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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여전한 유혹
시편 49편 묵상
by 고명환
2024-01-25
1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 성공을 바란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이 시대에, 성공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인의 아들이 의사가 되었다.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뒤, 험한 일을 해가며 자식 뒷바라지를 했으니 나름 성공한 것이다. 일전에, 그분에게 아들이 의대에 진학하려는 동기를 물은 적이 있었다. 들려온 답은 간단했다. 아들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의대에 가려 한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적성에 맞아서’나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아니면 ‘보람 있는 직업이라 생각해서’ 정도의 상투적인 선택 동기를 기대했는데, 정제되지 않은 솔직한 대답에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난다.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돈을 좇는 것에 냉소를 보내고 싶지 않다.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들에게 돈은 안정과 안락함을 보장해 주는 수호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넉넉한 돈은 갖고 싶은 것 갖게 해주고,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주고, 병들었을 때 치료받게 해주고, 고민 없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해주며, 편안히 쉴 공간을 제공해 준다. 물신의 통치 아래 사는 시민에게 돈은 쾌락이요, 안정이요, 권력인 것이다.허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 편승해서 성공과 돈을 좇는 대열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는 풍조는 그들이 진정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이생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의대 보낸 이웃을 부러워하고, 안되면 치대라도 보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녀를 일찍이 학원으로 몰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를 대할 때면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투기를 목적으로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고,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 불필요한 땅을 사둔 사람들도 교회의 요직에 배치되어 있다. 백세가 보장된 것처럼 ‘백세시대’를 노래하며 그때까지 누리고 즐길 넉넉한 자금을 비축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장로님 목사님들 앞에 하루하루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빈자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진다. 예배 시간에 백억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하는 당회장 목사를, 거부가 교회에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장로님을 마주할 때면 이곳이 교회인가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잠언 30:8). 과거에 그리스도인들 입에 제법 회자되던 성구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겸손한 기도와 가르침을 듣기는 쉽지 않다. 물질의 어려움 없게 해 달라는 기도나 사업이 잘되어 주님을 위해 멋지게 쓰게 해달라는 기도를 더 듣게 된다. 겨우 의식주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디모데전서 6:8)고 가끔이라도 강조하는 설교자들은 주변에 있는가? 의식주만 해결되면 자식 교육, 문화생활,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만족하며 살라고 가르치면 교회 건축, 선교 등의 교회 사업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런 시대적 필요 앞에 자족과 절제 같은 성경의 미덕은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교회 속에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2시편 49편1만민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2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귀를 기울여라.3내 입은 지혜를 말하고, 내 마음은 명철을 생각한다.4내가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을 타면서 내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5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나를 에워싸는 그 재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과 돈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7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하여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하는 법,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8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비싼 것이어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다.9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도 하지 말아라.10누구나 볼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나 우둔한 자도 모두 다 죽는 것을!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11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12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13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14그들은 양처럼 스올로 끌려가고,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아침이 오면 정직한 사람은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시들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될 것이다.15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 목숨을 건져 주시며, 스올의 세력에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셀라)16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 집의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너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아라.17그도 죽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며, 그의 재산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18비록 사람이 이 세상에서 흡족하게 살고 성공하여 칭송을 받는다 하여도,19그도 마침내 자기 조상에게로 돌아가고 만다.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20사람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새번역)“들어라(Hear)” “귀를 기울여라(Listen)”(1절). 시인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며 시작한다. 그가 하려는 말을 흘려 버리거나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혜(wisdom)가 있고, 명철(understanding)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련한 짐승처럼 근시안적 삶을 사느냐(12, 20절), 미래를 내다보고 영원을 사느냐 하는(14, 15절) 중대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2절), 들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1절)은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든, 저주 받은 이방인이든 가릴 것 없이, 삶을 부여받은 피조물들은 지혜를 말하고 명철을 주며 인생의 의문을 풀어낼 수 있는 시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3, 4절).시인은 단지 부자들을 경고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자기의 민족 이스라엘만을 향해 교훈하려고 그들을 첫머리에 부르지 않는다. 만백성(all people)을 부른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all who live in this world)에게 외친다. 누구도 예외 없이 들어야 할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호소하듯 “들으라”고 외친 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경고한다. ‘죽음의 목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높은 자, 낮은 자, 부자, 가난한 자, 우매 자 혹은 지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생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라고 소리를 높인다(10절). 이 죽음 앞에 사람은 조금도 저항할 수 없다. 양처럼 지각이 없는 존재인 사람은 목자인 죽음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다(14절). 다만, 보이는 물질세계의 위력에 눈이 멀어 인생의 진리를 볼 수 없는 것뿐이다. ‘죽음의 목자’를 따르는 선두에는 가진 자들이 도열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 놓고 의지하는 부와 권력이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며(18절), 영원히 기거할 집(11절)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어두움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무덤이 영주할 주인인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11절). ‘죽음의 목자’가 이끄는 대열의 선두 뒤에는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며 그 대열에 진입하고자 애쓰는 무리가 있다(13절). 그들은 가진 자들의 교훈과 철학을 기뻐하고 그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충고를 반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쥘 기회를 제공하는 그들이 고맙기만 하다.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인 가진 자들만이 보이지, 가진 자들 앞을 인도하는 ‘죽음의 목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영원한 거처, “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19절)으로 향하는 인파 속에 섞여 있음을 알지 못한다.살펴본 것처럼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밝힌다. 반면, 거기에 따르는 구체적인 훈계나 교훈은 절제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시인의 외침만으로도 청자나 독자들이 각자의 인생의 좌표를 점검하게 만든다. 더하여, 시 안에 직접적인 지시나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한다.부언) 부한 자들을 경고하고 부를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를 전체를 수렴하는 주제로 내세우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따라서, 새번역 성경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부유함을 의지 하지 말아라”는 제목은 적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재물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바꾸거나 살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임을 일깨워 주고(6-8절), 소멸하지 않는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의 자신감은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확신에서 나온다(15절).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시인이 부자를 두려워하거나(6절), 그들로 인해 초라해질 리 없음은 당연하다(16절). 3소유욕은 정말 질긴 욕망이다. 만족할 줄 모르며 중단할 줄도 모른다. 한 사람을 주관할 수도 있고 집단을 조종할 능력도 있다. 영특해서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낼 때도 있고, 숨어 정체를 숨길 때도 있다. 다스림 받기를 싫어하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뛰쳐나가 일을 벌인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통 채로 삼켜 버리기까지 한다. 사무엘하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범죄 기록을 거론할 때 간음죄를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면 살인죄를 붙여 풀어 나간다. 물론 이 둘로 해석하고 교훈을 얻는다 해도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면 사건의 온전한 실체를 다 아우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간음과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은 원인이 빚어낸 결과임을 찾아 낼 수 있다. 그 사건의 이면에는 엄청난 일을 벌이도록 작용한 배후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범죄 당시, 다윗의 인생은 절정기에 있었다. 불안했던 왕위가 확고하게 안정되었고 왕국을 위협할 만한 주변의 큰 이방 민족들은 모두 평정되어 직접 전쟁에 나가도 되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에 해당하는 영토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었고, 이에 앞장섰던 다윗왕을 향한 백성의 신망은 매우 두터웠다. 아내로 삼은 여섯 여인에게서 여러 왕자가 태어나 왕가 역시 크게 번성했다(사무엘하 3:2-5). 왕으로서 최고의 영예와 부를 누리는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내면에 도사린 탐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라는 사실을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통제를 벗어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밧세바를 소유했고, 이를 덮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말았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다윗이 일시적인 성적인 유혹을 못 이긴 간음죄 정도로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다. 나단 예언자의 입을 빌어 예를 든 비유 중, 많은 양과 소를 가졌는데도 손님이 오자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뿐인 어린 암양을 빼앗아 대접한 부자의 탐욕이 다윗 안에 숨어 있음을 먼저 들추어내신다. 그런 뒤, 직접적으로 그의 근본적인 잘못이 무엇인지 준엄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또 내가 사울의 손에서 너를 구하여 주었다. 나는 네 상전의 왕궁을 너에게 넘겨 주고, 네 상전의 아내들도 네 품에 안겨 주었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나라도 너에게 맡겼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무엇이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하여 나 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하였다.” (사무엘하 12:7-9)주님은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시고 상전의 아내들을 그의 품에 안겨 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넘치게 베풀어 주셨다. 나라와 백성을 맡기셨고, 그것으로도 부족하게 여기었다면 그 이상 무엇이든 더 주실 마음이셨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의 소유를 부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악한 일의 원인이 만족함이 없는 그의 소유욕에 있었음을 집어 내시고 그것을 간음과 살인보다 더 악한 것으로 판단하셨음을 들려준다. 마가복음 10장에 전도유망한 한 청년이 등장한다(누가복음 18장, 마태복음 19장). 공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관리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부자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크게 성공한 엘리트 젊은이였다. 거기에 신앙심도 깊어 하나님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잘 지켜온 믿음 좋은 청년이었다. 아마도, 믿음 좋은 딸을 둔 부모들이라면 사윗감으로 삼고 싶은 보기 드문 젊은이였다. 돈과 지위를 이미 거머쥔 이 부자 청년은 무엇이 부족했던지 예수님을 찾았다. 