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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7일간의 도전_6일] 용감하게 행동하라
by 최성은
2023-04-08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태복음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성경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지낸 두 사람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고, 또 하나는 니고데모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고, 세리 마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아리마대 요셉을 보기 이전에 먼저 그의 친구인 니고데모를 살펴보자.니고데모의 이름은 요한복음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유대 종교 지도자 그룹 중 가장 세력이 강한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평신도 그룹으로 당시 부유한 귀족 상인들과 경제를 이끄는 사람들 가운데서 유대교의 전통을 철저히 지키는 보수파 엘리트 그룹이었다. 그 일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리고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한다. 평생을 유대 종교 지도자로 살았으나 니고데모는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도 답답하고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법을 가장 쉬운 말로 풀어 니고데모에게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바로 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나눈 이 흥미진진한 대화는 요한복음 3장에서 결말 없이 끝나버린다. 요한은 니고데모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응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스토리가 이렇게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니고데모의 반응이 없이 끝났을까? 왜 요한은 더 설명을 안 할까?그런데 디고데모가 요한복음 7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두고 “그가 참 선지자다. 아니다”를 두고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도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 7장 서두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 주로 계셨다. 유대로 가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예수님에게 더욱 불리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앞에 예수님을 변호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요 7:50). 그렇다. 바로 니고데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니고데모의 응답을 여기서 보여준다. 이제 니고데모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겁도 없이 예수님을 변호한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요 7:51, 새번역) 이 말이다: 어떻게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느냐? 그의 행한 열매들을 확실히 알고 하는 이야기냐? 우리가 믿는 율법이란 것이 겨우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그런 유치한 것이냐? 그러자 동료 바리새인들이 니고데모에게 말한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성경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요 7:52, 새번역).요한은 니고데모가 앞서 예수님과 나누었던 대화의 결론을 그의 단순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 니고데모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삶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본질적인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대부분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자신이 종교 국회의원이고 바리새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사회적 흐름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말을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아직 다 드러내놓고 하지는 못하지만, 니고데모는 서서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고 있다. 조금씩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예언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배경으로 예수님을 사모하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도 니고데모처럼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했지만, 늘 옆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흠모했던 사람이다.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십자가 사건)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아리마대 요셉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부자였다(마 27:57). 마가는 그를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막 15:43)라고 기록한다. 누가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눅 23:50-51)이라고 기록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태는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하고 “내가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드러내놓고 다니지도 않았다. 니고데모와 비슷한 데가 많다. 신중하고 천천히 변화되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것은 두려움이었다. 동료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드러내놓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했다. 저명한 신학자 윌리암 거날(William Gurnal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많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적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두려움이 전자의 두려움을 치유한다. 사람이 당신을 겁나게 할 때는 하나님의 진노를 향해 당신의 생각을 돌려라.”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맞서 싸우거나 유대인들 앞에서 정면으로 맞서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의 죽음 앞에 드디어 용기를 내었다. 성경은 “이 일 후에”라고 기록하여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변화되었음을 알려준다. 요셉은 당돌하게 빌라도를 찾아갔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서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생각한다면, 요셉의 이 행동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더군다나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서 장사지낸 동굴 무덤은 바로 요셉의 소유였다. 나중에 유대인들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놓은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아리마대 요셉의 친구가 한 사람 더 등장한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앞에서 말한 그 니고데모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친구가 된 것 같다.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의기투합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지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요 19:40, 새번역). 몰약은 시신이 급격하게 썩는 것을 방지하고, 침향은 시신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방지했다. 몰약과 침향의 값어치는 금을 넘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값진 것이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가져온 것도 바로 이 몰약이었다성경은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침향의 무게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는데, 예전 성경은 “백근”으로 기록하고, 개역개정은 예수님 당시의 로마 측량 단위로 백 리트라라고 기록한다. 1 리트라는 무게가 326그램이므로 100리트라는 33킬로그램 정도인데,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용한 나드 한 근의 100배 분량이다. 나드 한 근은 노동자 1년치 삯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지금의 값어치로 다 환산하는 것은 무리지만, 노동자 한 사람의 일 년 치 임금을 3천만 원으로 쳐서 계산해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 지내기 위해서 가져온 향수와 몰약의 양은 무려 30억 원의 값어치로서 한 나라의 왕을 장례 치르고도 남을 양이다. 노동자 100명의 1년 월급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니고데모의 전 재산일 수 있다. 니고데모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몰약과 침향을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와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은 이제 더 이상 은밀한 제자가 아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용기를 내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청하고, 나아가 자신의 땅과 무덤을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전 재산일 수도 있는 몰약 100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다.이 두 사람은 의심 많고 은밀한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용기를 내어 아무도 찾지 않고 돌아보지 않는 예수님의 찢긴 시신을 품에 안은 채 장사를 지내고 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다 도망간 마당에 은밀하게 자신이 제자인 것을 숨겨온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어 주님께 헌신하고 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가장 외로운 바로 그 시간, 늘 은밀하게 예수님을 사모하던 이 두 제자는 드디어 주님 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환호할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버려졌을 때 용기를 내었다. 니고데모와 요셉은 향유와 몰약을 예수님 시신에 바르고 세마포로 싸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시 면류관 쓰셨던 예수님의 머리, 태장과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기고 부서진 몸, 옆구리에 난 창 자국, 구멍이 난 손과 발에 못 자국을 보면서…. 이렇게 가까이서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이 둘뿐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며 예수님께서 전에 그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눈물로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니고데모를, 아리마대 요셉을 십자가에 돌아가실 만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내어 주셨으니, 이스라엘의 율법사야, 선생아! 그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려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단다.”예수님과 마음 터 넣고 선생님과 제자로 그렇게 시간을 보낸 적은 없지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 지낸 용감한 사람으로, 또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긴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헌신이 진정한 섬김이 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그리고 그다음으로 우리는 그 무덤 가까이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두 여인을 발견한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다. 예수님의 시신을 데리고 가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몰래 따라온 것이다. 두 여인은 이 두 남자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있다. 어쨌든 이 여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열심히 쫓아다니더니, 결국 이틀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또 한 부류의 “용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대제자장들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잔인하게 십자가에서 죽이고도, 그들은 아직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빌라도를 찾아갔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마 27:63-64, 새번역).그리고 빌라도도 이것을 합당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잘 훈련된 로마의 병사들을 빌려주었다. 악인들은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다시 하나가 된다. 그들은 로마의 군인들과 함께 동굴 무덤에 큰 돌을 굴려서 막아 놓았다.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고이 장례 치르기 위해 그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빌라도를 찾아갔다. 그런데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시신을 지키려고 빌라도를 찾아갔다. 둘 다 생각한 대로 행동했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용감하다”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생각은 하는데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두 부류는 생각하고 믿는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이 달랐다. 한 부류는 악한 일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겼고, 또 한 부류는 선한 일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겼다. 앞의 악한 부류의 사람들도 ‘이 예수가 진짜 메시아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순간순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얼마나 “용감한” 행동인가? 인류 역사는 늘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용감하게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에 이끌려 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용감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용감하게 행동하느냐이다.정말 인생은 길지 않다. 쓸데없는 일에 용기를 내지 말자. 영원하신 예수님을 위한 행동에 용기를 내자. 영원 속에서 칭찬받을 행동에 용기를 내자!
