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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의 주객전도
by 전재훈
2024-01-19
주인과 손님이 바뀌었다는 의미의 주객전도(主客顚倒).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집을 지키는 개가 아니라 개를 지키는 집처럼, 몸에 맞는 옷을 사기보다 옷에 몸을 맞추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 피시방에서 피시 이용료로 돈을 벌기보다 피시방에서 파는 음식으로 돈을 버는 것과 같은 일도 있다. 유재석이 다른 프로에 게스트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도 게스트로 간 유재석이 진행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교회 안에서도 주객전도 현상은 많다. 섬기라고 항존직을 뽑았더니 섬김을 받고 있더라 하는 식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에서 십일조를 떼어 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예물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받으려는 투자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하루는 저녁이 되어 잠을 자고 아침이 되어 하루를 일하고 저녁이 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아담은 창조 후 안식을 먼저 맞이하고 그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산에 들어가 1년을 예배하고 40년의 광야를 살아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하루가 끝난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예배에 나와 위로와 치료를 받는다. 은혜를 받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서 상을 받으려고 애쓴다. 주일에 주 앞에 나와 주님의 힘을 얻어서 일주일을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간 사람은 다음 주일에 감사를 가지고 재단에 나오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가 지친 마음으로 주일에 나오는 사람은 자신이 일한 만큼의 보상을 기대하고 나온다. 예배에 감사를 가지고 나오기보다 자신의 의를 가지고 나오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열심히 주의 일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열심히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한다. 어떤 선한 결과물이 나오면 전자는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지만 후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린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은혜를 받은 것에 감사하여 드리는 사람과 은혜를 받으려고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지만,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물개박수를 치며 찬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감동시켜 은혜를 받으려고 물개박수를 치며 찬양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잘 섬겨서 재물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가 재물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재물이 목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박씨를 받으려고 제비 다리를 고친 놀부처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것을 얻으려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마 6:33) 이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 했더니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상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이다. 하지만 수많은 설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선포하고 있다. 다윗을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선포하기보다 어린 목동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지는 설교한다. 어린 목동도 사용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된 다윗의 성공을 찬양하게 만들고 있다. 모든 사람이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여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조차도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을 선포하기보다, 바디매오의 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과 근성을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서 우리도 포기하지 말고 부르짖을 것을 설교한다. 하나님이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한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변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전하는 것이 주객전도가 일어난 설교인 셈이다. 구원에 있어서도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구원하신 자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연단에 통과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구원 얻은 자가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식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분이심에도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으로 바꿔 버렸다. 하늘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아닌 우리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천국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기보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전하는 것이 문제이다. 거기에 덧붙여 천국에서 더 큰 집과, 더 좋은 자리와, 더 많은 상을 얻는 방법이 있다는 식이다. 은혜여야 할 많은 것들이 수고에 대한 대가나 삯, 혹은 보상의 개념으로 바뀐 셈이다.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주객전도 현상의 백미는 역시 주인이신 하나님을 나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어떻게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리고 내 기도대로 응답해 주시도록 만들려고 한다. 기도할 때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기보다 내 기도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이 주를 이룬다.이 시대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기보다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바쁘실 듯하다. 마치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통해 내가 영화롭게 되며 그분을 영원토록 부려 먹는 것과 같이 되었다.내 신앙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해체가 탈회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by Jesse Furey
2024-01-12
“아직도 예수를 믿기는 해. 하지만 나 자신을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어.” 오랜 친구가 이렇게 말하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충격에 나는 거의 커피를 뱉을 뻔했다. “그러면 안 돼!”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참았다. 그날 나는 친구가 “교회”에 느끼는 좌절감을, 그리고 신앙을 해체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더듬거리듯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대학 도시에서 목회를 하는 나는 점점 더 자주 이런 대화를 나눈다. 신앙 여정에서 해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이전 세대에게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표현이 특징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교회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신앙과 배교를 가르는 미지의 영역이 이제는 활짝 열린 상태이다. 친구와 나눴던 그 대화를 되돌아보면, 그때 내가 그가 다시 정통 신앙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될 책을 소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 션 맥도웰과 존 메리어트가 쓴 표류: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믿는 바를 해체하기는 참으로 소중한 자원이다. Set Adrift: Deconstructing What You Believe Without Sinking Your FaithSEAN MCDOWELL AND JOHN MARRIOTT기독교의 비본질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 이 책은 많은 사람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질문과 문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당신은 역사상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모두 다 똑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각 장은 진정으로 기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은 신앙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분석하고, 다시 생각하고, 나아가서 재조립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한다. ZONDERVAN. 192 PP.의심의 안개 이 책의 표지는 짙은 안개가 밀려오는 바다에서 누군가 패들보드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시각적 기준점을 잃는 순간, 방향 감각을 잃게 될 것은 뻔하다. 그렇다면 바다에 휩쓸려 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움직이지 말아야 할까? 앞으로 노를 젓는다면, 그게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도리어 더 큰 위험을 향해 가는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해체 과정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의심의 짙은 안개가 낀 바다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낀다. 안개는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정치적일 수도 있다: 아니, 어떻게 우리 교회의 그 많은 교인이 저 사람에게 투표했다는 거야? 또는 신학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저주를 주기로 예정한 사람들이 있다고? 아니면 윤리적 문제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세상에 왜 이리 고통과 악이 만연할까? 그리고 많은 경우에 안개는 개인적 이유로 발생한다: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의심의 원인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표류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들의 방향을 잡아줄 무언가와 그 길을 따라가는 데 도움을 주는 안내자이다. 이 책은 바이올라 출신의 두 사람, 기독교 변증학 부교수 맥도웰과 기독교 사상 센터 소장 메리어트가 힘을 합쳐서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안내판을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이다. 해체 재정의하기표류는 해체의 철학적 측면이나 문화 현상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저자들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시작한 철학적, 문학적 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며 해체의 기술적 의미를 고려하는 데에는 고작 몇 페이지를 할애할 뿐이다. 자신의 신앙을 재평가하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데리다가 누군지도 모르며, 맥도웰과 메리어트는 기독교가 억압적이거나 편협하기에 해체를 시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해체 과정에서 종종 듣는 말은 이런 식이다. 표류는 해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수를 따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받은 믿음이 애초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완전히 정제된 선인지 여부를 의심하기 때문에 생기는 분석 과정으로서 찌꺼끼를 걸러냄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의이다. 예를 들어, 알리사 차일더스는 “해체”라는 용어가 가진 광범위한 의미 속에는 “순진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위험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무엇”으로 정의할 여지가 있기에, 애초에 “해체”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또 다른 선택은 성경에 따라 신앙을 정제하는 과정으로서 ‘탈문화화’(disenculturation)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해체’와 같은 용어가 주는 부담에서 피하려는 시도이다. 