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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미지근함을 깨부수는 복음의 명확성
by Tony Payne
2023-01-22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가 가지는 의문이 있다. “우리 교인들은 왜 이렇게 미지근할까?” 활력이 부족한 교회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구조와 프로그램, 설교와 부족한 기도, 또는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된 복합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교회가 나날이 힘을 잃어가는 이유에 고려해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많은 교회가 복음을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을 거다. “맞는 말이에요. 자유주의, 이단, 그리고 비정통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니까 대부분이 쇠퇴하고 죽어가는 거지요.” 그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건 견고하게 성경을 바탕으로 가르치는 복음주의 교회에 관한 것이다. 아마 당신이 속한 교회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정말로요? 그건 믿을 수가 없는데요? 우리 교회 설교는 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또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는다는 내용인데요? 우리는 복음을 찬양하고 또 성찬식 때마다 그 진리를 기억합니다. 우리 교인 모두가 확실하게 아는 거 하나가 있다면,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또 가장 중요하지만, 이 진리를 알고 믿는다는 것으로 복음 속 모든 영광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약 성경에는 복음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흐릿하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복음신약 성경이 전하는 놀라운 뉴스 속보(또는 복음)는 단지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로 확증되셨다. 부활하신 통치자로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용서와 구원과 영생을 주신다. 그것이 바로 사도들이 두루 다니며 선포한 내용이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주요 왕이셨지만(골 1:15-17), 사도행전 속 복음 설교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전하는 놀라운 발표를 만난다. 다름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고, 그리하여 하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다윗의 가계에서 나신, 또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온 세상의 통치자이자 재판관인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고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고전 2:2)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이제 하나님에 의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자 재판관으로 부활하셨다. 이제 그분은 회개하고 속죄의 죽음으로 확보한 죄의 용서를 받으라고 세상 모든 이를 부르신다. 당신은 교회 성도들이 복음에 대해서 이런 이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자신하는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주와 그리스도로서의 부활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교인들이 과연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왜 복음이 단지 믿음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이끄는 회개까지 요구하는지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복음주의 교회에서 사역한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wo Ways to Live 교육을 시작할 때 참가자에게 각각 그들이 이해하는 복음을 설명하라고 했다. 그때 부활에 대해서 언급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활이 어떻게 예수님을 살아 계신 이 세상의 통치자로 선언하는지에 대해서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확한 복음이 끼치는 영향우리는 이런 복음을 명확하고 완전하게 가르쳐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5에서 말했듯, 그리스도의 대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 메시지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지금도 우리가 서 있도록 하는 구원의 말씀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분명히 붙잡을 때, 우리의 마음을 관통한 그 메시지는 내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 복음은 용서받은 과거뿐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회개하며 사는 새로운 미래까지 포함한다. 그렇기에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순종과 거룩의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이제 그와 함께 일으켜졌으므로, 땅에 속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부활 시대의 새 생명을 입게 되었다(골 3:1-17).이 복음은 우리에게 확신과 희망을 준다.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시기 위해 죽으신 그분이 지금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살아 계시며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분은 반드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롬 5:6-11).이 복음은 전도와 선교에 동기를 부여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정말로 세상 모든 사람의 주님이자 심판자라면(행 17:30-31), 누구라도 예외 없이 구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와 믿음으로 주님께로 돌이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또한 사랑 안에서 기쁘게 서로 섬기도록 마음을 변화시킨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아 순종하는 모든 사람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그분의 모범을 따른다. 그것이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미지근함에 불을 붙인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와 건강한 교회일수록 부활의 복음이 전파된다. 그런 교회일수록 거룩함 안에서 성장하고, 기쁨과 확신 안에서 인내하며, 선교와 복음 전도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섬긴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섬기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게 정말일까? 우리 삶과 교회에서 만나는 부족한 영적 열기의 중요한 요인이 정말로 복음에 대한 명확성의 부족 때문일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설교, 세미나, 소그룹, 교육 자료 등 그 방법이 무엇이든, 우리는 신약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복음을 명확하게 선포해야 한다. 원제: Does Your Church Lack Gospel Clar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의명확성
부활하신그리스도
대속과부활의그리스도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by Jackson Gravitt
2023-01-15
창세기 18:12에서 사라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람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사라는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나님은 사라가 왜 웃었는지 물으시며,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다.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약속에 사라는 최악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청교도 제러마이어 버로스(Jeremiah Burroughs(1599-1646)가 그의 만족, 그리스도인의 귀한 선물(The Rare Jewel of Christian Contentment)의 말미에서 관찰한 것처럼, 하나님은 훗날 이 일을 떠올리시면 사라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칭찬하셨다.버로스의 베드로전서 3:6 관찰버로스는 베드로전서 3:5-6에서 성령께서 사라를 아내들이 따라야 할 본으로 세우신 것을 보았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자기를 단장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순종하던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내러티브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존경하는 칭호로 “주인”라고 부른 유일한 때는 창세기 18:12에서 사라가 자기의 의심을 표현하면서였다. 성령께서는 사라가 했던 말 중에서 죄스러운 부분은 지나치시고 좋은 말만 인용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버로스는 이렇게 주해한다. “악이 많고 선이 적으면, 하나님은 오히려 악은 지나치시고 선에 주목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은혜롭게 대하시는가! 많은 악한 말 중에 선한 말이 하나라도 있다면, 하나님의 해석은 이와 같다!”(225).버로스는 그 이유를 고린도전서 13:5에서 찾아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설명을 잇는다. “어떤 것에 대한 열 가지 해석 중 아홉은 나쁘고 하나는 좋다면, 사랑은 좋은 해석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 아홉은 버린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다”(224). 사라는 14개의 단어로 말했는데(“After I am worn out, and my lord is old, shall I have pleasure?”), 13개는 나쁜 단어이고, 좋은 단어는 단 하나다. 하나님은 13개를 지나치시고 하나를 강조하셨다. 그때의 일을 다시 거론하시면서 하나님은 사라의 믿음을 이야기하시고 그녀의 의심은 제외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해석이다!버로스가 바라는 것들이 본문을 버로스와 함께 읽을 때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까?1.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라.선지자 이사야는 우리가 하는 착한 일조차도 죄로 더럽혀진다고 말한다(사 64: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를 떠올리시는 하나님의 기억은 사라를 떠올리셨을 때만큼이나 은혜롭다.그 증거로 버로스는 신약 서신서들을 인용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더러움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성도라고 부르신다. 가장 큰 부패 아래에서 가장 볼품없는 가장 비열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성도다”(224).버로스는, 위대한 청교도들이 다들 그랬듯이,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음을 독자들에게 각인하고자 간절히 원했다.2. 시련 중에도 만족하라.고난이 닥칠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선하게 해석하시듯이 하나님의 길을 선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버로스는 주장한다. 버로스는 고난이 낯선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영국국교회의 로드 대주교가 청교도를 극심하게 탄압하던 시기에 그는 양심에 따라 예배할 수 있는 네덜란드로 떠나야 했다. 그는 4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버로스는 고난이 오면 주님을 의심하기 쉽다는 것을 몸소 알았다. 그는 독자들에게 그러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하게 해석하라고 촉구했다: “하나님은 나의 부가 계속된다면 내가 죄에 빠지게 될 것을, 나의 형편이 좋아질수록 나의 영혼은 더 나빠질 것을 아셨을 것이다”(223-24).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잘못 해석하여 죄를 지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로 데려오셨다”(224)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버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오, 나의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선하신 생각을 간직하십시오. … [그리고] 그의 길을 선하게 해석하십시오”(225).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해석하기로 작정하시듯,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지혜로 행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봤듯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3. 사랑하라.버로스가 만족, 그리스도인의 귀한 선물에서 이러한 바람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있었다. 버로스는 평생 교회의 일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가 쓴 Irenicum에서, 버로스는 사소한 교리 차이가 영국 전체에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고 탄식했고, 그 이유는 신학이 서로 달라서가 아니라 이기심과 교만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은 은혜를 영국 교회가 나타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리스도인들이 고린도전서 13:5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에게 악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 교회의 사소한 분열이 치유되지 않았을까?버로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의 삶을 선하게 해석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이 우리의 최선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결케 된 다른 하나님의 가족에게 우리가 어떻게 그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버로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한 해석이 있다면, 우리는 악한 해석이 아니라 선한 해석을 사용해야 한다”(225).버로스와 함께 우리가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억을 깊이 묵상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도 은혜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성도의 일치를, 고안 중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만족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원제: ‘Love Thinks No Evil’: Jeremiah Burroughs on God’s Gracious Interpretat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사라
하나님의기억
베드로전서3:6
창세기18:12
사랑
악한생각
선한해석
고난과만족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고 느낄 수 있을까?
