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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복음을 어떻게 설교했을까?
by Tim Keller
2018-12-10
구약성경에는 의도적으로 해결시키지 않은 ‘이야기적 긴장’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긴장으로부터 복음의 토대가 마련된다. 이야기적 긴장이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고, 줄거리의 흐름과는 상반되는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해 본다면,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할머니의 간식을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단지 기록일 뿐이다.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할머니의 간식을 가져가는데, 나쁜 늑대가 그녀를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긴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신명기 전체를 끌고 가는 이야기적 긴장은 성경 전체가 십자가로 나아가며 드러내는 기승전결의 이야기적 긴장과 동일하다.‘내가 보기에 신명기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성경이 아름다운 까닭은 성경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놀라운 전조들 때문이다. 신명기 30장에는 바로 그 전조가 나타난다.신명기 30장은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는데, 심지어 모세가 현재에 대해 말하는 듯한 내용조차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모세가 궁극적으로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신명기 30장에서 모세는 미래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한다.1. 너희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모세가 첫째로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명기 30장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다. 만일 이를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면,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을 잘못 해석하게 될 것이다. 1절을 보라.“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모세는 이스라엘이 흩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유배와 흩어짐은 가장 큰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절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실패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예언한 모든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언약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끔찍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신명기를 읽는 현대인들은 오늘날의 문화가 동기부여에 능한 강연자를 얼마나 선호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어떤 의미에서 신명기 전체는 그러한 인물의 강연과 같다. 또 다른 표현으로 신명기는 놀라운 윤리 서적이다. 신명기는 온전함, 정의, 그리고 고결한 삶을 향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신명기를 묘사한 바에 따르면, 모세는 역사상 첫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자기계발 강사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반면, 모세의 이 연설은 어떻게 끝을 맺는가? 모세는 1장부터 29장까지 이스라엘인들이 따라야 할 윤리적 기준들을 이야기한 후,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껏 말한 것들을 단 한가지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참한 실패를 맛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만 놓고 보자면, 내가 지금껏 쓸모 없는 말을 한 것과 같습니다!”아마도 이런 강연은 자기계발용으로는 썩 좋지 않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는 매우 훌륭한 복음 설교이다.모세는 처음부터 “너희는 실패할 것이다”라고 이스라엘에게 말했다. 복음 설교자들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 설교자들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겨 줘야 한다. “여러분은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자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것을 행하며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2. 하나님이 너희의 마음을 고치실 수 있다또한 신명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셔서 온전케 하려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신명기 30장 2-5절에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6절에 와서 이렇게 말한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모세는 지금 성경의 이후 부분에서 나올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로마서 2장 29절에서 우리의 마음이 할례를 받았다는 표현을, 또 빌립보서 3장 3절에서는 참된 할례라는 표현을 쓴다. 마음의 할례는 곧 복음을 의미하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예견하는 메시지이다.'할례 받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소 끔찍한 상상 아닌가? 피터 크레이기(Peter Craigie)에 의하면, 신명기가 말하는 우리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는 하나님이란, 우리 마음을 수술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한다. 할례가 외적인 순종과 언약 공동체로의 진입 및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복종을 보여주는 표시라면, 마음의 할례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출발점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결혼을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사랑 없이 이루어지는 결혼도 많다. 그런데 나는 내 아내 캐시(Kathy)와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내가 바뀌기를 바랐는데, 그런 캐시의 바람은 내게 곧 명령과 같았다.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캐시의 말에 따르는 것이 그녀의 의지에 대한 복종이라거나 굴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사랑으로 인해 나는 분명 변화하고 있었다. 즉,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동일해진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의무가 동일한 것, 그것이 바로 할례 받은 마음이다.골로새서 2장 11절은 다소 이상하지만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크리스천]는 그리스도의 할례로 인하여 할례를 받았다.” 바울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거듭날 때, 단순히 새로운 마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할례가 선행되었기에 그분께서 주시는 할례 받은 마음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할례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언약의 저주, 즉 내쳐짐을 겪으셨다. 누군가가 거짓을 말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에 회중으로부터 내쳐지는 일은 신명기가 끊임없이 제시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형벌은 ‘그분으로부터’ 내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내쳐지는 것은 곧 생명, 빛, 모든 선한 것들로부터 내쳐지는 것과 같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 형벌을 감내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으셨다.에덴동산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쫓겨났으며(곧 내쳐졌으며),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은 검을 든 천사로 인해 막혔다. 생명 나무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그 검을 통과하는 길뿐이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검을 통과하셨다. 그가 할례 받았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인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우리를 위해 그 할례를 겪으셨기에, 우리는 오로지 믿음만을 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될 자격을 얻었다. 또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짊어진 그분의 형상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짐으로써, 주님의 자녀는 비로소 순종에 대한 의무가 곧 기쁨이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만약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행하신 일, 즉 우리를 위해 전 우주적 '내쳐짐'을 겪으신 일을 바라보며 “내쳐져야 하는 자는 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저를 대신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의 마음은 할례를 받은 것이다.3.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 이 일을 하셨다위의 두 가지 내용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신명기 30장이 말하는 미래에 대한 세 번째 내용은 두드러질 정도로 현재에 관한 언급처럼 보인다. 사실상 신명기 30장의 1-6절은 “먼저 너희들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모든 저주들이 임하게 될 것이고, 결국 너희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를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미래의 시간을 내다 보고 있다. 이는 새 언약과 거듭남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신명기 30장의 뒷부분인 11-15절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이 부분에서 ‘오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모세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이제 현재에 대한 주제로 돌아온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모세는 이 말씀의 앞부분인 11절과 14절에서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결정지을 하나님 율법이 어렵거나 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과 마음 안에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먼저, 하나님의 율법은 모호하지 않은 명확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 이미 찾아온 말씀이므로, 이를 지키지 않는 오늘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그 어떤 변명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바다 건너 현자나 신비주의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미 율법을 주셨기 때문이다.반면, 톰 슈라이너(Tom Schreiner)의 분석과 같이, 바울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킬 수 없고 지키지도 않을 것이라고 모세가 이미 말한 내용을 기억하며 이 본문을 인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석은 바울이 로마서 10장 4, 6-9절에서 말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슈라이너가 말하기를, 바울은 모세의 말이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할 유일한 단어, 즉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어렵지 않은(믿기만 하면 되는), 그리고 당신이 찾아 나설 필요가 없는(하나님의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그 복음 말이다. 모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그 복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는 곧 미래의 역사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불가능한 일을 행하셨다.바울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부정하거나, 그분을 다시 하늘에만 머무시게 하는 것과 같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세상으로 향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복음은 어려운 명령이 아니다(신 30:11). 다시 말해, 개인적인 열심과 같은 행위로써 순종을 증명해야 하는 그런 명령이 아니다. 또한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떠한 명령도 이와 같지 않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장차 이 복음이 너희를 찾아올 것이다.”하나님의 은혜로, 그 복음은 지금 우리 곁에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Moses Preached the Gospel번역: 김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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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모세