표류는 일단 해체를 긍정적인 의미로 채우려는 선택을 반영한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저자는 정직한 질문자가 의심을 극복하고 정통 기독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한다. 잘 해체하기두 저자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순전한” 기독교를 해체 과정의 경계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지구의 나이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 및 천년 왕국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 서로 간에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권위가 우리의 “경험, 직관, 문화 또는 다른 것”에 위치한다는 진보적 관점에 맞서서, 성경적 권위에 대한 역사적 교리를 옹호하는 데 한 장을 할애한다. 일부 교리에 대해서는 건전한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그러한 토론조차도 성경의 권위라는 경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건전한 해체를 위해서는 단지 교리에 대한 신실함을 넘어서 사회적 상상까지도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지적으로는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지만, 느낌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저자는 “모든 사회적 상상에는 (일반적인) 세상과 (특정한) 개인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무언의 비전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이 특히 탁월하게 이바지하는 부분은 해체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사회적 상상과 교리 사이의 갈등을 인식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다양한 해체의 단계에 있는 여러 친구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개인마다 가진 사회적 상상 사이의 격차는 메울 수 없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종종 오해와 좌절로 이어졌다. 이 책이 정확하게 지적하는 지점은 바로 개인마다 가진 근본적인 가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가정에 의해 통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혼자 표류하지 말라표류는 해체의 초기에 있는 사람에게 특히 유용하다. 이 책은 해체자들을 평가 대상의 표본으로 다루기보다는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로 다룬다. 개인별 독서뿐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도 좋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더불어 사는 삶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불확실하고 낙담할 때일수록 더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믿지 않는 상태에서 그 사람은 결코 스스로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말씀을 전달하고 선포하는 다른 형제이다.” 사역자라면 의심의 안개 속에서 표류 중이라며 고백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손에 이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어야 한다. 원제: Don’t Let Deconstruction Become Deconvers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나는 내 트랜스젠더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by 익명
2024-01-09
예수님은 가족의 갈등을 십자가 지는 것과 연결한다(눅 14:26-27). 나는 이 가르침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우리 큰아들과 나, 그리고 아내 및 다른 가족 사이에서 일종의 죽음이 일어나는 일이다. 아들은 어릴 때만 해도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고 교회의 다양한 지체들과도 신앙 대화를 꾸준하게 나눴다. 우리 부부는 가정에서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쳤다. 따라서 작년에 성 혐오증에 빠진 아들이 자신이 행여 트랜스젠더가 아닌가를 놓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채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열여덟 살 된 아들은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믿었고, 동시에 LGBT+ 정체성이 성경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왜입니까? 우리 부부는 물밀듯 몰려오는 질문들과 싸워야 했다. 도대체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건데? 아들이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도대체 뭔지를 찾고 또 찾았지만, 우리가 발견한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옛 친구 하나가 코로나 시절에 내 아들의 삶에 스며들었고, 둘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다양한 LGBT+ 공동체를 거친 사람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가르쳤는데, 거기에는 친구를 향해서 사랑과 관심을 쏟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내 아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은 몇몇 다른 사람들이 LGBT+ 생활 방식도 얼마든지 기독교와 일치할 수 있다고 아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모든 LGBT+ 정체성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아들지만, 그는 현재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인정한다. 우리 부부는 아들이 진정한 신자라면 그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갈 5:19-21; 고전 6:9-10). 아들이 동성애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와 순종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아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결정을 내린 이후로, 나는 LGBT+ 정체성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모든 잠재 요인과 원인에 대한 책을 읽었다. 정말로 내적 또는 외적 끌림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주님께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함을 갈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주님의 주권에 항복함을 의미한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내 아들과 내 가족을 위한 가장 좋은 대답은 언제나 예수님이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한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 고백을 삶에서 실천하는 건 어렵기만 한다. 아들을 사랑하기동성애를 선언하고 몇 달 동안 아들은 대부분 폐쇄적인 시간을 보냈고 우리조차도 적대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에 대한 확신이 커짐에 따라 조금씩 주변을 향해서 마음을 열었다. 오늘날 그는 다정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예를 들어, 마침내 아들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호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선가 자신이 선호하는 이름과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서 그는 우리가 부모로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막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육신의 존귀함을 무시하는 성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어느 날 대화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이름과 대명사를 사용할 수 없다는 우리 말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가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할 수 없어요.” 그날 아들은 방으로 가서 통곡하며 울었다. 나와 아내도 무력감을 느끼며 울었다. 물론, 그가 원하는 이름과 대명사로 부르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아들이 기뻐하는 방식으로 같이 기뻐하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이렇게까지 힘든 순간을 맞으면, 아무리 신앙을 굳건히 갖는다고 해도 아들이 요구하는 변화가 결국에는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에도 해를 끼칠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쉽지 않다.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 아들은 작년 크리스마스 휴가 내내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암울한 크리스마스였던 그 시간은 몇 달이 되었고, 그 기간 내내 우리는 행여라도 자살한 아들을 방에서 보는 게 아닐까 마음 졸여야만 했다. 우리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왜 우리는 아들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 수 없는 걸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아들은 우리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몰랐던 게 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도 그는 제대로 몰랐다. 누가복음 14:26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녀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건 문자 그대로의 미움이 아니다. 성경에는 자녀를 기뻐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선한 명령으로 가득하다(신 4:9; 잠 17:6; 사 49:15-16; 말 4:6; 골 3:21; 엡 6:1-4). 예수님은 여기에 반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조하는 게 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할 때 치러야 하는 희생의 정도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가족, 심지어 당신의 자녀에게도 증오로 보일 수도 있다.우리 부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건 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들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항상 아들이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의 죄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리는 도무지 “악을 기뻐할 수” 없다. 비록 우리의 사랑이 아들에게는 미움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기뻐해야만” 한다(고린도전서 13장).우리 부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죽어야만 한다. 1.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인생을 충만하게 살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2.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아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줄 수 있다.3.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이 더 큰 삶과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다.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 이건 부모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처음부터 정해진 패턴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다. 그건 부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오로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이 험난한 물살을 헤쳐나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은혜밖에 없음을 쉬지 않고 확증한다. 아들의 어려움은 우리가 예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로지 우리 구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부활의 생명으로 꽃피운 유일한 죽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건 예수님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이자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며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본다면, 영적으로 장님이 된 아들로 인한 나의 계속되는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받고 싶은 것을 받으면서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죽음을 낭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원제: I Love My Transgender Child. I Love Jesus Mor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주시는 시련보다 크다