그가 한 질문이 이유를 말해 준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자 청년은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나사렛 청년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부자이고 지위가 있는 젊은이가 예를 갖춰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질문한 것을 볼 때, 이미 주님에 대한 상당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얻고자 하는 바, 영생의 길을 예수님은 알려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겸손하게 다가와 영생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계명들을 나열하시며 “생명의 길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의 랍비라 칭함을 받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할 만한 평범한 대답을 먼저 하신 것이다. 이에 부자 청년은 말한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참으로 비범한 젊은이가 아닐 수 없다.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아온 청년이다. 세 복음서 기자들이나 예수님께서 청년의 대답에 대해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은 진실했던 것 같다. 마가는 이즈음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삽입한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마가복음 10:21). 기자는 한 개인에게 예수님께서 따뜻한 시선을 보이셨다는 흔치 않은 설명을 덧붙인다. 마가의 관찰대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다. 아버지가 자랑스런 아들을 사랑하듯, 여러 면에서 칭찬할 만한 청년을 주님은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헌데, 주님은 이 부자 청년을 그것으로 놓아주시지 않는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쉬운 해답을 들려주시지 않았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집어엎고 다시 구축해야 할 혁명적인 길을 제시해 주신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가복음 10:21)시간이 흐르면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을 버리고 영원히 남을 것을 대신 소유하라고 도전하신다. 영원한 보물 저장고에 그의 소유를 옮기고, 그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유로 삼았던 돈, 명예, 도덕성의 추구, 종교적 업적이 줄 수 없는 영생을 얻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린 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추구해 오던 인생의 업적을 모두 해체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산과 같은 제안을 하셨던 것이다.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자 청년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꾸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섞어질 것을 썩지 않을 ‘하늘의 보화’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보이지만 임시적인 세상의 보화를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하늘의 보화로 바꾸라고 말씀하셨다. 이 트레이드를 보장해 주시는 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었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야 하는 청년에게는 그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예수님을 다른 랍비들과 다른 정도의 수준이 아닌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시는 메시아로 믿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이 트레이드에 실패했다. 그를 사랑했던 예수님과, 갈구하던 영생의 길을 뒤로하고 근심하며 떠나가고야 말았다. 많은 소유가 그를 붙들었고, 청년은 이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마가는 청년이 결단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초대형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젊은 목사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제자화 전략을 통해 소규모 교회를 거대 교회로 일구는 데 성공했다. 물론 교회 주변에 신도시들이 생겨서 교회가 커지는 데 일조한 면도 있었다. 교회의 몸집을 더 이상 불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시점부터는 꾸준히 분립개척을 여러 번 해왔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가 커지면 한국 교회가 손대는 대안학교, 복지시설 등도 운영해서 교회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6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일년 후에 조기 은퇴할 거라고 했다. 이유인즉, 이젠 “번아웃(burnout)” 되어 더 이상 목회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큰 교회 목회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하여,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조그만 목회를 하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목회다운 목회를 하려면 교회가 200명 이상이 되면 어렵다는 소견을 가졌던 나는 그분의 결정을 반기며 잘 생각하셨다고 맞장구를 치고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이어진 그분의 장래 계획은 나의 기대를 금방 깨고야 말았다. 조그만 교회를 일구어 큰 교회에서 못한 한 영혼 한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심정으로 섬기고 돕겠다는 소박한 꿈이 아니었다. 목회자들을 컨설팅하는 사무실을 열어서 자신의 목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컨설팅 자격증을 땄고 교회에서는 그 일에 이미 지원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교회에서 마련해 준 공간에서 자신의 목회 성공(?) 노하우(교회를 크게 만드는 비결)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며 목회자들의 멘토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였다. 어찌 생각해 보면, 성공한 목회자가 성공을 위해 몸부림 치지만 어떤 이유에서 건 고전하고 있는 후배를 위해 나선다는데 박수치고 기대감을 가져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길은 더 높은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픈 본인의 또 다른 욕망 성취를 위한 시작은 아닌지.’ ‘목회라는 책임감과 정신적 압박의 자리에서 비켜나, 힘들이지 않고 여전히 존재감을 잃지 않을 자리로 옮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스쳐 가는 의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른 한편, 그분이 젊은 시절 부목사로 시무했을 당시의 담임목사님의 은퇴에 대해 언급했다. 개척해서 견실한 중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기까지 고생하신 목사님에게 교회가 은퇴 처우를 섭섭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흔히 있는 불미스러운 일 정도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멈추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더는 캐묻지 않았다.시간이 지나, 그 교회에 함께 다녔던 장로님을 만나는 기회에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은퇴하시는 목사님에게 교회로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섬겨 드렸다고 했다. 원로 목사님으로 추대해서 담임목사님이 받는 80퍼센트의 사례비를 매월 지급하고 있고, 퇴임 후 퇴직금은 물론, 편안하게 사실 아파트까지 마련해 드렸다고 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내가 판단하기에도, 기본적으로 개인 재산이 있으시고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뒷바라지가 끝난 노년에 그 정도면 사모님과 큰 불편 없이 살아갈 만한 충분한 지원이었다. 그런데도, 그 성공한 목사님은 자신이 모시던 담임 목사님이 섭섭한 대접을 받고 은퇴했다고 전해주었다. 궁금하다. 작은 교회를 초대형 교회로 키운 그 목사님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 어떤 퇴직이 보장될지. 분명한 건, 섭섭하게 보냈다던 그 목사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퇴직금과 생활보장이 이루어질 거라는 사실이다.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존재감을 보여주며, ‘성역’을 이룬 보상으로 주어진 재물이 주는 편리함을 향유하고, 그것이 가진 힘을 행사하며 넉넉한 노년을 보낼 것 같다. 4얼마나 가져야 하는가? 성경은 그 한계를 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한 소유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이 가져야 할 분량의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얼마나 소유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각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과의 관계에 실패를 가져오는 어떤 소유도 정당화될 수 없다. 소유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관계에 틈을 만든다면 소유는 악이고 적인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 정도의 양이 각자가 가져야 하는 분량이다. 미련 없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얼마나 많은 가치를 부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가치에 눈을 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와도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은 많은 가축과 종을 거느린 부자였다. 단지, 가축과 재산만 소유한 부자가 아니라 주변의 왕들과 싸워도 결코 밀리지 않는 훈련된 사병을 보유한 강력한 족장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진 것을 가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낮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그의 소유는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카 롯에게 좋은 곳을 선택할 기회를 먼저 줄 수 있었고, 자식들에게도 공평하고 적정하게 재산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에게 많은 소유는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수중에 있었어도 그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욥 역시 가진 자였으나 가지지 않은 자처럼 살았다. 그의 거대한 재산이나 많은 자식이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재산도 자식도 축복으로 생각했으나 소유로 여기지 않았다. 잠시 자신에게 맡겨진 임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뿐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가 모든 것을 잃고 했던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죽을 때에도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주신 분도 주님이시요,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욥기 1:21, 새번역)그의 곁에 있다가 사라진 많은 것들, 재산, 자녀, 건강, 신뢰 같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일시에 잃었을 때, 욥은 권리를 가지신 주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보통 욥의 믿음을 강조하는 선에서 관찰을 멈추고 끝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행동도 간과하지 말고 주목하기를 바란다. 욥은 잃은 것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주님을 찬양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찬양을 통해 영광을 돌린다.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하셨기에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 합당하며 선한 뜻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차원 높은 믿음의 표현까지 실천했던 것이다. 보았듯, 많은 소유가 욥과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소유주로 착각하지 않고 만유의 하나님을 소유주로 바르게 인식했던 믿음의 사람을 상실이 침몰시키지 못했다.5인류의 타락 이후 소유욕은 사람들 마음의 빈자리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에덴 동산에 머물 때는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소유하지 않더라도 불안하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등진 이후 사람들은 소유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힘과 만족으로 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서로를 소유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소유는 영혼의 불안과 공백을 채우는 양식이 되었고,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빼앗아 갔다. 그런 뒤,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마저 그것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부유한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소유가 영혼에 밀착되어 사고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성경의 여러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많이 거둔 소출에 취해 영혼마저 부유해진 나머지 커다란 착각에 빠진다. 자기가 소유와 영혼의 주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영혼에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누가복음 12:19, 새번역)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소출로 영혼의 양식을 삼고 앞으로 즐기며 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영혼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그날 밤 영혼을 회수할 수 있는 절대자가 권리를 행사하면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는 영혼을 소유에 빼앗긴 채,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계획을 세웠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소유로 인해 전 인생을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를 마음에서 분리해 내야 한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것이 마음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내게 주어졌으나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부족함 없는 생활을 넘어 외유와 관광이 잦고, 사치와 호식을 축복으로 자랑하며 고민 없이 즐기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선교지를 방문한다는데 골프 장비를 가지고 가야 할지 테니스 채를 가져가야 할지 저울질하는 목사들의 들뜬 고민이 들려 오기도 한다. 과연 이분들 영혼 속에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자리 잡을 틈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사도 바울은 감독이 갖추어야 할 여러 자격에 대해 열거할 때,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디모데전서 3:3)라는 항목을 포함시킨다. 바로 이어서 언급하는 집사의 자격보다 감독(overseers)의 자격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언급한 것으로 보아, 감독이 중요한 직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돈을 사랑하지 아니해야 한다’(not a lover of money)는 요구조건은 집사가 될 사람들에게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아니해야 한다’(not pursuing dishonest gain)는 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수준 높은 자격요건인 듯하다. 그만큼, 영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일꾼들은 소유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소유에 의해 잠식당하기 쉬운 오늘날의 영적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점검하는 엄격한 표지의 하나로 삼아야 할 가르침이라 생각한다.