by Jeremy Linneman
2023-01-12
초신자든 오래 믿은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종종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 다 예외 없이 기도하는 데에, 오래된 습관을 극복하는 데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과 평화를 찾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어려움 이면에 숨은 질문을 던진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어떻게 진짜로 알고 느끼고 있는가?코미디언 브라이언 레간(Brian Regan)은 팝 타츠(켈로그에서 나오는 크림을 바른 과자)와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팝 타츠에 설명서 들어있는 거 봤습니까? 팝 타츠보다 간편한 음식이 또 있을까요? 설명서가 없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걸 들고 서서 이렇게 물어야 하나요? “이 맛있는 걸 어떻게 하면 내 몸속에 넣을 수 있지요?”이게 바로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느끼는 방식이다.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 믿는다. 그러나 올바른 교리를 알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인도하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는 차갑고 무미건조하며 또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건 경험을 통해서 잘 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또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안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진실은 종종 지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아마 당신도 내 말을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베소 사람들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알았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달라는 바울의 기도에베소 성도들은 초대교회의 올스타 같다. 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는 책망이 거의 없으며 그들은 신학과 영성 형성에 있어서 “고기”를 먹을 준비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애썼다. 이 도전의 역사는 기독교 역사만큼이나 길다. 긴 신학적 논설(1-3장)과 실제적인 가르침(4-6장) 사이에서 바울은 3:14-21에서 잠시 멈춰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기도할 때 자세를 보면 내면을 알 수 있다. 성경을 펴고 책상에 앉아 일기장에 적으면서 하는 기도는 이해와 지혜를 구할 때 적합한 자세이다. 침대에 누워서 반쯤 졸면서 하는 건 내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다는 기도를 할 때 합당한 자세이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신음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심오한 투쟁이나 열정의 순간이다. 그게 지금 바로 바울이 기도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넘치기를 구한다. 그런데 1-3장에서 그는 이미 이 세 가지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위해 왜 그는 또 이토록 뜨겁게 기도하는 걸까? 에베소 성도들은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채워져야 할 또 다른 수준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지신 모든 것을 “잡게”(grasp) 해달라고 기도할 때(18절, NIV), 이 단어는 ‘씨름하다’ ‘빼앗다’ 또는 누군가를 ‘압도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씨름이 무엇인가? 나 자신, 나의 혼, 나의 육체, 그리고 나의 속사람과 싸우라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붙잡고,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넣는 씨름을 하도록 기도하고 있다.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 3:16-17)라고 바울은 썼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근원은 다름 아니라 성령님이다. 팀 켈러는 바울이 지금 “복음 진리에 대한 영적이고 내적인 민감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성령에 대한 민감성은 무미건조하고 안일한 신자와 따뜻하고 열정적인 신자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고(엡 1:17; 3:5; 6:17),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엡 3:16; 5:18-19; 6:18),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롬 8:9-11), 영광이 커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고후 3:18).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시 34:8).우리 마음을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까?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어떻게 도우시는가? 바울의 기도를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엡 3:17-19).얼마 전에 우리 가족은 지하실 콘크리트 공간을 특이한 거실과 사무실로 탈바꿈시키는 공사를 마쳤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나는 점점 더 지하실의 크기에 익숙해졌다. 이전까지는 거기서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이 몇 제곱피트인지, 벽의 길이가 얼마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몇 번에 걸친 측정과 다양한 작업 덕에 지하실 공간을 손바닥처럼 잘 알게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는 이음새 없는 결합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결합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1. 천천히 시간을 들여라.살면서 힘든 것 중 하나가 항상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낼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바삐 움직이는 삶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다. 서두름은 우리 속에서 성령을 소멸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서두름을 마음속에서 끊어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지속해서 구하고 또 듣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2. 말씀을 묵상하라.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 법을 배우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는 온 힘을 다해 기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 묵상의 실천이다. 조지 뮬러(George Muller)는 묵상의 중요성을 발견한 인물이다. 매일 내가 참석해야 하는 첫 번째 크고 중요한 일은 다름 아니라 주님 안에서 내 영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먼저 염려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섬기고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주로 인해 행복한 상태에 머물고, 내 속사람을 살찌울 수 있을까이다. … 속사람을 위한 양식은 무엇인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냥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경우 물이 파이프를 통해 흐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마음을 타고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읽은 다음에는 숙고하고 또 숙고함으로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적용해야 한다. 3. 십자가를 묵상하라.바울은 우리가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까지 붙잡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할까?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그렇게 한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 갖기를 기도한다. 이는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켈러의 말로 풀어보면, 얼마나 넓게?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얼마나 오래?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라고 하셨다(마 28:20).얼마나 높이? 주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에 닿을 정도까지. 얼마나 깊게? 무덤보다도, 지옥 구덩이보다도 깊게.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상기했다. 예수님의 손은 양쪽으로 넓게 뻗어졌고,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높이 그리고 깊게 당겨졌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담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도무지 측량할 길이 없다. 그 사랑은 항상 더 깊다.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더 깊이 담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내라. 말씀을 묵상하라. 온 힘을 다해서, 그리고 성령의 영원한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드러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붙잡아라.원제: How Do We Know and Feel God’s Lo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사랑
십자가
조지뮬러
말씀묵상
그리스도의사랑
하나님께서 가져가실 때
슬픔 속에서도 누리는 그의 선하심
by Tim Challies
2023-01-1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종종 경건한 사람이 고난받도록 부름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진실한 사랑과 그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실재함을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고통에는 깊은 신비가 있다. 성경은 슬픔과 상실, 시련과 애통의 시간을 만날 것을 예상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왜 그런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지 이유를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경이롭게 드러낼 놀라운 작품을 수놓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오로지 믿음이 눈을 통해서만 온전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2020년이 저물어가던 몇 주 동안 우리 가족은 가장 깊은 어둠의 시간을 마주했다. 스무 살 된 아들 닉의 심장이 갑자기 멈췄고, 그렇게 주님 곁으로 갔다. 얼마 전까지 닉은 게임에서 동료 학생들을 이끌던 신학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다음 순간 천국으로 떠났다. 닉의 죽음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고 황폐케 했으며, 그 이유를 질문하게 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고통을 우리에게 주신 걸까? 왜 하나님은 고통의 대상으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일까? 끔찍한 그날 저녁의 여파로 나는 많은 책과 설교를 남긴, 만난 적 없는 오래전에 죽은 소중한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계획 수립을 위해서도 조언자가 필요한데, 하물며 올바로 슬퍼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조언이 필요하겠는가(잠 15:22)? 가장 힘들고 어두운 시간에 그들은 나를 상담하고 위로했다.증언으로서의 고통테오도르 커일러(Theodore Cuyler)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섭리의 먹구름 뒤에 밝은 축복을 두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나를 격려해준 친밀하고 꾸준한 동반자였다. 마이어(F.B. Meyer)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 평화가 올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이 가져가시는 것에 있어서도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고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특히 내 마음에 고요함을 주고 내 길을 인도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혜를 준 사람은 옛 설교자 밀러(J.R. Miller)였다. 종종 경건한 사람이 고난받도록 부름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진실한 사랑과 그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실재함을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은 직업 종교인을 비웃는다. 세상은 종교가 진짜라고 믿기를 거부한다.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원칙이라는 것은 이기심일 뿐이며, 그것은 결코 가혹한 시험을 견디지 못한다고 도전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상실과 고통과 슬픔을 견디도록 부름받았다. 그건 그들 속에 근절해야 할 특별한 악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세상의 비웃음에 대답하기 위한 증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The Ministry of Comfort”)시대를 가리지 않고 우리는 고난의 부름을 받자마자 신앙을 저버린, 한때 신자라고 공언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뜻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한, 하나님의 섭리와 자신의 선택이 다르지 않은 한,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얻는 것 대신에 잃고, 웃는 대신에 울고, 번영 대신에 가난을 마주하도록 부름받는 순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떨어져 나간다(마 13:20-21). 모래 위에 세운 탑과 같이, 잔잔한 날에는 튼튼하게만 보이던 그들은 홍수가 나는 순간 바로 떠내려간다(마 7:26-27).