by Abigail Dodds
2024-01-08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 오래되고 진부한 이 말이 나를 조롱했다. 나는 살면서 하나님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주신 게 분명하다고 여러 번 느꼈다. 생명을 위협하는 발작으로 인해 임사 체험까지 한 아들을 둔 사람에게,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는 또 어떤가? 무력함? 만성통증? 어쩌면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나쁜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모든 상황을 견디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그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옆방에서 구급대원들이 발작하는 아들을 치료하는 동안 땀에 젖어 기절한 채 욕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나를 생각하면, 그건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사자와 우리의 한계“갤럽, 브리, 뛰어. 너희는 군마라는 사실을 기억해”(The Horse and His Boy, 270). 자신의 조국 칼로르멘의 악을 피해 도망친 어린 공주 아라비스는 말하는 말 브리에게 적들로부터 최대한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했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7권 중 하나인 말과 소년(A Horse and His Boy)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리와 친구 흐윈(Hwin)은 각자 나름 생각하기에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거 같다. “확실히 두 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리고 이렇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 둘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말하는 두 마리의 말과 그 등에 올라탄 소년과 소녀의 필사적인 질주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공포의 정점을 향해서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그들은 칼로르멘 군인들로 이루어진 끔찍한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가까이에서는 더 위험한 적인 위대한 사자가 바로 뒤에서 포효하고 있었다.“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271). 동화 속 이 단순한 장면이 지난 십 년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측면에서 내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어려움 속에서 나의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2)어려운 시기에 나를 짓누르는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3)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짓누르기로 선택하셨는지와 관련해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엿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욕실 기절 사건에 적용하기브리는 위대한 사자 아슬란을 등에 태우고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내 경우에는 위기를 맞은 아들과 필사적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을 잃어버린 끔찍한 생리 반응을 어떻게 사자를 등에 태우고 속도를 더 내는 브리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비슷한 게 없다. 하지만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던 나는 나만의 새로운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거기 누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내 아들을 구해 달라고 간구했고, 동시에 주님을 더 믿기 위해서 내게는 새로운 변속 기어가 필요했다. 내가 매 순간 아들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항상 계셨다. 나는 아들의 발작을 멈출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다. 아들이 죽는다고 내가 따라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내 아들 곁에도 계실 것이다. 브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내 생각에 괜찮다 싶을 정도만 믿음을 가졌다. 사실 그게 대단한 믿음도 아니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다 감당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한 시련이 아니었다. 위대한 사자의 추격과 함께 나는 새로운 믿음의 차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당신은 알고 있는가? 당신이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상 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창조자이자 유지자가 아니기에,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당신의 한계를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다. 내 한계를 넘어서 우리는 모든 걸 다 바쳤고,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나의 한계를 제대로 시험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나는 안 돼, 이건 내 한계를 넘은 거야, 이런 손해는 감당할 수 없어, 이런 시험은 말도 안 돼, 난 이런 결과를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필요한 압력을 행사하신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9)알다시피, 고난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믿음이 우리가 원래 강인한 체질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는 건 내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다.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바닥에서 박박 기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할 수 있다. 변치 않는 사랑의 길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그분을 의지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음을 종종 보여주신다. 그리고 직관에 거슬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단지 격려나 긍정적인 사고 또는 확언을 통해서 우리를 그 믿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다. 브리의 경우처럼 고통과 시련을 증가시킴으로,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해서 달려나가도록 인도하신다. 브리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자, 위대한 사자는 그들과 그들을 쫓는 진정한 적들 사이의 거리를 더 벌어지게 했다. 아슬란이 그들을 겁주었지만, 결국에는 그게 다 그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였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느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고 선한 일에만 복종하게 하실 뿐, 필요 없는 고통은 단 한 방울도 더하지 않으실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일이 합력하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신다(롬 8:28-29).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어라 질주하고 숨에 헐떡이도록 몰아가실 때, 그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은혜이다. 그분은 오로지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는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우리를 압박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옛 적들, 즉 세상과 육신과 마귀 사이에 거리를 두심으로써, 정말로 해를 끼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당신이 위대한 사자의 압력을 받는다고 느낄 때 결코 잊지 말라. 그의 모든 길은 변함없는 사랑이다(시 25:10). 화장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도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원제: More Than Mom Can Bea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개미가 지혜를 지고 나른다
by 필립 정
2023-12-30
올해 4월경, 광화문에 있는 큰 서점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다. 베스트 셀러를 진열해 놓은 곳에 자기 계발, 인간 관계론, 주식 투자, 토익, 경제 서적들이 뒤덮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인문학 책 진열대에 갔더니 ‘니체의 말’ 번역본과 니체의 다른 책들이 압도적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냥 서점을 나와 벚꽃이 휘날리는 경복궁을 걸으며 한참 생각해 보았다. 자기 계발, 돈과 니체의 책들의 조화가 수상해 이들의 접점을 찾으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얼마 안 가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한국 청년들의 마음이 현재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사실 내가 현재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계속 꼬리를 물고 나를 붙잡고 늘어져 과거까지 끌고 간다. 한번 과거의 선택이 잘못되면 현재의 삶이 뒤틀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삶에서 경험된 지식이 충분히 쌓여야만 현재의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고 미래를 보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판단력, 통찰력, 결정 능력을 성경도 세상도 지혜라 부른다. 단지 성경이 말하는 지혜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 출발점이 다르니 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모든 지식과 지혜가 시작된다고 한다(잠언 1:7). 경외란 하나님을 알아 가며 그의 능력에 탄복하여 존경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뜻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쌓인 놀라운 경험이 지식이고 이에서 생긴 통찰력으로 현안을 해결하며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판단력을 지혜라 부른다. 오늘 소개할 개미 선생님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가 어떤 것인지 좋은 예로 증언해 주고 있다. 개미가 인간의 스승이란다. 흥미롭지 않은가!게으른 자는 누구일까?잠언 기자는 잠언 6:6에서 게으른 자에게 “개미에게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며 나무란다. 그런데 저자는 게으른 자를 지혜가 없는 자라고 단정해 버린다. 왜 그런지 이유가 다음에 나와 있다. 이 게으른 자가 지혜 없는 자의 전형인 인격적 결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개미는 두령도, 감독도 통치자가 없어도 일하는데…(잠언 6:7)” “너는 언제까지 눕고 언제 일어나서 일하러 가겠느냐”(잠언 6:9)라고 한다. 이에 게으른 자의 반응이 매우 반항적이다. “나는 좀 더 자겠다. 졸겠다. 좀 더 누워 있겠다”(잠언 6:10)며 무시해 버린다. 저항, 반항, 분노의 모습이 여실히 그려진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 1:7)는 말씀이 여기서 떠오른다.굳이 멀리서 이런 게으른 자의 예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철없던 어린 시절이 그려지지 않는가! “내 인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마세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외치며 이불을 뒤집어 쓰는 철없던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후회를 할 모습이 여실히 그려지는 지혜 없는 자 즉 게으른 자의 전형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다.개미의 지혜개미는 게으른 자가 배워야 할 지혜로운 대상으로 묘사된다. 잠언 6장의 개미의 지혜에 묘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밀해서 두려울 정도다. 하나님을 알면 그에 대한 탄성과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왜 개미가 지혜롭다고 할까? 잠언 저자는 개미가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이도 먹을 것을 위해 여름 동안에 예비하여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잠언 6:7, 8)며 개미의 자발적인 미래 대비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개미의 이 대비 능력은 그냥 말 한마디하고 지나갈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한마디 뒤에 첩첩이 쌓인 무수한 개미들의 지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우선 개미들에게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다는 말씀에 주목해 보자. 