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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림의 시간
by 이춘성
2023-12-08
“지름신이 강림하셨다.” 이 말은 홈쇼핑 채널이 새로운 쇼핑 트렌드를 만들었던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유행어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문장을 충동구매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에서 물건을 홍보하는 쇼호스트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옷이나 음식을 선전하는 모델의 그럴듯한 외모를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들고 버튼을 누르는 모습이 마치 신들림 현상과 비슷하다는 뜻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러한 ‘신들림’ 표현은 다양한 영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의 영역에서 ‘신들림’ 표현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의미 전환에 성공해서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지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분이 오셨다”와 같은 신들림의 표현은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수식하는 관용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마니아라는 표현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러한 현상을 ‘신들림의 세속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세속화란 과거 신성시하였던 표현과 현상, 공간을 인간의 언어와 현상, 공간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세속화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작년에 유행했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추앙’ ‘은혜’ ‘구원’ 등의 종교적인 용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낯선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풍기면서 히트 친 이유는 배우들의 좋은 연기도 있었겠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이상한 언어들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인물들이 일상어가 아닌 종교적인 신성한 언어들을 일상어로 세속화하면서 일상의 영역을 일종의 신성한 영역으로 만드는 묘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경험은 일상의 지루함, 익숙함을 신선함, 새로움, 설렘 등의 신선한 감정으로 탈바꿈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신성화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모든 것이 신성하면, 결국 모든 것이 세속적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정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Human Future에서 범신론이 대중적인 인도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인도에서 ‘소’는 신성한 존재이지요. 그러나 인도에서 가뭄과 기근이 들면 제일 먼저 잡아먹는 동물이 바로 ‘소’라는 것입니다. 후쿠야마는 이것이 모든 것의 신성화는 결국 모든 것의 세속화라는 증거라고 주장하지요. 그런 세상은 인간이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할 마지노선의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속화는 신성한 공간과 언어, 현상만이 아닌 신성한 규범을 상대화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림’의 언어의 대중화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세속화 현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또한 ‘신들림’의 세속화와 대중화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이 현상의 시작점을 보면, 탁월한 쇼호스트들과 유명인들이 인터넷과 홈쇼핑 등을 통해 전국 단위로 물건을 팔게 된 2000년대 초반 이후에 극대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그보다 약 20년 정도 앞서 이러한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현상을 상품에 인격이 거주하는 현상, 달리 표현하자면 상품에 판매자나 생산자의 인격을 담아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 현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분석하였습니다.상품들이 자발적으로, 자생적으로 시장에 가기 위해 걸어가지는 않으므로, 그들의 “보호자들”과 “소유자들”이 이러한 사물들에 거주하는 척한다. 그들의 “의지”가 상품들에 “거주하기”(hausen) 시작한다. 여기서 ‘거주하다’와 ‘신들려 있다’ 사이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파악 불가능하다. 인격은 자신이 사물에 거주함으로써 생산한 객관적인 신들림의 효과 자체에 의해, 말하자면 그 자신이 신들리게 함으로써 인격화된다. 인격(사물의 보호자나 소유자)은 그가 자신의 말과 의지를 마치 거주자들처럼 사물 속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 속에서 생산하는 신들림에 의해, 역으로, 그리고 구성적으로 신들리게 된다. … 이러한 환영 산출적인 또는 몽환적인 과정에 대한 기술은 “종교적 세계”와의 유비 속에서 물신숭배에 대한 담론의 전제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306쪽)신들림이란 사실 서로 존재하는 영역이 다른, 전혀 다른 타자들이 하나로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합니다. 귀신, 혹은 신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면, 이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괴기스럽고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현상일 것입니다. 귀신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존재는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이나 매력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귀신 들린 영매나 무당을 찾아다니며 점을 치고 안정을 찾기도 하지요. 이렇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공포가 공존하는 현상이 신들림입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신들림이 일상화된 것이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 활동이라는 통찰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물건과 파는 사람의 인격을 동일시하고, 생산자와 물건을 동일시하는 신들림 표현을 통해 인간과 물건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물건화, 물건의 인격화 그것이 현대 신들림의 중심에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여 누군가의 탁월한 능력을 그의 인격과 동일시하며, 추앙하고 신앙처럼 떠받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추앙받는 존재의 능력이 바닥나면 동시에 그의 인격도 바닥으로 내팽개쳐집니다. 신의 몰락인 것입니다. 인간을 신격화하는 신들림의 표현은 인간을 측정 가능한 물질로 환원시켜 인간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이것이 앞에서 후쿠야마가 인도과 동양 종교의 범신론을 통해서 분석한 ‘소를 잡아 먹는 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의 세속화는 모든 것의 신성화이며, 달리 말해 모든 것의 신성화는 모든 것의 상대화를 의미합니다. 끝으로 인격과 물건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물질에 자기의 인격을 담는 것이 아니라 신(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때(벧후 1:4),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신성함을 세속화하여 모든 것을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성함을 더 신성하게하고 세속을 세속에 걸맞게 대접하는 것, 또한 인격이 물건이 되는 것에 저항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인간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증진할 수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바트 어만 씨, 뭐라고요?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요?
by Glenn Hohnberg
2023-12-02
성경 연구 저자이자 회의론자인 바트 어만은 ‘복음서를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성경의 모순들’이라는 강의에서 반복해서 말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으세요. 읽으면 다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성경 본문을 읽었다. 그리고 내가 찾은 것은 어만이 신자들에게 어려운 구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조금만 생각해도 그가 말한 수많은 모순이 단숨에 사라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가 말한 모순 중 일부는 논리가 너무나 연약해서, 나는 어만이 솔직하지 않은 게 아닌지 궁금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경의 모순이라는 이 문제에는 많은 게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어만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읽는다고 해서 그게 꼭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게 다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9분 50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은 더 큰 주제로 이어진다.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모순에 대한 어만의 정의는 ‘서로 다르고 조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성된 둘 이상의 설명’이다. 따라서 ‘두 개의 모순된 설명이 둘 다 역사적으로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강의 시작 부분에서 어만은 성경을 나란히 놓고 읽을 것을 열정적으로 촉구한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누가복음, 마가복음, 마태복음의 같은 구절을 서로 평행선에 놓고 비교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의 독서법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한 학자의 열정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오래된 NIV로 복음서를 읽을 때 나는 이미 유사한 모든 구절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었다. 자, 서론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본격적으로 모순이라는 문제로 들어가서 어만이 말하는 모순이 진짜 모순인지 살펴보자. 그의 강의에 나오는 순서대로 그 문제를 다루도록 하자. 1. 야이로의 딸을 고치심비교가 가능한 두 구절은 마가복음 5:21-24과 마태복음 9:18-20이다. 어만은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한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야이로의 딸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의 기록을 보면 그녀는 죽었다. 자, 여기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 어만은 청중에게 텍스트를 읽으라고 촉구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몇 가지를 알아차린다. 마가복음에서 야이로는 예수님께 오리지널 코이네 헬라어로 ‘내 딸이 죽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대담하고 생생한 이미지이다. 따라서 독자가 그의 딸이 실제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가 야이로의 집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딸이 지금 죽었다고 말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살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막 5:35)이건 보기에 따라서 어만의 주장을 확증하는 거 같다. 그러나 마가와 마태를 주의 깊게 읽으면 피 흘리는 여인의 이야기가 일으키는 방해와 야이로의 딸 주변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서,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더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이 사건에 관한 마가의 기록이 23절에 걸친 반면 마태의 경우는 9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마태가 야이로의 딸과 피 흘리는 여인에 대한 두 이야기를 압축하여 두 문장으로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적지 않은 세부 사항을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마태가 서술한 야이로의 이야기는 단지 상황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기에 굳이 종들이 알려준 자세한 설명까지 다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게 아닐까?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죽었다’로 번역된 마태가 사용한 동사는 부정과거형이다. 