책을 좋아하던 젊은 시절에 사방을 빽빽하게 책으로 장식한 목사님들의 사무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많은 책은 그분의 영적인 내공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그 무게 앞에서 나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만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심리적 위축감이 들었다. 교회는 담임 목사님의 도서 구입비로 상당액을 사례비 외에 지원해 주었고, 어쩌다 지나치는 당회장실 문 옆에는 배달된 큼직한 책 박스가 눈에 띄었다. 어느 날, 당회장실 소파에 앉아 목사님을 마주할 때,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할 겸 객쩍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이 참 많으시네요.”“아! 내가 책 욕심이 많아요.”목사님이 반색하며 말씀을 이어 가셨다.“새 기독교 서적이 나오면 무조건 알아서 내게 배달이 되게 되어 있어요.”그러고 보니, 구석에는 아직 끈도 풀지 않은 큰 박스 두어 개가 눈에 띄었다. ‘책 욕심’욕심이 책과 결부되면 미덕으로 둔갑하는가 보다. 그럴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개인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책 읽기에 욕심을 부린다면. 하지만, 공간을 꾸미기 위해 수집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도 미덕이 될까. 미덕은커녕 허세가 되지는 않을지. 유학을 결심하고 짐을 부쳐야 할 때가 되었다. 거기 가서도 필요하리라 선택된 물건들이 박스에 쌓였다. 그중에는 생활비를 아껴 구입한 주석서, 성경 사전 등의 소장 가치가 있는 책들이 박스들의 반이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공부하러 가니 충분히 그곳에서도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었다. 일반적인 신앙 서적들은 어느 교회에 기증한 터였고, 신중하게 챙긴 알짜들은 그 나라까지 기어코 나와 동행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앞으로 두고두고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석, 사전류 등을 없는 살림에 열심히 구입했고,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서 그 덩치가 점점 커졌다. 이렇게 모은 책들은 빈번한 이사 때마다 싸고 풀고 정리하는 일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 갔다. 그때마다, 나그네 생활이 끝나고 어디에 정착한 후 번듯한 공간이 생기면, 더 이상 박스에 담을 일도, 풀어 책꽂이에 반듯하게 정리할 일도 없을 거라는 작은 소망을 위안 삼아 며칠 간의 정리 작업을 해내곤 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그런 날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또다시 박스에 싸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번엔 달랐다. 이제 많은 책 박스들은 귀국하는 짐이 되어야 했다. ‘그동안 애착을 가지고 구입하고, 끌고 다녔던 것들인데. 또, 한국에 가면 구할 수 없는 원서들인데. 앞으로 주의 일을 하려면 필요한 재산일 텐데.’ 두 번 생각할 이유 없이 당연히 함께 가야 할 짐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준비하면서 책들이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곳에서도 저 많은 책을 풀고, 정리하고. 또, 다시 옮겨 할 텐데, 같은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하는가?’ 앞으로는 새로운 것을 살림으로 만들지 않기로 다짐하고, 이미 의복 외에 정들었던 세간을 처분해 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책들은 끝까지 곁에 있어 주어야 할 것 같은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과 생각은 그것들도 이젠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계속 사인을 보내왔다. 마침내, 모든 책을 처분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책 중에는 일 년에 한 번 들춰 볼까 말까 하는 두꺼운 책들이 상당수였고, 어떤 책들은 구입한 후 나중에 읽어 보리라 마음먹고 표지도 열어보지 않은 채 몇 년을 끌고 다닌 묵은 것들도 있었다. 이미 읽었지만, 나중에 또 한 번 보겠다고 보관하고는 다시 꺼내지 않은 책들도 제법 되었다. 가까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늘 가까이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힘들여 소유할 만한 이유보다 보내고 나서 오래도록 아쉬워할 만한 이유가 덜한 것들이었다.책을 떠나보내도 정 필요하면,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기본적인 기독교 서적 정도는 구비한 목회자를 찾으면 해결될 것 같았다. 아니면, 전자도서를 사거나 빌려 이용하면 짐스런 책들을 더 이상 불러들이지 않아도 필요를 채우는 데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애착을 가졌던 값나가는 책들을 팔고, 주고, 버리는 일은, 결코, 쓰지 않는 생활용품을 처분하는 것처럼 즐겁게 할 일이 아니었다. 마치 폐업정리 하는 주인과 같이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분은 목회자인데 책이 별로 없어.”오래전, 한 집사님이 어떤 목사님 방을 들여다본 후 하던 소리가 생각났다. 더불어, “책 욕심”이 많다던 그 목사님의 소리도 겹쳐 들려왔다. 다행히, 단권 주석 두 권, 성경 두 권, 신학 사전 두 권을 빼고는 모든 책이 순조롭게 정리되었다. 남긴 여섯 권의 책은 급할 때 가까이 두고 쓸 의향으로 떠나보내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금도 처분한 책들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없는 아쉬움보다 자유로움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마음 한켠에는 ‘그것들이 무엇이라고’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거기에 두려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다. 책이라는 조그만 소유로 영혼이 부요한 적이 있었음을 후회하는 마음 또한 지우지 못한다. 6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풍족하게 주시는 이유는 명백하다. 나누고 베풀라고 주신다. 사치와 향락에 쓰기보다 돕고 사랑하는 데 쓰라고 주신다.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소진하라고 주신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여러 목회적 충고 가운데, 부한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내용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넉넉한 형편을 주시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에게 ‘명하라(command)’는 강한 어휘를 사용한다. 오늘날, 사도의 명령 그대로 교회 안의 부자들에게 명하여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다면 아마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17-19, 새번역)하나님은 부한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부를 맡기셨다(18절). 한낱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거나 거기에 소망을 두게 하는(17절) 사적 소유물로 간직하라고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 맡기신 부를 “아낌없이” “즐겨” 베풀고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며 이로 인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고 허락하신 것이다(18절). 주님의 뜻대로 소유를 흘려보내는 일은 결코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하늘의 계좌로 이체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정성스럽게 보내 준 쓸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섬김이 사도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마음에 새겨지는 선물이 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들의 장부(account)에 기록되는 열매라고 흥미롭게 표현한다(빌립보서 4:17).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늘에 계좌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서 사랑으로 베풀고 나눈 소유는 자신의 하늘 계좌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쌓이게 됨을 가르쳐 준다.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누가복음 12:33)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되지 않는 적절한 설명이다. 소유를 떠나보낼 때, 나의 장부의 잔고가 줄어들었다고 아쉬워하기보다 보상이 반드시 따르는 안전한 계좌에 입고되었다고 기뻐해야 할 이유이다. 성경 원리를 따라 맡겨진 부를 적절하게 내보내는 일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최상의 투자이며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7이제, 긴 전개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 소유가 끄는 힘은 너무도 강하다. 타락한 본성 안에 도사린 소유욕을 부추겨 어떤 사람이라도 수하에 거느릴 수 있다. 수십 년의 선한 업적과 명성을 쌓은 지도자라고 말년에 소유의 희생양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를 탐하다 오명을 남기고 떠난 교계 거성들이 근자에도 제법 되지 않은가? 시인이 말한 부와 성공이 생명을 속량할 수 없다는 진리와,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재산이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범한 명제를 흘려듣지 말기를 바란다.소유를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분리해 내고 객체화하는 작업을 통해 소유의 지배를 끊어 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유는 서서히 그 편리함과 위력에 나를 취하게 하고 마비시켜, 도저히 분리해 낼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에게는 성공한 자로 칭송과 명예를 얻게 할지 몰라도 생명의 목자이신 주님과의 관계성에는 실패한 자로 전락시킬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소유에 대한 집착을 이길 적극적인 방법은, 가지셨으나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분이 내 속에서 그 어떤 소유보다 귀중한 존재로 자리 잡는다면, 또 그분이 약속한 하나님 나라가 실상으로 다가온다면, 소유는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단순한 원리이지만 최선의 해법이다. 기억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교회에서, 혹은 목회에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성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임을. 예수님께 나와 영생의 길을 물었던 성공한 부자 청년처럼 말이다.
출산을 장려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방식
by Heidi H. Dean
2024-01-18
정해진 범주를 흩트리고 청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신학자로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따라올 사람은 없다. 그는 도덕 윤리 분야의 최고 목소리였고, (내가 지지하는) 개혁 신학에 대한 비판자였으며, 내가 아는 한 강의 시간에 입에 욕을 담은 유일한 신학자이다.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도 남을 그는 신학적 좌파에 관해서는 그들이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며 무시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타임은 2001년에 그를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명명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는 “최고”라는 단어는 자신이 아는 한 신학 용어가 아니라며 무미건조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우파가 가진 우상과 좌파가 가진 우상,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장 위험한 우상을 불러내는 데에 적극적 의지를 가진 하우어워스로부터 우리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목사가 설교 시간에 헌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교회가 얼마나 조용해지는지 눈치챈 적이 있는가? 하우어워스는 이런 모든 어색함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물질주의, 통제에 대한 욕구,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실패가 우리의 출산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말로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불편해진다. ‘출산’에 대한 논의는 그만큼 어색하다. 그렇다면 하우어워스는 아이들에 대한 나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토론(debating)에서 데이트(dating)로 나는 독신 대학원생으로서 하우어워스와 함께 공부했는데,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가족”에 관한 그의 비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바로 범인이었다. 좌절한 범인. 미혼이었던 나는 전반적으로 진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듀크 대학에서 나는 데이트보다 토론을 더 좋아하는 남자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다가 철학과 학생 한 명이 내 마음을 끌었고, 나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듀크뿐 아니라 같은 교회를 다녔던 그 “친구”와의 몇 주간에 걸친 논쟁에서 (그게 과연 단지 우정이었을까?) 중심이 된 건 결혼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견해였다. 단순한 학문적 활동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논쟁이었다. 우리 각자가 독신 생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혼 부부만큼, 혹은 그 이상을 이바지할 수 있는가? (내 친구의 입장이다.) 아니면 뭔가 더 좋은 것은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성취될까? (내 입장이다.) 우리는 교제와 로맨스 같은 개인적인 가치와 다음 세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과 같은 사회적 가치의 바른 위치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스티븐은 나이 많은 독신이고 로맨스보다 생산성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우어워스의 강력하고 비감정적인 결혼 비전 덕분에 오늘까지도 그 큰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섯 자녀를 둔 후에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가족의 목적과 관련해서 하우어워스의 도전적이고 파괴적이며 필요한 관점을 인용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의 행동노틀담 대학에서 진행했던 결혼 강의에서 하우어워스가 학생들에게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라. 나는 “당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들은 건, “아이들은 재미있다” “아이들은 외로움을 막아주는 울타리이다”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를 키우라고 추천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진짜 좋게 들리는 멋진 대답을 하나 내놓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사람들은 완벽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충분한 재정과 집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이들을 이 세상에 맞이하려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어떤 아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 끔찍한 비극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녀를 갖는 것은 실로 엄청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 특별한 행위이다. 자유주의나 복음주의 집단 중 그 어디에서도 하우어워스가 2001년에 발표한 글에서 말했던, 자녀 출산에 대한 “급진적 소망”과 같은 말을 하는 신학자는 만날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녀를 갖는 것이다. 자녀를 먼저 낳아야 하고, 그런 다음 우리 삶의 다른 측면을 ‘내게는 자녀가 있다’라는 현실에 종속시켜야 한다.”하우어워스는 불편하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진실을 말한다.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이 원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환영”할 만큼 급진적인 소망을 품고 있는가?성경 전체에서 드러나는 소망출산, 입양, 양육, 봉사 등에서 우리가 출산을 원하는 사람(pro-children)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있다. 고대 세계에서 억압받던 여성, 어린이, 기타 약자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신 예수님은 다름 아니라 구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패턴을 이어간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문화적으로 열등한 대상이었던 과부, 둘째, 외부인과 어린이를 높이셨다. 