아리마대요셉
니고데모
요한복음3:16
용기
[거룩한 7일간의 도전_5일] 진리를 붙들라
by 최성은
2023-04-07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태복음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마태가 기록한 제 육시는 지금의 정오, 낮 열두 시를 가리키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 삼시 즉 지금의 아침 아홉 시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침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세 시간가량 온갖 조롱과 수난을 당하시면서 고난을 견디어 내신 것이다.정오가 되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정오에 해가 나야 할 텐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표현은 요엘 2장 말씀처럼 마지막 ‘주의 날’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종말을 생각나게 한다.그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로서 시험들 수 있는 외침이다. 시편에서 다윗이나 아삽이 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나? 정말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실 수 있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의 고통에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개입이 보이지 않는다. 침묵하신다. 죄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을 다시 찾으시고자, 하나님은 그들 대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 가운데, 가장 극한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신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셨어도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외롭게 죽음을 맞으셨다. 십자가에 당하는 육신의 고통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이 겪으신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인 분리일 것이다. 또 한 가지 동시에 주님의 절규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외치신 예수님의 이 절규는 사실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 빛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사후의 삶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모른 채 아무런 소망도 없이 죽음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인생, 모든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주님께서 외쳐 주신 것이다. 그런 나를 위해서, 주님은 하늘 아버지 앞에서 절규하신 것이다.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왜 나를 이런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십니까? 예수님의 절규는 곧 고난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야만 했다. 그냥 하나님의 자리에서 ‘구원이 있어라’ ‘용서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꼭 이 땅에 내려오셔야만 하나?’ 그러나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그런 반쪽짜리 신이 아니다. 당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볼모처럼 내려보내신 하나님이시다.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33년을 인간들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죄인들의 친구”로 사시다가 가장 비참하게 모든 인간의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고통 가운데서 돌아가신 분이시다.예수님은 나의 슬픔을 아시는 분, 나의 질고를 아시는 분, 나의 허물을 아시는 분, 나의 수치를 아시는 분, 나의 상처를 아시는 분, 나의 고난의 깊이를 아시는 분, 나의 울부짖음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가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구주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절규는 나의 죄의 형벌의 무게를 견디시면서 동시에 나의 아픔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대신 외쳐 주시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의 외침이다.이런 절규를 듣고 있던 어떤 사람이 이 주님의 이 모습을 불쌍히 여겨 스펀지에 포도주를 적셔서, 극심한 갈증과 탈수 현상에 계신 주님께 마시게 했다(48). 그 와중에도 “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예수가 또 무슨 기적을 베풀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엘리 엘리”라는 주님의 외침을 주님이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들은 (이 말은 사실은 당시에 사람들이 생활용어로 쓰던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래 어디 놔두어 보자. 엘리야가 와서 저 예수를 구원하는지 한번 지켜보자”(49).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때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준다는 미신이 있었다. 정말 인간이 이렇게 잔인하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가 무엇인가 마지막 기적을 일으키는지 구경하려 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즐거움을 사랑하는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더 큰 표적과 기적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안 보여주시겠다고, 기적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기적을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기적은 반드시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하다. 그렇게 수많은 기적과 말씀을 통해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적 속에 담겨 있는 참된 구원의 진리를 붙들기를 거부하고, 또 다른 재미를 찾는, 또 다른 기적만을 원하는, 기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사랑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은혜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외면하는 그 세대를 향해서 주님께서 채찍질하시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다가와서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은 단 한 번도 기적을 베푸신 적이 없으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는 인간들은, 그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푸셨지만, 죄의 즐거움을 탐닉하는, 기적을 재미 삼아 부르는, 나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그러한 인간들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으시는 주님을 본다.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 내쉬며 크게 소리 지르시고 그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셨다(50).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잇는 커다란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갈라졌다(51). 성소의 휘장이 갈라진 것은, 이제 죄인된 나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예수님께서 다 없애 주셨다는 의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그렇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몸이 쪼개지신 것이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완전히 완성된 것이다. 광야에서 맺은 피의 언약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이루신 것이다. 율법을 폐했다는 것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율법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필요가 없어서 폐기했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이루어서 폐기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구약에 있는 율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한점 흠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 없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셔서 그 거룩한 보혈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성전이시고, 그분을 우리 가운데 모시는 우리의 삶도 주님의 성전이 되어 간다.그리고 이제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위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죽었던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났다(52-53).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이 마지막 기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보다 주안에서 먼저 자는 자들이 먼저 이런 부활을 경험하며 육과 영이 다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데살로니가서는 우리에게 격려한다. 지금까지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 대낮이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성전의 휘장이 갈라진다. 땅이 진동한다. 그리고 자는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난다. 엘리야가 와서 어디 구해주나 보자! 재미 삼아 구경하던 자들, 그토록 예수님을 심하게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예수님을 경멸하는 사람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 보라! 예수님을 비웃던 유대교 지도자들, 그들 모두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예수님 말씀처럼 이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는 여전히 이 진리를 붙들지 않는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매수하여 빈 무덤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진리가 선포되고 진리이신 그분이 앞에 서 있는 데도,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천지가 진동하는 데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데도, 예수님을 조롱하던 그들은 진리를 붙들려고 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교만하고 강퍅하면 이토록 진리가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보지 않는다.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런 놀라운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놀랍게도, 이 모든 십자가형을 진두지휘하던 로마의 백부장과 그 십자가형의 집행을 도왔던 군인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고백한다(54).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아보아야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누구신지조차 모르는 이방인들은 진리를 알아본 것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시는 말씀들을 듣고서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백부장은 수년간 십자가형을 집행해 왔을 것이다. 수많은 죄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빌라도처럼 그는 예수라는 자에게서 어딘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본 것이다. 어쩌면 특별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를 끔찍하게 형벌하고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자, 그것도 십자가상에서 그 모진 고통을 당하며 용서할 수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이 사람이 숨을 거두자마자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죽었던 자들이 깨어난 것이다.하나님의 판단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진리를 붙드는 방법은 같다.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간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닫게 된다.그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나타난 현상을 보고 두려워했다. 첫째 날 두려움에서 벗어나자고 했는데, 그 두려움은 사탄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기적과 권능을 보고 심히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진리를 붙드는 유익한 두려움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이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을 배반치 않고 끝까지 사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로 당시 가정 사회적 약자이고, 가장 힘없는 여인들이었다.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5-56).무시무시한 십자가 사건, 조롱과 핍박의 연속 가운데, 오랜만에 가슴 따뜻해지는 장면이다. 예수를 섬기던 여인들이라 했다. 갈릴리부터 따라왔다고 했다. 많은 여자라 했다. 어느 교회를 보아도 여자 성도들이 많다. 아마도 에덴동산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깨어있는 여인들의 노력인듯 싶다.도대체 이 시간에 예수님이 훈련하시고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들은 어디 있을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맡기신 것을 보면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는 누구도 다른 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한데, 오히려 형을 집행하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다. 전쟁이 빈번했던 시대에 아무런 힘도 없는 여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했다. 오히려 여자들이 예수님께 의리를 지켰다. 그 여인 중에 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로 전해진다.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었는데 예수님이 치료해 주셨던 그 여인이다. 한 귀신도 아닌 일곱이나 되는 귀신이 괴롭혔으니, 얼마나 처참했겠는가? 그런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녀를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며 주님의 임종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연약한 여인들은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군중에 끼어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고, 힘겨루기를 할 수도 없었고, 베드로처럼 칼을 빼 들 수도 없었고, 정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고 있다.진리이신 예수님을 붙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힘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대인관계도 아니다. 답은 너무도 단순하다.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이다.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 적을수록, 주님을 사랑할 가능성은 더 크다.진리이신 하나님을 붙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라.아무것도 없어도 그런 용기만 있으면 진리를 붙들 수 있다. 기다리지 말자. 오늘 붙들자.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고난
부활
[거룩한 7일간의 도전_4일]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
