌어당기거나 복음을 전하려는 의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국민의 절반이 넘는, 즉 자유주의와 세속적 인구에게 ‘우리는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음’이라는 표시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복음주의자가 호소할 수 있는 대상은 전통적으로 사고하는 덜 세속화된 미국인, 점점 줄어들고 있는 숫자에 불과하다. 복음주의자는 그들의 사역 방식을 역사의 새로운 단계인 탈 기독교 사회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9] 하나님, 죄, 도덕적 절대성, 그리고 내세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설득하는 데 복음주의자가 그동안 진전을 이룬 건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진보 좌파의 인종과 젠더에 대한 과도한 이념적 주장에는 저항하면서도 많은 복음주의자가 인종차별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그들은 교회와 목사들을 성적 학대로 고발한 여성들에 대해 비극적이라고 할 정도로 잘못되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와 교회가 여성 고소인을 ‘페미니스트’에 빠진 사람으로 호도했다. 용서와 화해를 내세운 것도 따지고 보면 다 피해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범죄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대중의 눈에 비친 일련의 모습은 복음주의 신뢰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중도” 피하기이제 우리는 반대편에 서 있는 두 개의 바다 괴물이라는 신화의 이미지는 뒤에 남기고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두 괴물의 손이 닿지 않게 정확하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항해할 수만 있다면, 이론상 우리는 그 어떤 사망이나 손상 없이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교회 갱신의 길은 너무 보수적이지도, 또 너무 진보적이지도 않은 길을 택하는, ‘중도’를 걷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다.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그것은 나쁜 조언이다. 자유주의 주류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개신교 교리를 보수주의보다 덜 지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을까? 인종 및 경제적 정의에 대해서는 꼭 조금만 걱정해야 하는가? 거기에 더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현대 문화가 조장하는 우상과 권력 구조에 대해 꼭 온건한 비판만 해야 하는가? 성경의 권위를 꼭 적절한 수준에서만 인정해야 하는가? 교인들이 꼭 모두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항상 ‘중도’ 아니면 철저한 ‘비정치적’이어야만 하는가? 전혀 아니다. 새로워진 교회는 역사적 교리에 있어서 완전히 정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이어야 한다. 진정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차이를 줄이는 것’ 또는 양쪽 모두를 다 조금씩 받아들이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양극단에 빠져 범할 수 있는 실수를 피하는 방법도 있다.[10]믿음, 윤리, 영성, 그리고 실천에 있어서 새로워진 교회는 자신의 길을 개척할 것이다. (a) 갱신된 교회는 더 수준 높은 지적 온전함(integrity)과 철저한 학문을 추구할 것이다. 교회는 그럼으로써 주류 교회보다 공동선과 공공 정의에 더 큰 공헌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이제 철저하고 공들인 주석과 보수적인 개신교보다 훨씬 더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고 전파하는 모습을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b) 윤리적인 면에서, 갱신된 교회는 인종과 빈곤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와 낙태, 섹슈얼리티, 가족, 젠더에 대한 ‘보수적’ 견해를 묘하게 결합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외부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개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갱신된 교회는 사회 개혁에 대한 헌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경청,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희생적인 사역과 전도, 새로운 교회 개척, 변증, 현대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대한 깊은 헌신 등 이 모든 것을 결합할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문화에 복음을 맥락화하고 신학과 현대 사상이 서로 대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당면한 필요를 신학의 회복뿐 아니라 역사적 교리와 전통의 충실함(faithfulness)이라는 점과도 결합할 것이다.[11] 교회는 (성공회, 루터교, 개혁파와 같은 정통 고백 교파 중심의) 역사적 교리에 대한 강조와 (오순절 및 기타 부흥 전통에 의해 강조하는) 영적 경험 및 (주류에서 중시하는) 사회 개혁에 대한 강조를 하나로 합칠 것이다. (c) 갱신된 교회는 많은 백인 미국인이 지향하는 급진적인 개인주의[12]나 진보 좌파 대부분이 주장하는 세속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인종과 정의에 대한 방향을 찾을 것이다.[13] 정의에 관한 성경 말씀과 더불어, 미국의 유색인종이 겪은 경험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좌파, 우파 또는 중도가 아닌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작가와 사상가가 있다. (d) 갱신된 교회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급진적인 개인주의나 부정적인 혐오를 반영하지 않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육체의 긍정, 동의, 다양성, 자유, 안전,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문화 고유의 내러티브를 사용함으로써 교회는 기독교 성윤리를 거부하기보다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더 큰 틀 안에서 설득력 있는 용어로 성에 대한 성경적 비전을 제시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e) 갱신된 교회는 정치와 국가에 대한 더 나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등장한 새로운 포퓰리스트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는 국가에 대한 기존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멀어졌다. 우파에서는 점점 더 많은 보수주의자가 국가 권력을 사용하여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을 억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홍보하는 데 매력을 느낀다(예: 헝가리의 빅터 오르반(Victor Orban)에 대한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의 매료). 다른 한편으로, 대부분의 젊은 성인들은 진보적이며 국가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국가가 부와 권력과 지위를 특권 집단에서 불리한 집단, 특히 인종 및 성 소수자 및 여성에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런 주장은 수혜 집단 구성원의 자유와 평등한 대우,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까지도 정당화한다.[14]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역할과 정치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거의 전쟁을 치른다고 할 정도로 서로 다른 견해로 다투고 있다. 갱신된 교회도 이런 논쟁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는 모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각에서 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무시하면 안 된다. 그건 모두가 다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5] 교회는 현재 미디어 ‘거품’ 중 하나에만 완전히 또는 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뚜렷한 세계관을 특권으로 하는 유망한 제안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립적인 방향을 지향함으로 공공 영역에서 여러 종교가 다 함께 번성하고 참여를 촉진하는 제안을 채택해야 한다.[16]갱신을 위한 리더십효과적인 운동의 핵심은 리더십이다. 리더십은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다중 민족(multi-ethnic). 앞서 말했듯이 갱신된 교회는 처음부터 다중 민족이어야 한다. 초기 성립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몇 명의 나이든 백인 남성이 처음에 교회를 시작하고는 젊은 다민족 지도자를 초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처음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이 처음에도 또 시간이 가도 계속해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다중 교파(multi-denominational). 교단과 전통을 초월한 지도자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정 전통에 지나치게 지배받는다면, 교회는 신뢰성을 잃고 “사실상 침례교” 또는 “사실상 장로교” 등으로 비췰 것이다. 참을성 있는 경청과 노력 없이는 결코 함께하지 않을 많은 그룹(루터교, 오순절, 전통적인 흑인 교회)이 있다.다중 “접점”(multi-“nodal”). ‘노드(node)’는 네트워크의 교차점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공적인 교단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인과 교회 및 사역의 강력하고 다양한 네트워크와 비공식적이지만 많은 경우에 엮여서 살고 있다. 갱신 리더는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어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는 다를 수 있다.(a) 영적 은사, 적성, 재능 및 전망. 광범위하고 심오하며 지속적인 운동은 결코 한 명의 지배적 인물에 의해 주도될 수 없다. 심지어 예언적 기질이나 예술적 기질, 경영적 기질 또는 학문적 기질이 다 비슷하다면, 아무리 여러 사람이 모였다고 해도 제대로 된 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 리더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리더를 분류하는 방법은 다양해야 한다! (아래 목록은 중복된다.)• 다양성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은 에베소서 4장에 기초한 앨런 허쉬(Alan Hirsch)의 “APEST” 목록이다. 이것은 사도적(apostolic), 예언적(prophetic), 전도적(evangelistic), 목양적(shepherding), 그리고 가르치는(teaching) 은사와 성향을 의미한다.