학자들은 성경에 번식과 자손의 중요성이 계속해서 강조되었음을 입증한다. “씨”(자녀, 후손)라는 모티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진다. 이는 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 교회, 새 창조 등 모든 주요 순간에 필수 요소이다. 인류에게 내려진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첫 번째 사명, 즉 자신의 형상을 온 땅에 전파하라는 명령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마침내 성취된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왕국을 “열방”(요한계시록 21장),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요한계시록 7:9)로 구성된 하나의 “성(도시)”으로 묘사한다. 역사적으로 씨와 번식이라는 모티프가 상상력을 자극했을 때 교회는 번성했다. 초기 교회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용하고, 죽도록 내버려진 유아를 입양하는 등 적극적으로 생명 옹호의 입장에 섰다. 바로 그 점에서 교회는 로마 문화보다 우월했고, 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약자를 통한 교회의 성장은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다. 어린이를 포함하여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독특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모습이다. 소망은 오로지 교회에서만 찾을 수 있다자녀 양육이 소망의 기초가 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희생과 지연된 만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생은 아이들이 자라서 광범위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썼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즉 권력, 부, 그리고 영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독실한 신자들의 특징이다. 국립보건원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종교를 중요시하는 여성일수록 출산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한다. 교회에 충성하는 신실한 여성일수록 더 많은 자녀를 원한다. 그렇다고 출산만이 취약한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 아니다. 더불어서 개인에게 일일이 출산의 소명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백성으로서 교회는 단체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투신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은 독신의 길을 영원히 존귀하게 여기셨다. 구원과 성화 활동을 통해 독신자도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독신에 대한 확신이 결혼이라는 소명을 통해서 이뤄지는 생물학적 출산이라는 축복을 과소평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우어워스의 지적이다. “결혼은 자녀를 목적으로 하는 관행이다. … 결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녀를 낳고 돌보라는 부르심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교회는 이 소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자녀를 갖는 것이 교회에서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라면, 세상에 의해서 제자화 되는 길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출산에 관한 설교가 그 안에 담긴 신학적 복잡성을 간과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 점이 경시되어 왔다. 내게는 여전히 답보다 질문이 더 많다. 피임 기구 사용과 관련하여 복음주의자가 고려해야 할 윤리 문제는 무엇인가? 피임은 이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일상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여기에 관해서 신학적 입장을 형성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도록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비전, 어떤 윤리적 패러다임과 지혜의 인도를 받아야 할까?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잘 가르치지 못한다면,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우리가 진정한 제자도를 키울 수 있는 영역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는 인공수정 기술과 관련해서 적절한 사용과 부적절한 사용에 대한 지침을 어떻게 받는가? 자녀를 갖기 전에 기다려야 하는 이유와 적절한 임신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까?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부부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목적 속에는 반드시 출산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팀 켈러는 물질주의와 같은 우상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계층으로 이뤄진 소그룹을 통해서 이뤄지는 깊은 공동체 의식과 투명성을 통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교회의 몸으로서 서로 간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피드백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자녀를 갖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에 수반한 윤리 문제를 탐색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 간에 믿음과 책임을 지며 동시에 개별적인 조언까지 주고 받을 수 있는 소그룹 공동체이다. 출산과 관련해서 제자 훈련을 하려는 교회라면 꼭 필요한 이 문제를 도발적으로 제안한 하우어워스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기를 갖는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은밀하고 어색한 주제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우선순위로 인식하고 다뤄야만 하는 중차대한 주제이다. 원제: How Stanley Hauerwas Inspired Us to Have More Kid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우리에게 오바댜가 필요하다
by Brandon Cooper
2024-01-15
J. L. 마이어스의 1923년 고전 The Dawn of History(역사의 여명) 첫 장은 수백만 명이 아무런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이 살았음을 상기시킨다. 세상이 현재 그대로 앞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역사의 원호가 휘는 법이 없다. 그렇게 믿지 않는 건 망상이며 거짓된 희망을 낳는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가 여전히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우리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한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단지 고려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대안으로 인해서 생긴 순진한 발상에 불과할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끄는 끝, 텔로스(telos)가 있는가? 짧고 생소한 오바댜서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더 큰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에돔에 관한 이 이상하고 작은 책은 어둡고, 국가주의적이며, 심지어 복수심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바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선물을 준다. 다름 아니라 역사와 종말론, 그리고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왜 역사가 필요한가오바댜는 역사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영감받은 통찰력을 말이 아니라 “계시”(1절)를 통해서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에돔에게 말을 거는 오바댜는 이러한 통찰력으로 유다를 격려한다. 유다는 지금 막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아마도 예루살렘이 약탈되고 그에 따른 유배가 시작된 거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바알이 여호와보다 강한가? 이웃 에돔은 그의 형제의 멸망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고 약탈을 하며 악행에 가담한다(10-14절). 에돔은 그 모든 나쁜 짓을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며, 바로 그 점이 유다에게는 오바댜의 메시지가 필요한 이유이다. 역사에는 과연 목적이 있는가? 정의가 구현되는 날이 올까? 오바댜는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패배한 민족을 향해서 선지자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선포한다(15절). 유다의 패배가 여호와의 패배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연합한 적들 부족이 에돔에 접근했을 때, 오바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리차드 린츠의 말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에 대한 교훈이었다. … 물론 세부적인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역사는 반복될 수 있기에 기록되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과거 행위가 그분이 자기 백성을 향해서 그리고 자신이 하신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주는 근거라는 원칙에 따라서 역사가 기록되었다.오바댜는 구속사의 안경을 쓰고 역사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법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는지에 추상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행동을 통해서 알고 있다.왜 종말론이 필요한가히틀러의 선전가 요제프 괴벨스는 “세상을 향해서 첫마디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옳다”라고 선언했다. 나치 정권에 대한 역사의 판단은 그가 틀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건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 단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마지막 말이 있다.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잘 알고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신앙은 종말론적이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이 없이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한 게 현실이 아닌가. 오바댜는 힘든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그날”이라는 표현은 11-14절에 여덟 번 나오며, 항상 부정적인 의미, 즉 환난, 재난, 불행의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15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느니라”라는 종말론적 소망이 터져 나온다. 그날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아직’이 마침내 ‘지금’과 ‘드디어’가 되는 날이다. 모든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끝끝내 모든 잘못이 바로잡힐 것이다. 큰 불행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바댜는 다가올 하나님의 공의로 그들을 격려하고 싶어한다. 에돔이 행한 불의함은 그에게 고스란히 다시 닥칠 것이다(15절). 모든 빚은 청산되고, 모든 계좌는 정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제대로 다루시지 않는다면, 천국조차도 지옥이 될 것이다. 과거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정의를 갈망한다. “그때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 계셨는가?”라고 울부짖을 때마다, 사실상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심판은 필요하고 옳은 일이다. 그날이야말로 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이 다다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바댜가 약속하는 게 단지 하나님의 보복적인 정의만은 아니다. 그는 회복을 예언한다. 이 책의 마지막 세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국경에 도달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겠다고 약속하신다. (포로 생활 중인 난민들에게 이 얼마나 감미로운 메시지인가!) 애초에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일부이기에 사실상 하나님은 지금 자신이 했던 그 언약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다. 골고다 이후를 사는 우리는 이 회복이 단지 땅 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을 덮을 것이다(합 2:14).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될 것이다. 주여, 제발 그의 나라가 하루빨리 임하게 하소서(옵 1:21).하나님의 통치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모든 잘못은 바로잡히고, 지상에는 평화가 임할 것이다. 인신매매, 인종차별, 그리고 살인이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역사를 애초에 목적하신 대로 마무리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불의를 저지르면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부터 바로잡혀야 한다. 오바댜서를 겉핥기로 읽는 경우에 마치 세상이 단순하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예언의 메시지가 은혜라기보다는 카르마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벨사살이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그릇으로 술을 마셨던 것처럼(단 5:3), 에돔의 죄는 하나님의 성산에서 술을 마심으로 성전을 더럽힌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과 열방은 계속해서 술을 마실 것이다(옵 1:16). 뭘 마신다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 포도주는, 물을 섞어서 묽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부어 넣은 것이다”(계 14:10).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엡 2:3). 유다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그들을 약탈하기 위해 바벨론을 보내셨다. 그 결과 어느 이스라엘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포도주를 먹여 비틀거리게 하셨습니다”(시 60:3)라며 한탄했다.그러나 이스라엘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새날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너의 손에서, 비틀거리게 하는 그 잔 곧 나의 진노의 잔을 거두었으니, 다시는 네가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사 51:22). 이런 현실이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이며, 그의 나라는 불완전하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댜는 단지 심판(16절)이 아니라 “시온산에 구원이 있으리라”(17절)고 말한다. 어떻게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와 변함없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만나기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진노의 잔을 우리 손에서 거두어 그의 아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막 14:36).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더 이상 진노의 잔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따라서 종말론이 주는 소망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반드시 우리의 죄를 벌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제사장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로 하여금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게 하셨다. 원제: We Need Obadia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창세기 1장은 성삼위 하나님을 계시하는가?