복음
설교
선한존재
하나님
예수님
신명기30장
톰슈라이너
경고와 확신의 관계를 혼동하지 마라
by Andrew Wilson
2018-12-05
바울의 가르침은 수수께끼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령의 은혜로 인해 우리가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보호될 것이라는 '확신'도 드러낸다. 이 상반된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말인가?어떤 사람들은 확실한 약속을 좋아한다.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고는 싫어한다.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경고를 좋아한다. 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확실한 약속은 싫어한다.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또 어떤 사람들은 확실한 약속과 경고, 둘 중 한 가지에 치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존 칼빈과 같이 두 가지 모두에 중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어떤 이들은 바울이 이 주제에 대해 혼란을 주게끔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말을 정중히 무시해도 좋다고 주장한다.경고와 확신의 조화경고는 실제적이다. 만약 성도들이 죄에 빠져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확신도 실제적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경고는 확신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이다. 바울의 확신에 따르면,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죄를 회개하여, 결국에는 구원에 이를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경고에 반응하도록 일하실 것이다.경고를 통하여 확실한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그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는 것이다.이 요점이 내 박사학위 연구의 결론이다. 그 중 결론 부분은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경고와 확신의 관계’(The Warning-Assurance Relationship in 1 Corinthians)라는 제목으로 최근에 출판되었다. 이 연구는 상세한 주석들과 더불어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알미니안주의자들을 함께 다루며 얻어낸 결과이다. 여기서 나는 목사이자 설교자로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그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 목회 사역에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경고와 확신에 대한 관점은 최소한 네 가지 차원에서 목회와 설교에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1.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돕는다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어떤 실수를 저지르든지 간에,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간혹 목회는 실망스럽거나 심지어 환멸감을 느끼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목회자)는 스스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상기하며, 우리가 목양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성만찬 자리에서 술 취하고, 우상 숭배와 성매매를 일삼고, 서로 고소하며, 더 나아가 부활을 부인할 뿐 아니라, 근친상간까지 인정하고 자랑함으로써 환멸감과 좌절감을 주는 사람들을 섬겨 본 적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8-9).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안을 준다.2. 성경의 경고를 비중 있게 설교하도록 돕는다많은 개혁 교회 목사들은 책망하거나 경고하는 말씀을 선포할 때 청중들의 반응을 우려한다.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마치 설교자를 은혜나 구원의 확실성을 불신하는 사람으로 생각할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로마서 8장보다 히브리서 6장을 설교할 때, 그리고 히브리서 6장보다 베드로후서 2장을 설교할 때 그런 염려에 더 빠지게 된다.그러나 바울의 경고가 크리스천의 인내를 보증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우리는 성경의 진리가 완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경고를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하나님의 선택이 있으므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말도 안 되듯이, 하나님이 보호하시므로 성경의 경고는 필요 없다는 생각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나는 이 교훈에 대해 존 파이퍼가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Brothers, We Are Not Professionals)에서 다음과 같이 옮긴 표현을 좋아한다. “형제들이여, 성도들을 구원하십시오.”3. 교회 안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올바로 대하도록 돕는다나는 교회에서 한 여성과 대화한 내용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와 상관없이, 또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은 완벽히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생각에 빠진 채 안주하는 삶을 살고 있었고, 심지어 공격적이기까지 했다.나는 그녀에게 히브리서 10장 26-31절 말씀을 가지고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할 거라고 확실히 말해 주었다. 이처럼 성경적인 경고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회개를 하든지, 아니면 회개를 하지 않든지, 반드시 진지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경고와 확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면, 우리는 후자를 약화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전자를 강조할 수 있게 된다.4.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내하는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돕는다바울이 달음질하며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백했듯이(고전 9:24-27), 우리는 삶 가운데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기업을 보장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하나님의 사역과 인간의 노력은 모든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우리는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사역을 이끌어 갈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설령 시험을 거부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을 때나 혹은 그런 상황에 처한 다른 누군가를 상담할 때, 우리에게 큰 격려를 준다.이런 차원에서 고린도전서와 바울, 그리고 성경에서 엿볼 수 있는 경고와 확신의 관계를 이해하면, 우리는 목회와 설교 사역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이 강조하는 메시지 간의 균형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신학적인 유익도 함께 얻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의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명령이지만 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Relationship between Warnings and Assurance-Don't Fumble It번역: 김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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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성전과 예수님의 빈 무덤
by Chad Ashby
2018-12-04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대제사장, 골고다, 두 강도, 빌라도, 군중, 십자가, 무덤, 그리고 예수님 자신과 같은 익숙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친숙한 기사이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다.마태에 따르면, 그 요소는 바로 성전이다.마태는 마지막 여덟 장에 걸쳐 성전을 16회 언급한다. 마태복음이 정점에 도달할 때, 성전이 중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태의 서술이 십자가에서 성전을 지나 무덤으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는 독자들이 예상하기 어려운 문학 장치가 자리하고 있다.곧 마태는 전문가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무덤을 단순한 바위나 돌 그 이상의 것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 무덤은 바로 한 장의 성전 그림과 같이 묘사된다.성전 허물기예루살렘을 향하는 종려주일 가두행진 후에 예수님은 성전의 뜰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분은 성전이 부정한 것들, 즉 환전상이나 강도들의 행위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예수님은 상을 뒤엎고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고, 눈 먼 자와 저는 자를 고치셨다. 다음 날, 그분은 제사장들 및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셨고, 그들에게 지옥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선언하신 후 그 성전을 떠나셨다.이때 제자들이 성전의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그리고 몇 장의 이야기가 흐른 후,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고자 모의하는 대제사장들이 그분을 고발할 만한 내용을 겨우 한 가지밖에 얻지 못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그 한 가지는 어느 두 사람이 대제사장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내용이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0-61).예수님은 성전을 무너뜨릴 생각이셨다. 이 장소는 자기 의로 가득한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의 오물로 채워진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회칠한 무덤으로 바꿔 놓았으며, 겉은 번쩍번쩍하고 깨끗하지만 속은 악으로 가득 찬 곳으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새로 짓고자 계획하셨다.휘장 찢기마태의 수난 이야기는 놀라운 변화로 끝이 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를 향한 모욕이 가해지자, 예수님은 시편 22편의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치셨다. 그리고 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마 27:50).하지만 클라이맥스는 여기가 아니라 그 마지막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성전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마 27:51-52).이렇듯 수난의 일주일은 예수님이 성전 외부 뜰에서 격노하신 일로 시작된 후, 성전의 파괴에 관한 예언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했던 휘장이 찢어지는 소리로 마무리되었다.성전에서 무덤으로요셉이라는 한 남자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고, 그 시신을 세마포로 감싼 후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마 27:60). 마태는 여기서 무덤을 성전과 병행구조로 연결시키는 문학 장치를 사용한다. 곧 성전 벽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 무덤 벽으로, 불의 천사들로 수 놓인 휘장은 경비가 보초를 서는 큰 돌로 대치된다.