단순함을 위해 종종 과거형으로 번역되지만, 행동이나 사건을 요약해서 말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은 야이로가 그의 딸이 지금 막 죽었다고 말하거나(단순 과거 시제), 또는 마가의 경우에서처럼 그녀의 죽음이 임박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경우에도 쓰일 수 있다. 죽음이 내 딸 가까이에 있다. 아마도 이런 설명이 당신을 설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두 설명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세부 사항에서 동의한다는 점을 고려하라. 1. 야이로가 온다.2.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다.3. 야이로는 예수님께 딸에게 손을 얹으라고 요청한다.4. 피 흘리는 여자가 방해한다.5. 피 흘리는 여자에게 예수가 하는 말.6. 예수가 도착했을 때 죽은 소녀.7. 예수의 말씀,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8. 군중의 웃음과 불신.9.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는다. 사건의 핵심은 예수가 도착하기 전에 소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드라마이자 중심점이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 텍스트를 공정하게 읽으면, 비록 스타일이 다르다고 해도 그것을 압도하는 일관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주의 사항 중 하나에 도달했다. 각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건을 다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은 그것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어만은 지금 거기에 21세기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그는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축어적) 보도에 절대적인 정확성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게다가 한 인물의 말투에서 발견되는 약간의 차이를 핑계 삼아 전체 사건을 엉터리라며 창밖으로 던지고 있다. 그가 발견한 차이점이 실제로 야이로의 딸이 실제로 죽음의 순간에 있지 않았거나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실제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일단 다음 문제로 넘어가자. 2. 누가와 마태의 족보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의 예수님 족보의 차이이다. 역사적으로 학자들은 하나를 마리아의 족보로, 다른 하나를 요셉의 족보로 이해했다. 그러나 어만과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것처럼, 누가의 족보에도 그게 마리아의 족보라는 말은 없고 요셉의 혈통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바로는 두 족보가 요셉이 받은 유산의 두 가지 다른 측면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하나는 생물학적 혈통을 드러내고 다른 하나는 법적 계보일 수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족보에 관한 데럴 복(Darrel Bock)의 짧은 토론(복음서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을 참조하라. 그러나 텍스트를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일어나는 훨씬 더 많은 일을 눈치챘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에 관련된 문제이다. 마태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가 세 명의 왕을 연속해서 놓친 사실을 알 수 있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이다(참조, 역대상 3장과 솔로몬의 아들들). 그는 또한 여호야김도 뺐다. 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까지, 그리고 유수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멋진 14세대를 연속해서 가지기 위한 마태의 자의적인 조작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니까 마태는 역사가 아닌 수학으로 족보를 썼다는 주장이다. 아니, 아니, 그렇게 빨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다시 돌아가서 그가 뺀 네 명의 왕을 보면, 그들이 하나같이 다윗의 본을 따라서 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저버리고 다윗 왕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즉, 그들은 진정한 다윗의 자손이 아니었다. (아하시야-왕하 8:25-27, 요아스-대하 24:17, 아마샤-대하 25:27, 여호야김-왕하 23:36-37). 그래서 마태는 그들을 제외했다! 이 사실을 확증하는 것은 여호와께 헌신하지 아니하였으나 다윗을 위하여 명시적으로 확증된 아비야 왕이다(왕상 15:15). 그래서 마태는 그를 포함했다. 마태는 1장 1절에서 이 족보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사라고 말한다. 아마도 마태는 어만보다 구약의 본문, 즉 유대인의 경전을 훨씬 더 주의 깊게 읽었던 거 같다. 그러나 어만 식의 이해가 가진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다. 족보와 관련하여 어만은 유대인들이 후손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지 않았다고, ‘…족보 보관은 있을 수 없습니다’(20분)라며 매우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두 족보 모두 다 분쿰(bunkum, 헛소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이 정말로 족보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1세기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자신의 생애에 관해서 쓴 다음 내용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부터 나의 선조들을 순서대로 나열할 것이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이름은 사이먼…요세푸스는 조상의 이름을 계속해서 나열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리하여 나는 공공 기록에서 발견한 대로 내 가족의 족보를 지금까지 기록했다.요세푸스는 자신의 족보를 자세히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개된 기록이라고 말한다. 족보 보존이 전혀 당시에 없던 일이라면, 어떻게 족보가 공문서에까지 남을 수 있을까?더욱이 콘트라 아피온(Contra Apion)[1]에는 족보를 보관하는 유대인 관습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족보가 서술된 구약성서의 페이지가 나온다. 유대인들의 족보 보존은 정말로 당시에도 대단한 일이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따라서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 족보를 찾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어만이 전에 무어라고 했던가?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어만의 학문 연구에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은 다음 문제를 보자. 3. 이집트 피난어만이 제기하는 세 번째 모순은 이집트 피난이다. 누가복음2:2-40과 마태복음 2:1-23이다.이 둘의 설명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누가에는 목동만 있고 동방 박사는 없다. 마태에는 천사, 동방 박사의 꿈, 더 많은 꿈, 그리고 이집트 피난까지 들어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잠시 멈추고 누가가 처음에 무어라고 하는지 들어 보자.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눅 1:1-3).누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조사하여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보컴(Bauckham)과 같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이 정보는 목격자의 인터뷰를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이 사실은 왜 꿈, 이집트 피난, 그리고 귀환 등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없는지에 대한 간단하고도 가장 분명한 설명이다. 그에게는 그 사실을 확인할 목격자가 없었다. 꿈꾸는 사람 외에 누가 꿈을 증언할 수 있을까? 이 사실은 동방 박사의 방문에도 두 가지 방식으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다르게 그들은 목자들과 같은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목격자가 없었다. 페르시아에서 왔던 동방박사들은 다시 돌아갔기에 그들과는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누가는 마태와 모순을 초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검증을 받을 수 없었기에 이러한 세부 사항을 빠뜨린 게 아닐까?그러나 아직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마리아의 정결 예식을 마치고 성전에 올라갔다가 나사렛으로 돌아간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 가족은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나사렛에 정착한다. 왜 누가는 그들이 정결 예식을 마치고 곧장 나사렛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 같이 썼을까? 나는 그가 그렇게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차로 22분, 약 9.3킬로미터 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라. 고작해야 몇 시간만 걸으면 되는 거리이다. 어느 날 요셉은 갑자기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물건이 많은 그곳 상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정화 의식도 당일치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정화 의식을 마친 후 어느 시점에서 그들은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런 추론을 더욱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의 목자들보다 늦게 마리아와 요셉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헤롯은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마 2:14). 그래서 그들은 고작해야 얼마 동안만 베들레헴에 있을 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서 쇼핑, 정결 의식 등 예루살렘을 들락날락했어야만 했다. 어만은 다시 이 모순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처럼 누가가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조사하고 그가 인터뷰할 수 있었던 목격자들에게 중요했던 사실에 근거해서 복음서를 썼다고 보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4. 예수님의 죽음과 찢어진 성전 휘장이것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이는 또 다른 명백한 모순이다. 마가복음 15:37-39과 누가복음 23:45-46이다. 어만은 이 모순을 매우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나서 예수님이 죽은 건지, 아니면 예수님이 죽고 나서 휘장이 찢어졌는지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모순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혀 없다! 먼저, 이 두 구절이 담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텍스트에는 시간 표시가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 대략 ‘언제’ ‘이후’ 또는 더 직접적으로 ‘오후 열두 시에’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다음은 누가복음이다. 어느덧 낮 열두 시쯤 되었는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눅 23:44-45).그러나 문제가 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시간 표시가 없다.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눅 23:45-46).한편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막 15:37-38).발생한 일을 다른 순서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위의 구절에도 시간 표시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휘장이 찢어진 것은 단순히 등위접속사(kai)에 의해 연결되는데, 이는 ‘그리고, 그러나, 또는, 심지어, 그러나, 아직은’ 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된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휘장이 찢어지고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쉬셨다. 그리고 마가복음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쉬셨고 그러자 휘장이 찢어졌다. 당신이 거리의 평범한 소녀나 남자라면 이런 차이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ESV와 같은 현대 영어 성경 번역은 단순하고 충분할 때 kai에 대해서 바로 위에서 번역했듯이 ‘그러자’(then)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번역이 보통 사람에게는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어만과 같은 학자가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2]따라서 등위 접속사를 고려할 때,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요점은 예수님의 죽음과 휘장이 찢어지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내러티브의 요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다시 말해, 복음서 저자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죽음과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 사이에는 순서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와 마가복음의 순서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가지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때 그 중 하나를 먼저 이야기해야만 한다. 