2023-04-06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태복음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내가 삶을 마감하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 결국 이 세상에 속했던 것들은 단 하나도 내가 가져갈 수 없다는 신념이다. 남미의 와오라니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순교한 짐 엘리엇은 그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것들을 위하여, 결국은 붙들 수 없는 그것들을 포기하는 자, 그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우리가 결국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또 붙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붙들 수가 없는 것들, 이 둘을 분별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사는 사람일 것이다. 짐 엘리엇이 20대에 깨달은 진리이다.마태복음 27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주변에 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았는지, 그들의 대화와 반응을 살펴보자. 고민하던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다. 총독 관저 안에 200명이 넘는 군대가 소집되었다. 잘 훈련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먼저 채찍질을 가한다. 그 끄트머리에 납이나 동물의 뼈가 붙어 있는, 그래서 맞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는 그런 채찍이었다.사도 바울도 핍박당할 때 이런 채찍에 맞았다. 유대인의 태장은 40에 하나 적은 39대를 맞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법에는 그런 자비가 없다. 죄인이 지칠 때까지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런 채찍을 맞으신 예수님은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탈진한 상태셨다.빌라도의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로마 장교들이 입는 홍포를 입힌다. 날카로운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다. 그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시뻘건 피가 얼굴로 흘러내린다. 주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희롱하고 조롱한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철저히 조롱하고 재미를 보고 있다. 고문 기술자들은 양심이 마비되면서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사탄이 아니면 누가 사람의 마음에 그런 마음을 주겠는가?예수님의 무기력한 모습에 로마 군인들은 재미를 더해간다. 가학의 기쁨을 느낀다. 예루살렘에 주둔한 로마 군인들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한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 사람, 다니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특별히 유대의 권세 잡은 자들과 힘겨루기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던 나사렛 예수란 자에게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놀리면서, 혹시나 어떤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믿음 아닌 믿음을 내심 갖고서 그를 더 조롱한다. 그러면서 뭔가 일어나길 바란다. 그런데 소문과 전혀 다르다. 유대 독립운동가의 패기 같은 것도 없고, 자기변호도 없고, 발악도 없고, 계속 당하면서도 도무지 아무 말도 없다. 재미가 없다. 그럴수록 더 조롱하고, 더 괴롭히고, 더 핍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수난이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52:14-53:6).다시, 무릎을 꿇고 있던 군인들은 이제 일어나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를 다시 손에서 빼앗아 그걸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조롱한다. 홍포를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예수님은 자신이 못 박혀야 할 십자가를 지고 비탄의 길, 슬픔의 길, 비아돌로로사를 걸어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야 했다.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대략 1.5킬로미터 거리이다. 당시 십자가형을 당할 죄수들은 모두 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갔다. 그러나 너무도 심한 채찍과 구타로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고 탈진하신 주님은 대략 45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나무 십자가를 지기에 버거우셨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리신 주님의 어깨에 지탱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무게였다. 그때 눈에 띈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북아프리카 출신인 시몬은 유월절 성지순례를 왔거나, 아니면 원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라고 기록하고 있(막 15:21). 루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로마의 동역자일 것이다(롬 16:13). 지금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있지만, 지금 자신이 진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지 모르지만, 그 “재수 없는 날”은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축복의 날이 되었고, 그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로마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이 될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은 골고다, 해골의 못이라는 곳에 도착하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갈보리’도 ‘골고다’에서 파생한 말로, 같은 “해골”이란 뜻이다.) 마태는 지치신 예수님에게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기록한다. 마가는 여기에 몰약이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마취 효과가 있어 고통을 줄여주는 포도주였다. 그런데 주님은 조금 맛보시고 거절하신다.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니라.” 이 대목을 묵상할 때마다 뭔지 모른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주님의 육신 또한 인간의 육신 그대로셨다. 그 육신의 고통을 온전히 다 겪으시면서 인내하시느라 몸부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선하다.이제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두 손목과 두 발목에 대못을 박는다. 우리가 보는 유명한 그림들과 달리, 십자가는 우아하지 않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찌른 피가, 등짝에는 채찍에 맞은 피가, 팔과 다리에는 대못에 박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피가 흥건했다. 따귀와 주먹으로 맞은 얼굴은 일그러지고 부어 있었다.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긴 채 예수님은 겨우 세 개의 대못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다.누가 보아도 이 모습은 우리가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 섞인 죄패가 보여주듯이, 로마에 대항했다가 실패한 반역자일 뿐이다. 지나가는 유대인들이 이 장면을 구경하다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에게 욕을 해 댄다. 아마도 이런 욕이었을 것이다. “꼴 좋다. 그렇게 까불고 다니면서 기적을 행하더니, 결국 다 사기였지. 자기도 구원 못하면서 무슨 헤롯 성전을 사흘 만에 헐어버리고 다시 짓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디 지금 당장 자기부터 구원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라!”(39-40절).양옆에 달린 사형수들도 예수님을 욕하고 있다. 물론 그중에 하나는 마지막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 기록에 남을 만한 위대한 일을 하고서도, 이렇게까지 모든 사람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이가 또 있을까?이제 마지막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이 장면을 놓칠 수 없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그동안 저 예수 때문에 얼마나 당했던가?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대못보다 더 날카로운 혀로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한다.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2-43). 그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도, 그가 선포하신 말씀도 다 들어서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권세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피며 그를 따라다녔던 무리가 이들이다. 종교가 세속화되면 철저하게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유대 지도자들은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면 믿겠다고 한다. 수없이 많은 기적과 하늘의 말씀의 권세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보여달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도 더 큰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졸라댔다. 그때도 예수님은 거절하셨다. 성경은 분명히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능력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세속주의의 특징은 늘 보여달라고 한다는 데 있다. 보았지만 또 보여달라고 한다. 축복을 받았지만 더 큰 것을 강요하고 요구한다. 즐거움을 보여달라고 한다. 돈의 권세를 보여달라고 한다. 성공을 보여달라고 한다. 권세를 보여달라고 한다. 기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에게 받았던 세 가지 유혹이 모든 세속주의를 대표한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믿음은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힘이라고 말한다.십자가의 육신의 고통 이상으로 로마의 군병들이 조롱하고 외치는 이 말들이 주님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육신의 고통보다도 이런 것들이 더 예수님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디 거기서 내려와 봐라.”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께 사탄에게 받았던 시험과 비슷하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와 봐라.” 세속주의의 공격이다. 그 뒤에는 사탄의 어두운 음모가 숨어 있다. 믿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는 너를 구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수많은 기적을 행했으면서도 왜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는가?”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때로 고난을 받으면서 사탄에게 정죄 받는 그러한 내용들이다. 시편에서도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많이 발견한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면 너를 구원할 텐데.” 욥이 받았던 경멸과 조롱도 마찬가지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의 이 외침에서 우리는 그 고통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깊고 넓으면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무게를 이렇게 표현하셨겠는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죄의 형벌은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지옥의 모습이 그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형벌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세속주의는, 세상은 성공을 보여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속주의가 원하는 성공의 끝이 어디인지를, 죄의 대가와 결과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세상이 원하는 성공 속에서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의 결과, 세속주의 성공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그 고통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조롱과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이 모든 것을 두 팔을 벌려 감수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세속적인 육신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도 은혜도 긍휼도 용서도 자비도 이 세상을 이끄는 힘들이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십자가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물들어 있으면 아무리 보여주고, 아무리 들려주고,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깨닫지 못한다.사랑을 즐거워해야 하는가? 즐거움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반드시 죄의 즐거움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이 세속주의의 핵심이다. 우리는 사랑을 기뻐해야지, 즐거움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현대는 세속적 쾌락주의에 물들었다. 질병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다. 기독교 내부에도 세속주의의 물결이 거세다. 세속주의는 근본적으로 쾌락주의와 인본주의이다. 그래서 신이 이렇게 고통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원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중심이 된 세속주의는 이 고통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창조주가, 우리를 구원할 신이 어떻게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세속주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로 그 모습이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고, 내가 받아야 할 대가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세상의 모든 근본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병들, 지나가는 유대인들, 양옆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다들 세속주의에 눈이 멀어서, 눈을 뜨고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도, 세속주의에 물들게 되면 우리의 심령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들, 하늘에 속한 것들을 경시하게 된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신다. 세속주의는 늘 끊임없이 표적을 구한다. 기적을 구한다.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 12:39). 표적과 기적을 구하는 세대에게, 예수님은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 외에는 더 이상 보일 기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세속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눈을 뜨고도 믿지 못하겠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신다.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2-23). 또 바울은 “오직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고백한다. 그의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바꾼, 새롭게 변화된 바울의 신앙고백이다. 성공주의를 외치고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는, 그러나 그 끝을 보지 못하는 이 세상이 살 수 있는 길을 그가 깨달았던 것이다.세속주의 신앙은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것이고, 참다운 신앙은 믿으면 보게 되는 것이다. 대신,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듦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16세기 청교도 목회자 제레미야 버러우즈는 세속주의를 경계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결국 숨을 거두게 되는 순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우리의 소유로 남길 수 없는 것에 여러분의 생각을 집중시키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것은 참으로 서글프고 비참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속적인 마음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가장 작은 죄의 모습도 제거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 오직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의지하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결국 세상은 진리를 말해 주지 않는다. 즐거움을 사랑하라고는 가르쳐 주지만, 진리를 사랑하라고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세상은 불확실해서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이 세상에서 살아갈 나의 시간은 제한적으로 정해져 있다.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일에 최대한 시간을 투자하라.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친히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고 경험하라.세속적인 것들이 틈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것들을 과도히 생각하지 말고, 죄로 인해 오히려 겸손해지고, 나의 삶 가운데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많이 묵상해야 한다.우리는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다. 지금 여기가 바벨론이고, 지금 여기가 페르시아다. 그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에게 여기서 빛과 소금이 되라 말씀하신다.