사실 이 말씀은 과학적 사실과 맞지 않아 보인다. 분명 개미 사회는 여왕개미가 최정점에 있고 이들의 페르몬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왕개미는 페르몬을 뿌려 다른 암컷들인 일개미들의 생식 활동을 통제하고 혼자 자손 번식 활동을 도맡아 한다. 수명도 여타 개미들보다 10배 정도 길고 몸집도 거대해 생산 활동에 적합하다. 그래서 여왕개미가 사라지면 생산이 멈춰진 개미 사회는 급격히 무너져 버린다. 개미들의 생과 사가 여왕개미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결정되니 여왕개미를 최고 권력자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여왕개미를 인간 사회의 왕이나 통치자로 보면 개미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여왕개미는 생산 활동 이외 어떤 힘도 없고 통치할 권력도 갖고 있지 않다. 다른 암컷 일개미들이 콜로니를 벗어나 몰래 알을 낳으려는 것을 저지할 수도 없고 알을 못 낳을 정도로 병이 들거나 노쇠하면 일개미들에게 끌려가 굴 밖으로 버림을 받는 신세로 무력하니 여왕개미는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95퍼센트가 넘는 일개미들이 여왕개미가 낳은 알을 돌보고 새끼들을 먹이고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우기도 한다. 혼내거나 책망해도 일하지 않는 고집 세고 저항적인 게으른 자들과는 전혀 다르다.잠언 6장의 기자인 솔로몬은 이 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있다. 솔로몬은 자신이 비록 왕이지만 자신의 힘이나 권력이 게으른 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게으른 자들이 개미 조직의 일 개미들처럼 스스로 움직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사실 개미의 자발적 분업 사회에 대해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중반에 들어서야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미들의 사회적 분업의 발달에 관심을 갖고 생식 계급과 비생식 계급으로 나누고 어떻게 이들이 서로의 갈등을 이겨내고 진화해 왔는지 연구하였다. 개미가 만 이천 종이 넘어 어떤 보편적이고 일관된 질서를 찾기가 어렵지만 개미 사회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서로 돕는 역할로 진화해 왔다고 연구 결과를 내었다. 이 진화론적 관점의 연구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솔로몬은 이것을 이미 3천년 전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왕이지만 권력 없는 여왕 개미처럼 힘으로 눌러 억지로 일하게 만들 수 없음을 알고 개미의 자발성에 눈을 뜨도록 게으른 자들에게 책망과 동기 부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종적인 지시 체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돕는 개미 같은 횡적 조직 체계에 솔로몬이 이미 눈뜨고 있는 것 같다.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솔로몬이 여왕개미의 존재나 특성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미물의 조직이라도 통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데, 솔로몬이 개미의 두령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은 개미의 자발적 협력 체계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 분명하다. 솔로몬은 개미의 자발성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에 감탄하여 인간 사회도 개미 사회 같아야 한다고 보고 좋은 예를 제시하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왕정 시대에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움직여 일하는 유기적 체제를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왜 일개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알아볼 차례다. 단지 성경대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일까? 그 이상의 지혜가 숨어 있다. 왜 개미들은 자기의 자식도 아닌 여왕과 그 후손들을 위해 일하고 협력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찰스 다윈도 이 점을 매우 궁금해했다. 대부분 개미의 병사 계급은 나이 많은 일개미이다. 평생 생산 활동에 참여해 보지 못한 늙은 처녀개미가 자기 자식이 아닌 여왕개미와 그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운다. 다른 일개미들도 역할만 다를 뿐 여왕과 그 자손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다니거나 건축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몸 바쳐 한다. 다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타적인 동물이 소멸하지 않고 매우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솔로몬이 하필이면 다른 동물이 아닌 개미에게 배우라고 한 것은 이런 개미들의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헌신 때문으로 보인다. 개미는 이 이타성을 빼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개미의 이타성의 비밀은 유전자 연구가 활성화 된 현대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인간은 남녀 모두 염색체 한 쌍을 갖고 있는 이배체의 동물이다. 개미의 암컷 역시 이배체이다. 그러나 개미의 수컷은 염색체 한 벌만 갖고 있는 반수체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형제자매간 유전자의 1/2을 갖고 있지만 개미는 형제자매 간에 유전자의 3/4을 공유한다. 그러니 자기를 더 많이 닮은 형제자매의 번성을 위해 자기들의 생산 활동을 포기하고 자기의 어머니인 여왕과 여왕의 자식이자 일개미들의 형제자매를 위해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보다 훨씬 이타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조직 사회를 유지해 나간다. 그래서 동물 학자들은 모두 개미를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솔로몬의 개미에게 가서 그의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은 이런 개미의 공동체적 특성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게으른 자들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더 눕자”고 저항하며 솔로몬을 무시해 버린다. 이 게으른 자들의 태도는 그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 결과는 무섭게 나타난다.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6:11). 미래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살다가 강도와 적군같이 예고 없이 찾아온 궁핍에 무너져 버리는 인생의 비극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게으른 자들의 선택은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자신들을 기대하고 있는 공동체조차도 무너뜨린다. 솔로몬의 권면의 당사자인 르호보암이 그 좋은 예이다. 솔로몬의 사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과 그를 따르는 참모들은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저 세제를 더 강화하고 부역의 짐을 백성에게 가중시켜 집권층의 이익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반란으로 국가의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를 위하며 섬기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북쪽의 10지파를 르호보암에게서 빼앗아 가셨다. 솔로몬의 경고가 그의 게으른 자식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게으른 자들은 이렇게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선택하라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조금 더 분명히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좌우된다. 하나님의 통치와 솜씨에 놀라고 경탄하며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이고 이를 우리의 삶에 하나둘 적용하면 통찰력과 판단력, 실천하는 능력, 즉 지혜가 자라나 우리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두려움에 싸이면 맘몬 신앙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 대형 서점에 수없이 진열된 자기 계발 서적, 주식, 코인 투자 안내서, 니체의 책들은 여실히 미래에 대해 열심히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보여 준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지 내가 사는 이 미국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들의 고군분투 속에서 엄청난 부담감과 염려와 공포에 눌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지나치면 그것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지배해버린다. 이는 신앙과 같다. 마태복음 6:24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말씀하며, 주님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지혜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재물에 대한 두려움과 지나친 염려는 하나님을 중히 여기지 않는 불신앙이니 여기서 떠나라는 것이다.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현대인들이 니체에 열광하는 이유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신의 부재에 공포를 느끼며 그 부재를 극복하려고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고 스스로에 열광하는 광적인 태도가 아니면 이 불안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하지 않음에서 오는 공허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초인적 자기 극복이 현대의 뉴 노멀 시대를 겪는 공포와 많이 닮았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그 공포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압도되면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느끼는 내 존재의 무익함은 니체의 공허와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지식으로 채워지면 거기에서 오는 통찰력과 판단력의 지혜가 나를 인도하여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문제들은 풀기가 어렵고 답이 없다.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삶의 고통이 내 능력 위에 있다고 인정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그를 경험하여 얻은 지식만이 세상을 이기는 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일개미들처럼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때 지혜로 실현된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결단하고 선택을 해야 미래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한번에 건너 뛰려 하지 말고 말씀 한 구절을, 삶의 한 찰나에 적용하면 언젠가 이런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을 기대하며 꿈꾸기를 원한다.나는 이 글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앞길이 안 보여 절망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오해되어 읽히거나 그들에게 잔소리 조의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의 설교 인용 도구로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주를 깊이 의지하고 경험하여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가 충만한 목회자들의 손에 들려 지치고 힘든 한국의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혜의 왕으로 오신 주가 탄생하신 날을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
야고보서의 기도 문법을 배우자
by 최창국
2023-12-28