동시에 두 문장을 쓰거나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와 마가는 단지 문장을 다른 순서로 넣었을 뿐이다. 이것을 모순이라고 부르는 어만의 정직성을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게다가 텍스트 비평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신약의 헬라어를 알 것이다. 당연히 등위 접속사도 알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쉬운 사실을 놓쳤다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어만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더 포괄적인 역사적 사건알려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신뢰성에 관련해서, 어만은 누가복음 2장과 일치하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어슨(Brooke W. R. Pearson)은 누가복음 2:2의 핵심 문장을 기존의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 호적 조사는 퀴리니우스가 시리아를 다스리기 이전에 (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 있었다.’ 피어슨은 이것이 맞는 번역이며 널리 알려진 역사적 맥락에 매우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음은 ‘누가복음 속 인구 조사를 다시 들여다보기’(Lucan Census Revisited)에 관한 기사이다. 나는 어만이 이 연구를 고려했는지 궁금하다. 그는 어떻게 대답할까? 청중에게 증거가 이끄는 곳으로 가라고 도전했던 그가 이 질문에 기꺼이 응답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그가 뭐라고 했던가? 고집을 부리는 무지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마음을 바꾸고 총명해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론그렇다고 내가 어만이 제기한 모든 모순을 다 해결한 건 아니다. 그 점을 인정한다. 게다가 나는 그가 더 많은 모순을 들고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그가 제기한 ‘모순’ 중 일부는 결코 면밀한 조사를 견디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단지 텍스트를 주의 깊게 읽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은 명확해졌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아마도 어만은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1세기에 대한 그의 지식도 자신이 자랑하는 만큼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약하자면, 어만이 복음서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복음서를 거부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심지어 당신이 이미 결정한 사실에 대해서 그는 단지 확증을 하는 데 불과하더라고 말이다. 1. http://penelope.uchicago.edu/josephus/apion-1.html#S7그들은 조상과 조상의 옛 이름을 서면으로 예루살렘에 보내고 증인이 누구인지도 알린다. 심지어 먼 조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1세가 우리나라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폼페이(Pompey) 대왕과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tilius Varus) 3세가 침공했을 때처럼, 게다가 이미 수많은 전쟁이 우리 시대에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런 경우에는 살아남은 제사장들이 오래된 기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족보를 작성하고 남아 있는 여성들의 상황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여전히 포로된 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2. 누가복음 23:45의 분사는 부정과거이다.원제: Bible Contradictions? A Response to Bart Ehr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함께 가는 길
시편 133편 묵상
by 고명환
2023-11-25
1 신학교 교회사 시간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는 분열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이다. 개신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그 가지 수를 늘리고 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에서 그 실상은 쉽게 발견된다. 교파를 가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교파 안에 수많은 교단이 정통의 깃발 아래 간판을 달리하고 있다. 개신교를 방어하는 혹자는 이를 다양성이라는 미명으로 애써 포장하지만, 다양성을 낳은 태생의 동기를 파헤쳐 보면 얼마나 허전한 변명인지 금방 알아채게 된다. 분리는 연합보다 쉬운 선택이다. 일치를 위해 애쓰는 것보다 떠나 독립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가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긴 고민 없이 분리를 선택하는 큰 이유일 것이다. 덩치가 큰 기독교 집단이 분리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들끼리 협력보다 분리를 선택하는 이유는 일맥상통한다. 그 속성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갈등하며 같이 가는 것보다 혼자 자신의 길을 가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함께 가기 위해 맞춰주고 받아주고 기다리고 설득하고 때론 싸워 조정하는 데에는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렇지만, 떠나고 숨고 거부하고 무관심한 편을 선택하면 그런 일과 씨름할 필요가 없어진다.나 역시 쉽게 떠나는 편을 선택해 왔다. 어떤 그룹은 세상적이라고, 아니면 그 친구들은 너무 보수적이라고 하면서. 생각이 맞지 않는다며 동역자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들의 모임을 피하려 했다. 소수라도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일하려 했지, 껄끄러운 분들을 적극 설득해서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어쩔 수 없다며 적극 다시 끌어오려 하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 앞으로 속 썩지 않아도 된다는 얄팍한 계산도 했던 것 같다. 2시편 133편은 시의 분량이 말해주듯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간결한 시이다. 그런데, 시작이자 시 전체를 수렴하는 1절은 긴 공명을 일으킨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새번역)시편 133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1그 얼마나아름답고 즐거운가!형제자매가 어울려서함께 사는 모습!2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3헤르몬의 이슬이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주님께서 그곳에서복을 약속하셨으니,그 복은 곧 영생이다.형제자매들(하나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은 밖에서 보기에 좋아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즐거움이 있다(1절). 주님의 사람들이 선한 일에 연합하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즐겁고 기쁜 일은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은 두말할 필요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답다. 이런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며 마음껏 복을 주신다(3절). 형제들과 함께하며 얻는 즐거움은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시편 122편을 시작하는 구절이다. 시 전체는 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을 둘러보고 느낀 황홀한 감격을 그린다. 이 잊지 못할 경험은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는 형제들의 제안에서 시작된다. ‘기뻤다’는 표현이 말해주듯 같은 마음을 품은 형제들과 좋은 일을 함께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전도서에는 주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때 비단 즐거움을 얻는 데 그치지 않음을 들려준다.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유익을 얻게 됨을 가르친다. 물론, 힘을 합하여 큰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 홀로 일어나지 못할 때 서로 일으켜 줄 수 있으며, 혼자의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상황에서 힘을 보탤 수 있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힘을 합쳐 이루어 낼 수 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9-12, 새번역).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신 일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다. 그런데도,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다니며 일하셨다. 이 땅을 떠나시기 전,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그들이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요한복음 17장). 잡히실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깨어 기도하라 부탁하기도 하셨다. 부활 후에는 제자들 곁을 아주 떠나지 않으신 채, 한동안 세상에 머무시며 확신을 심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하셨다. 마침내,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교회가 시작되게 하심으로 주님의 원대한 계획에 제자들이 동참하는 영광을 얻게 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전도 여행에는 언제나 동행자들이 있었다. 때론 그들 가운데 뜻이 맞지 않아 의견 다툼이 생기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혼자의 길을 고집하지 않았다. 새로 만나는 주님의 일꾼들과 거리낌 없이 협력했고, 의견이 다른 일꾼들과 잠시 갈라서기도 했으나 영영 결별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편지에는 받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가 하는 일에 기도와 마음으로 동참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3즐겁고 아름다운 형제의 연합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다름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다양성의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같은 모습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에서 각각 차이가 난다. 이처럼 각 사람을 독특하게 지으신 목적은 자기만의 색깔을 내며 홀로 독불장군이 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아니하면서 다른 색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큰 그림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이 다르듯이 살아가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한 아버지를 모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양태 역시 제각기 다르다. 유사한 사람들로 그룹을 지을 수 있지만, 면밀하게 뜯어보면 그 안에도 똑같은 생각이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란 없다.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형편에 따라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신앙인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TV를 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제 될 게 없다고 하는 신앙인이 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프로그램만 골라 보면 된다고 한다. 유행가를 불러도 된다 혹은 안된다. 교회 안에서 반바지를 입지 말아야 한다, 괜찮다 등등, 다양한 의견 차이와 생활 방식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미국에 사는 동안 현지 목사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 목사님들의 삶에 익숙한 내게 미국 목사들은 너무도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매일 새벽잠 깨어 교회로 향하지 않아도 되고, 밤늦은 시간에 기도회를 인도하지 않아도 된다. 주일 오전 예배에 사용할 설교 한편이면 설교 준비는 끝난다. 주중에는 교회에 마련된 목사실로 며칠 출근하여 스스로 정한 근무 시간을 채우면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활용하든 상관하는 사람이 없다. (미국 목사들은 ‘오피스 아워’라고 부르는 시간 동안 사무원처럼 사무실에서 일한다.) 