그러므로 많은 불신자가 기독교 신앙은 결코 큰 도전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은 단지 삶이 편안하고 환경이 좋을 때만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의론자가 비웃는 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첫 번째 만난 큰 도전보다 강하지 못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신실한 신자들도 그들의 믿음이 과연 깊은 슬픔의 시기를 이기기에 충분한지, 또는 무서운 충격까지도 견뎌낼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밀러의 말이 위안이 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세상이 봐야 하는 것큰 슬픔의 시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응답을 갈망한다. 선하시고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왜 고통의 섭리를 허락하셨는지 알고 싶어 한다. 밀러는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게 아니라고, 또한 내가 이루지 못한 의로움 때문에 받는 징계도 아니라고 나를 확신시킴으로 위로를 주었다. 우리는 고통의 상황이 하나님의 눈 밖에서 벌어졌고, 따라서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모든 고통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또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오로지 좋은 일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얼마든지 고통 가운데에도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다. 고통 속에 담긴 목적 중 하나는 우리가 그럴수록 더 굳건히 서서 그분에 대한 충성을 고백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바울은 투옥조차도 “참으로 복음 전파에 유익하였다”고 고백했다.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에 대해서 우리가 바울과 똑같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빌 1:12).비신자와 그리스도인 모두 다 알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서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게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상황만을 허락하셔서가 아니다. 불신자와 그리스도인 모두 다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작은 것에도 풍족할 수 있고, 상한 마음으로도 온전할 수 있으며, 빈손으로도 얼마든지 가득 찬 것 같이 하나님께 진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기에 찬송하는 자들은 가져가시는 하나님도 여전히 찬송할 것이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중에도 여전히 경배의 손을 들 수 있으며,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어두운 계곡에서도 여전히 그분을 의지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친애하는 친구 밀러가 내가 눈을 뜰 수 있도록 한 가르침이다.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선하신하나님의 은혜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나는 내 목자가 선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다. 깊은 슬픔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달콤한 위로를 증언할 수 있다. 상한 마음이지만 내 믿음은 여전히 온전하다고 선포할 수 있다. 맑은 날에 만들어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비가 오는 날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건 내 아내와 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고백을 하는 데에는 조금의 강요도 없었고 또한 과시도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우리의 힘은 작지만 하나님의 힘은 크다는 것을 함께 배웠기 때문이다. 그를 붙잡는 나의 힘은 약하지만, 나를 붙잡는 그의 힘은 강하다. 고통의 도전 앞에서 나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그의 긍휼은 끊이지 아니하고 아침마다 새롭다. 그의 신실하심은 실로 위대하다(애 3:22-23).하나님이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닉을 데려가기로 결정하셨는지 나는 여전히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답을 요구하거나 그분의 섭리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우리의 확신은 그의 설명 여부에 달린 게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그가 행하신 일에 달려 있다. “처음부터 내가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였고, 내가, 이미 오래전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렸다. ‘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이룬다’고 말하였다”(사 46:10).슬픔을 당한 그날 밤 첫 순간부터 그분은 함께 계셨다. 하나님은 친절하고 신실하고 선하셨다. 그는 모든 약속을 다 지키셨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그를 더 사랑한다. 원제: When God Took Away: His Goodness in My Grief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고난
고통
고통의의미
용서의 세 지평
by 최창국
2022-12-28
용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단순하지 않다. 성경에서 용서는 매우 복잡하고, 피상적으로 보면 용서를 다루는 많은 본문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항상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는 서로 다른 지평의 용서가 묘사되어 있다. 바로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와 심리적 용서와 관계적 용어이다(스티븐 트레이시, 영혼을 만지다, 301-12). 용서의 이러한 세 가지 지평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구조와 특징을 지닌다.용서의 사법적 지평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는 하나님에 의한 죄의 용서와 관련된다. 사법적 용서는 죄책감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며(시 51:1-9), 가해자와 다른 모든 범주의 죄인에게 해당한다(시 32:1-5; 고전 6:10-11). 하나님에 의한 사법적 죄의 용서는 구원 경험과 관련된 용서이다. 사법적 용서는 죄에 대한 고백(시 32:5; 요일 1:9)과 죄의 인정과 회개(눅 24:47: 행 2:38, 5:31)를 조건으로 한다. 죄에 대한 사법적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를 베풀 권한이 없다. 인간은 사법적 용서를 베풀 수 없지만 가해자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사법적 용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역할이 모두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도록 충고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묵인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성경에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내용이 있다(마 9:1-8; 막 2:1-12; 눅 5:17-26).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군중 속에 있는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기 위해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아래로 내려보낸 내용을 그리고 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죄 사함 또는 죄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가 아니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피해자의 용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용서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보다 사실상 ‘신의 용서’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물의 핵심 의미는 내세적인 신앙이나 “의례적 종교 행위의 일환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맞춰가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92).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선명한 예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아침 식사를 하는 광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 21:1-19). 예수님은 음식을 준비하신 후에 불과 며칠 전에 사람들에게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 부인하였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한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두 가지로 총 세 번 하신다(요 21:15-19). 처음 두 번의 질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묻는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만 베드로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주님의 친구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말을 바꿔 이렇게 묻는다. “너는 나의 친구이냐?” 세 번째 질문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그대로 옮겨 다시 묻자, 베드로는 슬퍼하며 이렇게 답한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의 친구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답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용서를 넘어선 위임의 말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책임을 부여한다. “내 양들에게 먹이를 주어라.”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보살펴라.” 그런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제자의 소명을 암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이는 베드로에게 전환의 순간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명의 메시지만 아니라 용서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만남에는 용서의 두 가지 의미, 즉 베풀다(카라조마이, carizomai)와 풀어주다(아피에미, aphiemi)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87-88).결국 주님의 용서는 용서와 소명으로 이어지는 확장성을 지닌다는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용서는 단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있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방향 전환을 뜻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는 이웃을 위한 존재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이웃을 향한 새로운 방향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이웃이란 교회 안과 밖의 사랑의 대상만이 아니라 분노와 심지어 증오의 대상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용서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뉘우침으로부터 이웃에 대한 소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베풂(for giving)과 남을 위함(for others)이라는 신의 부름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93). 결국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를 위한 기초이자 소명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의 심리적 지평심리적 용서 또는 정서적 용서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용서로서 두 차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부정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차원이다. 심리적 용서의 부정적 차원은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 등과 관계되고, 긍정적 차원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관계된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가해자가 저지른 악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심리적 용서의 부정적 차원인 분노와 같은 반응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분노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분노가 무조건 나쁘거나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악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건강하고 적절한 반응일 수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해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였다(마 21:12-17; 막 3:5). 시편에도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5편, 10편, 69편).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분노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통해 분노는 신성한 적대감이 아니라 악을 향한 거룩함의 변치 않는 반대라고 해석했다(리로이 아덴·데이비드 베너, 용서와 상담, 259). 성경에서 금하는 분노는 개인적으로 복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마음속에 품는 분노다. 바울은 인간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죄가 되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엡 4:26). 한편 분노와 유사하지만 다른 형태로 표출되는 감정인 분개도 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서 누그러지지만, 간혹 그 분노가 마음속에 오래 머물거나 때로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정착된 분노가 소위 분개이다. 