야고보서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약 5:13-16). 여기서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는 명령문은 현재시제로, 기도는 교회 공동체의 일상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야고보서 5:16 하반절은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제시한다. 즉, 의인의 기도는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기도에 대한 전체 단락의 핵심이다(존 윌킨슨, 성경과 치유, 374-75). 효과적인 기도는 바로 의인의 진심 어린 믿음의 기도이다. 하지만 모든 믿음의 기도가 효과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믿음의 기도가 반드시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가 치유되기를 전심으로 기도했지만 치유되지 않았다(고후 12:8). 여기서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을 통한 질병의 제거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동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바울의 관계성 속에서 나오는 질병의 새로운 용도가 곧 치유였다.중요한 것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기도의 효과를 의미하는 현재분사 에네르고우메네(energoumene, 효과적인)에 대한 문법적 또는 해석학적 논쟁이 있다. 분사 에네르고우메네가 수동태 혹은 중간태로 해석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메이어는 이 분사는 수동태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의인의 기도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 안에서 효과가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J. B. Mayer, The Epistle of St. James, 177-79). 반면에 기도의 효과에 대한 중간태(middle voice,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의 어법)의 의미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보다는 기도 자체로써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현대 주석가들이 선호하고 있다(James Adamson, TDNT (1064), vol. 2, 923-38). 기도의 효과에 대한 이 두 해석은 기도는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역사의 경험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영 등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기도의 문법을 수동태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해 성령은 능동적으로 역사하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응답을 받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기도의 문법을 중간태로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은총 또는 창조적 선물이 활성화되도록 하나님의 생명력과 리듬에 참여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된다. 잭 레비슨도 기도 실천에서 중간태의 특성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밝힌다.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직접 개입하여 역사하기보다는 출생 때 주어진 하나님의 숨-영(창 2:7)이 넘칠 정도로 채운다(toping up)고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채운다는 것은 없던 것을 갑자기 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마음과 영 등이 온전해진다는 의미라는 것을 구약 과 신약, 그리고 고대 유대 문헌과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헌에 드러난 영(ruach)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밝힌다. 따라서 “우리 속의 하나님의 영이 계속 거룩한 영으로 유지되려면 올바른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다”(잭 레비슨, 성령과 신앙, 102). 특히 하나님의 숨-영이 이미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기도 방법도 달려져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숨-영이 우리를 자극하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출생 시 주어진 “우리의 영이야말로 일차적인 기도의 동인이고, 하나님과 신자 간의 처소이며, 인간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장소이다. 하나님의 영이 이 기도를 승인할지는 몰라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런 촉발과 영감은 내면에서 나온다”(잭 레비슨, 성령과 신앙, 84).야고보서에서 효과적인 기도의 문법이 수동태의 특성보다는 중간태의 특성이 더 타당하다고 할 때, 현대 교회의 기도 이해에 주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기도의 중간태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다. 기도의 문법은 능동태와 수동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중간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의 능동성, 즉 기적과 능력을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인 기도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데 텔로스(telos), 즉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명력을 나누는 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움직이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이며, 만남과 응답의 리듬이다”(케네스 리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19).유진 피터슨도 기도의 특유한 특성을 그리스어 문법의 중간태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스어 문법책에는 중간태가 ‘행위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묘사하는 동사 용법을 말한다’고 적혀 있다. 지금 그것을 읽고 있는데, 마치 기도를 설명하는 문서를 보는 느낌이다. ‘행위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체들’이란 표현은 기도에 딱 들어맞는다. 나는 상대의 행위를 통제하지 않는다. 주문이나 의식으로 신을 움직이게 한다는 건 이미 비인격적이고 운명론적인 의지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건 힌두교적인 기도 개념이다. 나는 세상을 지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 시작한 행위에 가담하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결과에 참여한다. 행위를 하지도, 행위에 지배받지도 않았지만 주님이 뜻하신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Eugene Peterson, The Contemplative Paster, 103-04).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참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 존재론적 동역자가 아니라 실천적 동역자가 된다. 물론 인간의 욕구가 기도 생활의 가장 원초적인 동기가 된다. 그러나 기도에서 욕구를 위한 차원이 기초적이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기도의 본질적 목적은 단지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력을 경험하는 데 있다.레오나르도 보프는 그가 어느 날 그를 설레게 했던 한 부인과의 만남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한다. 그가 만난 부인은 열다섯 살 된 아들과 함께 도시의 쓰레기 집하장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수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그 여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경직되어 웅크리고 있었고 울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보프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지경에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그때 그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부드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눈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다보았다. ‘저요?’ ‘어떻게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제 아버지가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제가 그의 손에 있음을 느낄 수 없다면, 그 누구에게 제가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보프는 이 만남을 통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마르크스는 잘못 생각하였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 신앙은 마약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빛을 발하는 해방이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삶이다”(Dorothee Solle, The Silent Cry, 294에서 인용). 우리는 여기서 기도는 단지 말이 아니며, 생산품도 아니며, 신비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기도의 이러한 신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통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변화시킨다. 방향이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통치 관계로 만들지만,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만든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사랑이 통치를 무너뜨리고 사랑이 드러남을 알게 되는 바로 이 점에서 기도 또한 작용한다. 그것은 사랑의 한 언어다. 그리고 기도가 사랑의 언어가 아닌 곳에서는 그것을 생략할 수 있다”(Dorothee Solle, The Silent Cry, 296). 여기서 사랑은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어’라고 말하는 종속성과 같은 것이다. 이 종속성은 서로를 충만하게 하는 종속성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사랑이 넘치는 종속성이다. 기도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중 경청’의 엄중한 교훈
by Trevin Wax
2023-12-27
내 믿음의 영웅 중 한 명인 존 스토트는 “이중 경청”라는 개념을 대중화했다. 그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형성되고 또한 현대 세계의 현실에 완전히 몰입한” 기독교인의 지성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스토트는 “이중 거부”라는 맥락에서 이중 경청이 필요하다는 프레임을 만들었다.이중 거부첫째,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성경 공부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말씀이 세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세상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주변의 사건과 경향, 또는 이론에 너무 매료되어 이 세상을 말씀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또는 더 나쁘게는 세상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중 거부가 의미하는 바는 현실도피적 후퇴의 길과 혼합주의적 순응의 길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토트의 비전은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이 옹호하는 “선교적 만남”과 유사하다. 선교와 만남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하다.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선교적 접점이 없는 만남이라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면 순결이라는 환상에는 이를지 몰라도, 우리가 다가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 이중 경청의 필요성스토트는 이중 경청을 이중 거부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우리는 기대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혼란스럽고 원하지 않는 말씀을 주실 수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주변 세계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먼저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그들에게 말씀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고 노력한다. 스토트의 설명이다. 우리는 겸손한 경외심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이해하게 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비판적 예민함으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을 믿고 순종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세상과 공감하고 복음이 세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하겠다고 결심한다. 팀 켈러는 이중 경청에 있어서 최고의 모델이다. 성경에 뿌리를 두고, 청교도에 대한 독서와 더 폭넓은 개혁 전통에 참여하면서 신학적 성찰에 흠뻑 젖었던 이가 켈러이다. 그는 또한 사회 동향에 대해 늘 호기심이 많았으며, 비그리스도인의 문헌과 분석에도 정통했다. 그랬기에 켈러는 현대의 우상 숭배가 성경의 진리와 접촉하도록, 그것도 가슴을 찌르는 방식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켈러를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다. 즉 말씀에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임과 동시에 말씀에 비추어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분석하는 자세이다. 