세속주의
빛과소금
구레네시몬
로마군병
[거룩한 7일간의 도전_3일]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
2023-04-05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부터 36년까지 10년 동안 사마리아와 유대 전역을 다스린 로마 총독이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통치했고 그들을 경멸했다. 유대인들 역시 그런 빌라도를 무척 증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증오하는 빌라도의 힘을 빌려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들이 증오하는 이방인과도 타협하며, 그들 스스로 율법을 위배하는 악함 태도를 보였다.잡혀 온 예수를 응시하며 빌라도는 이렇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옳도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예수님을 심문하고 고소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무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빌라도는 예수님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들이 여러 가지 증언들로 예수 당신을 반대하는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느냐?” 또 예수님은 침묵하신다. 빌라도는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법정에서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하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전혀 변호하지 않으신 것이다.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은 “신성모독”이었다. 그러나 그런 죄목은 로마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는 로마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가 반역죄로 예수님을 고소했다.이 얼마나 기가 막힌 행태인가? 만약에 예수님의 죄가 정말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히려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이 되어야 할 것이다.역사가들은 평가하기를 빌라도는 유능한 장수이면서, 로마 정계 진출을 꿈꾸는 정치가이면서, 사악한 협잡꾼이었고 말한다. 빌라도는 바보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자를 시기해서 없는 죄목을 씌워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걸 잘 알고 있었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반문한다. 요한복음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여러 번 고백한다(요 18:38; 19:4, 6).빌라도가 예수님을 바라보니 그의 눈은 맑고 선하고, 사람을 죽일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제국을 전복하려는 혁명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그들이 시기하는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빌라도는 머리를 굴려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려 한다. 유월절에 유대인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행을 그는 활용하려 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독립운동가인 바라바 예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라바는 재미있게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다. ‘바라바 예수’는 유대 혁명가요 독립운동가였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영웅인 바라바 예수와 지금 그들 앞에 있는 나사렛 예수, 둘 중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는지 묻는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지만, 예수님을 풀어줄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쓰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만듦으로써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참으로 영리한 모사꾼이다.또한 빌라도는 이 예수 사건이 유대 전역에 가장 큰 이슈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만약에 예수를 풀어준다면, 유대 전역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민란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빌라도의 아내가 심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보냈다. 재판을 하고 있는 자리에 빌라도의 아내가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그날 꿈에 나사렛 예수가 죄가 없는 사람인 것을 계시로 알고 괴로워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빌라도는 더욱 책임을 회피하기로 작정한다. 빌라도는 질문한다. “유대인들이여, 바라바 예수와 나사렛 예수 중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유대인들은 하나같이 “바라바 예수”라고 답한다. 빌라도가 말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 군중은 주저 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이 무리 중 상당수는 얼마 전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예수를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라 외쳤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불과 며칠 후에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 이들은 회색지대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든지 자기에게 유익한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없이 잡혀 아무런 능력도 발휘 못하는 목수의 아들 예수를 보자, 좀전에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했던 사람들이 폭도로 변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서 세상을 선택할 때, 우리는 또다시 주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회색지대의 신앙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대충이라도 신앙생활을 한다면 예수님 안 믿는 악한 사람보다는 덜 나쁘다? 가장 큰 착각이다.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삶에서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모르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두 가지 종류의 회색지대가 있다. 하나는 불신앙의 회색지대다. 바로 빌라도다. 그런데 두 번째는 신앙의 회색지대다.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신앙이다.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분이 내 눈앞에 나타나셔도 깨닫지 못하는 눈먼 신앙이다. 그들은 신앙의 회색지대에 살며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빌라도의 눈에도 이것이 기가 막히게 보였다. 빌라도가 오히려 예수님을 변호한다. “유대인들이여, 어찜이뇨?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저 예수가 도대체 무슨 악한 일을 행했느냐?” 그렇게 파렴치한 정치꾼 빌라도가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기적일 정도이다. 이방인인 빌라도는 보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은 보지 못한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영적인 눈이 완전히 멀어 있다. 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눈이 멀고 더 악해져 있다. 빌라도의 질문에는 귀를 막은 채 유대인들은 더 악을 쓰며 외친다(23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빌라도는 너무 놀랐다. 얼마나 유대인들이 소동을 치며 소리를 지르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는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지 않으면, 곧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 감지한다. 빌라도는 두려웠다. 예전에 폭동이 일어나 로마 황제에게 밉보인 적이 있는 그였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일을 약점 잡아 빌라도를 협박했다.사도 요한은 이 일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유대 총독 빌라도까지 협박하는 용기를 보이는 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이 사람들을 보라! 이들을 왜 “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이라 부르는지, 그 증거가 여기 있다: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론은 히브리 말로 가바다인데, ‘돌을 박은 자리’라는 뜻이다.)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요 19:13-15, 새번역)신앙의 회색지대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당연히 유대의 왕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해야 맞는데, 그들은 빌라도보다도 더 가이사에게 충성스럽다. 진짜 그랬을까? 아니다.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회색지대의 신앙은 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팔려고 들기 때문에, 애국심도 팔고, 하나님도 팔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그러면,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빌라도는 어떤가?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요 19:7-10, 새번역) 그렇다. 성경이 기록하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럴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결정하는지 보라. 빌라도가 이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고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바로 가롯 유다가 뉘우치며 대제사장들에게 왔을 때 제사장들이 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유대인들이 그 똑같은 말을 되돌려 받고 있다.손을 씻는 행위는 로마의 관습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의 관습이다. 빌라도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씻는 유대의 의식을 행했다. 그래서 빌라도의 죄가 없어졌는가?예수님 돌아가시고 2천 년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사도신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한순간의 위기는 모면했는지 모르지만, 그때 그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2천 년 동안 예수님을 부당하게 재판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결국 그는 구원받지 못한 인생으로 어둠 가운데 슬피 울며 지내고 있다. 회색지대 불신앙의 특징은 한순간에 위기를 모면하고자 검은색이나 흰색이 아닌 늘 회색지대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결코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그러면 유대인들은 어떤가?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5절).예수님을 죽인 것은 단순히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다. 25절을 자세히 보라. “백성이 다….” 참으로 대단하다. 악을 행하는 데 참으로 용기가 대단하다. 자기들만 그 죗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도 받겠단다. 그만큼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자신 있다는 것이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너무나 섬뜩한 맹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 믿음대로 되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함락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80년이 걸려 완공되었던 헤롯 성전도 불탔다. 무려 110만 이상의 유대인이 죽고,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유대인은 나라 없이 1,900년을 떠돌아다녔다. 신앙의 회색지대의 삶의 결과이다. 정치에는 회색지대가 있다. 경제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인간관계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철학과 문학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포스트모던은 분명한 색깔을 싫어하는 세대이다. 그래서 회색지대가 인기 있고, 신앙도 적당히 생활하는 회색주의가 유행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라. 진리에는 회색지대가 없다. 세상은 늘 중간지대를 선호하지만, 진리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선과 악만 존재할 뿐이다.북왕국의 악명높은 아합 왕 시절에 바알 숭배로 열을 올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엘리야는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우리는 국적을 분명히 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가? 아니면 세상 나라의 백성인가?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벗어나야 한다!