특히 가해자의 악의와 부정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가 분개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버틀러(Butler)는 분개를 일종의 자기보호 기재로서 불의를 목격하거나 경험할 때 나오는 정당한 감정적 대응이라고 이해하고 이렇게 강조하였다. “악의와 부정에 대항하는 분개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유대감이자 동료애라고 할 수 있다. 개개인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S. Lamb·Jeffrie G. Murphy, eds., Before Forgiving, 44). 그가 분개의 긍정적 차원을 피력한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하다. 소위 용서에 관한 기독교적 가르침은 안타깝게도 피해자의 분개와 같은 감정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용서에 관한 가르침에서 이미 일어난 일은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중요치 않다는 관점을 견지하며 용서야말로 악행이나 상처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버틀러의 이해는 기독교의 이러한 가르침처럼 단순하고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한다. 용서의 실천을 단지 손쉬운 아량으로 혼동하는 오류는 심한 상처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피해자들에게 더욱 큰 심적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불의나 악에 대해 단순히 침묵하거나 잊거나 무시하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는 정의에 귀 기울이고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피해자가 용서하려고 할 때 무엇을 용서하려고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 용서가 자신과 가해자 그리고 세상을 좀 더 밝은 곳으로 만들지 아니면 더 못한 곳으로 만들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용서는 윤리적 차원을 피하기 어려운 심리적 영적 여정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분개는 악행에 항거하는 일종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자아존중의 행위의 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분노나 분개의 위험한 측면도 있다. 피해자의 분노나 분개가 자기 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가해자에게 집착하는 상태가 된다면, 분노와 분개는 역으로 지나친 자기 몰입에 빠지는 위험성을 초래할 수 있다. 파멜라 쿠퍼-화이트(Pamela Cooper-White)는 피해자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섣부른 용서를 할 때의 위험성을 잘 설명하였다. 섣부른 용서는 일시적으로 모든 일을 무마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게다가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기독교의 주요 덕목이라고 믿으며 성장해 온 우리에게 섣부른 용서는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섣부른 용서는 분노와 아픔을 내면 깊숙이 집어넣는 결과를 일으킨다. 그 때문에 이 분노와 아픔은 독을 품는 증기가 되어 우리 집과 교회와 공동체 밑바닥을 서서히 썩게 만든다. 그리고 섣부른 용서 때문에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어떤 책임도 진심으로 감당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변화와 재활을 막기 때문에, 그것은 실은 계속해서 폭력을 일삼아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과도 같다(Pamela Cooper-White, The Cry of Tamar: Violence Against Women and the Church's Response, 256).광의의 맥락에서 용서는 정신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피해자가 자신의 부정적인 감성을 무시하고 진정한 용서에 이를 수 없다. 피해자의 부정적인 감정은 용서에 필요한 예비 단계이자 여정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가해자로 인해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인하게 하거나 그러한 감정이 자기 비하와 같은 내적 분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용서는 단순한 분노 관리 그 이상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정당한 분노, 즉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인 분노를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의 기억을 바꾸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는 자신의 분노와 같은 내적 상태나 행동을 부인하거나 왜곡시켜도 안 되지만, 가해자로부터 받은 상처만을 기억하기보다는 가해자의 곤고한 상태도 생각해야 한다. 피해자의 긍휼의 마음이 용서로 이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골 3:12-13). 피해자의 이러한 마음은 분노를 극복하도록 도와 심리적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심리적 용서의 긍정적 차원은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가해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가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가 가해자에게 다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피해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초하여 가해자가 스스로 회개하고 치유될 것을 기대하면서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이다(마 5:43-47).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분노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도우심으로 분노와 증오를 극복하고 가해자에게 적절한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울 때 심화된다. 피해자의 분노나 분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일부이다. 특히 분노나 분개는 자아존중이라는 측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일상에서 이러한 감정들에 익숙해질 경우 도리어 그 감정들이 피해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분노와 분개는 용서와 모순되는 감정이 아니다. 용서의 행위는 정당한 분노와 분개를 무시하거나 잊는 데 있기보다는 그러한 감정들을 품고서 무언가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용서하는 사람은 분노나 분개의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품고 있지만, 그 분노나 분개가 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조용히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자신의 내적 장벽을 극복하는 여정이기 때문에 용서의 시작일 뿐이다. 인간의 용서는 피해자의 내적 여정과도 관계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용서의 관계적 지평관계적 용서는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변화와 관계되어 일어나는 용서이다. 즉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회개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메타노니아’는 ‘마음’과 ‘변화’를 뜻하는 두 헬라어를 합성한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삶의 방향이나 행동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행 26:20; 롬 12:2; 고후 12:21; 계 2:5). 가해자의 회개와 사과(apology)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사과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확실한 지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사과는 자신을 ‘재구성하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해자의 사과는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은 심각한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가능하다. 관계적 용서는 특히 가해자가 범한 죄와 그 죄가 지닌 악하고 파괴적인 성질에 대해 충분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가해자의 행동이나 삶의 변화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회개할 때까지는 용서를 시작하거나 어떠한 용서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용서의 역동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관계적 용서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법적 용서와 심리적 용서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용서이기보다는 피해자의 내적 여정과 관계된 용서이다. 심리적 용서는 가해자의 죄나 악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의 장벽을 극복하는 여정과 관계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나 악으로 인해 발생한 분노와 같은 내적 장벽을 정화하는 여정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피해자는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라 하더라도 심리적 용서를 해야 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에게는 치유의 희망을 제공하고, 가해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여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피해자는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믿고, 가해자를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에서와 야곱의 심리적, 관계적 용서인간 사이의 심리적 용서의 여정과 관계적 용서가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의 교활함과 속임수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와 야곱의 회개와 함께 관계적 용서의 과정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에서는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가 장자권을 빼앗긴 후에 극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발생한 에서의 분노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에서의 분노 감정은 격분으로 이어진다. 그의 격분은 야곱에 대한 복수감정으로 이어지고 야곱을 죽이고자 한다(창 27:41). 리브가의 도움으로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한다. 이때 리브가는 야곱에게 “네 형의 분노가 풀리거든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창 27:45)고 말한다.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야곱에게 집을 떠나 기다리라고 권한다. 분노의 감정은 순식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세월이 흐른 후에 야곱은 에서에게로 돌아온다. 세월이 지난 후에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워졌을 때 야곱은 에서에게 용서를 구한다.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 감정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완화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에서의 분노의 감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완화되었으며, 야곱의 회개를 통해 용서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에서 앞에서 야곱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힌 후에 에서와 야곱은 화해를 하게 된다(창 33:4).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서 피해자인 에서의 심리적 용서와 에서와 야곱 사이의 관계적 용서는 야곱의 회개와 함께 순차적으로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에서의 심리적 용서의 여정에서 발생한 분노가 시간이 필요했음을 암시해 준다. 즉 리브가가 야곱에게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리게 한 것은, 야곱으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 감정이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에서의 심리적 용서는 용서의 예비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에서의 심리적 용서의 과정이 있은 후에, 야곱의 회개와 함께 관계적 용서가 일어난다. 이는 야곱이 에서 앞에서 몸을 일곱 번 굽힌 후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는 모습(창 33:3-4)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선물로서 용서 용서는 새로운 우리를 탄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용서는 새로운 나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방법이자 여정이다. 용서는 상처나 악행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와 같은 감정을 무시하거나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넘어서는 일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와 악행을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상처의 황무지에서 공감의 강물을 건너 새로운 땅으로 들어갈 자유를 되찾는 여정이다. 용서는 공감의 프락시스다. 그것은 가해자가 느끼는 소외감과 비통함과 죄책감 등을 피해자가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피해자를 위한 승리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용서는 피해자로서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도리이다. 용서의 결과,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자나 부당한 상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거듭난다. 한쪽은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는 의미로서 승리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는 반전의 제로섬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치유와 자유의 기회를 주는 선물이다. 진정한 용서는 악에 대한 자비의 승리이며 비정에 대한 공감의 승리이다.