이렇게 마태는 그 당시 성전의 이미지를 무덤에 투영한다. 마치 석관 상자인 언약궤가 두꺼운 휘장 뒤에 놓여 인간이 보지 못하게 감춰진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 임마누엘 곧 예수님은 무덤의 입구를 막아 놓은 돌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서 가리워 지셨다. 돌 휘장이 하나님과 죄인의 사귐을 막은 것이다.성전은 곧 죽음의 장소, 피가 흘려져서 항상 죄를 기억하게 하는 무덤과도 같았다. 또한 성전은 무덤처럼 악한 제사장, 거짓 가르침, 오물 같은 부패한 장사꾼의 부정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이 모든 것은 곧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빈 무덤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다시 세우기 위해 돌아오셨다. 돌 성전도 돌 무덤도 하나님의 임재를 영원히 가둬 놓을 수는 없었다.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마 28:2).성전 휘장에 수 놓여 있던 천사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었다. 그러나 이번 천사는 반대로 주님이 계셨던 무덤으로 여자들을 이끌었다.“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휘장처럼 돌이 입구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대제사장들이 작은 방에 하나님을 다시 가두려고 했지만, 예수님과 세상을 분리한 바위벽과 무거운 돌은 더 이상 그분을 가둬 놓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무덤을 떠나셨다. 성전이든 무덤이든 어떤 물리적인 벽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었다.여자들이 두려움과 기쁨으로 무덤에서 떠날 때, 걸어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마 28:9).그렇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와 세상으로 오셨다. 마침내 하나님과 인간은 오래 전 에덴 동산에서 그러했듯이 다시 함께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무덤에서 새 성전으로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돌을 모으라고 제자들을 보내신다. 부활하신 왕은 이제 차갑고 생명이 없는 돌로 된 무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로 지어진 영적인 집, 곧 새 성전을 짓고 계신다. 그리고 깨끗하게 씻음 받고 제자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을 세상 곳곳에서 모으고 계신다.최고의 소식은 이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분의 성전이며, 이 땅에 심겨져서 번성하고 충만하게 될 정원(곧 회복된 에덴동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는 바로 이 살아 있는 성전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Earthly Temple and the Empty Tomb번역: 이주일
신학
신약성경
성전
예수님
빈무덤
휘장
마태복음
부활
마태
제자들
우리의 신앙을 대중과 나누는 방법
by Tim Keller
2018-12-03
대학 시절에 나는 기독교 문학을 읽는 동아리에 참석했다. 거기에는 ‘의심하는 사람을 환영합니다’(Doubters Welcome)라는 제목의 소책자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제목에 놀랐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믿음에 대해 의심하는 크리스천을 보면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점차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의심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믿음의 도약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내와 자비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그 동아리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적이고 의심하는 학생들이 초대되었고, 우리는 항상 크리스천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이후로 나는 항상 그와 같이 크리스천이 아닌 혹은 기독교 신앙에 의심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러진 교회를 만들 수 있기를 소망했다.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첫 모임 장소는 집이었다. 그 후 공공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고, 1989년 9월에 마침내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세상과 접촉하는 일’은 시작부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리디머교회의 중심 가치 중 하나는 비기독교인 혹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그들의 의심과 어려움을 존중하며, 또한 그들의 씨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리디머교회 역시 해가 지남에 따라 그 일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교회가 불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질문을 적극 환영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다. 리디머교회는 세 개의 캠퍼스로 확장되었고, 각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들, 그리고 직원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회중이 더 나은 청취자가 되고 자신있게 스스로의 믿음을 나누는 자들이 되도록 훈련의 기회도 열심히 제공했다.대중에게 나아갈 수 있는 이유종교적인 신념을 드러내지 말 것을 강요하는 세속적인 시대에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 문화에서 인식하는 신앙의 역할은 개인의 정서에 평안을 안겨주는 것이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는 거듭남이 전혀 아니다. 달리 말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적대적인 반응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뉴욕 같은 대도시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친구나 이웃, 혹은 직장동료에게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당혹감을 느낀다. 즉, 도시인들은 대중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기 어려운 문화 속에 살고 있다.그러나 리디머교회의 경우, 초창기부터 기독교 신앙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바로 교회의 성도가 그들의 직장동료나 이웃에게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공개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리디머교회는 대중을 향한 우리의 나아감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고, 이러한 정신을 꾸준히 계승하고자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때로 불편하고 어렵다. 동시에 비기독교인들의 요구 못지않게 기존 성도의 요구도 충족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필요를 한발 양보하는 마음과 훈련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편협하고 자기 방어적이며 결국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이처럼 대중과 신앙을 나눌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엄청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경이로움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둘째, 복음의 본질인 겸손은 우리가 비기독교인에게 나아갈 때, 우월감이 아닌 존경심을 가지고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선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기독교인들에게 우리보다 나은 지혜와 자비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셋째,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거부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복음을 전하는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행위는 바로 비기독교인들과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교회로 나아올 수 있도록 관심을 갖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전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수단적으로 혹은 비인격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을 공유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믿음과 삶을 공유한다. 이런 복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강력하게 나타날수록, 교회는 비기독교인들을 자석과 같이 강력하게 이끌 수 있다(행 2:47).대중에게 다가가는 방법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첫째, 권위적이기보다는 지성적인 접근으로 믿음에 대해 나눠야 한다. 우리는 신앙 없음이 어떤 종류의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하고, 또 사람들이 단순히 진리에 대해 듣기만 하면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다.둘째, 우리는 단번의 행사로 복음을 제시하는 접근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을 제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복음에 노출될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복음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속한 상황 안에서 기독교에 대한 답을 찾아가도록 도울 수 있다.셋째, 우리는 복음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전제주의적’(presuppositional) 접근을 취해야 한다. 여기서 전제라고 함은 모든 사람, 심지어 회의론자들도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롬 1:18-25).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 즉 하나님에 대한 단서를 그들 안에서 찾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어떻게 하면 그들이 창조자에게 돌아갈 수 있는지 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과정’에 있던 한 사람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고백할 때에 따뜻하게 화답하셨다. 우리의 공동체도 이와 같은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가? 어느 곳에서든 해야 한다. 리디머교회는 신앙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위한 안내 매트(Doubters Welcome mat)를 모든 예배와 모임에 비치해두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또 나누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예배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들로 행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이 예배 후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공부와 활동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누구나 서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여러 모임과 행사를 늘 사람들에게 열어 둔다.신앙을 대중에게 드러내도록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일은 곧 세상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앙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과 같다. 다시 말해, 이 훈련은 우리가 대중 지향적인 공동체가 되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수시로 나눌 수 있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동료들의 의구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들이 마침내 복음의 소망에 빠져들도록 해야 한다. 대중을 향해 나아가는 공적 신앙(Public Faith)은 건강한 크리스천의 결정적인 모습이다.리디머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 어려운 대도시에서 사역하기 때문에 오히려 복을 받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도시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자연스럽게 믿지 않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리디머교회는 그 출발부터 교인들이 “만약 내가 믿지 않는 친구들을 우리 교회에 데려온다면, 그들은 기독교가 얼마나 강력하고 합리적인지를 보고 놀랄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소원해 왔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과 행동을 계속해 나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계속해서 변화시킬 것이다.참고공적 신앙(public faith)은 진정성 있는 관계를 전제한 개념으로서 우리 자신만의 사회적 · 영적 안전 지대를 넘어서는 신앙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 공적 신앙은 성령님이 우리의 관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신다고 믿는 태도이다. 비록 많은 크리스천들이 고립적인 혹은 개인적인 신앙인에 머무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더욱 공적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고 바란다.개인 신앙(private faith)을 가진 사람은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지만 개인적으로 그 친구들에게 믿음을 솔직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고립 신앙(secluded faith)을 가진 사람은 크리스천 친구들이 많지만,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은 거의 없다. 따라서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는 믿음을 드러내지만,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는 일이 거의 없고 그들에 의해 도전을 받을 일도 없다. 공적 신앙(public faith)을 가진 사람은 크리스천 친구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또한 겸손하고, 따뜻하며, 대중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모든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여러 친구들로 구성된 다양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ublic Faith-How to Share the Hope You Have in Christ번역: 김형용