[17] • 다양한 은사를 생각하는 또 다른 방법은 흔히 조직의 이사회에서 자주 인용하는 네 가지 유형의 리더로 구분하는 것이다. (1) 비전가 또는 ‘아이디어 형’ (2) 예산, 기금 마련 및 비즈니스 모델을 이해하는 금융 전문가, (3)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을 이해하는 전략가, (4) 조직의 실제 제품을 꿰뚫고 있는 해당 주제 전문가.• 은사를 다양하게 갖추는 마지막 방법은 리더십의 직업 구성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목사와 신학자가 기독교 갱신 운동에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성직자가 지배하는 갱신 운동은 단지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결과를 낸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건 결코 개신교와 맞지 않다는 점이다! 학자, 사업가, 예술가, 과학자, 언론인, 정치인, 변호사 등의 평신도 지도자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b) ‘자본’의 형태. 자본은 여러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부와 같은 경제적 자본이 있다. 관계적 연결과 같은 사회적 자본뿐 아니라, 상징적, 문화적 자본 및 기타 세분된 다른 자본도 있다. 제임스 헌터(James Hunter)가 썼듯이, 중복된 자본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지도자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세상은 진짜로 변한다.”[18]그러나 이 분야에서는 달라선 안 된다.영적 성숙. 새로운 운동이 저지르는 지극히 흔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는 아주 단순하다. 꼭 필요한 다양한 형태의 자본과 연결을 얻기 위해 영적 성숙이 부족한 사람을 지도자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물론 성장하고 있는 확고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다양한 수준의 성숙과 영적 경험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교만과 자기중심적 태도, 또는 분노와 가혹함의 패턴이 익숙한 사람을 지도자로 끌어들이는 것은 비극을 부르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리더는 이래야 한다.진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갱신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활력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은사와 자본은 단지 인위적으로 결합할 뿐이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관점과 지식이 우리 속에 깊이 스며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더 현명해지고, 더욱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더 창의적인 태도로 서로를 신뢰할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전형적인 예는 18-19세기 영국의 “클래펌 모임”(Clapham Group)이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의 내부 서클로, 런던 교외의 클래펌 마을로 이사하면서 문자 그대로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의 공통 목적은 기독교/성경적 가치로 영국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노예제 폐지에 중점을 두었다. 클래펌 모임에서 파생한 것 중 하나가 격주 토론 그룹에 외부 인사를 초대한 성직자 그룹인 에클레틱 소사이어티(Eclectic Society)이다. 바로 에클레틱 소사이어티에서 처치 미셔너리 소사이어티(Church Missionary Society)와 중요한 복음주의 신문인 크리스천 오브저버(Christian Observer)가 탄생했다. 클랩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을 참조하라.너무 빨리 움직이지 말라. 클래펌의 사례는 깊고 지속적인 변화가 결코 한 번에 또는 빠르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그보다 더 기초적인 다른 프로젝트가 먼저 완료되어야만 가능하다. 가장 빨리 이뤄져야 하는 것 중에는 이 시리즈의 세 번째 기사에서 언급한 ‘이니셔티브’가 있다. 공통된 신학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한다. 회개와 특별한 기도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구체적인 목표를 꿈꾸고 브레인스토밍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인도할 “프로테스탄트 사회 교육”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된 마음과 비전의 통일성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수행할 특정한 이니셔티브와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각 프로젝트를 장기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리더십 팀에 새로운 사람들을 모집하라(이 기사 하단의 부록 참조).[주][4] 어떤 사람은 우리가 미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 주류 개신교나 복음주의 개신교를 기대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가톨릭교회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게 어떻겠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톨릭도 매우 심각한 성적 학대 스캔들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급격한 쇠퇴에 직면해 있다. 로스 두타트(Ross Douthat)은 다음과 같이 썼다. “최근 들어, 우리[가톨릭]는 교황이 바뀔 때마다 신학과 이데올로기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나라와 교회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현재의 교황 제도 아래에서 벌어지는 교리적 갈등은 추기경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일반 신도 수준에서 말하자면, 서유럽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가톨릭이었던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가톨릭은 종교 개혁이라는 위기를 능가하는 신도 이탈을 경험했다.” “The Shadow of Failure: A Reply to Edmund Waldstein,” First Things, June 2022. [5] “Southern Baptists Drop 1.1 Million Members in Three Years,” Christianity Today, MAY 12. [6] Nathan O. Hatch, The Democratization of American Christianity, Yale, 1989.[7] “Live Orthodoxy” in Richard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 An Evangelical Theology of Renewal(Expanded Edition), IVP, 2020, 271-288; Sinclair Ferguson, The Whole Christ: Legalism, Antinomianism, and Gospel Assurance―Why the Marrow Controversy Still Matters, Crossway, 2016.[8]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주의자는 개신교 주류가 자유주의 및 민주당과 결합했을 때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보수주의 및 공화당과 관련해서 저질렀다.[9] See Lesslie Newbigin,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 Eerdmans, 1988, and “Can the West Be Converted?”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January, 1987.[10] 단순한 조합이나 ‘중간 타협책’이 아닌 대안을 찾기 위해서 가장 접근이 쉽고 탁월한 방법은 크리스토퍼 왓킨(Christopher Watkin)이 곧 출간할 책에서 찾을 수 있다. Biblical Critical Theory: How the Bible's Unfolding Story Makes Sense of Modern Life and Culture, Zondervan, 2022.[11] For example, Michael Allen and Scott Swain, Reformed Catholicity: The Promise of Retrieval for Theolog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Baker, 2015.[12] Christian Smith and Michael O. Emerson, Divided by Faith: Evangelical Religion and the Problem of Race in America, Oxford, 2000; Also see C. Smith, American Evangelicalism, especially chapter 7- “Ironies of Subcultural Distinction,” 178-217.[13] 미공개 논문에서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는 “분석적이고 비판적 인종 이론”과 “존재론적이고 비판적 인종 이론”을 구분한다. 후자는 당신의 인종을 당신의 궁극적인 정체성으로 바라보고, 다른 모든 요소를 제거하거나 주변화함으로 인종을 “구체화”한다. 내 생각에 헌터의 논문이 출판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가 다루는 모든 가능성(option)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할 것이다.[14] Eric Kaufmann, “The Politics of the Culture Wars in Contemporary America”, Jan 25, 2022, The Manhattan Institute. [15] 갱신된 교회가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할 두 개의 에세이는 에릭 카우프만(Eric Kaufmann)의 Manhattan Institute 기사와 아담 조이스(Adam Joyce)가 쓴 “만약 ‘제3의 길’이 있다 해도, 이건 아니다(ABC Religion and Ethics, May 10, 2022.)”이다. 조이스는 매우 진보적인 입장에서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닌 사람을 중도주의자로 구분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 중 상당수가 그의 말과 달리 실제로 권력과 인종 분석을 실시했다. 또한 어떤 주제에 있어서 단지 스펙트럼 양쪽의 다른 주장을 결합하는 것이 중도주의자라는 그의 주장도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에세이는 단지 ‘중도’ 입장을 취함으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떻게든 정치적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유익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16] See Rowan Williams, “Secularism, Faith, and Freedom”, chapter 2 in Faith in the Public Square, Bloomsbury, 2012—can be found on-line at VIRTURONLINE; Wilfred McClay, “Two Kinds of Secularism” in The Wilson Quarterly(Summer, 2000). A sophisticated dialogue on this subject can be found in R. Audi and N. Wolterstorff, Religion in the Public Square: The Place of Religious Convictions in Political Debate(Lanham: Rowman and Littlefield, 1997).[17] See Alan Hirsch, 5Q: Reactivating the Original Intelligence and Capacity of the Body of Christ, 100 movements, 2017. 앨런은 아주 세세하게 각 유형의 리더의 특성을 설명한다. 어느 리더나 혼자로는 안 된다는 사실, 누구나 다른 성격을 가진 리더와 동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하게 강조한다. [18] James Davison Hunter, To Change the World: The Irony, Tragedy, and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 Oxford, 2010, 43.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4-The Strategy for Renewal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미국교회