본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특별한 요청이 있을 때 어쩌다 교인을 심방하기 때문에 심방으로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는다. (계절별로 대심방이나 성도들의 기념일로 심방 하는 일은 없다. 병원을 방문하거나 상을 당한 성도를 심방 하는 일 정도가 심방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원하는지 잘 판단해야 한다.) 게다가 일 년에 한 달 이상 휴가를 다녀오고 두세 주 정도의 독서를 위한 특별휴가까지 받는 것이 보통이다. 설교 시간에 지난주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친구들과 환한 얼굴로 찍은 사진들을 교회 프로젝트 화면에 띄우며 자랑하기도 한다. 사명감에 불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회 일에 분주한 한국 목사들에 비하면 그들은 놀고먹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직무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설교 준비에 성의를 다하고, 매일 새벽에 교회로 향하지 않지만 개인의 처소에서 경건 생활을 위해 힘쓴다. 단지 그들은 한국의 목사들과 다를 뿐이다. 목사라는 직책을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고, 목회 철학이 다르고, 세상과 가정과 개인 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 이유에서 건 다 다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반목과 무시로 서로를 대하기 쉽고 불협화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가진 것만이 옳다고 믿고 주장할 때,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어울리지 못할 타인들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합과 조화에서 오는 즐거움은 고사하고 분열에 따른 아픔만 남게 된다. 이는 서로 사랑함으로 그 정체성을 세상에 알려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히려 분열함으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은 차가울 것이고 나아가 주님에게 큰 손해를 끼칠 건 뻔하다. 어떤 그룹이나 개인이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면 그다음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작은 이슈들에 집착해서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 거리를 두기보다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집중하면 좋겠다. 하나님 나라는 흑백으로만 그려져야 할 지루한 평면적인 그림이 아니다. 형형색색이 어울려 그려져야 할 화려하고 아름다운 입체적인 그림이다. 다음으로, 이해와 포용, 용서와 화해의 자세를 가질 때 연합과 조화의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진다. 이해와 포용의 기반 위에 협력과 동행의 좋은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관계를 이어가는 힘은 이해와 포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는 이해와 포용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의 핵심 정신이다. 이해와 포용이 상대의 연약함이나 약점을 덮을 수 있는 정도라면 용서와 화해는 상대방의 잘못과 허물까지 덮을 수 있다. 용서와 화해가 없는 기독교는 정의와 법만이 지배하는 삭막한 종교의 수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해와 포용을 넘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기까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대학 시절에 교회의 청년부에 속해 있으면서 대학생선교회 활동을 했다. 분명 두 그룹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한쪽은 모이면 전도와 민족복음화를 얘기하는 순수 열정 대학생 모임이었고, 다른 쪽은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대화로 가져와 웃고 즐기는 세상적인 기독 청년 모임이었다. 한창 뜨거웠던 나의 눈에 비친 교회 청년들의 모습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이런 비교는 점점 그들과 거리를 두게 했고 그들 속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소속한 대학생선교회에 대한 자부심은 또한 다른 그룹의 대학생선교회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각자의 특성대로 일하는 동역자이자 형제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고 칭찬은 고사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열리는 연합 행사에 건성으로 협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의 관점에서 대학생선교회를 지도하시는 간사님들은 최고로 헌신된 주님 나라의 일꾼들이었다. 일정한 소득 없이 매달 불안정한 후원으로 살아가면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묵묵히 일하던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사도들처럼 보였다. 반면에, 의식을 집전할 때는 근엄한 태도의 성직자들이 되지만, 단을 내려오면 언어나 생활에 본이 되지 않는 교회의 목사님들은 그저 그런 일꾼으로 판단했다. 이런 좁은 생각으로 인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고 가까이하여 그분들의 좋은 점들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기도로 기꺼이 돕지도 못했다. 미국 교회의 원로 목사님이 해 준 말씀이 생각난다. 아마 그분과의 대화 중 당시 내가 섬기던 교회의 한 성도의 흠을 잡았던 것 같다. 이혼을 거듭했고 말을 사납게 하는 여자 성도가 교회에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노령의 목사님은 그 성도를 잘 품어 주라고 당부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아주 비싼 벤츠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데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갔다고 차를 버리겠냐?” 내 좁은 속을 부끄럽게 만드는 적절한 충고였다. 그 당시의 나는 전체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트집 잡으며 가치를 절하시키고 나중에는 폐기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다 실수하고 때론 죄를 지으며 산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고 죄를 꼬집는 나 또한 실수와 죄의 비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고, 실수했다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죄를 지었다고 멀리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주님은 그분의 사람들이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연합과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상대의 약점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함께 가라고 하신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어 주님 나라를 확장해 가라 요구하신다. 세상은 혼자 당당하게 사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한다. 당신에게 유익을 주지는 못하면서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사람을 손절하라고 가르친다. 홀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부각하며 동경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혼자 살아가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어울려 즐겁고 아름답게 살도록 부름받았다. 그리고 함께 일하도록 부름받았다. 어울려 살아가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하려면 서로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형제라도 끝까지 참아 주고 곁에 있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서 손절당할 무익한 존재들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하찮게 여겨지는 관계라도 함부로 끊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들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가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바래 본다.
상(床)을 베푸시는 하나님
by 박혜영
2023-11-22
우리는 성찬의 말씀을 나누고, 주의 떡과 잔을 함께 먹는 시간을 갖습니다. 매번 이 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자세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의 기원은 흔히 알고 있는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고전 11:23)보다 훨씬 이전인 광야 시대의 성막에 놓인 ‘상’에 있습니다(참고. Brant Pitre, Jesus and the Last Supper). 레위기 24:5-9과 출애굽기 25:23-30은 둘 다 광야의 성막 안에 설치한 ‘진설병 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 상 위에 진설병[떡]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출 25:29-30). 숟가락까지 준비해 놓은 걸 보면, 이는 식사를 위한 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내 앞에”]서 먹고 마시는 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베푸신 상일까요? 하나님이 베푸신 상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여기에 놓은 떡(진설병)이 특이합니다. ‘기념의 떡’이었으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레 24:7, 8). “기념[기억]”을 위한 것이라니, 먼저 이런 상을 베푸신 적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시내산 언약식 장면입니다.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대표들에게 하나님이 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니, 이는 하나님 앞에서 먹었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출애굽기 24장)이 끝나자마자 성막 설치에 대한 지시(출애굽기 25장)가 나오는 걸 보면, 성막 안 ‘진설병 상’은 시내산 언약 식사의 축소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성막을 ‘휴대용 시내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진설병 상’의 떡을 ‘기념의 떡’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시내산 언약 식사를 기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베푸신 상이라니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합니까! ‘진설병 상’이 언급된 구약의 본문을 찾아보면, 거의 언제나 지성소 안의 ‘증거궤’ 다음으로 등장합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한지 지성소의 증거궤와 ‘진설병 상’만 삼중 포장하여 이사합니다(민 4:6-8). 성막의 다른 기구들은 이중 포장이면 충분했습니다.그렇게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 12지파를 위해 베푸신 ‘진설병 상’을 유월절에 예수님이 12 제자에게 베푸셨습니다(눅 22:14-20). 이 상은 예수님이 베푸신 게 분명합니다. 14절 문장을 원문 순서로 읽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앉으시니, 제자들이 함께 하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었고, 12제자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위한 초청입니까?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 식사 자리에서 떡을 주시며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으며(눅 22:19), 잔을 주시면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 하셨습니다. 구약 12지파를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얼굴의 떡[진설병]’(출 25:30)을 먹었듯이, 12제자는 “내 몸”(눅 22:19), 곧 ‘주의 몸’을 먹었습니다. 정리해 보면, ‘진설병 상’이 이어져 내려온 순서는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24:10-11→출애굽기 25:23-30(레위기 24:5-9)→누가복음 22:14-20.광야 백성에게 상을 베푸신 분이 하나님이듯, 교회의 신자들에게 상을 베푸시고 초청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 상의 기원은 시내산 언약이며, 예수님은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눅 22:7)에 새 언약을 세워 시내산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사도들에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하셨기에, 오늘날 교회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일러 ‘성찬식’이라 하는데, 주님이 베푸신 ‘언약의 식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진설병 상’을 그렇게 거룩하고 중요하게 여겼다면, 교회의 신자들도 예수님이 베푸신 상을 거룩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다른 일이 있다는 이유로 빠지는 교회의 정회원들이 있다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참고. 눅 14:16-20). 자신에게 흠이 있어 이 거룩한 식사를 감당치 못해 피한 것이라면, 더 좋은 방법은 참석하여 그런 내용을 주님께 고백하고, 한 몸이 된 교회의 성도들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동성애를 논하신 적이 있는가?