회색지대
빌라도
[거룩한 7일간의 도전_2일] 불신앙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
2023-04-04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태복음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한 악당이 자기와 함께했던 친구들을 차례로 죽이고 갱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비 오는 어느 날, 보스가 된 이 악당은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옛날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그들을 죽인 과거를 후회하고 눈물을 훔친다. 이런 장면을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심심찮게 본다. 나름 고뇌하는 악인은 사람은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투영한다. 그러나 악당의 그런 눈물이야말로 ‘악어의 눈물’이다. 먹이를 잡아먹으면서 흘린다는 저 악어의 눈물은 곧 자기가 짓밟은 정적 앞에서 흘리는 위선자의 눈물이요 거짓된 슬픔의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지키려는 본능과 처한 상황이 짓누르는 두려움에서 예수님을 배신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째 부인할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베드로는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이 하신 예언의 말씀이 생각났고, 대제사장의 집을 나가서 대성통곡했다. 우리는 성경의 문맥과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베드로가 정말 주님을 부인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두려움에 질려 엉겁결에 나온 그 행동마저도 통곡하며 회개했음을 알게 된다.그런데 가룟 유다 역시 베드로 못지않게 회개처럼 보이는 행동을 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서 가장 배역한 인물로 여겨진다. 둘은 비슷한 행동을 했음에도 이렇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은 무엇일까?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가룟 유다의 거래로 팔려서 잡혀 온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씌워서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려면 로마당국의 판결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유대 전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다.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서서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을 베드로처럼 지켜보면서 “스스로 뉘우쳤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했다(마 27:3). 여기서 쓰인 헬라어 ‘메타멜로마이’는 ‘뉘우치다/괴로운 마음을 갖다/후회하다’라는 뜻이다.그렇게 뉘우친 다음에 그가 한 행동은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30세겔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가롯 유다는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는 여인에게 날 선 비판을 가했었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지 쓸데없는 일에 허비하냐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지금 같았으면 가룟 유다는 아마도 여인과 예수님을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렸을 것이다.그런데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도 요한은 실상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한때 동료요 친구였던 요한의 이 말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실상 돈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을 자기에게 맡기면 거기서 몰래 돈을 훔쳐 갈 수 있는데, 여인이 그만한 가치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걸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렇게 나의 죄성을 반대로 정의감으로 표출할 때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 드디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온갖 유익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이 자칭 메시아는 곧 십자가에 죽을 것이란 불길한 이야기(“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만 하고,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의 친구이기를 자청한다. 유능하고 돈 많고 권세 많은 메시아를 생각했건만, 예수님은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마태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여인의 향유 옥합 사건 이후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 26:14-16).여인이 드린 향유 옥합은 가롯 유다가 계산한 대로 300데나리온이다. 당시 몸으로 일하는 노동자의 일년 치 급여다. 지금 돈으로 약 3,000만 원 한다고 가정하자.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은 30세겔을 받았는데, 이 가격은 120데나리온이다. 향유 옥합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다. 지금 돈으로 한 1,000만 원 넘을 돈이다. 분명 적지 않은 돈이다. 그러나 평생 일 안 하고 먹고 놀 수 있는 그런 돈은 아니다.그렇다면 고작 1,000만 원에, 그래도 그동안 3년 반이나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했던 스승을 팔아넘겼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자기 양심을 팔고 받은 값이 1,000만 원이다. 그래도 사람이라고 가룟 유다는 팔아버린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주고 자기 양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랬더니, 제사장들의 말을 보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마 27:4).가룟 유다는 이제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오늘 분명히 자기가 “무고한 자의 피를 팔았고 그것이 죄”라고 말한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면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에게 가야 한다. 그런데 유다는 유대인들이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제대로 믿지 않았다. 가룟 유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메시아는커녕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실제로 믿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반대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양심을 다시 찾으려 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보자. “그때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는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가 내린 것을 보고 뉘우쳐 은화 30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 주며 ‘내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팔았으니 정말 큰 죄를 지었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오.’하고 대답하였다. 유다는 그 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나가서 목매달아 자살하였다”(마 27:3-5).가룟 유다는 자기가 은 30냥에 판 스승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동시에 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대목을 묵상해 보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이다(“내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팔았으니”). 가룟 유다의 삶은 끝까지 난센스다.가룟 유다는 자기가 팔아넘긴 그분이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양심에 찔림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것이 아니다. 끝까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가룟 유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회개는 양심의 가책에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범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 사이의 용서로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면 안 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게 신앙인이다. 가룟 유다는 용서를 구하고 양심을 되찾으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갔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너의 죄, 네가 당하라”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유다는 은 30세겔을 성전에 던져놓고 목매어 목숨을 끊었다.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철저한 인본주의이고 불신앙이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13:2). 또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22:3).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이전에 자신의 영을 어두움의 세력인 사탄에게 먼저 팔았다. 예수님에 대한 불신, 예수님에 대한 증오, 그리고 돈을 훔쳐 가는 죄, 자신의 죄를 정의감으로 가장한 이중적 생활, 이런 모든 것이 사탄에게 길을 열어 준 것이다. 가룟 유다의 위치를 생각해 보라. 그는 인간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특권인 열두 제자에 뽑힌 사람이다.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아는 모든 인류에게 계속해서 기억되는 아름다운 축복의 자리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했다. 3년 반이나 직접 보고 들은 말씀을 그 위기의 순간에 기억해 내지 못했다. 산상수훈도, 주기도문도, 용서함에 대한 말씀도, 십자가에 대한 예언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단 한 구절이라도 기억했다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욕심 때문에 사탄에게 미혹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7-10).정확히 가룟 유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가롯 유다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서 회개했다면, 그가 메시아를 팔았어도 하나님은 그를 틀림없이 용서하셨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의 그 현장을 지휘한 백부장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의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며 이렇게 실토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명령에 따라 형을 집행하여 메시아를 살해한 그를 하나님이 용서하셨을까? 당연하다. 십자가에 달린 한편의 강도는 구원받았는데, 다른 한편의 강도는 왜 구원을 못 받았을까? 구원받은 강도는 그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지만, 다른 한편의 강도는 끝까지 불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베드로가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인정했기에 그분의 용서하심과 치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했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불신앙이다. 베드로는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을 분명히 사랑하고 있었다. 주님도 베드로를 아끼고 사랑하셨다. 그게 주님과의 교제라는 것이고 진실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애초부터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사랑이 없으면 다시 돌아갈 곳도 없고, 일어설 수도 없다. 불신앙이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불신앙은 항상 불순종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권은 우리가 순종할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권세, 능력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거나, 게을러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용하지 않거나, 반항심에 사로잡혀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요, 이름은 있으나 불순종하는 자이다.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 가운데 주신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종의 삶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오늘 하루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기억하자.나의 삶에 여전히 불신앙 가운데 있는 부분을 찾아내자. 내 안에 숨어 있는 가룟 유다와 같은 것들을 찾아내자. 내 안에 자라는 가라지를 찾아내자. 그리고 기도하자. 주여, 태워 주옵소서. 불신앙을. 불순종을. 주여, 드러나지 않은 교묘한 것들도 태워 주옵소서.가룟 유다와 베드로 둘 다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회개한 베드로만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세상에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죄인과 그렇지 않은 죄인밖에 없다. 실제적인 의인은 없다. 의인의 칭호, 자녀의 칭호는 회개하는 죄인에게 씌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자이다.이번 주간,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진실한 고백과 참된 회개의 시간이 필요하다.주님, 예수님을 부인하고, 팔아넘기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은, 베드로도, 가룟 유다도, 빌라도도, 군중도, 로마 군인도 아닌, 바로 저, 저입니다.