교회갱신
개인주의
공동체
복음주의교회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을 위한 전략(4-1)
by Tim Keller
2022-07-31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의 마지막 글입니다. 1부 주류 교회의 쇠퇴2부 복음주의의 쇠퇴3부 갱신의 길4부 갱신을 위한 전략[4-1] 갱신이 필요한 이유갱신을 위한 비전 [4-2]갱신 앞에 놓인 함정갱신을 위한 리더십[4-3]갱신 프로젝트부록: 클래펌 그룹갱신이 필요한 이유 1. 교회에게는 지금 갱신이 절실하다. 미국 개신교는 영적, 제도적 쇄신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주류-자유주의 교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가파르게 쇠퇴해 왔으며, 역사적으로 축적된 재산과 부동산 자산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보수-복음주의 교회도 쇠퇴하고 있으며, 특히 엄청난 숫자의 젊은이 이탈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흑인 교회는 그들대로 매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세대적, 신학적, 제도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국 역사상 교회가 지금처럼 약해진 적이 없었다. 또한 미국 인구가 지금처럼 종교와 단절된 적도 없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이라는 지붕 아래에서 생존하던 다양한 기관이 지금처럼 한꺼번에 이렇게 세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가톨릭교회조차 교구 축소와 성직자 감소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전 글에서 자세히 설명했다.)2. 국가에도 갱신이 필요하다. 많은 세속적 목소리가 전례 없는 교회의 변질을 말 그대로 축복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많은 분석가와 사회 이론가는 다른 어디에서도 제공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종교가 사회에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바로 도덕적 직관의 합의, 강한 공동체적 유대, 물질적 환경을 뛰어넘는 삶의 의미, 그리고 미래를 향한 강력한 희망 말이다.이런 문제와 관련한 사상가를 딱 한 명만 꼽자면, 로버트 벨라가 쓴 고전 Habits of the Heart(마음의 습속)에서 다룬 주제를 한번 살펴보자.[1] 벨라는 미국 사회사를 통해 미국 사회야말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개인주의적 문화로 넘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어떤 문화도 미국 문화만큼 개인의 이익을 가족과 지역사회와 국가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문화는 없었다. 그 어떤 문화도 미국 문화보다 개인의 성격과 정체성과 생활 조건까지, 그 모든 것이 다 개인의 결정과 선택 때문이라고 말하는 문화는 없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가난하거나 소외되었다면, 그건 온전히 그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더 적극적으로 살았더라면 얼마든지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난 2세기 동안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그나마 득세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이 가진 종교적 본성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목소리를 높임으로 미국 문화가 가져다주는 악영향에 맞서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과 긍휼을 강조했다. 교회는 기혼자에게 결혼 서약을 고수하라고, 오로지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성적 만족을 찾으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 종교가 쇠퇴하면서 이런 “가드레일”이 사라지고, 우리는 더 급속한 사회적 붕괴를 목격하고 있다. 벨라는 현재 종교의 저항에서 크게 벗어난 미국의 개인주의가 사회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가족 붕괴 및 기타 여러 기능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또 다른 최근의 예를 찾아보자. 버클리 대학교의 캐롤린 첸(Carolyn Chen) 교수는 뉴욕타임스 기사 “당신의 직업이 당신의 믿음까지 대체할 때, 그것은 문제가 된다”[3]에서 종교가 후퇴할 때 사람들은 또 다른 신이나 믿음을 대신할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다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신격화할 뭔가를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사람이 오로지 일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와 안정감과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 그 결과는 단지 일 중독과 불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윤리적 타협, 공동체와 시민 참여의 부족,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극심한 경쟁, 그리고 비인간적인 경제 상황이다. 첸의 결론은 단순하다. 종교가 후퇴할 때, 우리는 직업과 일을 새로운 종교로 섬기게 되고 그 결과 모두가 다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발견한 사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벨라가 분열된 문화 전반에 대하여 쓴 내용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 연구를 발견한다. 3. 하나님의 사랑이 갱신을 요구한다. 미국 교회의 쇠퇴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영적 갱신을 요구하는 이유는 종교가 제공하는 사회적 효용 때문도, 자신들의 제도적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갱신을 바라는 이유는 기독교가 사회 현실에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라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 유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가지는 이유가 단지 희망, 기쁨, 깊고도 끈끈한 공동체, 그리고 사회 치유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는 이런 가치를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갱신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갱신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 세례를 주고 … 가르치라”(마 28:19-20)고 말씀하셨다. 미국은 예수님이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수많은 국가 중 하나이다. 예외는 없다. 예수님은 또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갱신이야말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또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서 교회의 갱신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갱신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이다. 갱신을 위한 비전우리의 비전은 단순히 교회와 기독교 기관을 이전의 강력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는 오류이다. 우리의 비전은 성령의 공동체로서 교회에 대한 놀라운 성경적 가능성이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미국 사회에서 실현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삶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과 선하심을 발산하는 원천이 되는 거룩한 능력을 받았다(벧후 1:3-8). 교회는 새로운 인류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 즉 탁월한 아름다움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엡 2:14-18, 4:15-16).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교회는 주변 지역사회를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마 5:13-16; 눅 10:25-37; 갈 6:10). 그러므로 교회는 더 많은 이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 앞으로 이끌어야 한다(벧전 2:11-12; Cf. 신 4:5-8).우리는 다음과 같은 날을 꿈꾼다. 1. 자신의 삶과 능력의 핵심 원천으로 교회를 지목하는 사람들로 도시가 점점 더 넘쳐난다.2. 미국의 모든 지역사회에 그리스도인을 양육하고 불신자를 환영하며, 이웃을 섬기는 가정 친교 그룹과 가정 교회가 벌집처럼 빽빽하게 넘쳐난다. 3. 문을 닫는 교회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가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새로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2/3는 이전에 교회에 다니지 않았거나 불신자로 구성된다. 4. 역사적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개신교가 미국 인구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5.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상적인 관계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며, 듣는 사람 대부분이 불쾌하거나 어색한 대화로 인식하지 않고 도움이 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6. 교회를 떠나는 지금 젊은이의 현실이 완전히 역전된다. 교회를 다니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역사적 신앙이 주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속 문화가 제공하는 매우 불충분한 대안적 정체성과 내러티브를 분별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속 문화를 향해 제대로 답변하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 7. 