by Scott Swain
2024-01-05
TGC의 성경 읽기(Read the Bible) 운동에 참여하세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일 년 안에 힘을 합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등장할까? 대답은 확고부동한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시기에 창세기 1장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걸쳐서 삼위일체 되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서 삼위일체의 존재를 확증하는 건 쉽지만, 다양한 구절 속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임재 방식을 분별하는 건 훨씬 복잡한 문제이다. 오래전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창세기 1장에서 특정 구절이 드러내는 것보다 더 과도하게 삼위일체를 찾아내는 과잉 해석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에 반해서 현대 독자들은 특정 구절이 증명하는 것보다 삼위일체를 훨씬 적게 바라보는 과소 해석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다.구약 속 숨겨진 존재구약성경에 삼위일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큰 질문에서 시작하자. 루터교 신학자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에 따르면, 창세기 1장 속 삼위일체는 “그 시대에 적합한 계시 방식으로” 존재한다. 성경 속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는 이중 경륜에 따라 전개된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구약의 삼위일체 자기 계시)과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후(신약의 삼위일체 자기 계시)이다. 이 두 형태의 계시를 가르는 대조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삼위일체가 구약에는 전혀 없고 오로지 신약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조는 상대적이다. 구약과 신약에는 다 삼위일체가 드러나지만, 임하시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구약에서 삼위일체는 “숨겨져” 있고, 신약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난다.”구약에 숨겨진 삼위일체의 임재는 마치 밭에 감춰진 보물과도 같이(마 13:44; 골 2:2-3) “숨겨진 임재”이다. 그에 반해서 신약에서 삼위일체는 “명백한 임재”를 보여준다.창세기 1장 속 숨겨진 존재 이러한 명확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이제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었다. 삼위일체는 어떻게 창세기 1장에 “그 시대에 적합한 계시의 방식으로” 존재할까?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의 숨겨진 임재에 대한 최소한 세 가지 흔적을 보여준다. 이러한 흔적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계시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필수적인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1. 창세기 1장은 주어-동사 불일치의 여러 사례를 보여준다.창세기 1:1에서 복수명사 “엘로힘”(ESV에서는 “God”)은 단수 동사 “창조하다”와 결합되었다. “태초에 [엘로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 패턴은 창세기 1:27에서도 반복된다. “이에 [엘로힘]이 자기 형상 곧 [엘로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느니라.”이러한 주어-동사 불일치는 저자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일까?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분의 유일한 대리인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창조는 하늘의 존재들이 구성한 위원회의 회의를 통해서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인도자(사 40:13-14)와 돕는 자(사 44:24; 렘 10:12; 27:5) 없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이 점을 강조하면서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 신학의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구성 요소인 유일신론을 제공한다. 한 분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만물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 유일신교와 별도로 삼위일체 신앙은 다신교의 한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오로지 유일신교의 맥락에서만 삼위일체 신앙이 다신교가 아닌 세 위격을 가진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 2.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포함한다. 앞의 예들은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차지하는 위치를 인식하도록 돕는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이 만물을 생산하시고, 형성하시고, 또 채우시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하나님은 창조물이 존재하도록 말씀하신다(창 1:3, 6, 9, 11, 14, 20, 24, 26). 하나님은 다양한 피조물에 이름을 지어 주신다(창 1:5, 8, 10).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축복하신다(창 1:22, 28).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은 창조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미완성, 채워지지 않은 세상 위를 어미 새처럼 맴돈다(창 1:2; 신 32:11 참조). 그리고 생명을 주는 그분의 임재를 통해 창조물에게 생명, 활력, 총명, 그리고 충만함을 공급한다(출 31:3; 35:31; 민 24:2).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하나님이 만물을 생산하시고, 형성하시고, 또 채우시는 데 필요한 수단임을 밝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로서 말씀과 성령을 포함시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창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른 누군가의 대리인을 통해서 일하시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창조하신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시 33:6-9; 요 1:3; 롬 11:36; 고전 8:6; 골 1:16; 히 1:2).그러나 창세기 1장이 삼위일체 신학에서 “말씀”과 “성령”이라는 이름이 갖는 완전한 의미까지 제대로 드러내는 건 아니다. 이 이름들의 온전한 의미는 오로지 성육신으로 오신 말씀과 오순절에 부어진 성령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자신의 존재 속에 말씀과 성령을 포함시킴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기본 구성 요소를 마련한다. 성경이 나중에 엘로힘과 그분의 말씀 및 성령 사이의 어떤 구분을 밝히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말씀과 성령을 한 분 하나님과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씀과 성령에 대한 어떤 구분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안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3. 또 다른 복수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창세기 1장 속 하나님은 반복해서 복수 명사 “엘로힘”으로 표현된다. 일부 성경 주석가들은 이 복수 명사를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뿜어내는 충만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또 창세기 1:26에 나오는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표현(“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창조 사역이 삼위로 이루어진 한 분 하나님의 역사라는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런 복수형은 삼위일체의 숨겨진 현존을 나타내는 표시인가? 창세기 1:26을 보자. 창세기 1:26에 나오는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호칭은 때때로 왕이 복수형으로 자신을 호칭하는 관용적 표현, 소위 말하는 “군주 일인칭”(royal we)의 예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 복수형을 하나님이 소집한 천상 회의 속 천사들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욥기 1:6; 2:1). 그러나 이 두 가지 설명 모두 다 가능성이 작다. 첫 번째로 고대 근동에서 로얄 일인칭이라는 관용적 표현이 쓰였다는 증거가 부족하다. 두 번째로 천상 회의 주장은 창세기 1장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요한 메시지와 모순된다.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하시는데 굳이 합창단 역할이나 맡을 천사들의 도움이 필요할 리가 없다(욥 38:7). 하나님만이 언제나 그분의 유일하고 주권적인 대리인을 통해서 행동하신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요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친 자니라”(사 44:24).그러면 창세기 1:26의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지칭의 수수께끼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언젠가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이 언급했듯이, 창세기 1:26 속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지칭의 잠재적 대상으로 가능한 유일한 후보는 말씀과 성령이다. 이러한 관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결정적인 결론에 아직 도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이중 계시가 주는 어려움을 이해한다면, 구약에서 삼위일체의 계시를 해석할 때 결정적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를 맞는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이유도 또 고민할 이유도 없다. 구약에서 만나는 삼위일체 계시의 수수께끼는 신약의 삼위일체 계시에 의해서 언제나 해결 가능하다. 창세기 1장은 무대를 만든다구약성경에 있는 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흔적은 신약성경에 의해서 완전한 체계로 드러나는 삼위일체 계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의 주인공, 즉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소개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형성되고, 채워지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열심(commitment)의 주된 목적,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세기 1장은 성경의 주된 목적, 즉 삼위일체와 그분을 위해 창조되고, 구속되고, 또 완전해진 백성 사이의 연합과 교제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원제: Is the Trinity in Genesis 1?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재고한다
by 이춘성
2024-01-04
“신들림의 시간”에 이어서 읽으면 더 좋습니다. 많은 분이 레이첼 카슨이 1962년에 쓴 침묵의 봄을 아실 것입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살충제와 제초제로 사용된 DDT로 인한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려, 미국과 전 세계에서 환경 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되고 5년 뒤인 1967년, 기독교와 교회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중세 유럽의 농업 기술사를 가르치던 린 화이트 주니어가 쓴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짧은 논문을 통해서 현대 환경 파괴와 생태 위기의 기원으로 지목되는 불명예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기독교와 교회가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의 주범이라는 그의 주장은 대부분의 학자들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화이트의 글에 따르면, 기독교가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독교의 자연관이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자연을 대상이나 도구로 여겨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둘째, 인간 중심주의가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구별된 존재로 보았고, 이로 인해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신론을 비판했습니다.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의 범신론과 달리 기독교는 자연을 신의 일부로 여기지 않아 자연을 함부로 착취했다는 것입니다.놀랍게도 이러한 주장은 당시 반전 운동을 하던 히피들을 포함한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쉽게 수용되었으며, 반전 운동은 환경 운동과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평화주의를 탄생시켰지요. 그리고 이들은 평화의 적으로 기독교와 교회를 지목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1960년대 서양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급격하게 떠나는 ‘탈교회’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당시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은 동양 종교, 특히 인도의 힌두교와 동남아 및 일본의 선불교에 매료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비틀즈와 같은 유명인들은 1968년 인도를 방문해 마하리쉬 요기를 만나서 초월명상법을 배워 돌아왔습니다. 이후에도 서양의 많은 대중 가수들과 배우들이 인도를 찾아 초월명상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동양 종교의 명상을 돕기 위해 동양 음악을 차용한 음악 장르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 음악입니다.환경 파괴, 전쟁, 핵무기, 과학 기술에 대한 회의,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 평화주의, 반전 운동 등으로 1960년대 서양은 공포와 혼란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기독교는 이 모든 혼란의 주범으로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는 신론, 창조론, 인간론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일어났고, 일부는 수정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극단적인 실존적 이해와 관계론적 이해가 대두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는 20세기의 이해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의 참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관계성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20세기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이전의 교회와 기독교가 이해해 온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종교개혁 이후 대표적인 두 신앙 고백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은 인간에 대해 현대와는 다른 이해를 제시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소요리 문답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의 6번 답은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원한 복락 속에서 살고,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합니다.20세기 이전의 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관계라는 피상적인 개념으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 하나님을 창조주로 바르게 알고 사랑하며, 그와 함께 살고, 그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관계를 바르게 설정하고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감각적인 표현, 즉 관계성이 연결되었는지, 끊어졌는지에 대한 집중보다는, 연결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할 때, 따라오는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이것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즉, 터치가 먼저이고, 그 후에 거룩함과 영광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특히 개신교인인 우리가 존귀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교리인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교리는 실존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실존적 관계성, 일종의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 은혜와 믿음의 증거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러한 터치를 경험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뒤로 미뤄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신교인들의 실존주의적 신앙의 능력 없고 고민 없는 삶을 보면서, 개혁파 신학자 바빙크는 로마가톨릭보다도 못한 개신교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러한 한탄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경건함이 거짓된 원칙–즉,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치가 없다고 즉시 단언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멀리해야 한다. 그러한 판단이 정말로 많은 진리를 담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말하기 전에 개신교의 좋은 교리로 말미암은 의로움보다 가톨릭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이 훨씬 낫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Refomed Ethics 1, 44) 베드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현상인 이유를 창세기 1장과는 다른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것은 우리의 타락과 구원과 성화, 영화라는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조망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벧후 1:3)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의 미래적 설명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신성한(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이어서 이를 위해 성도들이 해야 할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꼭 잡았을 때, 어떤 에너지가 전달되어 자동으로 변화되는 만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 자동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공상 영화와도 다릅니다. 베드로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한 ‘처절한 투쟁’에 가깝습니다. 믿음 안에서 거룩하고 덕스러운 삶을 살고, 옳은 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탐구하며, 지식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절제하고, 절제로 오래 기다리며 인내하며, 인내 속에서도 경건함을 포기하지 않고, 약한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사랑을 더하는 삶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자랑하며, 서로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종말에 자격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칭찬이며, 상급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름을 인간을 향해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마치 우리를 미리 의롭다고 칭하시는 ‘칭의’의 은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사랑 속에서 우리에게 보증해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우리의 가벼운 이해를 재고해야 할 때입니다.