회개
불신앙
불순종
가룟유다
[거룩한 7일간의 도전_1일] 두려움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
2023-04-03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태복음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롯 유다가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대제사장의 용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철저하게 군호를 짜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리기 위해 예수님과 입맞춤까지 했다. 인류 역사에서 늘 그러했듯이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이다.베드로는 분개했다. 품속 칼을 빼 들었다.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한 용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훨씬 숫자도 많았고, 훈련된 사병들이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앞뒤 사정 보지 않고 용맹성을 발휘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베드로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하고, 손을 얹을 때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죽은 자를 살리며, 5천 명을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폭풍과 바다를 꾸짖으시고 가라앉히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런 주님이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잡혀가신 것이다. 성경은 그때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하나같이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베드로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왜 그토록 용맹했던 베드로는 한순간에 용기를 잃고 도망갔던 것일까? 사냥개들이 자신보다 열 배나 더 큰 맹수 앞에서 그토록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기 주인이 가지고 있는 총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맹수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토록 용맹한 사냥개도 자기 주인이 총을 가지고 도망가 버린다면 역시 도망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믿었던 주인이 도망가면 두렵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믿었던 것은 자신의 검이 아니라, 실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 하늘의 능력이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이 스스로 잡혀가시니 마음에 두려움이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한 시간은 늘 승리와 기적의 시간이었다. 한 번도 예수님이 이렇게 힘없이 물러나신 적이 없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다.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라가서 대제사장 집 안뜰까지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실로 상상치 못한 놀라운 광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온갖 거짓 증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로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었다. 급기야 사랑하는 주님이 폭행까지 당한다. 심문하는 사병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따귀를 때리고 있었다. 갖은 욕설과 멸시를 받고 계셨다. 베드로는 이 모든 광경을 멀리서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베드로가 지켜본 장면은 현실이었다. 환상이나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장면이었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때 한 귀퉁이에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다가와 말을 건다. “당신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아니냐?” 주변 다른 사람들이 놀라 베드로를 주목한다. 그때 베드로는 말한다. “네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종이 베드로에게 같은 말을 한다. 이때 베드로는 더욱 강렬하게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 또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같은 말을 한다. “네가 진실로 그 당이라. 네 음성이 그 증거이다.” 이 세 번째 말에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고 맹세하며 주님을 부인한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울었다. 누가복음은 이때 주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셨다고 기록한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란 주님의 예언을 기억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누가복음은 베드로가 주님을 두 번째 부인할 때와 세 번째 부인할 때의 시간 차이가 한 시간이나 났다고 기록한다(눅 22:59). 베드로는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주님을 부인할 때, 시간을 두고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앉아서 불을 쬐면서 도대체 왜 주님이 예언하신 것을 기억하지 못한 것일까?문제는 두려움이었다. 전에 없었던 두려움…. 3년 동안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한 번도 자신감이나 용기를 잃어본 적이 없는 베드로였는데, 지금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며칠 전 주님이 하신 자신에 대한 예언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몇 시간 전에 그 많은 군인 앞에서 칼을 빼 들고 주님을 구하려던 베드로였는데, 제사장의 집에서 허드렛일하는 한낱 어린 여종의 질문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 문제는 두려움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교회의 2천 년 역사를 이끄는 신앙고백의 초석을 마련했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은 이를 알게 한 것은 베드로 스스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시라고 하며 그의 믿음도 칭찬해 주셨다(마 16:15-17). 베드로는 총명했고, 용감했고, 사기충천했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계집종의 질문에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두려움이다. 아무도 베드로를 잡아가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 잡히신 후에 대제사장이 사병을 풀어서 제자들을 붙잡아오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도망쳤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두려움이 가득 차면 사리 분별이 안된다. 진리를 구분할 줄 모르게 되고 진실을 말할 용기도 사라진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이 아니다. 두려움은 어두움의 영이 주는 마음의 근심이다. 두려움은 죄를 지은 인간을 사로잡은 사탄의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고, 두란노 서원을 세워 제자훈련 잘 시켰던 곳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가 부임하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를 극찬한다.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고, 청결하고,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디모데는 목회하면서 힘들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위장병까지 얻었다. 바울이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2년간이나 머물며 목회한 곳도 드문데,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잘못된 교리들이 있었다. 다툼과 분쟁이 있었다.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에베소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디모데는 여러 가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그때 디모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은 결코 디모데의 성품이 모자라거나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디모데는 지쳐 있었다. 디모데는 영적 전쟁에서 지쳐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소심함’과 연결된다. 그때 바울은 그런 디모데에게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라졌던 하나님의 은사들을 다시 일으키라 격려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그리스도인이 사탄이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사명과 은사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의기소침해져서 무기력한 채 능력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존 비비어는 그의 베스트셀러 두려움에서 이런 두려움은 ‘위협’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 위협은 사탄이 우리 주변의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환경을 통하여 우리를 굴복하게 만드는데, 그런 위협에 내 권리를 내주면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마 28:18-19)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우리가 두려운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받은 권위를 행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차지하여 우리를 대적하는 데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영적 권리와 지위를 노리고 있다. 그 이유는 사탄이 그것을 우리 예수님에게서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노려서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기 위함이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과정 가운데 반드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두려움의 문제는 반드시 영적인 면에서 먼저 다루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반항하는 영과 불순종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나 환경과 직면해야 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두려워야 할 대상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나 환경이 아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존중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사그라든 열정과 능력을 회복시킬 것이다. 자신이 평범하고 신앙이 약해서 그렇다고만 생각하지 말라.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다. 그는 갈멜산 전투에서 혼자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상대해서 완벽한 승리를 얻은 놀라운 능력의 사람이다. 그가 기도할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그가 다시 기도했을 때 거짓말처럼 비가 다시 내렸다. 그런데 그런 천하의 엘리야가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들이덤비자 도망가고 말았다. 바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사벨은 그동안 선지자들을 잡아 죽인 선지자 킬러로 소문이 났다. 천하의 엘리야가 이사벨을 피하자, 그의 마음에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왕상 19:1-4). 두려움의 영이 들어가면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는 기적을 행하고 850명을 한꺼번에 대결할 수 있었던 사람도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던 영적 권위를 상실한다. 오늘 하루 정말 주님이 나를 위해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 묵상하라. 단순히 “죄”라고만 답변하고 공허하게 기도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깊이 묵상해 보라.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이유는 나에게 모든 죄와 그에 관한 억눌림에서 자유함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불러내어서 나에게 두려움의 영을 제거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평안과 사랑과 능력과 소망이다.예수님은 이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훗날 다시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상에 어떤 것(사람, 물건, 환경)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어떤 것보다도’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늘 가지고 있는 염려, 불안, 공포,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두려움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면 안 된다. 이 두려움의 문제는 주님을 사랑할 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것을 실패한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신 것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다시 사랑하라. 다시 사모하라. 사랑이 생기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 염려, 근심이 자리 잡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모든 두려움을 몰아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명하노니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어둠의 권세가 물러갈지어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염려와 불안과 공포가 떠나갈지어다!