그리스도인은 재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희생자를 돕는 것으로 유명해진다. 8. 교회는 사회에서 인종과 문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다양한 기관으로 알려진다. 사회를 향한 새롭게 된 교회의 ‘얼굴’ 그러니까 교회를 주도하는 목소리는 인종적으로 매우 다양하며, 동시에 미국 교회는 세계 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9. 오직 믿음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개신교 복음은 여러 시대에 걸쳐 교회에 만연했던 율법주의라는 만연한 병을 피해 많은 교단에 걸쳐 탁월하고 아름답게 선포되어 왔다. 이제는 거기에 더해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한마디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복음이 선포된다. 10. 많은 교단과 전통이 번성하며, 각각 고유한 특성에 대해 감사하고 확신하며, 교리적 희석이나 타협 없이 교단을 초월하여 서로 도우며 협력한다. 11.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된다. 슬픔과 고통과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된다. 12. 기독교 예술가가 점점 늘어난다. 죄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현실주의와 회복의 은혜에 대한 확신에 찬 그들은 고품질의 이야기와 음악 및 시각 예술을 생산하여 (a)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아름다움과 직관적인 개연성을 목격하게 하는 동시에 (b) 그 결과 이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더 큰 희망을 품게 된다. 13.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수하려는 건전하고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만들어진 학자 공동체가 점점 커진다. 이들은 (a) 탐구가 가능한 모든 학문 분야에서 활동할 뿐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고 변화를 촉진하는 학문을 생산하고, (b) 대학에서도 그 존재감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으며, (c) 연구 센터, 싱크 탱크, 아카데미, 정기 간행물 및 출판이라는 지적 경제 분야를 전적으로 대체하는 세력이 된다. 14. 교회는 가시적일 뿐만 아니라 존경받는 ‘성적 반문화’의 중심이 된다. • 섹슈얼리티가 이기적이고 비용-수익을 기반으로 하는 소비재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 자기희생(self-donation)의 수단이 되는 공동체이다. • 결혼과 가정의 건강과 지속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공동체이다. • 독신, 특히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로, 낭만적인 관계에서 훨씬 더 큰 정서적 안정과 더 명확한 기대를 갖게 하는 공동체이다. 피상성을 근거로 해서 배우자를 구하는 현대의 흐름을 거부하는 곳이다. 따라서 외모와 돈은 훨씬 덜 강조된다. • 동성에 끌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성경적 비전과 성에 대한 윤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하는, 건전한 기독교 남녀를 양육하고 존중하는 공동체이다. 15.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한다. • 비즈니스에서 그리스도인은 덜 이기적이고 무자비하며 동료와 직원 및 고객에게 더 관대하다고 알려진다. • 사회적 기업가 정신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회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비영리 단체의 폭발적인 성장을 부추기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빈곤율의 측정 가능한 감소와 사회 복지에 대한 다른 통계의 개선으로 이어짐으로 그리스도인의 명성을 높인다. 기독교인은 자선 사업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 정치와 정부에서 그리스도인은 선거 이익보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정부 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 개척과 교회 갱신의 바람이 더 일어나며, 교계(broader church)에 의해 비가부장주의적인 지원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실질적인 주도를 감당한다. 나아가서 이런 현상은 사회에서 목격될 뿐 아니라 개선된 사회 지표의 하나로로 인식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변화는 돈과 권력보다 공정한 분배로 이어질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과 삶에 대해 더 많은 통제력을 갖게 될 것이다. 16.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 그리고 잘못된 믿음과 주장에 대한 가감 없는 비판으로 이름을 날린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믿는 세계관과 신념을 자유롭게 말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진정으로 다원주의적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손함과 헌신으로 유명해진다. •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도덕적 신념과 신념에 깊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상호 존중, 환영, 친절한 태도를 바탕으로 점점 더 공손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을 주도한다. • 그리스도인은 따뜻한 대화와 지적인 토론, 언론과 양심의 자유 수호를 가장 강력하게 촉진하는 사람들로 알려진다. [주][1] Robert Bellah, et al, Habits of the Heart, With a New Preface: Individualism and Commitment in American Lif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7.[2] 벨라의 원본 작업은 1985년에 출판되었고, 그 후 1996년과 2007년에 각각 새로운 서문으로 재발행되었다. 초기 연구 이후, 벨라가 수십 년 동안 점점 더 심해지는 사회적 악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알고 싶다면, 세 개의 서문을 모두 읽을 것을 추천한다. [3] Carolyn Chen, “When Your Job Fills In for Your Faith, That’s a Problem,” New York Times, May 24, 2022.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4-The Strategy for Renewal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미국교회
교회갱신
개인주의
공동체
주류교회
생각만큼 나쁘지 않은 기독교
교회가 세상에 이롭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통계들
by Josh Howerton
2022-07-05
우선 경고부터. 여기 나오는 그래프들은 모든 교회가 건강하다거나 반성이나 회개할 일이 전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아님. 전혀 그렇지 않다. 교회란 프로그램이나 건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곧 교회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지저분하고, 그래서 교회도 그렇다. (내 말이 미덥지 못하면, 고린도전서를 읽어보거나 아무 교회나 가서 거기서 10분만 있어 보라. ) 완벽한 그리스도인은―따라서 완벽한 교회는―없다. 슬픈 일이지만 완벽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 때가 많다. 그런데흠이 많고 죄가 많은 데 더하여, 교회에는 또한 주 무기가 거짓말인 원수가 있다. 영어 ‘devil’(데블; 악마)은 그리스어 ‘diabolos’(디아블로스)에서 온 말이다. 디아블로스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헐뜯는 자”이다. 계시록은 디아블로스(악마)를 “우리의 형제들을 헐뜯는 자,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헐뜯는 자”(계 12:10)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를 해하려고 중상모략을 일삼는 이 악마를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묘사한다. 이런 사실을 두루 종합하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그림이 나온다: 사탄은 교회의 잘못을 이용하여 그럴듯한 거짓 이야기들로 교회를 비방하여 예수께서 세우시는 교회(마 16:18)를 무너뜨리려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기독교를 기술하는 문화 내러티브들과 실제의 기독교 사이에 존재하는 크나큰 간격. 이를 보여주는 사례를 다섯 가지만 들겠다. 문화 내러티브 #1: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는 생명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출산을 옹호할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옹호하기보다는 출산을 옹호한다는 비방을 자주 듣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옹호하는 데 열정을 쏟는 척하면서 이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다. (비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작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통계 데이터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입양 비율▶미국 전체 가구: 2%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5%출처: Barna Research, 2013 report/ Philanthropy Roundtable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아동 지원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취약 여성들을 돌보는 거의 모든 임신 여성 지원 센터(pregnancy resource center)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입양 비율은 미국 가구 평균보다 2배 이상 높다. 기독교 단체들은 낙태에 대한 안전한 대안을 제공한다는 입증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문화 내러티브 #2: 그리스도인들은 성을 억압하고 혐오하며 독성이 강한 순결 문화를 퍼뜨리고 있다. “순결 문화”라는 말이 기독교 성윤리로 사람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 만능 표어가 되었다. 자신의 성(sexuality)을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해방되고 “성을 긍정하는”(sex-positive) 사람이 되지 못하고, 교회의 억압적인 순결 문화를 내면화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주장인즉슨 이러하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통계는 동의하지 않는다.성 만족도“배우자와의 성관계에 만족한다”에 ‘매우 그렇다’라고 응답할 확률 ▶1. 커플 둘 다 비종교적일 경우 남: 29%여: 32% ▶2. 커플 중 하나 또는 둘 다 “덜 종교적”일 경우남: 30%여: 32% ▶3. 