성도의 삶
시편 88편 묵상
by 고명환
2023-12-26
1 자식을 잃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며 그 아픔은 의식이 있는 한 따라다닌다. 재물이나 건강을 잃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실감의 무게 역시 가벼워지지 않는다. 다윗은 많은 자녀를 둔 복을 받은 것과 비례해서 그들로 인해 심한 고통도 겪어야 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핏덩이로부터 장성하여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던 아들에 이르기까지, 분신과도 같았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 중 아끼던 아들 압살롬의 죽음은 그 어느 자식을 잃어버린 것보다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를 제거하고자 천인이 공노할 일을 벌였던 반역자 아들, 압살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으로 한동안 슬픔의 나날을 보낸 것을 볼 때, 자식들을 향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분명, 시간을 두고 일어난 아들들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죽는 날까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했음에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흔들지 못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비극 앞에 심한 자책으로 긴 세월을 소모하지 않았고, 주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완숙한 성도로 살아갔다.욥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졸지에 잃은 충격은 많은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컸을 것이 뻔하다. 그 또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특별한 아버지였음을 성경은 들려준다. 행여나 자녀들이 잔치를 벌이고 나면 자식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지었을까 봐 다음 날 아침이면 그들을 생각하며 번제를 드렸다고 한다(욥기 1장). 이렇듯 섬세하게 돌보았던 자녀들이 모두 참변을 당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낙심하고야 말았다. 허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녀들의 죽음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헐어 놓지는 못하게 했다. 마음의 고통을 표현했을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녀를 비롯한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고백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 주었다. 상실이 그를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미국의 뉴 잉글랜드로 이민 온 60대 부부를 알게 되었다. 미국식 아침식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직접 운영하여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안정된 생활을 하는 부부였다. 한때 교회를 다녔지만, 오래전에 신앙생활을 중단했다는 주변 사람의 말을 듣고 식당을 찾아간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물론, 교회로 인도할 목적의 방문이었다. 몇차례 식당을 방문하면서 서로에 대한 경계를 낮출 수 있었고, 마침내 그분들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더 깊은 대화를 하며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호기였다. 부부가 사는 집은 둘이 사용하기엔 큰 전형적인 뉴잉글랜드의 이층집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부부는 집안의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여러 공간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안내한 방은 칠년 전부터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빈방이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말끔하게 치워진 방의 한켠에는 활짝 웃는 앳된 청년의 사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7년 전에 죽은 아들의 방이라고 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근처 바다로 서핑을 갔던 아들은 사고를 당해 영영 부모의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던 부부는 그가 남긴 모든 것을 고스란히 그 방에 보존한 채 아들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있으면 왜 내 아이를 죽게 해요.”“그분이 진짜라면 아들을 지켜줘야 하지 않아요?”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항변에 선뜻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언가는 말해야 했다. 그래서 만든 대답은 지금 애써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의례적인 대답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바꾸기에는 궁색한 위로의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부부의 심한 실의와 불신은 교회와 하나님을 등지게 몰아갔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가족과 소유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평탄한 길 만을 걷게 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자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다. 안 집사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김미선(가명) 성도의 첫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약물 과복용이 사인이라고 했다. 남동생이 마약 중독으로 떠난 지 채 일년도 안 되었는데 형도 그 길을 가고야 만 것이다. 얼마 전 동생을 묻는 자리에서 관에 손을 얹고 잘 가라고 눈물로 작별 인사를 했던 형이었는데…. 삼십을 코 앞에 둔 펄펄한 청년 둘이 일년을 사이에 두고 마약의 희생양이 된 것도 가슴이 먹먹한 일이었지만, 남은 아들마저 잃은 김미선 성도의 심정을 생각하자 모든 우울한 기운이 한꺼번에 덮쳐 왔다. 이젠 더 이상 해 줄 위로의 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미군을 만나 타국으로 시집온 그녀에게 두 아들은 삶을 지탱해 주는 한 축이었다. 다른 한 축을 담당해 주어야 할 남편은 잦은 외도로 기대지 못할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속 썩이는 남편 때문에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며 살아왔는데, 두 아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녀를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만 같았다. 물론, 소식을 들은 주변의 사람들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찌할 수 없어 며칠을 기다린 뒤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분은 모든 방문자를 거절하고 홀로 막막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들려온 소리는 절망 끝에서 나오는 힘 없는 절규였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지요?”“또, 왜 꼭 하나님을 잘 믿어 보려고 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그렇다. 남편의 배신 이후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 주님만을 신뢰하며 살겠다고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던 중, 둘째 아들이 떠나는 시련이 닥쳐왔다. 그래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 몸부림으로 지탱해 왔건만, 또다시 찾아온 불행은 그녀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 같았다. “저도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건넨 힘없는 응대였다. 거듭된 시련은 김미선 성도를 주님을 영영 원망하며 멀어지게 할 것만 같았다. 헌데, 감사하게도, 두어 달 지나 김미선 성도는 교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주님 외에 그가 갈 곳은 없었다. 살아야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았던 것이다.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시간이 흐르면 의문도 아픔도 점차 희석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주님을 따라가기로 다짐했다고 믿고 싶다.내가 교회를 떠난 후 들리는 소식은 희망적이다. 떠났으나 보내지 못한 두 아들의 엄마는 매일 그들이 잠든 무덤을 방문한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도 착실하게 다녀 새로운 목사님에게서 집사 직분도 받았단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두 아들도 잃고 주님도 잃어버렸다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떨치지 못할 안타까움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성도의 길을 이탈하지 않고 눈물로 가고 있는 것이다. 2시편 88편은 시편 중 가장 어두운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암울한 기운이 무겁게 드리우고 있다. 적어도 고난 가운데 구원을 호소하는 많은 비탄시의 처음, 혹은 중간, 아니면 마지막 부분이 찬양이나 감사로 장식된 것과 달리 이 시의 어느 곳에서나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기도응답에 대한 기대나 밝은 미래에 대한 소망도 그려져 있지 않다. 전편에 걸쳐 짙은 어두움만이 흐른다. 시편 88편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어렸을 때부터 시인을 따라다녔던(15절) 고난은 이제 가까운 친구들마저 떼어 놓았고, 건강마저 앗아가 버렸다(8, 9절). 게다가, 주님은 그를 버렸고 얼굴을 감추셔서 더 이상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 것 같다(14절). 사실 여부를 떠나 여러 절에서 표현했듯,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었다. 주께서 그를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던지셨고, 친구와 건강을 앗아 가셨으며, 두려움과 공포를 보내어 떨게 하셨다. 주님께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극한의 벼랑에 시인을 놓으신 것이다. 세찬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주님 앞에 자리 잡고 낮이나 밤이나 그분을 바라본다(1절). 무덤과 같은 어두움만이 지배하는 환경에서도 그의 영혼은 주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바꿀 수 없는 형편을 상세히 알리는 한편, 비참한 환경에서 갖는 그의 생각과 감정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부르짖어 구원을 호소한다. 찬양과 감사의 구절로 고조된 음역을 연주하는 듯한 시편의 시들 가운데 왜 절망의 늪에 빠진 영혼이 토해내는 신음과 같은 시가 삽입되었을까? 의도를 알지 못하나, 이런 성도의 삶이 분명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고난의 긴 터널 속에 주님은 성도를 놓아두기도 하시는 것을 보여 준다.그리고 이때, 성도가 취할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비록 낙심과 고통으로 주저앉을 수는 있으나 주님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말 것을 암시한다. 원망과 불평 속에 뒤돌아 가기보다 오히려 부르짖어 기도하는 편을 택하라고 들려주는 것 같다. 이것이 다채로운 시편 가운데 이 시가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아닐까?3성도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은 각각 다르다. 어떤 성도에게도 동일한 길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비교적 순탄한 길로부터 험하고 거친 길에 이르기까지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은 다양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헌데, 그중 고난이 기다리지 않는 성도의 길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재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을 수 있고, 육체나 정신적 질환에 시달릴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떠한 조건의 길이 주어졌건 주님은 성도들이 끝까지 완주하기를 원하신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치면 상상치 못할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잃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꿋꿋하게 버텨 시련을 이겨내어, 모두 이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광에 이를 수 있을지 찾고 따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인내로 견디어 내야 한다.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는 어떻게 준비된 마음이 열매를 맺는지 들려준다. 이와 함께, 신앙을 포기하는 이유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낙오하는 영혼들에게 시련이나,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시련이나 유혹은 신앙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온다. 다만 이들은 고난이나 세상의 유혹이 마음에 간직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지 못하도록 인내하며 지켜낸다. 그들이 단지 좋은 마음의 상태를 준비했다고 신앙의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은 가르쳐 준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누가복음 8:15). 지키고 인내하는 생활이 성공적인 성도의 삶을 견인하는 중요한 요건임을 알려 준다. 시편 71편의 성도는 88편의 기자처럼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어 왔고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했다고 한다(시편 71:5-6). 이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인생의 서리가 내린 늙고 쇠약한 노인이 되었다(9, 18절). 세월은 흘러 인생을 마감할 시기가 가까웠으나 줄곧 따라다니는 고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4, 10, 11절). 여전히 그를 해치려는 잔인한 자들은 주변을 맴돈다. 한편, 살아오는 동안 고난이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면, 그는 변함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해 왔다. 주님밖에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5, 14절).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에서 ‘견디다’라는 단어는 여러 번 사용되었다.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환난을 예언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24:13).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딜 것을 당부한다(야고보서 5:7). 사도 바울도 여러 편지에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성도들을 격려했다. 인생의 거친 길을 헤쳐 나갈 때 개인이 가진 능력만으로 인생의 시련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면, 절대적인 타자가 원하는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적 삶을 실천하는 여타 종교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계시는 주님은 성도의 아픔이나 난관에 객관적 방관자가 아니시다. 