복음
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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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머장로교회
대중
크리스천
복음의본질
공적신앙
종교적신념
공동체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일곱 가지 이유
by Dennis Johnson
2018-11-30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내가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재림 시점을 알도록 도와주시기 위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또는 “중동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대환난에 대한 악몽을 일깨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휴거를 놓치지 않게 하시려고”, “크리스천에게 논쟁거리를 제시하시기 위해”, 또는 그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시려고”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은 이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계시를 준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곧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은혜를 주사, 우리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의미심장한 횟수인) 일곱 차례에 걸쳐 복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은 계시록의 메시지를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계 1:3; 22:7),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계 14:13),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에게(계 16:15),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들에게(계 19:9),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계 20:6),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는 자들에게(계 22:14) 주어지는 복이다.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계획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매일의 삶에서 직면하는 영적 싸움에 승리하도록 우리를 무장시키기 위함이다. 내가 쓴 계시록 주석인 ‘어린양의 승리’(Triumph of the Lamb)의 말미에서,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아래 내용은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1. 계시록은 현재 상황의 이면을 제대로 보도록 도와준다흔히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추세나 세계적인 위기 상황에 관한 뉴스에 근거하여 오늘날 진행되는 ‘전쟁’을 평가한다. 그러나 계시록의 환상들이 보여주는 역설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고후 5:7)한다는 진리를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기력한 어린양을 도살하는 사건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유다 사자의 승리였다(계 5:5-10). 신실한 순교자들이 피를 뿌릴 때는 대적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계 11:7; 13:7), 순교자들은 사탄을 물리친 진정한 승리자들이었다. 곧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계 12:11) 아니하였다.2. 계시록은 대적들의 정체를 드러낸다우리의 대적은 생각보다 더 강하고 교활하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 와서 그 뱀을 물리치고 승천하셨다(계 12:5). 그러므로 사탄은 더 이상 참소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그의 참소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계 12:10-11). 십자가 사건으로 패배한 사탄은 지상의 교회에 그 분노를 터트린다(계 12:12-17). 그의 무기는 격렬한 핍박(짐승), 그럴 듯한 기만(거짓 선지자), 그리고 기만적인 쾌락(음녀 바벨론)이다. 따라서 강한 정부나 거짓 종교 또는 사치스런 방종이 ‘구원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지 말라. 이들은 당신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계시록의 상징은 이처럼 사탄이 사용하는 무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3. 계시록은 챔피언인 그리스도를 참된 영광 가운데 계시한다 제목이 말하듯이,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계 1:1). 계시록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우리의 마음과 소망이 그분을 향하도록 이끈다. 예수님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극적 장면의 영웅이시다. 또한 다니엘서 7장에 예언된, 신성한 영광으로 빛나는 인자이시다. 자신의 부활로 사망의 열쇠를 움켜잡고 교회들 가운데 거하신다. 또 죽임을 당함으로써 승리한 분이고, 세계 만민을 구속하신 유다의 사자이시다. 또한 그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천군의 대장으로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성도들을 보호하며, 용과 짐승들을 마침내 멸하신다. 우리의 챔피언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으로 우리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진다(계 22:20).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한다(계 22:20). 4. 계시록은 참된 아름다움 가운데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준다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낸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정확히 지켜 보시며(계 1:14; 2:18), 우리의 신실함을 칭찬하는 동시에 허물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계 2-3장). 이 세상의 교회들이 완전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을지라도, 우리의 신랑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처럼 우리를 준비시키시며,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계 19:8) 입히기까지 쉬지 않으신다(계 21:2). 이처럼 계시록은 다가오는 결혼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까닭에 우리는 장차 온전해질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요일 3:2-3).5. 계시록은 고난 가운데 인내를 요청한다계시록의 원래 독자는 신앙 때문에 고난받는 크리스천들이었다. 그들은 궁핍, 비방, 투옥, 심지어는 죽음을 겪었다(계 2:9-10, 13).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 사탄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역사를 완결하실 때까지 성도에게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전쟁을 피하는 삶이나 고통 없는 인생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다(계 1:18). 이 약속을 믿는 우리는 인내를 요구하는 왕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계 1:9; 2:2-3, 10, 13, 19, 25; 3:8, 10; 13:10; 14:12).6. 계시록은 타협이 오더라도 순수함을 지키라고 요청한다21세기의 여러 교회들처럼, 1세기의 어떤 교회들은 핍박보다 더 교묘한 위협에 직면했다. 사탄이 거짓 교훈을 퍼뜨려 성도들을 현혹시키려 한 것이다(계 2:15, 20). 또한 물질적 위안이 부르는 세속주의나 주변 문화로부터 유입되는 이교주의도 유혹적이었다(계 2:14; 3:17). 이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교활한 공격은 지금 우리에게도 가해지고 있다. 쾌락과 번영을 우상화하는 마귀의 거짓에 대항하여, 계시록은 흰옷 입은 어린양의 신부가 될 자들에게 순전한 마음과 생활을 지키라고 요청한다(계 3:4-5, 17-18; 7:9, 14; 14:4; 19:7-8; 22:14-15). 7. 계시록은 우리가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인내로써 순전함을 지키라고 요청하는 계시록의 당부는 그저 위험한 세상을 피하여 벙커에 숨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증언하라는 계시록의 가르침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martyr는 ‘증언’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티스’(계 2:13)에서 유래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섬에 있었다(계 1:9).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고 자신의 증언을 피로써 보증하는 증인으로 묘사된다(계 11:4-12).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소심하게 침묵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심을 담대히 선언함으로써 고난 당하는 자들이다. 우리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계시록 7장의 환상을 성취하신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가르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기 위함이다. 계시록은 우리의 상황, 대적, 챔피언, 그리고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통찰하게 해 주며, 또한 순전한 소망 중에 인내하며 용기 있게 복음을 증언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even Applications of Revelation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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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재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by Guy Waters
2018-11-29