존 웹스터의 중요한 상기이중 경청에 대한 스토트의 제안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그건 스토트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이 오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말씀을 듣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먼저 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 스토트의 비전은 말씀에서 시작하여 그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다. 그에 반해서 이중 경청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교사가 우선 성경에 깊이 빠졌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의 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야 세상이 더 집중해서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 웹스터(John Webster)가 “제자도와 부르심”이라는 강의에서 주는 중요한 교훈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는 사실상 스토트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임무가 항상 세상이 아닌 말씀에서 시작하고 계속해서 말씀을 강조되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실한 교회는 세상의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흥분되고 불안정한 교회는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으며, 안정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이고 인내심 있는 관심, 그리고 과도한 자극을 피하는 데서 비롯된다. 교회가 주변의 변화하는 문화만큼 유행에 빠지고 흥분한다면, 교회는 참으로 독특한 무엇인가, 즉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 안정된 확고함을 제공하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마치 스토트의 “이중 거부”가 피하려고 하는 또 다른 함정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웹스터가 말한다. 물론 교회는 세상이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질 것이다. 정중하고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자기중심적이고 반응이 없는 일종의 긴장증에 빠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도피주의자의 후퇴란 있을 수 없다! 웹스터의 요점은 신실한 교회가 세상의 말을 들을 때 “세상이 떠드는 내용에 매료되거나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복음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우리를 모든 것으로 채워 준다. 예수에 집중하기웹스터의 말이다. 복음은 언제나 세상을 능가한다. 예수님 자신은 세상보다 더 권위 있고, 합법적이며, 승리적이고 또 흥미롭게 말씀하신다. 교회가 정말로 세상을 사랑한다면, 교회는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표현을 듣기 위해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복음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돕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 끝없이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말씀을 다 들었으니까 이제는 세상과 소통하면 되겠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쉬지 않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배워야하고 또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해서 진리를 드러내는 길이다. 어쩌면 세상은 후기 현대,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우리가 지금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고백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와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곳에 머물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에게 이미 성취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제시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분은 자신에게는 마땅한 권리이자 우리에게는 성취가 되는 순종을 기대하신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가볍고 찰나이다. 그러나 말씀은 무겁고 영원하다. 이중 경청이 가능하려면 말씀에 일시적인 우선순위를 두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꾸준히 말씀을 파고 또 파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참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말씀을 가져간다는 의미이다. 원제: A Crucial Reminder for ‘Double Listen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 없음의 유혹
by Trevin Wax
2023-12-23
유혹 하면 보통 마음을 끌어당기는 특정한 태도와 행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유혹받는 게 뭔지 잘 안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 음란한 환상에 탐닉하는 것,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또는 내가 당한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연민에 빠져서 쓰라린 자아의 뿌리를 키우는 모습 등이다. 유혹이라고 하면 보통 죄를 생각한다. 또한 이기적인 충동을 떠올린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진리로 죄와 유혹에 맞서 싸우기를 소망한다. 간과된 유혹특정한 죄에 대해서 선하고 경건하게 저항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가 행여라도 정작 훨씬 더 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혹, 이기심의 더 깊은 근원이자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심각한 유혹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이 유혹은 다른 모든 죄악의 중심에 있으며, 개인 차원의 죄나 사소한 태도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하나님 없음의 유혹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특정 성경 가르침을 부인하는 영적 또는 종교적 사람들에 관한 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일상생활과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삶, 그래서 우리의 창조주를 아예 언급하지 않고 살고 싶어 하는 유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그는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자 저자를 내가 직접 쓰는 이야기의 각주로 축소한다. 이런 유혹을 “하나님 없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그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현실 대부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 부재점점 더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이 문화를 정의하는 것은 죄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주변으로 몰아낸다. 그래서 하나님은 삶의 가장자리 여기저기를 떠돌며, 필요할 때 치료를 공급하거나 고난받을 때 위로의 원천 정도로만 소환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게 아니라면, 나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안전하게 안주하며 내 일상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기를 원한다. 종종 개인적이자 사적 종교라는 감옥에서 하나님을 내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언제나 우리가 만든 조건에 부합할 때이다. 이제 우리는 나를 괴롭히고, 자유를 침해하고, 또 욕망을 방해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전하다. 이것은 세속 시대의 삶이 직면한 큰 유혹이다. 아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편한 대로 만들어 저기 어딘가 내놓은 존재로 인식하면서 살고 싶은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유혹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나 스포트라이트가 정작 우리를 비췰 때 눈을 가려서는 안 된다. 이 유혹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부재를 당연시하며 사는가? 전능한 ‘내’가 내 생각과 열망의 중심에 있는 진짜 위대한 ‘나’를 얼마나 자주 밀어내는가? 우리의 예배, 모임과 외출, 봉사와 사역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가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세속 시대 교회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각종 활동으로 바쁘고 싶은 유혹에 항상 직면한다. 문제는 그 하나님이 사실상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일상적인 기독교 용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조를 암송한다…. 단지 기능적 세속주의자로서.기도하지 않음우리가 하나님을 잊거나 무시하려는 유혹에 굴복했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라진 기도야말로 내 가면을 벗기고 나의 자급자족 정신을 드러낸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현실 세계”를 권력, 정치, 일과 여가, 심지어 사역의 중심으로 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결과 우리는 교회라는 영적 영역과 세상의 거칠고 험난한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한편,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분, 즉 우리가 가진 위대함과 자립이라는 환상을 벗겨내시는 하나님은 옆으로 제쳐둔다. 우리가 진짜로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안다면, 그래서 나를 부르신 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길이 없음을 진정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조용한 절망 가운데에서 그분이 함께하심을 갈구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고 또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하얀 불빛 같은 거룩하심과 함께 다가오는 부드러운 손길의 신선함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하나님을 옆으로 밀어내기세속 시대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가져다준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변으로 밀어낼수록 우리는 더욱 더 중심 무대에 선다. 이제 중요한 건 오로지 인간의 활동이다. 우리의 목표와 열망. 우리의 전략과 기술. 우리의 목적과 계획. 영원하신 분이 단지 보조 역할에 그치기에, 우리는 이제 영원이란 관점을 잃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들은 이제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 숨겨져 있다.뜨거운 기도의 부재로 드러나는 하나님 밀어내기, 이것은 확실히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가장 큰 유혹이다. 원제: The Temptation We Most Often Overloo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C. S. 루이스가 남긴 마지막 글: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
by Trevin Wax
2023-12-16