커플 둘 다 매우 종교적일 경우남: 39%여: 48%출처: Institute for Family Studies and Wheatley Institute규칙적으로 교회 가고,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하는 범주에 속한다. 결혼생활을 언약 관계로 중시하는 부부일수록 열정이 가득한 역동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는 성경의 “낡아빠진” 성 관습으로부터 해방될 때야 만들어진다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한다. 문화 내러티브 #3: 기독교는 감정을 억압하며 정신건강에 해롭다. 정말 교회는 신자들의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이 역시 정반대다. 통계 데이터가 교회 출석을 규칙적으로 하는 사람들과 상관관계에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우울증에 덜 걸린다• 자살율이 낮다• 흡인과 약물 남용 같은 정서적 진통제 사용 빈도가 낮다 • 사회적 지지를 더 많이 받는다• 더 나은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다• 자원봉사를 더 많이 한다• 사회참여도가 높다• 아이들이 더 행복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은 워싱턴 타임스 기사 한 토막. 규칙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만 유일하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혼란스러웠던 2020년에 정신건강이 실제로 호전되었다. 규칙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이 전혀 교회 가지 않는 사람들보다 감소한 위험도• 사망 위험: 33% 감소 • 자살 위험: 84% 감소• 우울증 위험: 29% 감소• 이혼 위험: 50% 감소• “절망사”(絶望死, Deaths of Despair) 위험(여성): 68% 감소• “절망사” 위험(남성): 33% 감소• 청소년 불법 약물 사용 위험: 33% 감소• 청소년 우울증 위험: 12% 감소출처: Christianity Today문화 내러티브 #4: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오로지 정치적 힘에만 관심이 있다.일부 진영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난을 혐오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들의 “진리 주장”(truth claims)은 단지 파워 플레이 곧 자기네 유권자 진영의 권력과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행동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렇다. 매일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은 비종교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지난 7일 중 돈이나 시간, 물품을 기부했다▶매주 교회 출석하고 매일 기도하는 미국인: 65% ▶기타 미국인: 41%출처: Pew Research Center, 2014 data/Philanthropy Roundtable 자원봉사를 했다지난 7일 중에▶매주 교회 출석하고 매일 기도하는 미국인: 45% ▶기타 미국인: 27%출처: Pew Research Center, 2014 data/Philanthropy Roundtable 문화 내러티브 #5: 기독교는 여성을 억압한다; 기독교는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도구이다; 기독교는 여성에게 해로운 관계들을 양산한다.소셜미디어를 통해 미투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여성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기관이라는 범주에 교회도 속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ChurchToo(교회도 가해자다) 운동은 엄연한 현실이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 다만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문제에서 우리의 실패는 우리가 우리의 신학대로 살아가지 못한 실패이지 우리의 신학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실패가 아니다.더하여, 통계 데이터 전체가 보여주는 것은 교회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덜 학대적인 관계를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관계의 질: 미국관계 애착, 책임, 만족, 안정 지수▶1. 진보적 젠더의식을 공유하는 비종교인 커플 남: 15.47여: 16.52▶2. 전통적 젠더의식을 공유하는 비종교인 커플 남: 15.81여: 13.87▶3. 진보적 젠더의식을 가진 둘 다 또는 한 쪽이 덜 종교적인 커플남: 16.79여: 15.17▶4. 전통적인 젠더의식을 가진 둘 다 또는 한 쪽이 덜 종교적인 커플남: 15.59여: 15.50 ▶5. 진보적인 젠더의식을 가지고 있는 매우 종교적인 커플남: 17.05여: 16.91▶6. 전통적인 젠더의식을 가지고 있는 매우 종교적인 커플남: 17.20여: 17.64출처: Institute for Family Studies and Wheatley Institute내러티브 #5와 반대로, 신학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젠더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 다니는 여성들은 미국 내에서 학대당한 경험이 가장 적고, 가장 행복한 관계들을 형성하고 있는 그룹에 속한다. 기독교는 사람을 변화시킨다통계 자료는 얼마든지 더 제시할 수 있다. 규칙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사람일수록 주요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낮다. 교회 다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마약을 하거나 결혼 전에 성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낮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이혼할 가능성이 35퍼센트 낮다. 심지어 교회 출석이 수명을 7년 연장해 준다는 연구도 있다. 요점은 이것이다: 세상과 미디어에서 인식하는 교회와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어떠하며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나는 우리의 잘못을 축소하거나 개인적 고통을 무시하는 데 관심이 없다. (사실은 복음이 참되기에 우리가 정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망가진 모습 속에서도 엄연히 빛을 발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은 분명하게 그려내고 싶다. 그리스도인들이여, 교회가 이런저런 이유로 내동댕이쳐지더라도 용기를 잃지 마시라. 당신의 형제자매들이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선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아닌 이들이며, 복음이 사람의 마음에서 일으키고 있는 진정한 변화를 애써 외면하려고 우리의 잘못을 핑곗거리로 삼지 마시라. 예수님은 사람들을 변화시키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도 변화시키실 수 있다. 원제: No, Christianity Is Not as Bad as You Think: 5 Statistics That Reveal It’s Good for the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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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 교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by Jeremy Linneman
2022-07-03
이런 헤드라인을 봤을 것이다.• “의료계는 이제 외로움을 전염병이라고 말한다”(워싱턴 포스트)• “젊은이가 노인보다 외로움을 더 많이 느낀다”(USA 투데이)• “중년 남성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흡연이나 비만이 아닌 외로움이다”(보스턴 글로브)• “외로움이 건강에 미치는 놀라운 영향”(뉴욕 타임스)• “외로움은 더 깊은 외로움을 낳는다”(애틀란틱)• “사회적 고립이 우리를 죽이는 방법”(뉴욕 타임스)• “사회적 고립이 비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슬레이트)사회적으로 서로를 연결하는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외로워한다. 저렴한 전화통화와 무료 이메일에도 불구하고 소통은 줄어만 들고 있다. 모두가 다 자동차를 갖고 있고 항공여행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지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볼링도 함께 치다가 혼자 치는 서서히 늘어나더니 소셜 미디어가 넘치는 이제는 아예 볼링 치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그저 화면을 바라보면서 혼자 스크롤 할 뿐이다.어쩌다 이러한 사회적 고립이 심지어 트렌드가 되어버렸을까? 이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내 이론은 간단하다. 서구 공동체는 급격히 쇠퇴하고 있으며 급진적 개인주의는 가장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급진적 개인주의는 전례 없는 사회적 고립과 21세기 미국 문화 특유의 깊은 외로움을 낳았다.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 이 점은 기독교 신학에서야 오래 전부터 주창되어온 것이지만 이제는 신경과학조차도 뒷받침하는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에 깊은 고립을 낳는 상황은 우리에게 문제가 된다.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이해함으로 우리는 교회와 세상에서 사회적 연결과 우정,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다.21세기 전염병올해 초 UCLA가 개발한 외로움 척도(Loneliness Scale)에 기초하여 2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그나(Cigna) 연구에 따르면, 18세에서 22세 사이가 72세 이상보다 외로움을 훨씬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결과는 학계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우리 각자는 다 하나의 외로운 국가이다. 전직 외과의사였던 비벡 머씨(Vivek Murthy) 박사는 외로움을 전염병이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다. 머피는 외로움이 만성 염증과 심장병, 관절염 및 당뇨병의 위험을 증가시키는 “교활한 유형의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사망에 악영향을 미친다. 외로움은 현대 서구 문화에서나 만나는 전염병이라고 쉽게 주장할 수도 있다. 심장병에서 음란물 사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전염병 대부분은 외로운 마음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다른 사람이 없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질병”이라고 말한 테레사 수녀의 말은 옳다.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우리보다 중요한 나외로움은 개인주의 사회의 당연한 증상이다. 적지 않은 역사가와 철학자가 지난 70년 동안 개인주의의 부상을 추적했다.