용서
용서의사법적지평
용서의심리적지평
용서의관계적지평
분노
사과
죄용서
하나님의용서
구유에 누우신 그는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다
by Gavin Ortlund
2022-12-22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그도 첫 번째, 세 번째와 마찬가지로 모든 곳에 계신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 그는 거기에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성경은 그가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한다. 그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3)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골 1:16).그런데 우리가 매년 성탄절에 기념하는 기적(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은 바로 이 신학에 질문을 던진다. 가령 서기 10년, 나사렛을 다니던 시간에도 소년 예수님은 온 세상 어디에나 계셨는가? 구유에서 동물들 사이에 누워서 마리아의 젖을 먹을 때는 어땠을까? 그때에도 과연 모든 쿼크와 별을 다스리며 온 우주를 가득 채웠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우리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이라고 부르는 신학에 따르면,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이지 않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에 제한되지 않으셨고, 성육신하신 동안에도 우주를 계속 채우고 붙드셨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교리를 탐구하는 데에만 수많은 책이 필요하겠지만, 올해 축하할 놀라운 성탄절을 앞에 놓고, 마음과 생각을 재조정하기 위해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만 던지도록 하자.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라틴어이다. 칼리니스티쿰(Calvinisticum)은 “칼빈의”(Calvin’s)를 의미하고, 엑스트라(extra)는 “외부”(outside) 또는 “너머”(beyond)를 뜻한다. 16세기와 17세기 루터파 신학자와 개혁파 신학자 사이에서 벌어진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에 대한 논쟁에서 나온 말이다. 루터파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이 자신의 육신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개혁파의 가르침에 반대했다. ‘기독교강요’에서 장 칼뱅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나 하늘을 떠나지 않으셨으며, 동정녀의 몸에서 나시고 이 땅에서 사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그는 태초부터 하셨던 것처럼 언제나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셨다! (기독교강요 2:13.4) 그러나 이 교리에 포함된 기본 사상의 원조가 칼뱅은 아니다. 이 교리는 아주 오래되었다.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썼다.말씀께서는 자기 몸에 속박되지 않으셨고, 몸 안에 임재해 계신다고 해서 몸 아닌 다른 곳의 임재가 가로막히지도 않았다. 몸을 쓰시는 동안 생각과 능력으로 우주를 명하시는 일이 중단되지도 않았다. … 경이로운 점은, 그분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사는 동시에, 말씀으로서 우주의 생명을 지탱하고 계셨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계속 함께 거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3.17)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하는 건 단지 인간 육체 너머에 있는 하나님 아들의 존재만이 아니다. 그는 아들이 우주의 지탱자요 감독자의 역할을 쉬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설교와 주석에서 칼뱅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속에 담긴 공간적 특성뿐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는 그리스도 그리고 천사들에 대한 중재자 역할이 가진 의미도 같이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편재 그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 중에도 완전한 신성을 유지하며 그에 따르는 모든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말이 되는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이 개념을 우리가 머리로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걸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두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첫째, 이 개념은 불합리한가? 그리스도는 유한하시며 무한하시다, 국부적이면서 동시에 편재한다는 것이 어떻게 비모순율(law of non-contradiction)을 위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 이것이 정통 칼케돈 그리스도론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유한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그리스도를 상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파 오류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이것을 이해하는 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은유가 있다. 간달프와 프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활동하는 반지의 제왕 이야기에 등장인물로 J. R. R. 톨킨이 자신을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그는 더 이상 옥스퍼드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중간계에 있는 그의 존재는 옥스퍼드에서 그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이런 상황이 톨킨의 인격의 통일성이나 논리의 법칙을 반드시 위반하느냐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결국 중간계와 옥스포드는 시카고와 뉴욕처럼 같은 세계의 다른 장소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영역” 또는 “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단지 은유일 뿐이다. 창조주가 피조물 세상에 들어가는 것과 작가가 이야기 속에 자신을 넣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과 창조 세계 사이의 연관성은 시카고와 뉴욕보다는 옥스퍼드와 중간계의 관계에 훨씬 더 가깝다. 여전히 옥스퍼드 책상에 앉아서도 샤이어를 걷고 있는 톨킨을 상상하는 것은 전혀 분리되지 않는 한 인격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아들, 신성한 본성에서는 무한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성에서는 유한한 그분을 개념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왜 중요한가?나는 개인적으로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부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통적인 그리스도론을 거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칼케돈 그리스도론이 주의를 기울인 몇 가지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뒷받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격화”하려는 유혹을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완전히 신성하고 불변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설명하기 위해 성만찬 시간에도 그리스도의 육체가 편재한다고 확증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이렇게 요약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초월성이라는 그리스도 신성(예를 들어, 제한될 수 없다)과 인성의 순수성(예를 들어, 오로지 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특징)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리이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보존함으로써 성육신이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라는 점을 깨닫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은 마리아의 자궁 속 작은 배아로 줄어든 게 아니다. 신성한 위엄은 여전히 남겨놓으셨다. 그는 언제나 완전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한 연구는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이렇게 요약한다. “성육신은 영원하신 아들이 그의 우주적 제국을 포기한 게 아니다. 오히려 반역하는 피조물을 향해 그의 제국을 재확인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매년 성탄절을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축하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생각해 보라.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는 다음 두 가지를 다 갖고 계신다.강보에 단단하게 싸여 있지만,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어머니를 꼭 잡고 있지만, 온 우주의 원자가 제자리에 있도록 붙들고 있다.젖 달라고 울면서도, 하늘의 별을 지탱하고 있다.나귀 사이에서 자면서도, 천사들의 찬양을 듣고 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이 성탄절 찬송[천사 찬송하기를] 가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처녀 몸에 나시어 사람으로 오셨네. 세상 모든 사람들 영원하신 주님께 영광 돌려보내며 높이 찬양하여라.원제: He Lay in the Manger without Leaving Heav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편재
그리스도론
성육신
성탄
칼케돈그리스도론
베들레헴: 작은 동네, 그러나 중요한 곳
by Kaitlin Miller
2022-12-20
몇 년 전 처음으로 성지를 방문했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전설적인 신화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검증이 가능한 장소에서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 위에 근거한다는 확신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다. 가장 심오하고도 또 구체적인 깨달음은 베들레헴에서 발생했다. 베들레헴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작은 마을” 이상으로 중요한 성경적 역사와 신학적 중요성을 지닌 실제 장소이다. 성경 속 베들레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왕, 그리고 생명의 떡으로 성취하고 증명하셨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어린 양성경 속 베들레헴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창세기 35:19-21에 나오는 라헬의 매장지이다. 라헬은 예수님 혈통 속에 있는 족장 야곱의 아내였다. 그녀의 이름은 “암양”(ewe)―어린 양 또는 양―을 뜻한다. 이 구절은 또한 라헬이 에델 망대(믹달 에델)에 묻혔다고 알려주는데, 이 히브리어는 “가축 망대”를 의미한다. 유대 역사에 따르면, 베들레헴의 믹달 에델에서 태어난 흠 없는 새끼 양이 천에 싸여 유월절 제물로 쓰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앞으로 오실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이 얼마나 놀라운 예표인가? 또한 미가서는 “가축 망대”에 왕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미 4:8). 그분이 누구신가?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세상에 처음 소개한, 참되시고 유일하신 왕 예수님이다. 예수님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강보에 싸였고, 결국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10:12). 베들레헴의 믹달 에델에서 태어나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던 흠 없는 어린 양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고(마 5:17),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유월절 양에 관한 예언이 성취되는 역사를 목격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예루살렘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온 백성의 죄를 담당하신 희생양이다. 이집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자비로 바뀌어서 그들을 죽이지 않고 넘어갔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제 그의 피가 우리의 삶에 임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영원히 넘어간다(pass over). 