이전에 쓴 칼럼 둘(아메리칸드림은 저절로 불이 켜졌을까?와 자유와 한계, 행복에 대한 ‘권리’)에서 나는 아메리칸드림, 행복 추구,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하는 자유를 살펴보았다. C. S. 루이스는 1963년 사망하기 직전에 Saturday Evening Post에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라는 논평을 기고함으로써 마지막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글은 영원한 법칙에 대한 순종과 ‘행복’의 분리라는 문제, 그리고 나아가서 ‘성적인 행복’이라는 권리를 추구함으로 인해서 행복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뿐 아니라, 결국에는 인류 문명의 본질까지 필연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 준다. 다음은 루이스의 글 전문이다. C. S. 루이스: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중요한 건 말이지요. 그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라고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언젠가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A는 B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버리고 이혼했고, B도 A와 결혼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이혼했다. A와 B가 서로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 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또 건강이나 수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들이 앞으로 매우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 두 사람이 과거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도 똑같이 분명했다. B의 경우에, 그녀는 한 때 남편을 아주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전쟁에서 몸이 망가졌고, 그 결과 남자로서 능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직장까지 잃고 말았다. 그런 남자와 함께 사는 삶은 애초에 B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불쌍한 건 A의 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외모가 망가졌다. 더불어서 한때 밝게 빛나던 활력도 없어졌다. 여러 번의 출산과 또 오랫동안 A를 간병하는 중에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그렇다고 A가 마치 단물 다 짜 먹은 마른 오렌지를 내다 버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를 저버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녀의 자살은 그에게도 끔찍한 충격이었다. 우리 모두 그 점을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언젠가 직접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그가 말했다.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잖아? 딱 한 번 오는 기회인데, 나는 그걸 놓칠 수 없었어.” ‘행복할 권리’라는 건 도대체 뭘까? 나는 그날 ‘행복할 권리’라는 말의 개념을 생각하면서 그와 헤어졌다.얼핏 보면, 이 말은 마치 행운을 누릴 권리만큼이나 이상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저런 도덕주의 학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관계없이, 행복이나 불행이란 건 인간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무언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게 행복할 권리라는 말은 내 키가 180이 넘는 권리, 백만장자를 아버지로 갖는 권리, 소풍 가는 날에는 항상 날씨가 좋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나는 사회의 법으로 보장되었다는 측면에서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이 사회가 자유를 주기에, 나는 공공 도로를 사용해서 여행할 권리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로에 “공공”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이다. 나는 또한 권리(right)를 법이 보장하는 요구이자 그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지워지는 의무로도 이해한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백 달러를 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건 당신이 내게 백 달러를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A가 아내를 버리고 이웃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을 법이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엄밀히 말해서 A에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뿐이지, 거기에 무슨 행복이니 하는 말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행복과 자연법물론 지금까지 말한 게 클레어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는 법적 권리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있다는 게 클레어의 말이었다. 즉, 클레어는 토마스 아퀴나스, 그로티우스, 후커, 로크의 스타일을 따르는 고전적 도덕주의자이다. 물론 그건 그녀가 자기 말을 곱씹었을 때 그렇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국가가 보장하는 법 뒤에 자연법이 있다고 믿고 있다.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 개념은 모든 문명의 기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없다면, 국가의 실정법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된다. 판단할 기준이 없기에 비판도 할 수 없게 된다. 클레어의 격언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의 유래는 8월 선언(the august declaration)이다. 모든 문명인, 이건 특히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말로, 인간의 권리 중 하나가 아예 “행복을 추구할 권리”로 규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진짜 요점에 도달했다.8월 선언을 만든 사람들은 그럼 무슨 의미로 쓴 것일까? 자연법의 의미그들이 의미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인간이 아무리 행복하고 싶더라도 살인, 강간, 강도, 반역, 사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아예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의미는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법이 궁극적으로 승인하고 나아가서 국가의 법까지 승인하는 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보기에 따라서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권리를 가지는 한도 내에서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식의, 격언의 원래 의미를 축소하는 동어반복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적절한 역사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동어반복이 항상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은 아니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해 왔던 정치 원칙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 그 도전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 개혁 법안 이전의 영국, 그리고 부르봉 프랑스에 던져졌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수단이 누구에게나 합법적이어야 하며 특정 계층, 계급, 지위 또는 종교의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또 어느 당에서도 이 사실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세기였던 만큼, 이것을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그러나 어떤 수단이 “합법적”인지, 즉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자연법에 의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지 또는 특정 국가의 입법부에 의해 법적으로 허용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나는 클레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무제한의 “행복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성적인’ 행복우선 나는 클레어가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건 아주 단순한 ‘성적인 행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클레어와 같은 여성들이 결코 다른 의미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클레어가 다른 종류의 “권리”에 관해서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에 있어 다소 좌파적인 그녀이기에 만약에 누군가가 오로지 돈을 버는 데에서만 행복을 찾는 무자비한 살인마 재벌이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녀는 분명히 크게 분개했을 것이다. 그녀는 또한 광적인 금주론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술에 취하면 행복하기에 알코올 중독자로 산다는 사람을 변명하는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다.클레어의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 특히 여자 친구들은 말 옮기기 좋아하는 클레어의 귀를 틀어막으면 자신들의 행복이 눈에 띄게 커질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자, 클레어가 과연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의 이론에 친구들의 이런 바람까지도 적용할까? 내 생각에는 그러지 않을 거다. 사실 클레어는 지난 40여년 동안 서구 세계 전체가 하던 일을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모든 진보 진영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거야? 다른 모든 충동을 다루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섹스를 다루자고”라며 말하곤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그들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나는 그들이 사실상 정반대의 의미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문명이 다루는 인간 본성의 다른 모든 충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섹스 충동이 다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충동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인정한다. 자기 보호 본능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비겁함이라고 부른다. 다 가지고 싶은 충동은 탐욕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경계를 서는 보초라면 자고 싶은 충동도 참아야 한다. 그러나 목표가 오로지 “침대 위 벌거벗은 네 개의 발”로 바뀌는 순간, 모든 불친절과 믿음의 배신까지도 얼마든지 용납되는 것 같다. 이건 마치 과일을 훔치는 게 잘못된 일이지만, 그게 복숭아인 경우에는 괜찮다는 식의 이상한 도덕성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이런 견해에 항의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의 정당성과 아름다움, 신성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성을 나쁜 무언가 또는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청교도의 편견을 품고 있다는 비난까지 받을 것이다. 나는 이런 혐의를 부인한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 황금의 아프로디테… 키프로스의 성모…. 나는 당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복숭아를 훔치는 소년을 반대한다고, 내가 복숭아 전부를 반대하는 걸까? 아니면 소년들 전부를 다? 내가 반대하는 건 단지 도둑질일 수도 있다.성적 충동과 터무니없는 특권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A에게 아내를 버릴 ‘권리’가 있는가를 일종의 ‘성도덕’에 관한 문제 중 하나로 간주함으로 실제 상황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것이다. 과수원 강탈이 ‘과일 도덕’이라는 특별한 도덕에 대한 위반이 아니다. 이는 정직성에 대한 위반이다. A의 행동은 (엄숙한 약속에 대한) 선의, (깊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공통되는 인간성에 대한 위반이다.따라서 오늘날 성적 충동은 터무니없는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놓여 있다. 성적 동기가 포함되는 순간, 다른 경우에서라면 무자비하고 비열한 배신이며 불의하다고 비난받았을 모든 종류의 행동까지도 다 용인되는 게 현실이다. 나는 섹스에 이런 식의 특권을 부여할 타당한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거기에는 강력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것이다.성 충동은 강하고 에로틱한 열정이라는 본질을 가진다. 이것은 일시적인 식욕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감정과는 달리 더 큰 약속을 하도록 만든다.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욕망은 무슨 약속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게 대단한 건 아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계속 사랑할 것이라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또한 빈번한 황홀경 뿐만 아니라 안정되고 결실을 맺으며 뿌리 깊은 평생의 행복까지 얻을 것이라는 거의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이 경우에 모든 것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남은 인생을 헛되게 살 거 같은 위기감마저 느낀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랑의 약속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어른이 되면 성적인 열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는 친구들이 떠버리는 사랑에 대한 끝없는 허세 정도는 아주 쉽게 무시한다. (물론 자신이 느끼는 건 제외하고) 우리는 그런 사랑이 지속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꼭 시작할 때 했던 약속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두 사람이 지속적인 행복을 얻은 건 그들이 꼭 훌륭한 연인이어서가 아니라, 좀 거칠게 말하면 (이런 표현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그러니까 스스로 통제하고, 신실하고, 공정하고, 상호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행동의 모든 일반적인 규칙을 대체하는 수준으로까지 “(성적인) 행복에 대한 권리”를 확립한다면, 그건 평소의 경험이 그 사실을 증언해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 열정에 빠져 있는 동안에 그것을 한 없이 소중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쁜 행동은 실제로 비참함과 타락을 가져오지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행복이라는 대상은 여전히 환상으로 남을 뿐이다. A와 B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 년 정도 지나면 A가 옛 아내를 버렸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B를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또 인생의 전부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진짜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A가 자신을 향해서 느끼는 동정심은 그로 인해서 불행해질 여자를 향한 마음이 조금도 없기에 가능하다. 