예수님을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거나 일반적인 가정에 도전을 제기하는 놀라운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그저 인정해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진리에 관해 우리가 자신의 확신을 재점검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들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요하게 만든다.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도 그런 역할을 한다.잔치이 비유는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왕에 관한 이야기, 곧 천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마 22:2). 혼인 잔치는 성경의 보편적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거룩과 기쁨 가운데 자신의 임재를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왕의 명령에 따라 잔치 초대장이 발송된다. 그런데 왕이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한다(마 22:3). 그들은 여러 변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보낸 종들을 함부로 대했기에 왕은 그들을 벌한다(마 22:5-7). 그리고 다시 종들을 파견한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마 22:9).여기서 예수님은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로, 그 다음 이방인에게로 전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신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메시지를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이 거부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공포하시고, 결국 로마의 군대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파괴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대인의 거부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여기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10)라고 말씀하신다.그런데 이 잔치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왕이 손님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고”(마 22:12) 온 자를 발견한다. 이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를 전혀 말할 수 없다. 왕은 그에 대해 종말론적 심판을 거행하며 사환들에게 명령한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예수님은 이 비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한 마디의 경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신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청함을 받은 자바로 이 의미심장한 최종 선언을 이해하는 것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의 뜻은 무엇일까?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여기서 사용된 ‘청하다’와 ‘택하다’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청하다’라는 단어는 이 비유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헬라어 본문에서 종들은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게”(마 22:3)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여기서 청함 받은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을 의미한다(마 22:4, 8). 종들은 이방인들을 ‘청하여’ 오게 하도록 명령을 받는다(마 22:9). 14절에서 “청함을 받은”으로 번역된 단어는 3, 4, 8, 9절에서 ‘청한’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군에 속한다.이 패턴을 알면, 비유에서 언급되는 청함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청함은 종들, 즉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더 나아가 신약시대의 사역자들을 통해 부르시는 일, 바로 하나님의 초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듣는 자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이 명령을 거부하는 일도 발생한다. 예수님은 청함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책임져야 할 과실이 있다고 교훈하신다.택함을 입은 자청함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그들을 “택함을 입은” 자, 즉 헬라어 의미에 따르면 선택된 자라고 부르신다. 이들은 성부가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이다(엡 1:4). 오직 택함을 입은 자들만이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돌아오실 때 구속된 무리에 속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있어야 청함에 진심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청함을 곧 택함이라는 의미로도 표현한다(롬 8:30; 딤후 1:9).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청함을 받았으나 택함은 받지 않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답은 성경 저자들이 ‘청하다’라는 말을 언급하는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있다. 즉,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청하다’를 외적 의미로 언급하신다. 이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청함은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부르는 명령이다.또 성경 저자들은 ‘청하다’를 내적 의미로도 언급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내적 부르심을 언급하는데, 이는 복음의 외적 부르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령이 내면에서 효과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역사를 의미한다. 이 내적 부르심은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게 한다. 외적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만, 선택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때에 내적 부르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에게 복음은 실제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6).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고 동요하게 만드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교훈은 무엇일까?첫째, 하나님이 그의 메신저를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이를 거절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심을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날에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교묘한 방법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외적 부르심에 입술로만 반응하고, 그 부르심으로 제시된 예수님은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거절 역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한다.여기서 나쁜 소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마음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부르심을 거부하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가 외적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신다. 구원은 오직 은혜의 결과이다. 어쩌면 이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 불안을 통해 우리가 진리를 보도록 이끄신다. 즉 오직 은혜로만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Did Jesus Mean by ‘Many Are Called, But Few Are Chosen’?번역: 이주일
신학
신약성경
청함
택함
교훈
잔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1장24절
구약성경은 부활 소망을 가르치는가?
by Mitch Chase
2018-11-28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무찌르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복된 소망을 선포한다는 점이다(고전 15:26). 어쩌면 부활 소망이 온전히 신약성경에만 속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망’의 줄기를 잡아당겨 보면, 그 뿌리가 구약 속에 깊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 백성에게 부활 소망을 허락하셨다.모든 사람이 구약성경에도 부활 소망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모세오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인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를 읽지 않았느냐”(마 22:29, 31). 우리는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하나님을 바라보셨다.육신의 부활미래에 일어날 육신의 부활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다루는 본문은 다니엘 12장 2절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이 본문의 가르침에 동의한다(요 5:29; 행 24:15).부활 소망에 대해 말한 선지자는 다니엘 뿐만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육체적 부활에 대하여 예언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기뻐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이사야 선지자는 ‘죽은 사람들은 티끌에 누워 잠자는 사람들이요, 부활은 그들을 깨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땅이 생명을 낳는다는 표현으로 부활을 묘사한다. 무덤은 자궁이요, 죽은 자는 언젠가 새롭게 된 육신의 생명을 입고 나타날 것임을 드러낸다.미래에 있을 육신의 부활은 말로 선언할 ‘진리’일 뿐 아니라 노래할 ‘소망’이기도 하다. 시편의 저자는 지혜 있는 자와 무지한 자가 모두 죽을 것이지만(시 49:10),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시 49:10)라고 노래한다.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일은 곧 전인을 죽음에서 데려오는 일이다(시 16:10; 행 2:24-29). 나아가 저자에게 시편 71편의 부활은 위로이다. 저자는 과거에 겪은 고난과 미래에 있을 구원을 생각하며 선언한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시 71:20). 하나님은 우리를 땅에서 일으키심으로써 다시 살리실 것이다.이러한 진술들에 담긴 부활 소망은 마치 정원 토양에 심긴 씨앗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실제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고려해 보면, 부활 소망은 낯선 개념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는 육체가 없던 아담과 하와가 주님에게 몸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성경은 하나님이 흙으로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7, 21-22). 그렇게 지어진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반역한 아담이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와와 함께 동산에서 내쫓으셨다(창 3:22).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는 아담이 갖지 못한 영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동산에서 쫓겨남으로 인해 이 나무에 다가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를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로 인도하기 위해 마지막 아담이 오셨다. 그분은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갈 3:13), 3일만에 생명 나무의 열매를 드셨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돌아오실 그 때,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우리 역시 그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다른 종류의 부활들간혹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물리적 상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타락한 세상에 거하는 우리 삶의 면면을 통해 죽음을 묘사한다. 이 면면은 재난, 기근, 질병, 상실, 불임, 유배 등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류의 죽음들에 대해서도 부활을 허락하신다. 먼저 ‘유배’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난 마른 뼈의 환상을 보았다(겔 37:7-10).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땅으로 돌아오는 사건을 상징했다(겔 37:12).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배는 일종의 죽음을 의미했고, 그들의 귀환은 부활을 상징한다.‘불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각각 불임인 아내를 두었다. 자녀가 없던 라헬은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라고 호소했다. 이는 불임이 혈통(가문)의 죽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임의 반대는 무엇인가? 죽음이 생명의 역사로 뒤바뀌는 일이다(롬 4:19). 