철학적 관점에서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종교적인 것에서 세속적인 것으로 전환한 서구 지성의 흐름은 자아와 의미에 대한 일차적 견해로서 공동체가 아닌 개인주의가 부상한 사실과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사물도 중요했지만, 사회적 유대 자체도 매혹적이고 신성하게 간주되었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를 인용하자면) “우리 조상이 살았던 마법에 걸린 다공성 세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삶이었다.” … 개인이 의미의 핵심이 될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의 본질적 원칙(atomism)은 이것이다. 불신이 더 이상 사회적 문제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음새 없는 천이나 촘촘하게 짜인 사회적 조직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사회적 “가스” 안에서 떠도는 개별 분자처럼 하나하나가 얼기설기 모여서 이룬 일개 집합일 뿐이다. 엉뚱한 곳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는 환멸에 빠진 개인으로서 나는 단지 단순히 자율성과 자존감이 필요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깊은 관계로 연결된 공동체 속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라지는 관계건강한 공동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점점 더 희귀해지고 있는, 같은 지역 내에서 발생하는 빈번한 상호작용이다. 최근에 아내가 자기의 하루 일과를 이야기했다. 아내는 식료품점에서 우연히 원래 알던 린지와 최근에 사귄 브래드와 체스니를 만났다. 같은 날 나는 빵집에서 친구 로스를 만났고 자전거 가게에 들러 안젤라와 내가 지금 고민 중인 몇 가지 새 타이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우연한 만남”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런 만남이 없이 며칠을 지난다고 해도 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마크 던클만(Marc Dunkelman)은 이러한 우연한 만남이야말로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식료품점, 커피숍, 놀이터와 같은 공공장소에서 이웃은 건강한 상호작용을 통해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웃과의 평범한 대화가 수백 마일 떨어진 사람과 스크린 화면을 두드리면서 만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식의 변화는 점점 사라지는 미국식 공동체에 더 큰 문제를 드러낸다고 더클만은 지적한다. 오늘날 성인은 과거 할아버지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연결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시간과 관심을 아주 친밀한 사람 또는 가장 가벼운 관계의 지인에게 사용한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고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를 우리는 아예 포기했다.중간 고리가 없는 사회 구조는 많은 부분에서 무너진다. 이러한 사회학적 발견은 우리의 경험과 일치하는데, 모든 사실이 신경과학에 의해서까지 뒷받침된다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신경과학이 신학을 지지할 때UCLA의 한 연구원은 관계 및 커뮤니티 문제에 기능성 MRI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 중 하나이다. 당연히 그의 연구는 사회적 연결의 필요성을 심도 있게 확인했다.기능성 MRI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는 인간의 두뇌가 사회 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과거에는 불가능하던 발견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연구는 인간의 두뇌가 다른 사람과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 이는 결코 결함이 아니라 설계상 특징이다.말하자면 인간은 사회적인 두뇌의 소유자이다. 이러한 발견은 자연스럽게 두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고립의 힘을 보여준다. 거부감이나 외로움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레고를 밟을 때 고통을 느끼는 뇌의 영역과 똑같다(Cacioppo and Patrick, 8).외로움은 아프고 그 고통은 육체적 질병으로 발전하는데, 치료 방법은 약이 아닌 우정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공동체 내에서 서로 연결되도록 설계된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을 모든 과학이 다 동의한다.관계를 맺는 존재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관계의 모델이 된다. 그는 관계를 맺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는 하늘을 쪼개면서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라 어머니의 태에서 조용히 자라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과 초기 성인기를 무명으로 생활한 후에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여 사역을 시작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에도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고, 또 겟세마네에서 함께 기도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어머니를 돌보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다.때때로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기 위해 제자들을 떠났지만 대부분의 활동을 그들과 함께 했다. 그의 삶과 사명은 그가 고립된 삶을 살기를 거부했음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에게 관계가 필수적이라면, 우리에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처럼 우리도 관계를 위해 존재한다. 삼위일체 곧 영원히 관계적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완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예수님이 역사상 가장 “완전하게 살았던” 인간이었기에, 누구라도 공동체 없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다. 마음이 외로운외로움이 넘쳐도 스스로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구원들은 ‘UCLA 외로움 척도’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어려운 질문에 답하고 실제 관계와 일상 습관을 제대로 파악할 때까지 결코 스스로를 “외롭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나는 외로운가?나는 30대 중반 기혼에 아이가 셋이고 생계유지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런 내가 어떻게 외로울 수 있을까? 아내는 최근에 내가 가장 좋아할 휴가는 감시가 느슨한 감옥에서 두 주를 보내는 것일 거라고 농담했다. 세 끼 식사에 마당에서 보내는 여유 있는 시간, 그리고 우는 아이들도 없고 말이다. 아내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하지만 나는 지금 이십대 때만큼 친한 친구가 많지 않고, 여가 시간도 전보다 줄어들었고, 또 대학 때처럼 밤늦게까지 놀 에너지도 부족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대부분의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20대와 30대와 40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때가 사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바쁘지만 관계는 끊어져 있다. 우리가 가진 여러 관계는 다 피상적이다. (소셜 미디어는 잘해야 외로움 해소에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뇌와 마음은 할 일이 많이 정신없다고 소리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외로워서 고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외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고립과 싸울 수 있을까? 고독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또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외로운 자를 가족에 포함시킨다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시편 68편에서 다윗은 아버지 주님을 찬양한다.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시편 68:5-6.이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인가? 그는 외로운 자를 가족 안에 두신다. 외로움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가장 깊은 형태의 고독에서 탈출하는 것, 곧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포함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옹호자, 해방자이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독의 감옥에서 가족이 주는 자유로 해방시켜 주신다. 물론 여기에 묘사된 가정생활은 생물학적인 부부와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다. 복음은 사회적이다우리가 가진 좋은 소식은 환원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복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은 관계적 차원이다. 창세기 3장의 저주는 관계적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갈등, 아내와 아이 사이의 고통, 하와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 사이의 적대감.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서 역전되는 저주 또한 관계적이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가족이다. 교회는 증거, 교제, 환대, 민족 화해를 통해 형성된다. 영원조차도 사람과 장소로 묘사된다. 우리 미국인은 심할 정도로 개인주의적 틀에서 성경을 읽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는 오로지 복수대명사만 들어있다.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주소서…. 우리의 죄를….”) 바울은 “우리 주님”을 53번이나 썼다. 그에 반해 “나의 주님”은 딱 한 번만 썼다. 우리의 구원은 개인적인 것 이상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썼다.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베드로전서 2:9-10.교회에서 외로움에 반응하기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은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 육성을 우선시하도록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복음의 능력으로 외로움을 물리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1. 등록을 통한 소속감 만들기내가 루이빌에 있는 ‘잠시 머무는 교회’(Sojourn Church)의 교인등록팀으로 일할 때, 우리는 등록교인 자격을 단순히 한 교회에 소속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 전환은 중요하다. 