by Paul Carter
2023-11-15
예수님이 동성애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 묻는 것은 예수님이 노인 학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지 묻는 것과 다소 유사하다. 그렇지만, 비슷하기는 한데, 꼭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노인 학대”라는 정확한 말을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는 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바리새인을 꾸짖었다(막 7:12-13). 그리고 다섯 번째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셨다.“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 20:12).따라서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노인 학대를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특정 단어를 사용해서 그 주제를 직접 언급하신 적이 없다.동성애에 관해서도 거의 비슷한 말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언약적 결혼에 대한 성경의 이상을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을 꾸짖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 19:4-6).분명히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성경의 비전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평생의 결합임을 확증하셨다. 그는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고 찬성하면서 그 특별한 맥락에서 성(sexuality)을 확증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구약의 한 구절을 권위 있게 언급했다.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을 부정적으로, 비난적으로 언급했다. 마태복음 15:19-2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마 15:19-20).‘더럽힌다’는 것은 부정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이는 예배 공동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 용어는 요한계시록 21:27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계 21:27).그러므로 예수님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성적 부도덕, 도둑질, 거짓 증언 및 중상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하는 더러운 죄라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을 통해 고백하고 용서받지 못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적 부도덕”이라는 죄를 더럽게 하고 배제하는 것 중 하나로 언급하신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신약 및 기타 초기 기독교 문학의 그리스어-영어 사전(BDAG)에서는 대부분의 성경에서 “성적 부도덕”으로 번역되는 ‘포르노네이아’라는 단어를 “불법적인 성교”와 관련해서 정의한다. 유대법은 레위기 18-20장에서 불법적인 성관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긴 목록을 제공한다. 해당 법령에 따르면 남자는 다음과 같은 대상과 성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 1. 이웃의 아내(레 18:20)2. 다른 남자(레 18:22)3. 동물(레 18:23)4. 장모(레 20:11)5. 며느리(레 20:12)6. 자매(레 20:17)이들 중 누구와 성 관계를 갖는 것은 포르노, 그러니까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님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성은 사람을 더럽히고 예배 공동체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밖에 머물도록 만든다. 예수님이 동성애 문제를 긍정하셨거나 무관심하셨다고는 확실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구약의 비전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맺은 불가침의 계약으로 분명히 지지하셨으며, 불법적인 성행위가 사람을 더럽히고 하나님 나라 밖에 두는 일임을 분명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동성애”라는 단어뿐 아니라 “근친상간”이나 “수간”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리스어 포르네이아를 사용해서 유대법이 합법적인 성과 불법적인 성에 대해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에 따르면, 불법적인 성은 죄악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속죄 제물로 바치러 오셨으므로 모든 범법자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다.거기에는 당신도 포함된다. 그리고 나도 들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상처받은 남자와 여자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신다고 말씀하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잔을 건네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8).불법적인 성 관계는 죄이다. 도둑질은 죄이다. 살인과 간음과 거짓 증언과 비방은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 용서받고 영원히 씻겨질 수 있다.할렐루야!원제: Did Jesus Ever Talk about Homosexu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by Russell L. Meek
2023-11-10
TGC의 성경 읽기(Read the Bible) 운동에 참여하세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일 년 안에 힘을 합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어렸을 때 나는 암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화학요법으로 서서히 빠졌고, 암에 굴복한 몸은 말라갔으며, 할머니가 숨을 거둔 방 밖에서 쭈그리고 있던 나를 위로하던 간호사의 말까지, 나는 그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한다. 무엇보다 암 투병 내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며 쉬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야기하던 할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할머니가 인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해하는 데에 무려 수십 년이 걸렸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욥기가 알려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나는 답을 숨길 생각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언제나 마음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회복을 원하셨다. 이것이 욥기 전체가 추구하는 주제이다. 욥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욥의 (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무려 마흔한 장에 걸친 빽빽한 시에 이어 욥기의 마지막 여덟 구절[욥 42:10-17]에 도달한 순간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욥기가 고난에 관한 책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욥의 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욥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그리고 나아가서 고통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오랜 투덜거림은 이 책이 전하는 더 큰 신학적 메시지를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오늘날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주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하나님에게는 티끌 같은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고통받을 사람이 아니었다욥 역시 죄인이기는 하지만(롬 3:23), 그러함에도 욥기 서문은 욥이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1)이라고 말한다. 3절은 욥의 막대한 재력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마치 그것이 욥의 정직함의 결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묘사된 순종에 대한 축복과 일치하는 해석이다(신 28:1-14).욥은 자신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나 1장에서 벌어지는 여호와와 대적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른다. 그러나 책 전반에 걸쳐 욥의 주된 불만은 자신이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유발할 죄를 짓지 않았기에 지금 닥친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그가 받는 고통이야말로 그가 지은 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곧 살펴보듯,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핵심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는 욥의 주장과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친구들의 주장 모두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지 저주할지 통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다. 신명기 28장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같은 신약성경에서도 분명히 밝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과 관련된 보상과 징계의 범주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욥기 속 당사자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범위를 가정하고 있다.그들은 고난과 죄, 축복과 순종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바라보았다. 축복은 항상 순종에 대한 보상이고 고통은 항상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서 순종은 항상 축복을 가져오고 죄는 항상 고통을 가져온다고 간주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는 우주의 사탕 자판기로 축소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높이고 하나님을 낮추는 행위이다. 여호와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신 이유이고, 또한 욥이 회개해야만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욥은 회복될 자격이 없었다욥기의 마지막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축복의 분명한 표시인 막대한 부와 많은 자녀를 얻은 이야기로 끝난다(신 28:1-14). 마치 저자가 미소를 지으며 독자들에게 해피 엔딩을 선물하는 것 같다. 아마도 1장 속 욥을 보면서 그가 충분히 복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독자라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욥기를 끝까지 읽고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욥의 시련과 야훼의 놀라운 자기 계시를 읽은 후, 하나님이 그의 무한한 지혜와 공의 안에서 선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욥의 고백에 마침내 우리도 동의하는가? 42장은 하나님이 욥을 회복시키신 내용이 아니다. 욥은 확실히 옳지 않은 말을 한 것에 대해서 회개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그러나 욥기는 여전히 욥에게 행한 악에 대해 여호와께 책임을 묻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욥 42:11). 우리는 다른 성경(예: 창 3장; 요일 1:5; 약 1:13)을 통해 여호와가 악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기 속 구절과 다른 구절(예: 암 3:6)은 하나님이 악을 이기고 악까지도 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주권자이심을 분명하게 한다. 이건 인간이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왜 “욥의 말년을 그의 처음보다 더 복되게”(욥 42:12) 했는지에 대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그렇게 하셨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욥의 상황에 중점을 맞추는 식으로 욥기의 결말을 해석하는 것은 특히 욥이 여호와와의 만남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드러난 앞선 이야기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욥기를 다 읽어도 우리는 고통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가진다. 그럼에도 최소한 축복이나 저주의 경험이 사람의 의를 측정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축복하거나 저주하실 수 있다.원제: Why Does God Restore Job?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를 더 기이하게 만들자
by Darryl Dash
2023-11-09