고난주간
부활절
성주간
두려움
팀 켈러의 ‘부흥’ Q&A
by Tim Keller
2023-04-02
질문: 부흥은 가령 낙태 반대 같은 사역의 파생물인가? 우리 교회의 주요 사역은 죄를 확신하고 회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음미하고 또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거룩해지기를 원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중요한 일이다. 당신이 “나는 낙태를 반대하고 태아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좋은 일이기에 사역의 파생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믿음은 선한 행실을 낳는다. 믿음으로 불타오르지 않고, 복음이 없고, 복음으로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서는 그 어떤 진정한 선행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부흥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부흥이야말로 우리 사역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외 다른 모든 것을 나는 파생물로 여긴다. 질문: 예전 뉴욕시에서 일어난 부흥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첫째, 리디머 교회 초창기에 다른 교회를 다니던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교회로 옮겨왔다. 당신이 교회를 시작한다면, 다른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의 일부가 유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적지 않은 극적 회심 사례도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과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기 시작했다.뉴욕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독신자가 많다는 것이다. 독신자가 다른 독신자에게 교회에 오라고 초청하는 건 가족이 가족을 초청하는 것보다 쉽다. 남편은 아무리 오고 싶어 해도 아내가 반대하면 (또는 그 반대의 경우) 그 부부는 교회에 오지 못할 것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독신자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결정을 내린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잠자던 그리스도인과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깨어났을 때, 그들은 순식간에 담대하고 또 겸손하게 이웃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확신이 마음을 가득 채울 때, 당신은 대담해지면서도 겸손해진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과거에 가졌던 교만은 사라진다. 동시에 과거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에 대해서는 덜 걱정하는,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 된다. 이처럼 복음으로 변화된 성품은 당신을 더 나은 복음전도자로 만든다. 우리 교회에는 복음으로 변화된 일단의 그룹이 있었고, 그들은 앞장서서 사람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매주 설교하는 내 앞에 앉은 비기독교인의 비율은 나를 놀라게 했다. 교회를 찾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당신이 완전히 초신자인 경우, 기존의 가까운 친구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런 경우에 그들을 향해서 당신은 삶을 오픈하기 마련이고, 길을 잃은 사람들과 더불어서 상호 신뢰를 키우게 된다.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 18개월 동안 우리 교회는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로 넘치는 엄청난 폭발을 경험했다.질문: 부흥은 파라처지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지역교회를 위한 것인가? 파라처치에서도 부흥은 가능하다.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 야외 설교가 주로 행해진 이유는 당시 교회가 윗필드와 같은 순회 설교자들에게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개종자가 몰려들었고, “자원봉사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부흥은 지역교회를 갱신했다. 웨슬리의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교단을 시작했다.비평가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교회 없는 기독교와 교회를 떠나서 존재하는 기독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18, 19세기에 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지역교회의 위상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비판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도 일리가 있다. 결국에 가서는 첫 번째 대각성 운동도 교회를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기까지에는 실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질문: 부흥을 경험하고 그것을 다시 경험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부흥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내 아내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성령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 일을 할 자격이 없어요.” 종종 젊은 사람들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은 이것이다. “그 일을 하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당신 생각이 아니었어요.” 성령님께 감히 당신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 운동에는 필연적으로 가짜가 따라온다고 믿었다. 가짜 체험, 지나친 열광, 광포한 사람들, 무엇인가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감정까지 강요하려는 사람들 말이다. 에드워즈는 가짜를 완전히 제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일부 가짜 때문에 부흥 전체가 불신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질문: 은사중지론이 부흥을 방해할까? 나는 온건한 은사중지론자이다. 중지론에 따라오는 어떤 것들은 부흥을 멈출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지론 자체가 부흥을 막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어, 중지론과 함께 체험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따라올 수 있는데, 이것은 부흥 자체를 차단할 수도 있다. 개혁파는 종종 체험을 두려워한다. 대신에 논리적인 논증을 더 신뢰한다. 우리와 같은 개혁파는 일반적으로 부흥을 추구하지만, 터놓고 얘기해서 부흥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질문: 함께 나누고 싶은 부흥 방법론이 있는가? 우리 개혁파는 첫 번째 대각성 운동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 운동은 설교자에 의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외에서 청중을 대면하고 그들에게 확신과 회심을 가져다주는 놀라운 설교를 했다. 나는 확신을 가져오는 복음 전파 설교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향한 설교,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그리고 은혜를 전파하는 것이다. 나는 설교에 의지하지만, 또한 특별한 기도에 의지해서 오륙 년을 보낸 교회들도 있다. 그런 교회의 핵심 사역은 기도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를 보았다.부흥은 마치 눈사태와 같다. 처음에는 잠자던 그리스도인 몇 명이 깨어난다. 명목상 그리스인 몇 명이 회심한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정말 흥미롭고 극적인 개종자가 몇 명 나타난다. 그리고 특별한 기도가 정말로 든든하게 뒤를 받친다면, 고작 몇 명으로 시작한 이 작은 자갈은 조만간 엄청난 눈사태를 일으킬 것이다. 원제: ‘Lord, Do It Again’: Tim Keller on Reviv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은사중지론
은사지속론
주님, 다시 부흥을
팀 켈러의 ‘부흥’
by Tim Keller
2023-04-01
버크넬 대학을 다니던 1970년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처음 2년간 내가 속했던 작은 IVF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은 고작해야 다섯 명에서 열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3학년이 되었을 때 숫자가 갑자기 열 배로 증가했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휴대폰과 소셜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고 전화기에 자동 응답 기능도 없을 때였다. 특별한 전도 캠페인도, 또 어떤 미디어 매체도 없었다. 사실상 우리는 ‘운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도 없었다. 그 어떤 지침도, 위원회도,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부흥을 공부하다대학을 졸업한 나는 목회를 결심하고 고든 콘웰 신학교에 들어갔다. 1972년 가을, 교회 역사가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그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영적 삶의 역학(The Dynamics of Spiritual Life)”이라는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은 부흥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부흥에 관한 역사가였으며 또한 대각성 운동을 연구한 인물이었다. 그의 과목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놀랐는데, 다름 아니라 버크넬 대학교 캠퍼스에서 목격한 사건을 상당 부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물네 살에 목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작은 마을에 있는 장로교회(PCA)에서 9년간 목회했다. 그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서 5년 동안 가르쳤다.뉴욕시에 부흥이 일어나다1989년 우리는 리디머 장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고 5-6개월 사이에(1990년 초부터 1991년 말까지), 다시 ‘그 일’이 일어났다. 대학에서 목격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역동성(dynamics)이었다. 같은 느낌이었고, 같은 냄새가 났다.우리 교회가 성장을 거듭한 곳은 범죄로 인해 사람들이 빠져나가던 맨해튼 한가운데였다. 우리 교회에는 쇼핑족이 없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다. 사실상 뭔가를 제대로 시작하기 어려운 장소였지만, 교회는 2년 만에 약 천 명이 예배에 참석할 정도로 성장했다.당시에 비하면 지금 나는 훨씬 나은 설교자이다. 그러니까 그때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몰린 건 내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교회 조직도 특별한 게 없었다. 직원도 많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그런 사건이 역사적으로 “부흥”이라는 말로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최전선과 오순절부흥을 정의하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그중 하나를 나는 최전선(frontier) 정의라고 부르겠다. 이 정의에 따르면 부흥이란 극도로 왕성한 전도가 이뤄지는 계절이다.나는 1970년대에 남부로 이주한 양키였다. 고작 스물네 살 먹은 청년이었고, 회심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초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복음주의 배경이 전혀 없었고 주류 루터교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남부 지역에서 만난 “부흥: 4월 21-27일”이라는 교회 광고를 보고 크게 놀랐다. “아니,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부흥이 4월 21일부터 27일까지 일어날 걸 저 사람들이 어떻게 알지? 그런데 4월 28일에 일어나면 안 되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부흥에 대한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오순절(Pentecostal)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순절-은사주의 접근 방식은 아마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형태일 것이다. 이 방식은 일반적으로 교회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세 가지 요소나는 역사와 성경, 나의 경험을 통해서 부흥을 어떻게 정의할지 결론에 도달했다. 부흥은 인간이 하는 일이나 성령의 특별한 나타남이 아니다. 진정한 부흥은 성령의 일상적 일하심이 강화되는 것이다. 성령의 일상적 일하심은 죄의 자각, 회심, 확신, 그리고 성화이다. 이러한 일하심이 교회와 교단, 나아가서 도시와 국가 전반에 걸쳐서 강화될 때, 우리는 부흥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는 다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1. 잠자던 그리스도인이 깨어난다성령께서 일을 시작하시면 따라오는 것은 회개와 확신이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충분히 슬프거나 또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 나의 죄에 대해서 충분할 정도로 자각하지 못한다. 깊은 회개를 경험하지 않았기에 결코 수준 높은 확신도 맛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이 나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면, 성령이 내 속에 오셔서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된다.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감동은 잠든 그리스도인을 깨운다. 2.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회심한다부흥은 또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회심시킨다. 교회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세례를 받았고, 등록 교인이며, 그중에는 임직받은 사람도 있다. 부흥이 일어나면 이렇게 고백하는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전혀 아니었어.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어.”목사라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혀 풍기지 못하는 교인을 모를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부흥의 시대가 도래하면 성령께서는 목사가 결코 할 수 없는 역사를 이루신다. 3. 확고한 불신자가 믿음의 길에 들어선다부흥의 시대에 교회는 성장한다. 