그리고 그 진노는 자비로 바뀌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한다. 목자-왕베들레헴은 성경에서 다윗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나중에 왕이 된 일개 목동이었는데, 그의 등극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성경은 다윗의 혈통에서 그의 집과 왕국을 영원히 견고하게 만들 아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삼하 7:12-16).그 아들이 바로 예수님이다. 아버지인 요셉의 혈통을 통해 태어나신, 다윗의 생물학적 후손이다. 성경은 그를 “양들의 큰 목자”(히 13:20)로 묘사한다. 그분은 사망과 죄와 수치의 거인들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되셨다.하나님께서는 그 왕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지금도 그분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으로 아버지 곁에 서서 만유를 다스리신다. 그 앞에서는 보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배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6-14).생명의 떡영원한 본향 천국에 도착해 보좌 주위에 둘러서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왕을 영원히 영화롭게 하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일용할 양식으로 때마다 공급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베들레헴은 “빵의 집”을 의미하며, 바로 이 집으로부터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계시하신 분이 오셨다(요 6:35).이번 성탄절에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세상의 덧없는 쾌락, 썩어 없어질 소유물에서 만족을 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깊은 갈망을 더 간절하게 느낄 뿐이다. 오로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굳건한 사랑, 그치지 않는 평화, 샘솟는 기쁨, 흔들리지 않는 소망, 변하지 않는 의미, 구속의 공의, 넘치는 은혜, 그리고 우리를 초월하는 영광을 더 애타게 갈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두라고 하신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떡의 집에서 태어난 진정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그에게로 오는 이는 결코 주리지도,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다(요 6:33-35). 이것은 좋은 소식이요 큰 기쁨이다. 떡의 집, 즉 다윗의 성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그가 바로 주 그리스도이시다(눅 2:10-11). 할렐루야!그를 놓치지 말라여행에서 만났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베들레헴 성문 밖에서 어린 양을 짊어지고 가는 한 어린 소년을 보았을 때였다. 그날도 그 아이를 눈여겨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오늘이나 삶의 혼돈과 성탄절의 분주함 속에서 정작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성탄절에 가장 자주 잊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늘 자기를 중심에 두고 온갖 세상사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정작 우리를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지 못하고 그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하늘에서 찬양하는 천사들, 달려온 목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이자 왕, 생명의 빵 앞에 무릎 꿇은 동방박사를 기억한다. 이 모든 진리를 마음에 간직할 때(눅 2:19), 우리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고 우리 영은 기뻐 춤춘다(눅 1:46-49). 저 작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우리가 얼마나 떨어진 곳에 있건 상관없이, 주님은 그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심으로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셨다. 할렐루야!원제: Bethlehem: Little Town, Big Significa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베들레헴
성탄
어린양
목자왕
생명의떡
마리아가 그 아기에 관해 알고 있었던 세 가지
by Jonathan J. Routley
2022-12-19
‘예수님이 성취하실 일에 대해서 마리아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이렇게 묻는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하나 있다. 메리 로리(Mark Lowry)가 작사한 ‘Mary Did You Know?(마리아, 알고 있었어요?)는 케니 로저스(Kenny Rogers), 위노나 주드(Wynonna Judd), 클레이 에이큰(Clay Aiken) 및 씨 로 그린(Cee Lo Green) 같은 인기 아티스트가 불렀다. 노래 가사에서 마리아는 아기가 앞으로 물 위를 걷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또 나라를 다스릴 것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마리아는 심지어 이런 역설적인 말까지 듣는다. “당신이 낳은 이 아이가 곧 당신을 다시 낳을 겁니다.”신약성경 저자는 마리아가 아들의 성취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메시아이며 그가 성취할 것에 관해서 마리아가 결코 무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만 알려준 게 아니라 노년에 잉태한 엘리사벳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눅 1:36).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가 급히 엘리사벳을 만났고, 마리아의 문안을 받은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천사의 말을 확증하는 예언을 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오늘날 우리가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라고 부르는 내용으로 주님을 찬양했다(눅 1:46-55). 정말 멋진 노래다. 다양한 구약 본문을 언급함으로써 마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구약성경에 정통한지, 특히 메시아와 관련한 주제를 이미 훤히 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어린 소녀는 놀랍게도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마리아가 알고 있었던 것 구약성경에 비추어 이 구절을 연구하면 마리아가 알고 있었을 세 가지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예언의 의미를 이미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1. 심판과 구원이 이미 동시에 도래했다.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눅 1:46-47)으로 찬양을 시작한다. 마리아는 지금 인용하는 건 하박국 3:18이다.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마리아는 적에게 심판을 집행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용사가 되시는 주님에 대한 이 본문을 암시한다. 하박국 3장의 언어는 예수의 감람산 담론과 요한계시록 및 다른 묵시적 구절들(cf.합 3:10-12; 마 24:7-30; 계 6:12-17)과 매우 유사하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사역과 관련하여 메시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오십니다. 친히 기름 부으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오십니다. 악한 족속의 우두머리를 치십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십니다”(합 3:13). 이 구절의 요점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놀랍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선지자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 하박국의 맥락을 이해한 마리아는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적에게는 심판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폭력적인 압제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당시 1세기 유대 땅의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어쩌면 마리아는 메시아의 오심을 죄로부터의 영적 구원보다는 정치적 구원의 관점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마리아의 이 노래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언급도 포함한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눅 1:51).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역을 언급하는 두 가지 핵심 용어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팔과 교만한 자들을 흩으심이다. 신명기 26:8은 여호와의 팔이 얼마나 구원하기에 능했는지를 설명한다.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뻗은 팔은 이집트 종살이라는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강림하시는 능력의 표시였다.마찬가지로 모세는 민수기 10:35에서 일어나 원수들을 흩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이 두 가지 암시는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 명확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원수를 심판하기 위해 당신이 택한 왕을 세상에 보냄으로 한 번 더 팔을 길게 뻗으실 것이다. 2. 불의가 뒤집힐 것이다. 마리아는 또한 메시아의 오심을 특징짓는 불의의 반전을 암시한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눅 1:51-53)겸손한 자를 높이고 교만한 자를 낮추는 주제는 이사야 2:11-12, 17을 반영한다. 주님의 종말론적 공포와 광채가 세상이 끝날 때 교만한 자를 낮추어, “그날에 오직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이사야서의 처음 내용은 통치자의 부패로 말미암은 사회 불의로 가득하다. 그러나 오실 메시아는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을 것이다. 부패한 통치자는 사라질 것이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사 2:4). 굶주린 자는 배불리 먹겠지만 부패한 엘리트는 더 이상 음식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사회 부조리가 바로 잡히고 정의가 영원히 확립될 것이라는 그녀의 희망을 드러낸다. 3.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 다음 세 구절은 우리의 주의를 언약으로 이끈다.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눅 1:50, 54-55)자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며,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심,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을 묘사한다. 마리아의 머리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련한 여러 구절이 들어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50절은 그녀가 특히 시편 100:5과 103:11을 생각했음을 암시한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시 100:5)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시 103:11)두 구절 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결코 잊히거나 무효가 되지 않으며, 메시아를 통해 실행될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신의 시를 마무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아브라함(더 나아가 다윗에게)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실 것이다. 마지막 단서 하나마리아는 예수님이 누구를 고치실지, 어떤 기적을 행하실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오심 속에 담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누가는 천사가 전한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마구간에 도착한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더불어서 마리아에 관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준다. 마리아의 생각이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겼다”(눅 2:19). 목자들의 말을 숙고한 마리아, 그것은 그녀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지식과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연결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마리아였다고 해도, 예수님이 하실 모든 일을 다 알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리아 찬가 속에 담긴 구약의 메시지는 그녀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원제: 3 Things Mary Knew About Her Baby Bo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마리아