따라서 하나님께서 족장들의 아내들이 겪은 불임을 해결하실 때마다 죽은 자궁과 혈통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죽기 전에 구원하심으로써 생명부터 죽음까지 다스리는 그분의 능력을 보이셨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기 위해 묶고, 이제 곧 칼날이 그의 몸을 관통하기 직전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순간 이삭을 대신할 정결한 제물을 주심으로써 그의 죽음을 막으셨다(창 22:4-13). 실제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삭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히 11:19).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이 틀을 바탕으로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부활 신앙을 그려낸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홍수에서, 요셉은 구덩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서,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유대인들은 하만의 계략에서, 요나는 거대한 물고기에서 구원을 받았다. 이처럼 재난으로부터 구원받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은 죽음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보여 준다.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구약성경에 부활에 대한 전제와 이해가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약속을 성취하지 않으셨다고 오해하며 눈을 감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족장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창 12:7; 13:15),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히 11:13).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의 말씀을 지키실 것인가? 바로 부활을 통하여 그들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지키실 수 있다. 부활하게 될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을 받을 것이다(롬 4:13). 그러므로 죽음은 하나님을 약속 불이행자로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란 사실을 부활이 증명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든 크리스천은 부활 소망의 불변성을 신뢰하고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내세에 대한 약속들은 절대 흔들리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셨지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소망이 남아 있다. 우리의 내면은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는 반면, 우리의 외면은 날마다 늙고 낡아진다(고후 4:16). 그러나 부활을 맞이하는 그날, 썩을 육신은 마침내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후 4:16). 우리는 예수님이 죽음의 무덤을 탈출하셨으므로, 미래의 우리 역시 죽음이 아닌 영생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es the Old Testament Teach Resurrection Hope?번역: 하늘샘
신학
구약성경
부활
소망
하나님의약속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
예수님
복음서 간의 불일치는 성경의 무오성을 약화시키는가?
by Robert Plummer
2018-11-27
우리는 성경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신 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었을까?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히브리서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저자는 시편 95편을 언급하며, 두 명의 저자를 그 시편에 적용한다. 처음에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히 3:7)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다윗의 글에”(히 4:7)라며 동일한 시편에 대해 두 저자를 언급한다. 이는 성경의 오류일까? 아니다. 히브리서는 이중 저작, 즉 성경의 공동 저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옳다.하나님은 완벽하게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거짓을 전하실 수 없다. 성경이 확언하는 모든 내용은 완전하게 진실이다. 크리스천은 이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를 나란히 펼쳐 놓고 보았을 때, 표면상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도대체 왜 이렇지? 어떤 문제가 생긴 걸까?”복음서들이 불일치하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서로 다른 목격자에 의해 같은 사건이 역사적으로 재진술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증인의 서술은 요약, 부분적 보고, 대안적 표현(paraphrasing), 자료의 연대기적 재배열 등을 거치게 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정확히 이런 식의 증언을 발견할 수 있다.복음서들이 모순을 포함하는가?1세기 인물인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Papias of Hierapolis)는 복음서의 기원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그는 마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상술한다. 파피아스에 의하면, 마가는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후에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기록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상황적 이유로 인해 그는 기록에 있어서 연대기적 순서를 반영하지 않았다. 최초의 독자들은 복음서가 연대기적 순서로 기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역시, 성경을 읽을 때 연대기적 순서의 뒤바뀜이 있다는 특징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그러므로 현대의 독자들이 복음서를 엄격하게 연대기적인 기록으로 간주한다면, 복음서의 기록을 ‘실수’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독자들은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복음서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를 비교해 보자. 같은 시험이 두 복음서에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세상 왕국을 주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각기 다른 순서로 시험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강조점을 달리 하는 것이다. 마태는 산을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한다. 그래서 5-7장에 걸쳐서는 산상설교를 상세히 설명할 뿐 아니라, 마지막 장에서는 산꼭대기에서 예수님이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준다(마 28:16-20). 이런 측면에서 사탄의 마지막 시험도 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다.반면, 누가는 예수님 안에서 새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관점을 강조했기에 성전 모티프에 관심이 깊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성전 시험을 마지막에 배치했다.이렇듯 마태와 누가는 단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복음서도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연대기적 특수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독자들은 과거 성경의 저자들이 연대기적 서술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진리가 반드시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얼마 전, 약국 주차장에 세워 둔 아내의 미니밴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다행히 내가 나의 경차를 가져다 주어 아내와 세 아이들은 집으로 갈 수 있었고, 그 사이 나는 미니밴을 지키며 수리공을 기다렸다. 그 다음날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할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메일을 보내기 위함이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어제 제 아내의 미니밴이 주차장에서 고장났습니다.” 하지만 선약이 있던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 차가 어제 고장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웃에게는 또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다. “아내는 어제 본인의 차가 고장나서 제 경차를 운전했습니다.”수백 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위와 같이 그 묘사가 조금씩 다른 세 가지 경우의 설명을 듣게 된다면, 아마 내가 거짓말을 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에게는 미니밴이 있는가, 아니면 경차가 있는가? 무슨 차가 그녀의 차이며, 도대체 어떤 차가 고장난 것인가?” 구어체에서 ‘차’(car)는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운송수단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혼이라면, 남편의 소유는 아내의 소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내 이름이 그녀의 미니밴 호칭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미니밴은 내 차이지만, 아내가 항상 몰고 다닌다.당신이 고장난 차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상세히 조사한다면, 내가 부분적인 사실만 언급했거나 서로 다른 면을 강조해서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거짓은 아니다.이는 복음서의 상세한 내용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마태복음의 계보와 누가복음의 계보 사이의 차이를 주목해 보라.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은 예수님의 계보에서 서로 다른 이름들을 담고 있다. 특히, 요셉으로부터 시작해 그를 이어가는 세대들에서 그렇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 차이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다.300년대 전반에 글을 쓴 유명한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설명하며,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의 견해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율리우스는 16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예수님의 이복 형제자매의 육체적 후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초기 사람들의 증언을 인용했다. 아프리카누스에 따르면, 계보상 불일치는 ‘계대 혼인’(곧 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형제를 대신해서 미망인과 결혼하는 제도)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은 과부가 된 여성을 위해 이 제도를 마련했다. 만약 남편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과부와 결혼할 수 있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갔다. 이 제도는 법적인 계보와 생물학적인 계보를 둘다 만들어 냈다. 따라서, 율리우스는 법적 계보를 따르느냐,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르느냐에 따라 계보상에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더 자세히 보기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들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계보의 복잡성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반영한다. 따라서 면밀한 연구에서 표면상의 불일치가 관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초기 크리스천들은 불일치처럼 보이는 부분들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의 신뢰성과 권위를 기준으로 삼아 그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들을 제시했다.만약 당신이 성경에 회의적인 독자라면, 스스로 갖게 되는 질문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염려되는 부분을 놓고 기도하라.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연구하라. 그 본문의 출처에 대해 질문하라. 이렇게 솔직한 질문을 한 후 답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구하는 데 두려워하지 마라.기억하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사랑이 가득한 하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당신을 속이거나,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이미 역사 속에서 완전한 삶을 사셨다. 더불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죽게 하시고 또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계시에 관한 확실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을 우리에게 주셨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 Inconsistencies in the Gospels Undermine Scripture’s Inerrancy번역: 이주일