지난 토요일에 나는 불신자들이 적지 않게 참석한 결혼식에서 설교를 했다. 나는 신랑신부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불신자에게 복음까지 전하는 성경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어려운 구절을 골랐다. 에베소서 5:22-33. 나는 신랑신부에게 주례자로서 하기 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복종과 사랑이다. 동시에 긍정적인 말도 있다고 말했다. 서로 사랑하고 복종할 때,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 사람이 반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 나는 복종에 관해서 말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주제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런 일이 퍽 자주 발생한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설교하다 보면 지금 우리 생각과 모순되고 이상해 보이는 부분을 성경 속에서 꼭 만나곤 한다. 전에는 그런 구절을 부드럽게 하거나 아니면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나는 어려운 구절들로 곧장 달려간다. 나이가 들수록 기독교의 어려운 부분이 지렛대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굳이 어려운 주제를 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어려운 구절을 적극적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더 정직하다어려운 문제를 피하는 교회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실망스럽다. 이건 마치 고객을 유인하는 상술 같다. 성경 속 어려운 주제는 적지 않다. 따라서 교인들이 나중에 그런 부분을 일부러 숨겼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솔직하게 알릴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사도행전의 설교를 보라. 사도들은 적대적인 청중과의 의사소통에 매우 능통했다. 종종 그들은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으로 바로 이동했다. 그런 내용은 피하거나 부드럽게 페달을 밟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공개하는 것이 좋다.더 힘 있다어려운 주제의 공개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우리에게 필요한 대위법을 제공하는 지점이 바로 성경 속 난제가 있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성경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소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따라서 어려운 구절일수록 피하기보다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과 우리가 메시지를 전하는 교인들 사이의 긴장 지점은 무엇인가? 그 지점을 피하지 말라. 적극 끌어안으라. 성경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변화를 어떻게 이뤄내는지를 보여주라. 결국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과 사고방식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 어려운 구절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무엇보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복음의 타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 모두와 모순된다(고전 1:18-25). 우리는 믿기 어려운 많은 내용을 믿는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성육신. 그의 죽음, 장사, 부활이 역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 더불어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이다. 믿지 않는 귀에는 이 모든 게 이상하며, 복음을 타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부드럽게 바꿀 수 없다.내 생각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경향과 기독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응답을 요구한다. 말씀이 현대인의 감성과 모순될 때, 올바른 접근 방식은 모순의 완화가 아니라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더 나은 말씀을 어떻게 제공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을 부드럽게 하지 말라. 정면으로 제대로 이야기하라. 달려가라. 어려운 부분, 이상한 부분, 괴이한 부분은 오히려 하나님 계시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보다 더 나은 말씀을 어떻게 주시는지 더 잘 보여줄 수 있다.원제: Keep Christianity Wei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by 고성제
2023-11-03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던 중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죽이신다(삼하 6장). 이런 기사를 읽으면 누구나 불평하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낸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느냐!” 그도 그럴 것이 웃사가 무얼 잘못했는지가 썩 잘 이해되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운반한 것부터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법궤는 사람들이 메거나 들고 운반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법궤의 네 귀에 고리를 달라고 명하셨다. 그러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이 큰 잘못인데…. 그럴지라도 그것은 웃사의 잘못이 아니라, 다윗 왕이나 그의 종교 담당 비서관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장대에 꿰어서 나르게 했더라면, 짐승이 날뛰어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은 일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아져 손을 내민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웃사야! 고맙다!”는 음성이 들려야 할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고, 독자의 감정이 좋지 않다.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화내기 전에 다시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무엇을 보게 될까? 우선 그 현장에 ‘웃사의 죽음’만 있는 게 아님을 보게 된다. 거기엔 언약궤도 거기 있고, 그뿐만 아니라 뒤돌아보면 성경에는 그때까지 언약궤에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웃사의 죽음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 마치 펼침막처럼 이 사건 배후에 펼쳐져 있는 그 에피소드들을 함께 살피며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에피소드 1첫 번째 에피소드는 사무엘상 4장에 있다. 엘리 제사장이 다스리던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는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그 지역에 전쟁이 잦았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약 4,000명이 죽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한다. “법궤를 가져오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이기게 해 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그 전쟁터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나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될 것’이라고 믿은 그들의 생각은 미신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단히 모욕적이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들은 하나님을 조작가능한 분으로 본 것이다.하지만 우리의 상황도 이와 똑같다. 사실 오늘 우리도 성경 계시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도 똑같이 흐를 것이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분이라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생각과 다르다는 건 우리로서는 생각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늘 보는 것이 뭔가? 늘 애쓰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분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걸 알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계신 것이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또 거룩한 분! 쉽게 말하면 다르고 다르고 다른 분이다. 너무 다르고 다르고 달라서 어디 견주어 설명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법궤와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가 동일하게 바로 그 점을 가리킨다. “나는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같은 얘기였다. 장로들의 제안은 이제 다시는 패배하지 않게 할 놀라운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조작이 가능한 분이 아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이라, 마음대로 살고, 그러다가 어려운 일 생기면 그냥 하나님을 동원하려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전쟁의 결과도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들은 다시 패배했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더 비참했다. 전사자 수가 이전의 8배에 달했다. 게다가 법궤마저 빼앗겼다.알다시피 이런 상황은 당시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지역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것은 다곤이 여호와보다 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영광스럽지 않은 분인가? 이제 더 이상 만왕의 왕이 아닌가?우리의 하나님 되시기를 거절하고 사임하셨나?블레셋인들도 생각했을 것이다. ‘다곤이 최고란 말인지? 우리의 다곤이 이제 이스라엘 신의 사업을 인수합병한 것이지?’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것이다.에피소드 2-3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블레셋 땅에서 일어난다. 법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인들은 그것을 다곤 신전에 두었다. 그들은 승리에 몹시 들떠 있었고, 법궤는 그들에게 마치 승리의 트로피와 같았다.하지만 다음 날 아침,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아침에 신전에 들러본 그들은 경악했다.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랐지만, 우연이라 생각하고 신상을 다시 원래대로 세워 놓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 그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아예 잘려져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불길하였을까?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온 동네에 갑자기 독한 종기가 돌았다. 그 재앙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기곤 했는데, 어디로 옮기든 피할 길이 없었다. 법궤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재앙이 내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라고 아우성쳤다.에피소드 4얘기는 자연스레 네 번째 에피소드로 이어진다(삼상 6장). 법궤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제 그것을 돌려보낼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가 제안했다. 궤를 보내되, 그 재앙이 그 신으로부터 왔는지 우연이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냐고. 그가 제안한 방법은 간단했다. 새끼를 낳고 아직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준비해서 그것들로 수레를 끌고 가게 하자는 거다. 새끼는 집에 놔두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소들이 새끼를 두고도 이스라엘 쪽으로 간다면, 그건 이 일에 이스라엘의 신이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가져오면 안 되는 법궤를 가져왔다는 뜻이라고 보기로 한 것이다. 나름 논리적으로 치밀한 방법이었는데, 그렇게 시행한 결과는 놀라웠다. 소들이 곧장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끄는 사람도 없는데, 길을 잘못 들지도, 멈추지도, 무얼 먹으려고 곁길로 빠지지도 않았고 새끼에게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이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 틀렸다는 거다. 하나님은 포로였던 적이 한순간도 없으며, 블레셋 땅 다곤 신전에 있을 때도 그곳에서 여전히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포로로 잡기는커녕, 언약적 관계가 없는 그들은 그분의 상징물조차 그들 가운데 두고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법궤를 두고도 저럴 정도니, 그분의 실재(real presence)를 감당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그뿐만 아니라 ‘그런 분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은 젖먹이를 둔 암소의 본능보다도 강렬했다. 그들이 그토록 잘못된 믿음의 미몽 속에 있을 때조차 말이다. 주님은 훗날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결국 이 에피소드들은 무얼 말해 주나?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거룩하신데, 그의 사랑도 자비도 모두 남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신도, 블레셋인들이 생각하는 신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그분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에피소드 5이제 법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궤를 보고 너무 반갑고 궁금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것을 들여다보려고 그만 그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리하여 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언약궤는 고핫 자손만 다룰 수 있고, 그들조차 만지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다.여기서도 하나님은 다시 한번 거룩하심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분은 완전 타자였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있어야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이해할 텐데, 달라도 완전히 달라 알거나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 단지 만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가 불가능한 분이었다. 그분은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순종할 분이지, 분석하고 판단할 “그것”이 아니란 말이다. 놀랍고 위대하기를 상상 자체가 불가할 정도라는 것이다.에피소드 6이제 본문 곧 마지막 법궤 얘기다. 이 일은 다윗이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시는 중에 일어났다. 다윗은 이 일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풍악을 울렸다. 그때까지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다시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궤를 옮기던 중에 갑자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놀란 웃사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지금까지 배후의 법궤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은, 본문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잘못했는데, 왜 웃사가 죽어야 하나…. 설혹 웃사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이렇게 죽는 건 좀 심하지 않나….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얄팍한 감정을 앞세워 성급하게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설교자로서 우리는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비극을 대할 때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이 이런 비참한 비극까지 감수하고도 하시고자 한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을 겸손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평범한 돌도 뒤집어 보고 나뭇잎도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웃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이거나, 다시는 만지지 말라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복음의 복음 됨을 더욱 밝히 보여주고자 하는 계시임을 보게 된다.단순히 “이제 웃사는 지옥 갔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안 된다. 사실 성경 인물들은 우리를 위한 드라마에 등장한 등장인물들이다. 