예수
마리아찬가
메시아
성육신
성탄
성탄은 신화가 사실이 된 사건이다
by 고상섭
2022-12-18
성탄의 가장 큰 의미는 출생이 아니라 강림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이 중요한 성탄의 의미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탄을 믿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합리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은 전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는 이 장애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리고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자연주의 세계관은 하나의 신념일 뿐이다 C. S. 루이스는 기적에서 기적은 초자연적 힘의 간섭으로 자연 외에 초자연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군가 기적을 경험하더라도 그의 신념 속에 초자연을 배제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적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옳다면 모든 자연의 법칙들을 물질세계 안에서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주의 세계관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유물론의 모순을 드러낸 홀데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정신 과정이 순전히 뇌 속 원자의 운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라면, 나는 내 소신이 옳다고 가정할 수 있는 어떠한 이유도 갖지 못한다. … 따라서 나는 내 뇌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이유도 갖지 못한다”(기적, 31). 루이스는 기적을 믿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째, 자연의 통상적 안정성을 믿어야 하고 둘째, 자연 그 너머에 어떤 실재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믿음이 있을 때만 비로소 초자연적 실재가 우리의 자연계를 이루는 시공간 속에 침입해서 그것을 교란시켰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동정녀 탄생과 같은 기적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이성과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사느냐의 문제이다.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 초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의 차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자연주의 세계관을 신념으로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뿐이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은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초자연의 세계관을 가질 때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동정녀 탄생은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이야기이다 팀 켈러는 성탄 설교를 모은 예수, 예수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픽션이 아닐 뿐 아니라, 픽션을 읽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는데,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들도 존재한다. 현대인이라면 더 현실주의적이 되어야 하는데 판타지 문학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는 계속 판타지를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유명한 동화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끊임없이 판타지 문학을 찾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열망을 얼마간 해소해 주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적 픽션은 그런 열망을 건드리거나 채워줄 수 없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갈망이 초자연 세계를 경험하려는 갈망, 죽음을 면하려는 갈망, 영원한 사랑을 만나려는 갈망,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며 창의적 꿈을 실현하려는 갈망 등이다. 잘 구성된 판타지 이야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감동과 만족을 얻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 그런 것들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잠시나마 이런 갈망을 채워주고 미치도록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예수, 예수, 50)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인간 안에 깊은 갈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이 탄생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열망하는 모든 판타지의 생각들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알려준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인간 안에 하나님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고 말한다.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코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처음 사랑에 빠졌거나 처음 외국을 그려볼 때, 또는 처음 흥미로운 과목을 배울 때 속에서 솟구치는 갈망은 결혼이나 여행, 배움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입니다. 결혼이나 여행이 최고의 것일 때도, 그 갈망을 처음 느낀 순간에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현실 속에서 무너져 버리고 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내가 훌륭할 수도, 여행 가서 묵은 호텔이 아름답고 경치가 빼어날 수도 있으며, 화학 연구가 흥미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 213)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음식이 있기 때문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은 성관계가 있기 때문이고, 새끼 오리가 헤엄치고 싶어 하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현실적인 이야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판타지 문학을 추구하고 그것을 열망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현실적인 사건들로 채울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자연주의, 물질주의가 아닌 초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판타지 문학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린이들의 동화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원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창문이라 할 수 있다. 신화가 사실이 되었다 C. 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신화를 읽을 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은 진리(Truth)가 아니라 실재(Reality)다”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인간 지식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경험적 지식으로 맛을 느끼는 순간처럼 맛을 경험하는 지식이다. 이것은 맛을 이해하고 지적으로 분석하는 설명적 지식과 구별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순간 더 이상 그 맛을 맛으로 느끼지 못한다. 부부관계를 하는 순간 쾌락을 조사하거나 회개하는 동안 회개를 연구할 수는 없고, 폭소를 터트리는 순간 유머의 본질을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을 정말 알 수 있을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피고석의 하나님, 73)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포옹하는 행복감을 느끼면서 사랑을 연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꼽 잡고 웃는 순간 유머를 분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설명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 즉 행복과 유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런 인간 지식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화라고 말한다.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단순한 명제로 기술되지 않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위대한 신화를 즐기는 가운데 우리는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화는 사고를 초월한다. 더구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단순한 죽은 신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신화이며, 그래서 사실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신화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역사적 사실에 동의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모든 신화에 부여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미 사실이 되어 버린) 그 신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은 동정녀가 잉태했을 때 이 위대한 신화가 사실이 되었음을 몰랐던 이들입니다. 사실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신화의 온갖 특성을 함께 가져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피고석의 하나님, 76)동정녀 탄생은 사실이 된 신화이다. 신화적인 모든 요소를 가지고 사실이 되어서 우리에게 그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사랑과 순종만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 도덕주의자, 학자. 철학자가 되어야 하지만 시인과 아이의 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실이 된 신화를 누리고 맛보고 경탄하며 경외할 수 있어야 한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신화적 요소의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자연주의 세계관에 갇혀 이 땅의 지식과 이 세상의 것들로 쉽게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육신은 인간의 지식 이상의 초자연의 세계가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탄절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현실인가? 눈에 보이는 이 땅을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오늘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현실인가?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어쩌면 나니아의 옷장을 여는 문인지 모른다. 마음을 다해 시인과 아이의 눈으로 그 문을 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돌아가는 현실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 나니아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성육신은 영원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의 좁은 시야를 열어주고, 나니아의 세계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니아의 옷장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함을 상기시켜 준다. 성탄은 신화가 사실이 된 날이다. 그리고 현실의 세상에서 초자연의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제 나니아의 옷장을 열어보자. 무미건조한 삶의 하루하루가 경외와 경탄이 있는 삶으로 바뀔 것이다.