성적인 행복 위에 세워진 사회살펴볼 게 두 가지 더 남았다. 하나는 이것이다. 부부간 불륜이 용인되는 사회는 결국 여성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몇몇 남자들의 노래와 풍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자보다 일부일처제를 지향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필요가 만든 결과이다. 따라서 난잡한 행위가 만연한 곳에서 여자는 주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또한 가정의 행복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를 쉽게 사로잡았던 바로 그 특성, 여자의 아름다움은 성숙함을 지나면서 매년 감소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여자로 생각하도록 만든 내적인 특성에 있어서는 그 어떤 감소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하나 기억할 건, 남자의 외모에 관해서 여자는 단 십 원어치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무자비하고 난잡한 전쟁에서 여자는 이중의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아무리 더 높은 지분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여자는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점점 더 야박해지는 여자들의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는 도덕주의자를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두 번째로, ‘행복에 대한 권리’가 주로 성적 충동에 대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단지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리 치명적인 원리라고 해도 일단 특정 분야에서 자리를 잡는다면, 그건 조만간 우리 삶 전체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 개인 뿐 아니라 각자가 느끼는 모든 충동에까지도 백지 위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그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라는 부사를 덧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다. 원제: C. S. Lewis’s Last Written Word: We Have No Right to Happi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편으로 자녀에게 감정의 소중함을 가르치라
by Courtney Reissig
2023-12-12
벤 사스는 The Vanishing American Adult(사라지고 있는 미국 어른)에서 회복력이 뛰어난 아이들로 키우는 사례를 제시한다. 그는 인내, 노력, 고난을 배우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이야기한다. 이 책은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는 내내 장기간 관찰한 연장된 사춘기에 대한 대응과 함께 미국에 필요한 다음 세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이들이 회복력을 키우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스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회복력을 목표로 하는 순간,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탐색하도록 어떻게 도울까에 관한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되며, 거기에는 우리가 쉽게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하나는 어려운 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예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너진 이 세상 때문에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들 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려고 한다. 반면에, 자녀가 부서진 내면을 가지고 살기를 원치 않는 부모는 무심코 자녀들이 감정을 꾹꾹 채우게 만든다. 그러나 정서적 회복력을 가진 자녀를 키우는 보다 나은 방법은 성경에 있다. 우리는 좋은 때나 나쁜 때나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치는 데 시편을 활용할 수 있다.감정은 좋은 것이다하나님은 감정을 지닌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고통과 슬픔, 설렘을 느낀다. 이 모든 감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말해 준다. 때때로 감정은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큰 개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기도 한다.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사랑처럼, 감정이 소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불안감이나 압도감과 같은 감정은 우리의 한계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자녀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좋은 것임을 인식하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다.“슬프다”라고 말하는 자녀에게 그 즉시 등을 두드리며 입에 발린 말로 격려하지 말고, 시편을 가르치라. 너와 똑같이 슬퍼했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슬픔에 신실하게 귀를 기울여 주셨다는 사실을 시편으로 가르치라. 시편에는 구약성서의 서사와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 많으며, 따라서 성경 속 인물들의 영혼을 엿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우리는 배반을 말하는 다윗을 시편에서 만난다(55편). 짧은 인생의 허무함을 알려 주는 모세의 글도 있다(90편). 그리고 의심과 환멸을 겪는 에스라 사람 헤만을 본다(88편). 시편은 한 마디로 구약의 신자들이 자신의 어려움, 감정, 시련, 의심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기도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보여 주는 모델로서 시편 앞으로 자녀를 데려갈 수 있다.감정이 반드시 죄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탐닉해서도 안 된다. 때때로 감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친구의 새 장난감이나 운동 경기의 성공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라.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죄(탐심)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 주라. 질투심을 결코 슬프거나 행복한 감정과 똑같이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시편 4:4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시편 시인은 우리에게 아예 화를 내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분노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죄에 굴복하지 않으며 화를 내는 방법, 곧 온전히 느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있다. 시편 시인은 감정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녀가 분노든 또는 비슷한 과도한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이 자신을 죄로 이끄는지 물어 보고, 그렇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치라. 시편 51편은 회개의 모델을 제시한다. 감정은 나눌 수 있다시편 4:4이 분노를 마음에 담더라도 잠잠하라고 말하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주님께 마음을 쏟아붓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시편이 고난 중에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개인 기도도 있지만, 적지 않은 내용이 집단이 부르짖는 기도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울부짖으며 회중으로서 겪는 고통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제심을 발휘하는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은 얼마든지 성경적이다.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칠 때, 그들의 감정을 듣고 싶어 하며 또 믿을 수 있는 친구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모든 감정을 주님 앞으로 가져가야 한다. 감정을 항상 믿어서는 안 된다 시편 73편에서 우리는 악인의 형통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을 받는 시인을 만난다. 그는 시기와 탐욕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렬한 느낌이다(22절). 그는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다(2절). 내내 신실하게 행하던 그가 거의 실족할 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주님께 가져갔을 때 그의 마음과 관점이 바뀌는 것을 본다. 자신의 감정을 믿고 싶은 유혹을 받는 자녀에게 시편 73편 같은 시편을 읽게 하라. 자녀가 이 부서진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가르침과 동시에 오로지 감정만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개념에 당당히 맞서도록 가르치라.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자신만의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내 솔직한 기분이었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게 마음이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예. 17:9-10). 감정을 믿는 순간 우리는 감정에 속아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이다. 진리의 표준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라. 우리의 모든 감정까지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감정이 우리를 배신할 때가 있다. 행여라도 감정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우리는 수시로 감정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를 배반한다는 말이다. 자녀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 주라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는 자녀의 눈에 마치 감정만이 유일한 실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감정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그들을 이끌 수는 없다. 그들이 감정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장점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 감정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타락한 감정을 지닌 존재로 존재하는 현실까지 모두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삶에서 감정의 위치를 인정하고, 더불어서 죄에 대한 충동과 어떻게 싸우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든지 자녀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타당성을 분별할 자격을 가진다. 우리 문화는 감정에 대해 두 가지 옵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감정을 항상 신뢰하거나, 아니면 아예 감정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짜 회복력을 가진 아이들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건전한 방법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시편을 지침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더 나은 방법을 보여 주라. 그것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올바르게 느끼도록 가르치기 위해 성경 전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이다. 원제: Use the Psalms to Teach Kids About Feel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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