복음
변증
복음서
성경의무오성
진리
정확성
시편95
다윗
베드로
우리 신앙은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by Kathy Keller
2018-11-26
‘도븨라이, 노 프로븨라이’(Doveryai, no proveryai)라는 러시아 명언이 있다. 이 명언은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 더 유명해졌다. 그 뜻은 ‘신뢰하되 검증하라’이다. 이는 주로 다양한 국제 협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신뢰하지만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신뢰는 정말 좋으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이 명언이 크리스천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신앙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 위한 도약’(leap of faith)이라고 정의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말처럼 ‘신앙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것’(Faith is believing in what you know ain’t true)이라고 정의한다. 둘다 그럴듯한 표현이다. 나는 이 글에서 신앙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가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크리스천의 신앙에는 신화나 사실이 아닌 것, 혹은 거짓이 포함될 여지가 없다. 인생이 거칠고 비참할 때, 하나님의 진리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최근에 나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역사적이면서도 검증 가능한 사실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신앙이 존재한다. 그중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실존 및 그가 했던 말과 행동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가 죽지 않고(즉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증거도 없었다면(곧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부활해서 걷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먹고, 제자들과 교제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 19).‘불쌍한 자’인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각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위안과 평화를 주는 행운의 토끼발(lucky rabbit’s foot)과 같은 부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죠. 당신에게 예수님이 그런 훌륭한 부적이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게 믿음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때 회의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신앙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과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다른 모든 종류의 신앙, 심지어는 과학, 교육, 정치 권력 등에 뿌리를 두는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기초이자 존재의 의미는 좋은 교훈(the good advice)에 국한된다.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삶을 위해 중요한 규칙들을 잘 지키고 선한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분명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런 삶은 인류 문명에도 괄목할 만한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로 인해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훌륭한 모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혹 지금 당장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는 당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상에 산다든가(이슬람), 환생의 삶을 경험한다든가(힌두교), 무존재(non-existence)의 평화를 누린다든가(불교), 아니면 ‘뉴욕타임스’에 당신의 부고가 게재되는 보상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르다. 이 신앙은 성경의 윤리적 교훈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도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자신의 신앙, 회복을 향한 소망,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를 어떤 한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실제 역사 가운데 살고, 죽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만들어진 이야기(a fairy tale)나 쫓으면서 평생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바보처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처럼 말이다.베토벤과 목격자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목격자들을 열거한다. 바울은 엄격한 로마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었다. 철학과 성경에 정통한 자였다. 그러나 믿음을 증명하는 일에는 자신의 교육 배경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부활을 실제로 보았던 그 목격자들로부터 믿음의 확신을 이끌어 내었다.나 역시 이런 믿음의 증거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 부분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익숙한 본문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배울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생각은 틀렸다. 잠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나는 일탈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나는 낡은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며 생각하는 일을 즐긴다. 그것도 대부분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Egmont Overture)을 들으면서 말이다(다행히도 나의 오래된 러닝머신에는 이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TV가 달려있지 않다). 이 서곡은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 중에 하나다. 나는 그 음악의 마지막 부분, 승리 파트를 들으며 상상한다. 말하자면, 그 마지막 부분을 예수님의 부활을 재현하는 훌륭한 사운드 트랙으로 여기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때 내가 상상하는 내용은 대략 이런 식이다. 천사들이 돌을 굴리고 예수님은 부활한 몸을 입고 기뻐하며 걸어 나오신다. 그리고 자신이 인류의 구원자이며 죽음에서 부활한 첫 열매가 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다. 이런 상상을 하며 음악이 끝나는 부분에서는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합창단원에게 부활의 승리를 표현하는 나팔을 불도록 사인을 준다.그런데 나는 그때 마태복음의 부활 기사를 읽으며 내 상상과는 다른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부활 이야기에 따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돌을 굴려낸다(그 돌은 몇 톤이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 테투리에서 입구 쪽으로 갈수록 경사는 더 높았다. 아마도 돌이 굴려져서 입구가 막히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는 돌을 다시 밖으로 굴려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그때(즉 천사가 돌을 굴려 냈을 때)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하러 온 여인들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마 28:6), “먼저 갈릴리로”(마28:7) 가셨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세상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엘비스는 이미 쇼를 끝내고 공연장을 떠난 것이다(천사가 돌을 굴려 내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을 떠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천사가 돌을 움직이도록 기다리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은 인간이셨지만, 자신을 싼 수의를 통과해서 돌로 봉해진 무덤 밖으로 나가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요 20:19). 다시 말해, 예수님이 무덤을 나가실 때, 천사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천사는 ‘왜’ 돌을 굴렸을까? 만약 천사가 돌을 굴리지 않고 무덤을 막고 있는 돌 위에 그대로 앉은 채,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메시지를 들은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믿었을까? 아마 믿었을 수도 있고,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천사는 여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매우 설득력 있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설득력 있는 천사의 말을 직접 듣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돌이 굴려져 무덤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빈 무덤이 거기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증명될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빈 무덤을 보지 않은 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헛것을 보았다고 취급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여전히 무덤 안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천사가 돌을 굴려야 했던 진짜 이유이다. 천사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가시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천사의 행동은 우리를 무덤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이 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하되 검증하라.’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과 그 안에 놓여 있던 수의를 직접 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 신앙은 천사가 무덤을 열어 줌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빈 무덤을 살펴보고, 예수님이 더 이상 그 자리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검증된다.그러므로 늘 질문하고 의구심을 표출하길 바란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가지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역사는 성경을 뒷받침한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그 부활은 모든 것을 바꾼 역사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ur Faith Is Historically Verifiable—Or It’s Nothing번역: 김재덕
복음
부활
검증
진리
천사
무덤
역사
성경
회심과 이스라엘 이야기
by Thomas Schreiner
2018-11-23