교회에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씩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갈망에 호소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초대임을 발견했다.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나 자존감, 의미 있는 일, 결혼, 또는 자녀가 아니라 소속감이야말로 음식과 주거지를 뛰어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교인에서 우리는 단순히 “나는 헌신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속해 있습니다”라고 한다. 새로운 교인이 교회에 대한 공개적인 헌신을 선언한다면, 교회도 그들을 향한 공개적인 선언을 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조셉 헬러맨(Joseph Hellerman)은 When the Church was Family(교회가 가족이었을 때)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영성 형성은 주로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발생한다. 지역교회에서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만족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이해에서 더 발전하며, 하나님 및 다른 사람과 건전한 관계를 맺는 능력에서도 더 성숙해진다. 이것은 대인관계의 불화와 갈등 해결이라는 종종 지저분한 과정을 통해서까지도 자기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용감한 그리스도인에게 특히 해당한다. 장기적 인간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정한 발전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다. 한 교회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성장하기 마련이다.헌신하도록 도전하라.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에 소속하도록 초대하라. 2. 생명을 주는 공동체를 우선시하라나는 생명을 주는 공동체 옹호자이다. 한 달에 몇 번 누군가의 집에 모이는 소그룹 모임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내 희망은 성인, 십대 및 어린이가 다함께 진정한 공동체의 리듬을 찾는 것이다. 소그룹은 달력에 표시한 시간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이다. 건강한 그룹은 서로 격려하고, 도전하고, 또 지원한다. 나 역시 공동체 모임에 매진하고 있지만 교회에서 공동체를 육성하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가 현재 주일학교 공과공부, 주중 예배 또는 지역사회 봉사 등등을 통해 공동체를 제공하고 있다면, 이미 구축한 그런 공동체를 더 발전시킬 방안을 고민해 보라. 필요하다면 더 깊은 관계를 증진하기 위한 전혀 새로운 공동체도 만들어 보라. 3. 공유하는 리더십에 대한 약속외로움이 서구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우리는 또한 동시에 다양한 회중과 사역의 부족, 많은 지도자의 도덕적, 관계적 실패 등과 같이 몇 가지 전혀 다른 긴급한 과제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흔하게 발생하는 리더십의 실패는 가장 먼저 관계와 책임, 공유된 권위의 실패에서 비롯한 것이다. 교회가 외로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리더라면 외롭기 마련이다”는 논리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물론 회중이나 조직을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리더십은 참으로 무거운 짐이지만, 그 리더십을 서로 나눔으로 외로움을 크게 완화할 수 있다. 건강한 장로, 직원 또는 자원봉사자 등으로 이뤄진 헌신된 팀과 함께 만들어 가는 목회는 한 명의 목사 또는 지도자의 부담을 줄이고 교회 사역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보호한다. 4. 우정과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많은 교회가 결혼, 육아, 가족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가르치지만, 우정과 공동체에 대한 심도 깊은 설교 시리즈를 듣는 것은 드물다. 그러나 구약은 가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소명,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그리고 우정과 충성에 관한 지혜를 강조한다. 신약은 예수님의 긴밀한 관계적 제자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증거, 서신서의 “서로”를 향한 명령,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누릴 영원한 교제의 소망에 대한 비전을 제공한다. 교회는 중점적으로 설교하는 내용을 홍보하기 마련이다. 우애와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교회는 강단을 활용하여 외로움 전염병을 퇴치할 것이다.5. 서로에게 헌신하라서구 개인주의는 전례 없는 사회적 고립을 촉발시켰기에 우리는 지역교회를 통해서 인간 본성과 공동체에 대한 성경적 비전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바울서신서는 희생적인 관계를 통해 지역교회 안에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로마서 12:10-13의 부르심을 점점 더 구체화하기를 바란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원제: How Your Church Can Respond to the Loneliness Epidemic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외로움
공동체
전염병
교회등록
소그룹의중요성
예수님의사회생활
사회적복음
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
by Garrett Kell
2022-06-24
“어떻게 다른 사람을, 특히 목사를 믿을 수 있을까요?”최근디모데후서 2장을 함께 공부하다가 마음이 여린 한 자매가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가 거짓 교사들의 위험과 부겔로와 허모게네[딤후 1:15], 데마[딤후 4:10] 같은 지도자의 배교를 토론하던 참이었다. 자매의 표정이 몹시 난감해 보였다. 최근에 남침례교단(SBC) 내부의 학대·부패·은폐 진상 보고서가 공개된 터라, 자매의 질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들 공감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양 떼를 보살펴야 할 목사들이 오히려 양 떼를 해치는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끔찍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설사 그러한 위선자들에게 직접이든 간접이든 상처를 입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교회에 거는 우리의 신뢰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아홉 가지 경고 신호우리는 지도자 전부를 의심하는 태도를 갖는 대신에 분별력을 기르고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한다(벧전 5:8; 요일 4:1).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목회자라고 모두 학대를 일삼는 늑대는 아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부(副)목자들(undershepherds)도 역시 자신의 잘못과 약점 때문에 고뇌하고 씨름하는 양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이 목회자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정도라면, 그때는 심각한 우려와 엄정한 조치가 따라야 한다. 1. 고립되어 있다목자를 양 떼가 알 수 있어야 한다. 강단에 서는 것은 목사의 책임 중 작은 일부일 뿐이다. 교인들이 목사의 삶이 어떠한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면, 교인들은 목사의 삶을 파악할 수 없고, 또 목사의 믿음도 본받을 수 없다(히 13:7).위험한 목사는 지켜보는 눈을 피하려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죄는 그런 고립 속에서 몸집을 키운다. 목사의 삶은 지켜보는 눈에 열려 있어야 한다.분명히 말하건대, 목사도 하나님과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교인이 목사와 친밀하고 개인적인 우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경건하고 성숙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야 함은 분명하며, 목사는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목사는 매우 의심스럽다.2. 무책임하다믿을 수 있는 목사는 책임을 강조한다. 경건한 복음사역의 파트너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목사는 모든 종류의 악에 취약하다.혼자서 이끄는 목회자는 강압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한다. 따라서 가능하면 자질을 갖춘 복수의 장로들로 이루어진 회를 조직해야 한다. 함께하는 동료가 적어도 괜찮을 때나 상황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요점은 반드시 다수여야 한다는 것보다는 어떤 자세가 요구되느냐에 관한 것이다. 함께하는 동역자 없이 혼자서라도 목자는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목사를 죄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이유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이와 같은 책임 구조를 내장하도록 교회를 설계하셨다. 그래서 함께 책임을 지는 구조에 있는 동료 목사들이나 친구들은 “예스 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비판을 꺼려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들은 담임 목사를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게 만드는(딤전 3:1-7) 용감한 사랑을 그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목사인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를 지지하고 격려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그들의 무언의 행동이 성경적 사랑에서 편향된 충성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3. 방어적이다위의 논의를 이어가자면, 경건한 목사들은 교인들이 피드백을 하고, 함께 걱정하고, 목사가 충실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도록 장려할 것이다.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방어하려 드는 목사를 경계하라. 비판이 대역죄 취급하는 교회는 목사에게도, 목사의 보살핌을 받는 교인들에게도 영적으로 안전한 환경이 못 된다.예를 들어, 이건 내가 확신하는 것인데, 목사의 강단 사역을 점검하는 어떤 공식 장치가 있는 교회라면, 그 목사는 이를 통해 겸손한 자세를 견고히 유지할 수 있고 또한 방어적인 자세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직원 모임이나 장로 모임, 아니면 별도로 정한 “예배 리뷰” 시간을 통해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 환경이 어떠하든 핑계대지 말고, 반드시 목사는 바로잡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날마다 성장하도록 힘써야 하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4. 