드라마에서의 배역이나 내용을 가지고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드라마에서 배우 아무개 씨가 죽었다고 실제 그가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웃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 말하도록 위임받지 않았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그러면 웃사 사건은 복음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어떤 하나님이 어떤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드러냄으로 그렇게 한다. 사실 복음이 정말 제대로 기쁜 소식이 되려면, ①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분인지를 알아야 하고, ②동시에 인간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③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어떤 위대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깊고 풍성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이 왜 그렇게 기쁜 소식인지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그렇다면 웃사 이야기는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 본문에서 웃사의 죽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웃사의 죽음을 그 이전에 이어져 온 법궤에 얽힌 이야기라는 펼침막 앞에서 법궤와 함께 보아야 한다고 했다. 웃사는 왜 죽었나? 법궤에 손을 대는 바람에 죽었다. 그는 왜 손을 댔나? 소들이 날뛰는 바람에 법궤가 굴러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법궤가 떨어져 더러워질까 염려한 것이다. 길에는 짐승의 배설물을 비롯해 더러운 게 많으니까 말이다. 이 점에서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더러운 것은 길에 떨어진 짐승의 배설물이 아니라 웃사 자신이라는 거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짐승의 배설물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든 것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은 웃사를 포함한 인간인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 17:9). 웃사는 자신이 그렇게 더러운 걸 모르고 손을 뻗어 하나님의 궤를 만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다. (기억할 것은 바로 이때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해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 보라고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말이다!)그 현장에 법궤가 있고, 그 뒤로는 이런 펼침막이 있다. 그 펼침막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거룩하다.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너희가 만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다. 나는 너희가 예배하고 순종해야 할 대상이지, 연구하고 분석하고 이제 ‘알았다!’라고 말할 “그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와 맺어준 언약 없이는 너희는 나의 상징물조차 너희 가운데 두고 누릴 수 없다. 나는 너희에 의해 조종될 수 없으며, 어느 신들보다 뛰어나며 어디서든 다스린다.이렇게 거룩하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죽었을까? 앞에 나온 에피소드들을 보며 생각해 보았나? 그 펼침막 속에서 죽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숫자가 무얼 말해 주나? 언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몇 번 죽었어야 할지 모르는 자들이라는 거다. 우리는 매일 죽을 수밖에 없고,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성경은 그런 분이 죄인을 사랑하신 얘기다.웃사 얘기는 웃사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웃사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이 “위하여 언약궤를 준비하신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작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대표로 삼아 구체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시내산에서 더욱 구체화하여, 궤에 담아, 손에 쥐어 주신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웃사와 같은 인간 혹은 그보다 못한 인간들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못났고, 그렇게 도덕적으로 망가져서,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더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자신들이 그러한 줄을 모르고, 넋 놓고 행동하는 우리들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런 얘기다.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이 얼마나 무지하고 더러운 인간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셨는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법궤는 오래전부터 바로 그 사랑의 증거로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은 지금까지 그나마 하나님 임재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법궤로 인해 죄인들도 그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 계획 속에서 웃사와 같은 죄인은 배제된 것이 아니라 포함되어 있었다. 기실 그 법궤와 거기에 담긴 언약은 웃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르는 인간을 위해 말이다. 그들이 아직 연약하고 원수되고 죄인되었을 때, 본문의 그림으로는 웃사가 자신이 어느만큼 죄인인지도 모르던 그때에 하나님은 이미 그 언약궤를 주셨고,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을 내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웃사는, 오늘도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이미 수 없이 죽고 또 죽어야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게 한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성제 목사의 설교영상 보러가기
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
교회를 사랑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by Matthew Barrett
2023-10-31
종종 마르틴 루터를 로마 성문을 향해 돌격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격렬한 시위자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캐리커처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루터는 종파주의자도, 분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교회를 분열시키지도 않았다. 더더욱 로마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로마가 마침내 가톨릭(보편) 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드러내는 더욱 현대적인 혁신의 시대로 전환했다고 확신했던 루터의 원래 의도는 내부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의 생각은 그가 내건 95개조 반박문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박문을 제시한 이유가 공개 토론을 위해서였지만, 서두에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밝히려는 열망”이었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밝혔다. 루터의 반박문은 열정, 심지어 심각한 경악까지 드러내고 있지만, 그의 대담한 불만 뒤에 숨은 더 깊은 동기, 곧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다. 면죄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면죄부의 남용은 루터가 이 95개조 반박문을 쓰도록 자극했다.당시에 반박문을 작성하고 게시하는 게 참신한 건 아니었다. 루터가 토론을 위해서 이런 식의 글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관행이 루터의 독점물도 아니었다. 중세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행동을 했다. 아마도 루터는 앞서 살았던 여러 사람을 모방한 것 같다. 이건 루터가 일으킨 자극을 경시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의도한 게 대중의 반란이 아니라 학문 논쟁이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의 면죄부 설교를 주관했던 브란덴부르크 대주교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에게 이 반박문을 보냈다. 그 외에 여러 친구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루터의 궁극적인 목표가 학문 논쟁이 아니라 구원 자체만큼 중요한 어떤 문제에 대한 공개적이고 목회적인 해명이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적 관점을 반영하는 그의 반박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죄에 대한 회개와 형벌루터의 첫 번째 논제는 마태복음 4:17에 대한 로마의 해석에 도전한다. “우리의 주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 되기를 바라셨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죄인에게 “참회하라”(라틴어는 poenitentiam agite 명령했다고 생각했다.루터는 죄에서 돌이키라는 단순한 명령을 면죄부를 포함한 로마의 전체 참회 제도로 독해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회개하라”라는 대체 번역을 선호했다.그는 “이 단어는 성직자가 집전하는 고해성사, 즉 고백과 속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라고 썼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내면의 회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한 경험을 바탕으로 루터는 외적인 열매가 없는 “회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육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외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내적 회개는 무가치하다.”죄에 대한 언급에서 루터는 죄가 주는 자책감과 죄의 형벌에 대한 로마의 구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터는 마치 교황이 그리스도인을 모든 죄의 형벌에서 전부 없애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교황에게 호소하는 것을 반대했다.더욱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라면 결코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모든 면에서 그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의 대리자인 제사장에게 복종하게 하지 않는 한 누구의 죄도 사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했다.1517년까지만 해도 루터는 사제직에 관한 로마의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제들, 특히 연옥의 개념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죽는 사람의 경우에 연옥을 들먹이며 성경의 형벌을 유보하는 사제들은 무지하고 사악하게 행동한다”고 지적했다.루터가 “형벌은 진정한 회개를 시험하기 위해 죄 용서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부과되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통 알려졌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 점은 루터를 끝없이 괴롭힌 문제였다. 아마도 루터는 일단 용서받으면 처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반 교회 신도들에게 비슷한 말을 했을 수는 있다. 연옥과 면죄부루터는 연옥에 대한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은 연옥의 목적을 전달하려고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사용했다. 루터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줄어들고 사랑은 늘어나는 것 같다”라고 썼다.루터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잘못된 인도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교황이 “모든 형벌의 전면적 용서”를 허용했을 때, 그가 “실제로 의미한 건 ‘모든 형벌’이 아니라 교황 자신이 부과한 형벌만을 의미했다.”루터는 한탄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든 형벌에서 면제되고 교황의 면죄부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이 면죄부 구입으로 연옥에서 즉시 석방될 것이라고 약속하며 거짓말을 선포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돈이 상자에 딸깍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탈출한다는 인간의 교리만을 설교한다”라고 썼다.돈 상자가 많아질수록 ‘욕심과 탐욕’은 더욱 커졌다. 자기가 하는 회개가 진짜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면죄부로 인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냐며,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했다. 의분에 불탄 루터가 면죄부 탁자를 뒤집었을 수도 있다. “면죄부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가르친 교사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불타는 언어, 목자의 마음루터의 강한 언어인 ‘저주’는 그의 목회적 혐오감을 전달했다. 면죄부를 살 만큼 충분한 돈만 있다면 회개 여부에 상관 없이 언제라도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인들은 면죄부 테이블을 향해서 달려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강간한 사람도 면죄부만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미쳤다!”라고 루터는 소리쳤다. “이 얼마나 끔찍한 참회 시스템의 남용인가? 진정한 참회와 관계없이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와도 아무런 상관없이 마치 죄에 대한 일시적인 형벌에 대한 속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마음의 진정한 성화를 희생시키는 값싼 은혜라고 확신했기에 루터는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했다.그리고 루터는 테첼 같은 설교자들을 화나게 했을 논제를 내놓았다.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용서받을 권리를 가진다.”“조심하기”를 거부한 “교황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평신도들에게 다른 “사랑의 선행”은 덜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루터는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루터는 면죄부 제도 전체를 뒤흔들었고,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의 동기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가치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루터는 교황이 면죄부 사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처음만 해도 루터는 교황의 선의를 믿었다. 