곁에서 이기도록 격려하고 위로해 주시는 친구이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주님께서 모든 형편을 아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성도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주님은 그와 함께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성도를 떠나시지 않는다. 눈앞이 깜깜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도 주님은 지켜보고 계신다. 혼자인 것 같으나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은 좋으신 분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하나님이다. 자녀의 불행을 결코 바라지 않으시며 더군다나 망하기를 바라는 분이 절대 아니다. 현재의 아픔이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그분의 선한 계획 안에 있고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로마서 8:28)은 분명하다. 주님이 좋으신 분이고 귀한 분으로 마음에 자리 잡는다면 내가 소유한 것을 잃는다 해도 그분을 향한 신뢰에 금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상실감을 갖게 될지 모르나 그분을 떠나지는 않는다. 주님이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고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의 선하심(goodness)을 믿고 현재의 어려움들을 이겨 나갈 것이다. 다윗은 시편 27편에서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선하심을 온전하게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편 27:13, 14).4고난에 굴복해서 얻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소중한 것을 잃고 상실감에 잠긴다고 같은 것을 돌려받지 못한다. 질고 중에 주님을 원망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영혼마저 황폐해질 것이다. 성공을 향해 기도하고 노력해 왔지만 실패만을 거듭해 왔다고 실의에 빠져 주님을 떠난다면, 인생 전체를 실패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고난을 통과했을 때 얻는 유익을 바라보자. 고난은 즐겁지 않으나 고난의 경험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큰 자산이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71절). 사도 바울은 죽음을 선고받은 것 같은 큰 고난을 겪었다고 증언한다. 고난만큼이나 하나님의 위로도 넘쳤고 그 위로로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며 하나님을 찬송한다(고린도후서 1:3-8). 두 아들을 마약으로 잃은 김미선 성도는 그 뒤 같은 슬픔을 겪는 부모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서로 위로하고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에 활동한다고 들었다. 그 성도만큼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부모의 심정을 잘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테고,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고난의 경험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같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쓰일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고난을 주신 이유는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더욱 견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할 경험과 지혜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신다(잠언 24:16). 신앙은 살아내는 거라고 말들 한다. 성도의 삶은 언제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행형이어야 함을 들려주는 교훈들이다. 잠시 주춤할 수 있으나 또 나아가야 하고, 넘어졌으나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로마서 8:18)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 어떤 어려움이라도 딛고 일어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예수 강생의 하모니
by Justin Taylor
2023-12-25
다음은 마태복음 1-2장과 누가복음 1-2장의 예수 탄생 사건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간단한 연대기이다. 마태는 주로 요셉의 눈을 통해서 사건을 전달하고, (아마도 마리아를 인터뷰했을) 누가는 주로 마리아의 시선으로 사건을 파악한다. 마태 누가 예수의 계보 1:1-17 3:23-38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요한의 탄생을 예고 1:5-25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 1:26-38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 1:39-56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낳음 1:57-80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림 1:18-25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음 2:1-7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을 전하고 목자들이 예수를 찾아감 2:8-20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감 2:21-40 동방에서 박사들이 도착(예수 탄생 1-2년 무렵?) 2:1-12 천사가 요셉에게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 이름 2:13-18 천사가 요셉에게 가족을 데리고 나사렛에 돌아가라 이름 2:19-23 함께 보세요 ▶ Lumo Project 원제: A Harmony of the Birth of Jesus: Matthew and Luk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by 박혜영
2023-12-22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예수의 탄생과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 또는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요 1:13) 말미암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으면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있음을 믿게 되며,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아무 어려움 없이 믿습니다. 둘 다 원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반면, 어느 한쪽을 믿지 못하면, 다른 한쪽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는 하나[한 덩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분이 자신은 거듭난 신자지만,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좀 마음에 걸린다고 하면, 그 사람 속에서 진리는 불일치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진리는 하나[한 덩이]라는 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전능(全能)하시며, 전능하기에 전지(全知)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두 분이라고 칩시다. 그럼 상대방을 어쩌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쩌지 못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순간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쩌지 못하는 대상이 있으면 전능하지 않은 것이며, 전능하지 않다면, 전지하지도 않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전지하려면 전능해야 하며, 전능하려면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특성에 대한 진리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덩이입니다. 원래의 내용으로 돌아와 봅시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요셉이 …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마 1:25)—에서 평범한 사람처럼 열 달을 채우고 출생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자가 육신이 되었으며, “나실 바 거룩한 자”(눅 1:35)가 되었습니다. 같은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에도 적용됩니다. 육신으로 태어나 살던 어떤 사람이, 삶의 어느 순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요한일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낳았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담하게 “씨[헬. 스페르마]”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요일 3:9). “씨”는 헬라어에서 ‘정자’(精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의 ‘정자’(perm[스펌])가 이 헬라어, 스페르마에서 기원한 겁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씨”를 육신으로 사는 어떤 사람에게 주시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일 3:9), 곧 “하나님의 자녀”(요일 3:10)가 됩니다. 하나님의 씨에 의해 잉태된 자녀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존재입니다.그럼 “하나님의 아들” 곧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육신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령으로 난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같은 모습이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3:2). “그와 같을 줄을!” 둘 다 성령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장래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으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뭐라고 말하는지 자세히 보면 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잉태된 아기가 어미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자라면 때가 되어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씨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 또한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요일 3:3)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부모에게서 난 사람이 전부인 이 세상에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출현하였습니다. 새로운 종의 인간입니다. 그렇다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죄를 짓지 아니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임의의 작은 친절
by 전재훈
2023-12-18
예전에 재밌게 봤던 영화 중에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짐 캐리가 주인공 브루스 놀란 역을 맡았습니다. 브루스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전능을 위탁받게 되면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지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전능은 반드시 전지를 수반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전지를 갖지 못하고 전능만을 가지고 있던 브루스로 인해 세상이 엉망이 되었거든요. 브루스 올마이티 후속으로 ‘에반 올마이티라’는 영화도 재밌게 봤습니다. 에반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노아처럼 방주를 짓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댐이 무너진 도시에서 에반이 지은 방주로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방주를 짓는 미치광이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가던 에반의 아내가 휴게소에서 하나님과 나눈 이야기가 압권이었습니다. “누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기회를 주시려 할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만일 누군가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뿅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도록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기회를 주실까요?”그녀는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방주가 완성될 수 있도록 남편을 돕습니다. 저는 이 대사 말고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임의의 작은 친절’이라고 했던 에반의 말에 하나님이 바닥에 ‘ark’라고 씁니다. 그렇습니다. 방주라는 뜻이지요. 이는 임의의 작은 친절(Act of Random Kindness)의 머리글자였습니다. 영화는 타인에게 이유 없이 베푸는 작은 친절이 세상을 바꾸는 노아의 방주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방주를 항상 심판으로만 이해했던 저에게는 홍수가 심판이고 방주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던 중에 베푸신 작은 친절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ark’에는 나무로 만든 상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방주와 언약궤를 모두 ‘ark’라고 하지요. 하지만 방주를 히브리어로는 ‘테바’라고 합니다. 테바는 방주뿐만 아니라 모세의 갈대 상자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만들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홍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하셨지요. 모세의 갈대 상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이스라엘 사람의 남자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으로부터 모세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아기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웠던 상자였습니다. 모세는 나일 강변에서 목욕하던 이집트 공주의 손에 건져져 후대에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는 지도자가 되었지요.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구유를 상기시켜 줍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누가복음 2:10-12)이 말씀은 천사들이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려주실 때 했던 말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표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유는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갈대 상자와 같은 느낌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방주에 탔던 노아는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고,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스라엘로 태동시킨 인물이 되었지요. 그리고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반 올마이티의 대사처럼 방주가 세상을 바꾸는 임의의 작은 친절이었다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몸의 가시가 무엇일까?