권리를 주장한다예수님을 섬기는 일을 크나큰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는 목사가 있다. 이런 목사는 특별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나는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가 그들을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목사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던 한 교회를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목사는 그동안 자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양을 이용하고 욕망을 채우는 은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교인들의 삶에 선한 영향력도, 그리고 악한 영향력도 크게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목사는 권리를 주장할 게 아니라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원해야 한다. 목사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선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고 있는 바로 그 교인들에게 자신이 잘못되거나 잘못했을 때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또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내가 주님께 불충하는 데도 나를 쫓아내지 않을 그런 교회라면 나는 절대로 목회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우리 교회 앞에서 종종 이야기한다.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에게 감명 받지 않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필요하다고. 이것은 목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5. 욕심이 많다예수님을 닮아가는 목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넉넉히 베푼다. 감사하지 못하는 목사의 특징은 욕심이다. 이 욕심은 돈, 힘, 관심, 또는 인정을 획득하려는 욕구로 나타날 수 있다.탐욕스러운 목사는 사람들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탐욕 중에서 성적 학대는 특히나 끔찍한 것이다. 학대하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자기만족에 신경을 쓴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가 충족된다면 누가 다치든 상관하지 않는 거머리 같은 족속이다(잠 30:15). 최근에 공개된 SBC 목회자 학대 보고서는 섹스와 권력에 굶주려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그 겉모습을 내보이려는(딤후 3:5) 남자들의 썩은 열매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이런 것이 탐욕의 죄다. 6. 통제한다 한번은 어떤 목사가 “내가 책임자니까 내 방식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놀랍게도 그 교인들은 “아멘!”이라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목사는 성경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자기 뜻에 복종하게 한다.통제하려 드는 사람이 모두 사악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감언이설로 취약한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한다. 이런 포식자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체하지만, 그가 늘어놓는 미사여구에는 속셈이 따로 있다. 이것은 자기가 보살피고 있는 사람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전술이다.물론 우리는 이것을 어려운 시기에 필요한 용기 있는 리더십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할 때마다 경고 신호를 울린다면, 그것은 합당한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리더십이 부드러움과 겸손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7. 냉담하다목사가 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부도덕한 일을 농담거리쯤으로 얘기하고 있는가? 어떤 죄에 집착하고, 다른 죄들은 가볍게 여기는가? 전 세계의 아젠다가 되어 있는 학대 사건들을 부정하는가?여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여성들은 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식으로, 남성우월주의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안에 있는 자매들, 특히 강한 자매들을 얕보는가?과부, 고아, 소수자, 외국인 같은 취약계층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또 어떤 식으로 관심을 보이는가?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또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말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온유하고 온화하게 대하는가(딤후 2:24-26), 아니면 얕잡아 보고 거칠게 대하는가?공감능력과 친절의 결여는 눈에 띄는 경고 신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항목들 중 어느 것을 올바로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인가?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실족한다. 그러나 성령이 빚어주시는 확신이나 경건한 책망에 대한 감수성의 결여는 명백히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8. 패거리 짓는다SBC 학대 보고서에서 가장 기괴한 면의 하나는 힘 있는 사람들이―희생자들을 비난하고―자기네끼리 서로 보호했다는 사실이다. 시종일관 그들은 복음의 사역을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기네 부족(tribe)을 진리의 유일한 수호자로 여기는 목사들은 그들의 담장 너머에서 제기되는 반드시 필요한 교정 요구를 묵살한다. 그들의 부족을 진리의 수호자로 보는 목사들은 그들의 성벽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교정조치에 저항할 것이다. 통계와 재무 보고서를 성공의 증거로 들이대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외부 기관에 학대 사실을 보고하는 걸 선교에 위협이 된다며 거부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선교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자기가 속한 부족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서 유쾌한 친교를 나누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자기가 속한 부족을 맹목적으로 변호한다면, 이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9. 균형 잡히지 않은 복음성화를 요구하지 않는 칭의 메시지는 불완전하다(갈 1:4; 히 12:14). 목회자가 전도나 칭의에만 치중하고 경건의 추구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면,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미워하라고(롬 12:9), 죄에서 벗어나라고(딤후 2:22),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라고(마 5:8) 명하신다. 교인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촉구하지 않는 걸 피하는 목사―또는 단순히 외적인 ‘거룩함’(예를 들어, 술 마시면 안 된다, 춤추면 안 된다, 요가바지 입으면 안 된다)에 안주하는 목사―는 편파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실상은, 숨겨 놓은 죄에 그의 양심이 가책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명백한 명령을 회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라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목사는 위험하다. 그런 목사는 심각한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한 목사는 도움과 치유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도구 중 하나이다.다시 말하건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품을 불완전하게 발하는 충성된 부목자들을 통하여서도 그의 양 떼를 돌보신다(고전 11:1). 충성된 목자들이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처럼 그들은 폭력이 아니라 온유함을 뿜어낸다(벧전 5:3). 예수님처럼 그들은 분노가 아니라 인내심을 보여준다(딛 1:7). 예수님처럼 그들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의 본이 된다(벧전 5:5-6). 예수님처럼 그들은 탐욕이 아니라 넉넉한 마음을 온몸으로 실천한다(딤전 3:3).충성된 목사 찾기는 꼭 해야 할 일이다. 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신뢰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과 맹목적 믿음은 전혀 다르다. 신뢰는 획득하는 것이다. 교회에 속하기 전에 먼저 목사를 알아보라.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확실한 목사를 따르라(고전 11:1; 살전 2:10).물론, 예수님을 신뢰하고 분별력을 발휘하고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한다고 해도 여전히 목사에게 상처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당신의 이야기라면, 당신을 학대하는 목사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충성된 목사의 돌봄을 받으며 신뢰를 회복하도록 도우실 것이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결코 거짓말 하지 않으시는, 결코 착취하지 않으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언제나 성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그리고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시는―하나님께서는 남은 무리와, 곧 자신의 욕망에도, 세상의 우상에도 무릎 꿇지 않은 많은 사람들과 항상 함께하심을(왕상 19:18)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그분께 맡김으로써 그분을 신뢰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남은 자들을 신뢰함으로써 그분께 맡기는 우리의 신뢰를 여실히 보여준다.집으로 가는 양떼의 여정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걸음을 주께서 돌보신다.원제: When to Distrust Your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연관 주제 함께 읽기 ▶ 이리 식별법 ▶ 이리를 조심하라: 거짓 교사의 세 가지 징후▶ 거짓 선생에 관한 놀라운 진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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