면죄부가 어떻게 남용되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교황이 앞장서서 면죄부 판매와 구매를 중단하리라 생각했다.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를 안다면, 양의 가죽과 살, 뼈로 세워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 대신 그는 차라리 그 성당이 불타서 재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자신이 얼마나 틀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종교개혁 여정 중 이 시점에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완전히 거부한 게 아니었다. 단지 교황의 권위를 분명하게 했는데, 즉 그 권위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남용될 것을 두려워했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일반 주교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한은 모든 주교나 큐레이터가 자신의 교구나 성당에서 신도들에 관해서 갖고 있는 권한과 동일하다.”루터는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받아서 교황에서 물려준다는) 열쇠에 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교황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열쇠의 권능이 아니라 양을 사랑하는 중보의 마음으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사죄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 95개조 반박문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데 있어 아직 초심자였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그가 나중에 포기한 신념도 여전히 담겨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의 핵심 우려는 분명히 담겨있고, 그 반박문이 올바른 손에 쥐어졌을 때 폭발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루터의 진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단지 교회의 진정한 유산을 회복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중세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때가 다다랐을 때, 그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로마에 종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글은 Zondervan Academic과 협력하여 출판되었으며 Matthew Barrett의 The Reformation as Renewal: Retrieving the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Zondervan, 2023년 6월)에서 간추렸다.원제: Catholic, Not Roman: Luther’s Ninety-Five Theses of Love for the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주님을 위해 일할 나이
시편 92편 묵상
by 고명환
2023-10-26
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광고나 강연에서 듣던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나이는 숫자 정도로 여겨지는가? ‘아니다’ 단언해도 무리가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고정관념을 깨자’는 취지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는 몰라도, 현실은 그 숫자가 가지는 위력 앞에 쉽게 굴복하고 만다. 여전히 나이를 따져 효율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잣대이다. 개척하여 섬기던 한인교회 가까이에 한참 떨어져 있던 한인교회가 이사를 왔다. 한인들이 희소한 매사추세츠주와 뉴햄프셔주의 경계에 자리한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한인교회 둘이 오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할 곳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개척을 결심할 때 마음으로 정한 원칙이 둘 있었다.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빼내어 시작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미 한인교회가 있는 곳에 터를 잡지 않는다.’ 한인교회가 가까이에 없는 지역에, 주님을 모르거나 낙심한 영혼들을 찾아내어 개척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기도하며 시작했다. 주님의 도움으로, 더디었지만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장소에서, 새롭게 주님을 알아가는 분들과 함께,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져 가는 중이었다. 한데, 적지 않은 역사를 가진 교회가 무슨 사정인지 지척에 들어온 것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체 상태였던 교회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도에 의욕적인 젊은 목사님을 맞아들였고, 교회 자리도 옮겨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젊은 한인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 서로 협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점점 바뀌었다. 그래서 연락해 오면 기꺼이 만나 인사도 나누고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 목사님과 만나 식사하는 자리는 수개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같이 식사하자고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마련한 기회였다. 만난 자리에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 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 분의 헌신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비교하니 나의 활동은 게으른 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계속된 이야기 가운데, 그 열정의 젊은 목사님은 한국의 유수한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서울의 대형교회 부목사로 일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주의 종’임을 듣게 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경력에 젊음과 열정마저 갖춘 그 분에 비하면 나의 것은 조촐했지만, 차례가 된 것 같아 나름 소상하게 풀어 놓기 시작했다. “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십오 년 동안 하며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위해 전 시간을 드려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교에 마흔이 넘는 늦은 나이에 들어가서 겨우 졸업한 뒤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개에 이어 교회 개척 동기와 진행, 현재의 모습에 이르도록 나름대로 성의 있게 설명해 주었다. “난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런 그 분의 말에 짐짓 당황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갔다고 말한 사람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하다니?’ ‘그의 앞에 있는 나이배기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했었다는 말 아닌가?’혼란스러웠다. 즉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공격적인 질문 대신에 상투적인 변호를 늘어놓았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팔십세가 되어 부름을 받았고, 갈렙은 팔십이 넘는 나이에도 주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성경에 보면 나이가 많아도 주님의 일꾼으로 귀하게 일한 분들은 많은데요.”이에, 그는 입술을 약간 떨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응대했다. “어쨌든 전 나이 든 사람들이 신학교 가는 것에 반대합니다.”얼굴을 붉히며 내보이는 단단한 고집을 확인하고 나니, 더 이상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하여, 애써 불쾌한 마음을 추스른 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어설프게 마무리해야만 했다.왜 그분은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것을 싫어했을까? 왜 목사는 자신처럼 젊은 나이에만 헌신해서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믿었을까? 자신은 제때 신학교를 거치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데, 늦게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세상에서 더럽혀진 사람들이 나중에 ‘성직자’가 되는 것은 자격이 없다고 믿은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이 든 사람들은 목회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듣고 싶지 않은 대답에 대한 질문을 지금도 해 본다. 2.시편 92편1-3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4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5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6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7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8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9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10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11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12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13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14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15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시이다. 시인이 노래하고 싶어한 주님의 사랑, 성실하심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것으로 밝히 입증된다. 곧, 악인들과 의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악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잠시 그들의 악행이 세상에 만연한다 해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도록 심판하신다. 반면에, 의인들은 악인들로부터 온전하게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크게 번성하는 복을 누리게 하신다. 시에서 악인은 풀(잡초)에, 의인은 나무(종려, 백향목)에 비유된다(7, 12절). 풀과 나무는 수명과 유용성에 있어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풀은 아무리 쑥쑥 자라 무성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말라 그 생명을 다해 쓸모없어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나무는 그 생명이 길고 여러 쓰임새로 인해 큰 가치를 지닌다. 의인은 우거지고 높이 치솟는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크게 번성하고 뻗어 나간다. 수령이 오래되어도 생기를 잃지 않고 푸르며 열매를 맺는다. 오래된 나무라도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며 풍성한 결실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이 늙으나 젊음을 유지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젊거나 늙거나 나이에 상관없이, 활기차고 열매 맺는 의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관건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밀착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3.나이란 하나님께는 숫자에 불과하다. 주님의 선발기준에 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주님의 쓰임을 받는데 나이의 커트라인이란 없다. 주님은, 자원하는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어리다고 돌려보내시지 않는다. 누구든지 쓰임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선택의 대상이 된다.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님께서 그 어떤 조건의 사람이라도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진 특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재능을 가졌든 못 가졌든, 나이가 어리든 어리지 않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쓰임에 합당한 열매를 반드시 맺는다. 관건은 나이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이다. 주님께 뿌리를 두어야 푸르름을 유지하고 열매 맺을 수 있다. 홍안의 소년이라도 주님께 뿌리를 두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한다. 백발의 노인이지만 주님께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그 잎은 푸르며 열매는 풍성하다. 시편 1편의 시절을 따라 열매 맺는 나무가 생명의 시냇가에 천착하였듯이, 진액이 넘치고 푸르르며 늘 열매를 맺는 나무는 생명의 근원인 주님께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다. 예수님은 가지인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려면 포도나무인 그분께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요한복음 15장). 주님 앞에 나이를 따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를 크게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작게 보는 사람이다. 어렸으나 주님의 쓰임에 적합한 다윗을 무시했던 사람들의 일원이며, 사무엘이 늙었다고 강제 은퇴시키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동조하는 부류 중 하나이다. 강력한 주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초라한 사람의 능력을 크게 보는 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고린도전서 1:27)이시라는 사실에 무지한 사람이다.아직 어리다고 뒤로 물러나지 말기를 바란다. 이제는 늙었다며 조기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님 안에 뿌리를 두기만 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것도 숨이 멎는 그날까지.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삶을 꿈꾸어야 마땅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이 가능함을 보장해 준다. 얼마나 힘이 되고 소망을 주는 말씀인가!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레바논의 백향목처럼높이 치솟을 것이다.주님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우리 하나님의 뜰에서크게 번성할 것이다.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12-14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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