by Wyatt Graham
2023-12-14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누가 주었을까? 그리고 바울은 왜 가시를 자신을 괴롭히고 “교만하지 않게” 하는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불렀을까? 이 글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이다.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무엇이었나? 가시라는 단어는 은유적으로 바울의 몸에 박힌 막대기를 가리킨다. 가시라는 단어가 은유로 기능하기에 주석자들은 그 은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머레이 J. 해리스(Murray J. Harris)는 사람들이 흔히 바울의 가시를 식별하는 세 가지 방법을 요약한다(2 Corinthians, 532-3). 어떤 정신적 불안 장애로 보는 사람이 있고 또 사역의 대적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의 질병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주석자들은 갖가지 신체의 질병을 제시한다. 나는 심지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에 따른 부분적 실명이라는 주장까지 들은 적이 있다(참고. 갈 4:15). 한 가지 일반적인 견해는 바울이 분명하게 “슈퍼 사도들”을 자신의 적대자로 명명했기 때문에 가시가 그들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Michael Gorman, Apostle, 386). 불안 장애는 사실 너무 추측성이 강하지만, 바울의 사역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따라서 가시는 불안 장애, 질병, 심지어 특정 상대를 나타낼 수 있다.다양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주석자들은 바울의 가시에 대해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꺼린다. 해리스의 결론이다. “정보의 부족 그리고 바울이 쓰는 언어의 모호함은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에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533). 프레드릭 댄커(Frederick Danker)도 여기에 동의하면서 바울의 가시는 “영원한 신비”라고 결론을 내린다(2 Corinthians, 193). 콜린 크루즈(Colin Kruse)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결정하기에는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하다”라고 지적한다(2 Corinthians, 266). 어느 정도 확실성을 가지고 바울의 가시를 식별할 수 없다는 데에는 현대 주석자들이 하나같이 동의한다. 바울은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기에 해석자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나는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그는 가시를 직접적으로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식별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세 가지 추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가시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가 바울에게 주었으며, 사탄의 사자/하수인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시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가 주었는가?바울은 한 구절에서 가시의 목적을 두 번이나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고후 12:7)이라고 밝혔다. 바울은 “계시”를 받았고, 이 가시가 없었다면 그는 교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시를 누가 주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사탄이 바울의 교만을 꺾으려고 가시를 줄 이유가 없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친히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는 이유로 가시를 제거하지 않겠다고 구두로 말씀하셨다.그리고 해리스가 설명했듯이, 고린도후서 12:2, 4에서 수동 동사의 사용은 하나님을 가리킨다(2 Corinthians, 532). 마찬가지로, 바울이 “내 몸에 가시를 주셨으니”(고후 12:7)라고 말할 때, 그에게 가시를 주는 암묵적 주체는 하나님이다. 그럼 가시를 준 주체가 하나님인데, 어떻게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사탄의 하수인은 무엇인가? 사자/하수인(messenger)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안젤로스(angelos)인데, 바로 여기서 천사(angel)라는 단어가 유래한다. 그리고 바울은 “내 몸에 가시를 주셨으니”라고 말하면서 즉시 그것을 “사탄의 사자/하수인”(a messenger of Satan)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탄이 보낸 천사가 바울의 가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 가시를 준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설명은 천사라는 단어가 (사자/하수인이 되기 위한) 영의 기능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의 본질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근본적인 관찰을 하기 전까지는 이상하게 들린다(Isidore of Seville, Sententiae, I.10.1).모든 천사가 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영이 다 사자 또는 하수인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모두 다 사용하신다고 가르친다. 또는 그레고리오 1세(Gregory the Great, AD 540-604)가 말했듯이, “사탄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숨겨진 정의의 목적을 수행한다”(Moralia, 2.20.38).특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령들이 자신의 공의를 집행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가르친다. 열왕기상 22장에서 선지자 미가야는 선한 영과 악한 영에 둘러싸여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환상을 전한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보좌에서 “누가 아합을 꾀어 내어서, 그로 길르앗의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고 물으신다(왕상 22:20).영 하나가 자원하고, 여호와께서는 그 영에게 어떤 방법으로 아합을 꾀겠느냐고 물으신다(왕상 22:21-22). 이에 대해 영은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습니다”(왕상 22:22)라고 대답한다.여호와께서 그 계획을 확증하신다. “네가 그를 꾀어라.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가서, 곧 그렇게 하여라”(왕상 22:22). 그리고 선지자 미가야는 다음과 같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다. “주님께서는 임금님께 이미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왕상 22:23). 더 유명한 것은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사탄과의 대화에서 먼저 욥을 언급한 건 하나님이었다(욥 1:8). 그건 하나의 암시적인 도전이었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탄은 욥이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비난한다(욥 1:9-11).욥을 사탄과의 대화에 넣은 여호와는 사탄의 도전을 들으신 후, 그가 욥을 해하도록 허락하신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욥 1:12; 또 욥 2:6 참조).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괴롭히도록 허용하셨지만, 욥은 그의 고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라”(욥 1:21). 욥은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가 언급한 것처럼 “주신 이가 여호와시요, 마귀가 빼앗는도다” (Psalm, §28)라고 말하지 않았다.마찬가지로 사무엘상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삼하 24:1)고 말씀하심으로 “다윗을 격동시켜 그들을 치게” 하셨다. 그러나 역대상 21:1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 조사를 하게 한 주체가 여호와인가 아니면 사탄인가? 이 점에서 대답은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들이 그분의 뜻을 성취하도록 허락하신다.또한 시편 78:49에서 말하는 대로, 재앙이라는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파괴하는 천사들의 무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그분의 진노의 길을 마련하셨다”(시 78:50). “파괴하는 천사들”이라는 문구는 “악한 천사들”(מַלְאֲכֵי רָעִים)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헬라어 구약성서(ἀγγέλων πονηρῶν)와 라틴 벌게이트(angelos malos)도 그렇게 번역했다. 더욱이 세 가지 번역본(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자들을 보내신다고 말한다. 이 시편을 해설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 악한 세상에서는 악한 천사들을 통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최고의 공의는 악한 피조물이라도 선용하신다”(Psalm, §28)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모두 다 사용하신다. “사탄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숨겨진 정의의 목적을 수행한다”(Moralia, 2.20.38).이러한 성경 배경으로 볼 때, 사탄의 천사는 사자, 하수인(문자 그대로는 천사의 의미)의 역할이나 직무를 맡은 악령을 가리키는 것 같다.그 사자/하수인은 악한 영이다사탄의 천사나 사자/하수인은 사탄에게 속한 악한 영이며, 하나님은 미가야의 환상에서처럼 악령을 보내시기도 하고, 또 사탄이 욥을 해하도록 허락하신 것과 같은 역할도 맡기신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사탄을 사용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도록 선동함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셨다. 또는 시편 78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출애굽기의 재앙 동안 하나님은 악한 천사들을 통해 진노의 길을 마련하셨다(시 78:49-50).욥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고후 12:8).지금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시고(시 119:68), 악한 영들은 2차 인과율 수준에서 자유 선택에 따라 행동한다고 확증하는 게 기독교 신학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이러한 악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비록 악령들이 자신의 악의적인 목적을 추구하지만 그분의 결정과 재량에 복종한다”(2.20.38).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가르침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나는 요점만 지적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사탄의 영, 즉 악한 영을 통해서 바울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어떻게? 정기적으로 우리의 육신에 고통을 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악마의 방식 그대로이다. 가시는 바울의 몸에 있는 사탄의 유혹과 관련이 있다바울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나는 이 말을 바울의 몸 속에 있는 악한 영이 그를 괴롭힌다는 뜻으로 직설적으로 받아들인다. 몸에 관해 말할 때 바울은 몸 안에는 욕망과 정욕, 곧 죄를 짓게 하는 것들이 있음을 명확하게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육체와 그 정욕과 욕심”에 대해 말한다.그리스도인은 쉬지 않고 이러한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육신에 속했기”(롬 7:14)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욕망을 품고 있다. 바울은 인격과 육체를 의미하는 자신의 “지체” 안에서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는 스스로를 “내 지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에 사로잡힌 자”(롬 7:23)라고 말한다. 바울이 직면한 이 싸움, 우리 모두가 영광 앞에서 직면하는 이 싸움은 그로 하여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고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또한 “육신 안에” 살고 있으며 “죄의 정욕”을 갖고 있다(롬 7:5). 바울도 말했듯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기”(갈 5:17) 때문에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정욕과 욕망은 육신 안에 있다. 그러면 죄가 어떻게 다가오는가? 몸이 금지된 욕망으로 유혹을 받거나, 또는 방종에 가까운 식욕으로 폭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육체에 뿌리를 둔 열정과 욕망이 뜻대로 활개를 펼치도록 고삐를 푸는 것이다. 흔히 그렇듯이, 과거의 신학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지금 다루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세비야의 이시도르(AD 560-636)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육체의 욕망 및 정욕과 연관시켜 그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사탄의 사자가 일으킨 도발로 인해서 바울에게 임한 육체의 자극(참조, 고후 12:7)은 인간의 몸이라는 지체 속 죄의 법에서 나온 것이다(참조, 롬 7:19-23). 왜냐하면 그건 음란한 욕망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 안에 거하면서 저항하는 이런 충동을 쫓아낼 때, 그는 온전해지고 비로소 음란한 기쁨이라는 약점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싸움을 싸웠다는 미덕을 받는다(참조, 고후 12:9)”(Sententiae, II.39.11).이시도르의 요점은 사탄의 사자가 시각, 후각, 그리고 촉각 등 신체의 감각을 통해 바울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정욕은 육신에 있다. 마귀는 육체의 감각과 욕망을 통해 사람을 유혹한다. 비록 육체를 입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육체의 욕망과 정욕을 어떤 식으로 공격했는지에 관해서 이시도르가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그는 다름 아니라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가시라고 결론지었다.결론바울은 몸의 가시를 자신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사탄이 보낸 사자/하수인임을 밝혔다. 나는 이 가시가 육체적인 질병이나 불안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믿지 않는다. 여기에는 몸 안에서, 즉 육체의 욕망을 통해 바울을 유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령이 포함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시련은 바울이 교만하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를 겸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에 있는 슈퍼 사도들이 전체 그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바울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더 오래된 기독교 주석가인 세비야의 이시도르의 해석처럼, 육체를 입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바울을 유혹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이 악령의 공격으로 인해 바울은 교만해지지 않게 되었다. 권력과 명성에 대한 바울의 욕망, 즉 그의 교만은 가시, 즉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악용하려는 특별한 욕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은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시는 육체를 입고 있는 사탄의 사자/하수인 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바울이 육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악령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성경 말씀을 고려하면, 우리는 바울이 겪은 어려움을 어느 정도 종합할 수 있다. 악한 영이 그의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끝끝내 저항했다.이러한 연약함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악한 목적으로 사탄이 심은 몸의 가시가 예수님을 통해서 선이 되었다. 약함을 통해 바울은 강해졌다. 우리도 약함을 통해, 예수님의 은혜로 강해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가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원제: What was Paul’s Thorn in the Fles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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