성경의 내용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누구나 인지하는 바이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또한 성경은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완성이라는 흐름의 특징을 갖는다. 이 이야기는 창조로부터 새 창조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회심은 어느 부분에 들어갈까? 그것은 구속 부분에 속한다. 분명, 회심이 성경 이야기의 핵심 주제인 건 아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대목은 회심이 지향하는 ‘목적’ 부분에서 나타난다. 이 목적은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장차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며 그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계 22:4). 동시에, 회심은 성경 이야기의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심하지 않고는 새 창조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마주하게 되는 매우 분명한 결론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흑암의 지배로부터 건져 내신 하나님을 천국에서 영원히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사역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올리는 찬양의 주제가 될 것이다.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 줄거리의 방대한 부분을 차지하므로, 왜 회심이 그 이야기의 기본이 되는지를 여기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회심과 이스라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실상 아담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대신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지어졌다(창 1:26-28).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그분의 대리 통치자여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신뢰하며 순종함으로써 그의 통치권 아래에서 만물을 다스려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했으며, 창조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고 피조물인 자신들을 숭배했다. 그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죽게 되었다(창 2:17). 그들은 죄를 짓는 순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회개하지 않는 한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운명이었다.죄를 범한 이후, 아담과 하와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은 회심이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상태일 때,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거나 그분의 축복을 세상에 확산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과 뱀의 후손을 이기리라고 약속하셨다(창 3:15). 초기 인류 역사는 인간들의 철저한 죄악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아들과 딸로서(롬 5:12-19), 그리고 뱀의 후손으로서(마 13:37-38; 요 8:44; 요일 5:19) 세상에 들어온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만이 사탄의 지배로부터 구원받는다. 예컨대, 가인은 의로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창 4:1-16).악의 힘이 얼마나 강했을까? 노아 당시의 세상에는 여덟 명의 의인들만 남았다! 인류는 철저히 악했고, 창세기 6장 5절은 죄가 만연한 상태를 증언한다. 뱀의 후손이 땅을 지배했지만, 하나님이 홍수로 죄인들을 멸함으로써 당신의 거룩하심과 통치권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창 8:21). 바벨탑 사건은 새 창조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창 11:1-9). 세상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았다. 즉, 새 창조는 새 마음 없이는 도래할 수 없었다.바벨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고 심판 받은 후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다(창 12:1-3). 악한 세상에서 다시 한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 사람은 복을 약속 받았다. 다시 말해, 가나안을 새로운 에덴으로 만드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아브라함은 아담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후손이 될 것이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 결과적으로 온 세상으로 확산될 계획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대로, 그는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약속들은 거의 2천 년이 지나도록 성취되지 않았다. 창세기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되었던 그들의 후손에 초점을 맞춘다. 이 족장들은 가나안 땅을 물려받지 못했으며, 온 세상에 확산되는 축복을 보지도 못했다.출애굽기로부터 신명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애굽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된 사실을 회고한다(출 1:15). 이제 하나님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스라엘의 후손을 향한 약속을 성취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일종의 새 에덴인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실행될 계획이었고, 만민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백성의 의와 평안과 형통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굽을 떠났던 세대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14:20-38). 그들은 애굽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과 하나님의 모든 표적 및 기사들을 본 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길 거부했다. 애굽으로부터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 중의 대부분은 완고하고 반역적이었며,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고전 10:1-12; 히 3:7-4:11). 그들에게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할례, 즉 회심이 필요했다(신 30:6).광야 세대 이후에 일어난 후손들은 예전 세대가 실패한 일에 성공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순종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수 21:45; 23:14).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새 에덴에서 살며 여호와의 통치 아래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을 보여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과 속 벌레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의 순종이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사사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만민에게 복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이방 민족들을 모방하고 이교적인 삶의 방식에 빠져들었다. 이스라엘이 회개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악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했나?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 이후로 거의 1000년이 지났다. 엄청 늘어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살았지만, 전 세계적인 축복에 대한 약속은 실현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처럼 왕을 원했고, 그들이 세울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삼상 8:5). 사울이 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아브라함처럼 또 한 명의 새 아담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울은 아담이 그러했듯이 여호와께 반역함으로써 왕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삼상 13:13; 15:22-23).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는 사울의 통치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후 다윗을 왕으로 임명하셨고, 그는 사울과는 달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나라를 다스렸다(삼상 13:14). 하지만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 살해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의 축복을 온 세계에 임하게 할 대행자가 아님을 드러냈다(삼하 11장).솔로몬이 즉위했을 때에는 새 창조의 낙원이 곧 눈앞에 닥친 것처럼 보였다(왕상 2:13-46). 그는 평화 중심의 통치를 했으며, 여호와를 위해 장엄한 성전을 지었다(왕하 3-10). 솔로몬이 이처럼 처음에는 지혜롭게,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여호와를 멀리하고 우상숭배를 행하였다(왕상 11장). 그 결과,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고(왕상 12장), 오랫동안 죄악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그리고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갔다(왕하 17:6-23; 24:10-25:26). 아브라함의 소명 이후로 약 1500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과 후손 및 축복에 대한 약속들은 성취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가나안 땅이 아닌 유배지에 머물렀고, 그들은 온 세계를 복 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세상 나라들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다.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을까? 무엇이 문제였는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거듭 가르친다(사 42:24-25; 50:1; 58:1; 59:2, 12; 64:5).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서에서 새 출애굽과 새 창조를 약속하신다. 하지만 새 출애굽과 새 창조는 오직 죄 사함의 역사 안에서만 이루어 질 계획이었고(사 43:25; 44:22), 또한 이 용서는 여호와의 종의 죽음을 통해 현실화될 예정이었다(사 52:13-53:12). 예레미야도 같은 진리를 가르쳤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할례 받은 마음이었다(렘 4:4; 9:25). 달리 말해서, 그들에게는 거듭남과 회심이 필요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새 언약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1-34).이와 동일하게, 에스겔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시며,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그 날을 내다보았다(겔 36:25-27). 그들의 변화된 마음은 성령의 사역에 따른 결과일 것이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길을 걷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주전 536년에 포로로 살던 땅으로부터 돌아왔지만, 선지서들에 나오는 위대한 약속들이 완벽하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말라기 시대에도 고투를 벌였고, 약속된 성령의 사역이 아직 전개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고, 새 창조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회심 없이는 이스라엘이나 세상을 향한 축복도 없다지금까지 살펴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죄 사함과 할례 받은 마음 없이는 새 창조와 새 출애굽도 누릴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이스라엘의 죄와 반역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의 뜻을 거듭 불순종하고 거역한 일들로 점철된다. 이스라엘에게는 죄 사함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이사야는 고난 받을 종을 예언함으로써 그러한 죄 사함이 실현될 것임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 즉 회심이 필요했다.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회심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 곧 성경 이야기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세상에 약속된 복은 그들의 회심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Conversion and the Story of Israel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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