성탄
성육신
신화
신화와사실
허구와진실
판타지
강림
동정녀탄생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한 문장
by Ed Welch
2022-12-1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신학교 첫해에 나는 하나님,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상담할 사람들과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끼칠 한 문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 내 눈에 성경은 단지 잘게 부서진 일련의 조각처럼만 느껴졌다. 물론 하나하나가 다 좋은 조각이었지만, 서로를 잇는 일관성이 부족해 보였고, 그 사실은 때때로 내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성경 속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보다는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어 핵심 메시지를 보여주는 책을 읽으려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만난 그레셤 메이첸(J. Gresham Machen)의 The Christian View of Man을 읽는 중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글이 하나 있었다. ‘하나님이 인격(personal)이시기에 인간도 인격이다’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이건 분명히 메이첸에게 있어서 대통합의 원칙이 되는 중요한 관점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내게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더 꼼꼼하게 읽었다. 무엇보다 메이첸이 ‘인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찾을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사실만 따로 정리하고 책을 덮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쓴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을 읽었다. 그는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주 잘 썼고, 그의 통찰은 내가 현재까지 추구하고 있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만든 출발점이 되었다. 그 책을 읽은 결과, 나는 보스의 모든 글(캐서린 보스(Catherine Vos)의 아동 도서까지 포함)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러는 중에 내 인생을 바꾼 문장을 발견했다. 보스는 내게 인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만족스러움을 가져다주는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제공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의지하는 것도 또 단지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의식적이며 호혜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생각과 목적과 일에서 그분과 나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영적 능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 그분에게서 받고 또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186쪽)주거니 받거니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 말이 그날 내게 준 감동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담긴 핵심이 무엇인지를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보스가 이단에 빠졌고, 나만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건가? “하나님과 의식적이며 호혜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영적 능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 그분에게서 받고 또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이첸이 말한 인격의 의미였다. 굳게 잠겨있던 뭔가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말은 내가 “주거니 받거니”(back and forth)라고 짧게 말하거나 쓸 때마다 그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은 대화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그분으로부터 또는 나로부터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은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시 62:8)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나는 그분께 내 마음을 쏟아낼 수 있고, 그분은 내 말을 들으신다. 하나님은 공감(compassion)으로 반응하시거나, 또는 단지 자녀가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대해서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겁게 들으신다. 그리고 그는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을 통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씀에 영향을 받아 변화된다. 주거니 받거니. 호혜적 교제. 영적 존재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그리스도께 더 가까이모세가 떠오른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출 32:7) 백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모세가 항의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가 실제로 백성들에게 어떻게 임할지를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그제야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대답할 여지를 주고 계심을 깨닫고 그 초대를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주셨던 과거의 약속, 열방 앞에서 드러날 하나님의 명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종…자손”이라는 사실에 호소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은 “마음을 돌이키셨다”(출 32:14).그렇게 ‘주거니 받거니’가 이어진다. 주님은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출 32:34)라고 말씀하신다. 응답하라는 하나님의 다른 초대를 모세가 놓쳤을 때도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출 33:3). 아마도 이전 대화로 인해 담대해진 모세가 대답한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출 33:15).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출 33:17). 그렇게 계속 주거니 받거니 한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일련의 대화는 주님께서 그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이 이제 죄의 용서로 표현될 것이라고 계시하실 때 절정에 이른다(출 34:6-7).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모세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서가 떠오른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 하늘과 땅을 나누는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오시며, 그분의 얼굴은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그분의 모든 백성을 향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새롭게 빚어진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에게 말하라고 권유하신다.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이 우리가 하는 말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이루신 역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벧전 3:18). 이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친구라고 불리며(요 15:15),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풍성함하나님은 이제 나를 그의 백성 가운데 두셨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나를 그 자신에게 더 가까이 두셨고, 내게 말하라고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더 많이 말할수록 내게는 더 좋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나를 하나님께 더 드러낸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런 식의 개인적인 친밀함을 원하신다. 누가 감히 그런 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이나 했을까? 이 사실이 내 마음에 점점 더 뿌리를 내려감에 따라서 나는 더 많이 기도하게 되었다. 좋은 것과 어려운 것에 대해서, 종종 나는 하나님께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그냥 털어놓기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더 자주 고백한다. 이런 기도가 내 삶에서 일으킨 변화는 내 안에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는 기도 속에 형식으로 포장된, 마치 친구들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형식적인 대화를 담지 않는다 이런 영적 풍성함은 아내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이 내 속에 자리 잡기 전까지 나는 아내에게 다 털어놓으라고 종종 말하기는 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부끄럽거나 아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주된 관심사가 내 말을 하는 것보다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매일 준비한다. 오늘 내가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지? 그런 다음, 나는 언제나 나를 돌보시는 주님께 나아가려고 준비한다(벧전 5:7).이런 깨달음은 매주 내가 하는 상담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언제나 내담자가 마음을 열고 얘기를 하도록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나는 꼭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그것을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염려에 쌓인 사람에게 하나님께 나아가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빌립보서 4:5-6은 그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님이 바로 곁에 계신다. 그러니까 당신을 괴롭히는 세상과 혼자 싸우려고 애쓰지 말라. 하나님께 나아가서 털어놓아라. 당신의 생각을 하나씩 정리해 보라. 불안함을 일으키는 요인을 생각해 보라. 당신을 괴롭히는 걱정이 말하는 사실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거기에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기 마련이다. 가르치다 보면 나는 자주 시편을 인용한다. 시편은 결국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이다. 각각의 시편을 각기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하라고 나는 제시하곤 한다. “나에게 말해라”라고 주님이 손을 내미신다. “지금 너를 괴롭히는 게 무엇이냐?” 나는 이 점을 최근에 쓴 책에서도 설명했다. 그 책 제목이 ‘더 가까이 가도록 창조된’(Created to Draw Near)’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내가 수십 년 전에 이런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보스를 인용했다. 끝나지 않는 대화내 주변의 세상을 관찰할수록, ‘주거니 받거니’야말로 온 세상에 넘쳐흐르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운영되는 방식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원칙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를 들어 좋은 친구는 서로 마음을 나눈다. 배우자도 서로 마음을 나눈다. 그게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마음을 나누지 않을 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내 마음에 감동을 준 이 네덜란드 신학자의 긴 문장이 말하는 바가 바로 이런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종하기 위해서, 의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다. 그 모두를 다 포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신의 대답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재구성되도록 하라. 그래서 이 세상 그 어떤 다른 피조물도 할 수 없는, 사랑의 말로 끝없이 속삭이는 ‘주거니 받거니’의 관계가 주는 기쁨에 당신이 동참할 수 있기를 간구한다. 원제: Back and Forth with God: A Sentence That Reshaped My Relationship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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