지역 사회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잠자던 그리스도인이 깨어나고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회심함으로 교회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갑자기 교회가 매력 있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능력을 발휘하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잠에 빠졌거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웃에게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부흥의 소문이 퍼져서인데, 다른 교회와 기존에 연결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몰려온다. 또 다른 경우로는, 초대받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부흥은 교회를 어떻게 바꾸는가: 부흥의 표시지금까지 부흥과 함께 발생하는 일을 살펴보았다. 그럼 부흥에도 분명한 표시(marks)가 있을까? 1. 복음이 회복된다부흥의 시대에는 거의 항상 어떤 의미에서든 복음이 회복된다. 복음이 새롭고 생명력 있는 생생한 방식으로 믿고 전달된다. 또한 복음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탈피한다. 이 두 가지는 복음의 양면에 있는 오류이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또한 일단 구원만 받았다면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도 복음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믿음뿐인 그런 믿음이 아니다. 거룩한 삶을 동반하는 믿음이다. 거의 항상 부흥은 교회가 복음에 집중할 때 일어난다. 첫 번째 방향은 교회가 경직되고 기쁨이 없고 모든 것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복음 중심의 은혜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옮겨가야만 한다. 두 번째는, 교회가 진정으로 속죄를 믿지 않고, 지옥을 믿지 않으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를 벗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야 한다. 복음의 회복은 이 두 방향 중 한 가지의 형태로 일어난다. 2. 회개가 일상이 된다부흥은 회개가 일상이 되는 특징을 가진다. 한국 교회의 엄청난 성장을 이끈 부흥의 초기 단계는 20세기 초인 1905-1910년경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회개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부흥이 일어나더니 여러 마을로 퍼져나갔다. 내가 읽은 기사에 따르면, 부흥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많은 지주가 놀랐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 죄를 깨달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지주에게 와서는 그동안 훔치거나 속인 사실을 고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3. 예배가 거룩해진다부흥의 또 다른 신학적 표시는 회중 예배의 성별이다. 몇 주 동안 24시간 내내 계속된 1970년 애즈베리 대각성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고백하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랑 자는데 이제는 정말 그만두고 싶어요. 하나님께 내 죄를 고백합니다.” 휘튼 대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이런 식의 공개적인 고백은 캠퍼스에 놀라운 영적 진지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이런 회개가 예배의 성화와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거룩하게 구별된 예배라고 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불신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아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자. 마음에 감추고 있던 비밀이 드러난 불신자가 화를 내기는커녕 뭐라고 한다고 바울이 말하는가? 그 사람은 결코 “아, 정말로 열 받는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이 참으로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라고 고백한다. 불신자마저도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된다. 이것이야말로 부흥의 신학적 표시이다.4. 제자들이 늘어난다부흥이 있는 곳에는 항상 교회 성장이 따라온다. 부흥 없이도 얼마든지 교회는 성장할 수 있지만,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 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친구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흥을 일으키는 방법?지금까지 제시한 건 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길 바란다. 지금까지는 신학적 표시이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일화는 당신이 부흥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구체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이런 궁금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부흥을 불러올 수 있을까요?”존 웨슬리와 조지 윗필드가 주도한 18세기 대각성 운동을 보면 충격적인 방법이 있음을 단숨에 알 수 있다. 바로 야외 설교이다. 설교 스타일이 하나의 방법이었다.그러나 1857년부터 1859년까지 뉴욕 시내에서 일어난 부흥은 야외 설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흥은 매일 도시 전역에서 있었던 평신도가 주도하는 정오 기도회를 통해 일어났다. 사람들이 기도회에 들어왔고, 복음을 들었다.누군가가 말했다. “같은 방법으로 나니아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옷장을 통해서 한 번 들어갔다면, 다시는 옷장을 통해 나니아로 갈 수는 없습니다.” 부흥도 마찬가지이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의 부흥에 대해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수십 년 전에 부흥을 경험한 교회들을 관찰한 그는 많은 교회가 과거의 방법에 갇혀버린 비극에 빠졌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러나 확실한 효과를 증명했던 방법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라고 당신은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종종 문화에 일종의 격변 또는 혼란을 일으키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섭리 안에서 성령의 일상적인 역사하심을 강화하신다. 나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로 그게 그분이 역사하시는 방식이다. 혼란이나 격변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부흥을 달라고 기도한다. 당신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원제: ‘Lord, Do It Again’: Tim Keller on Reviv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부흥운동
대각성
규범, 그 실천이 답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위한 세 가지 제안 2: 규범
by 김경호
2023-03-31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은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위한 두 번째 제안인 규범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변혁을 위한 수단의 한 축으로서의 규범norms은 일차적으로 윤리적 관점에서 인간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 규범은 기독교 윤리의 토대이자 불변의 근거로서 성경에 근거하며,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마음의 법과 창조 질서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규범은 특별계시로서의 성경과 일반계시로서의 인간과 창조세계에 근거하여 세계관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규범의 일반적 원리: 성경 규범의 일반적 원리는 성경에서 시작합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계시와 성경의 관계에서, 결론적으로 계시는 인류에게 완전한 소유가 될 수 있도록, 성경의 형태를 취하였고, 성경의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바빙크는 성경이 형태적인 관점에서 축자적, 유기적 영감설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기록될 때 기록자의 인간적이고 자연적 삶이 배제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쓰임을 받습니다. 성경은 그 내용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고 있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재료와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구원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학문과 예술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는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이 성경에 비추어 점검되고 수정되어야 하며, 또한 성경의 권위는 거룩한 종교적 영역(신학, 개인 도덕성)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예술, 학문과 같은 일에도 관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성경은 기독교 세계관 형성의 일차적 규범입니다. 규범의 구체적 원리: 인간의 마음과 창조질서 인간의 마음의 규범. 로마서 2:14-15에 따르면 규범의 내용은 본성과 양심이라는 마음의 도덕법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상원은 인간의 마음의 도덕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도덕법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규범을 도출해내는 것이 가능하고, 이방인들도 어느 정도의 도덕적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며, 일반윤리학 곧 철학적 윤리학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인간의 마음의 도덕법은 완전하지 않고, 단지 시민적 의를 도모할 만큼만 남아 있습니다. 마음의 도덕법이 죄로 인하여 손상됨에 따라 새롭고 완전한 도덕법 체계인 특별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도덕법이다. 성경의 도덕법과 마음의 도덕법은 서로를 대체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도덕법은 일반적 도덕 원리moral principles로서 작용하고, 마음의 도덕법은 구체적인 도덕 기술moral skills로 기능합니다. 이상원은 성경의 도덕법과 마음의 도덕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이란 성경에 기록된 도덕법을 일차적이고 주된 규범으로 삼고, 이 주된 규범의 빛 안에서 마음의 도덕법과 지성의 활동을 통하여 얻은 구체적인 도덕적 지침들을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규범들로 비판적으로 채용하는 가운데 인간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반성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때 일차적 규범과 부차적 규범이 서로 충돌과 갈등을 일으킨다면 일차적 규범이 적용의 우선권을 갖게 된다.” 창조질서의 규범. 또한 규범의 내용은 월터스가 말하는 창조의 법 또는 창조질서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창조 질서는 타락으로 인해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빛 안에서 비로소 규범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신칼빈주의 전통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법이라고 규정합니다. 법이란 하나님의 우주적 명령 행위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법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것은 ‘자연법칙’과 ‘규범’입니다. 하나님의 법 곧 통치는 비인간적 영역에서는 자연법칙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간적인 문화와 사회의 영역에서는 규범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창조질서에 속한 모든 것은 규범적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각각의 영역은 창조질서에 나타나는 규범에 순종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이것을 창조의 규범성, 또는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규범의 적용: 경제 영역 네덜란드에서 특별히 경제 영역에 대한 규범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산업혁명이라는 큰 파도 속에서 경제 영역에 대한 규범을 오랜 시간 숙고하며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정의, 청지기, 책임, 연대라는 규범입니다. 정의. 밥 하웃즈바르트Bob Goudzwaard는 성경으로부터 정의justice에 대해 고려해야 할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첫째, 성경에서는 정의를 결코 이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 즉 왕, 판사, 재산 소유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요청입니다.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고, 판사는 정의를 선언해야 하고, 재산의 소유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각자 책임을 전제로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정의의 수혜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은, 과부들, 고아들, 땅이 없는 레위인들, 채무자들, 노동자들과 같은, 불의에 처하게 되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국가의 사회와 시민법을 공유하며, 정의는 이러한 사람들을 명확하게 지향합니다. 둘째, 정의는 항상 해방 동인liberation motive을 포함합니다. 정의는 돈이나 권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억압받고 행복한 삶의 전망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회복을 가져오는 동인이어야 합니다. 정의는 바리새인들의 의(구제)를 초월합니다. 즉, 정의는 억압받는 사람들과 궁핍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건설하는 도움에도 관련되어야 합니다. 포로들은 자유를 누릴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인간 또는 국가가 자신의 소명을 다시 시작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당한 위치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정의는 소유에 대한 특정한 형태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선택이 아니라 소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거나 닫혀 있는 이용 가능한 재산인지의 여부와 관련됩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농부에게 자신의 땅의 수확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 둘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질서에서 소유는 배타적인 권리가 아니며, 소유는 이웃에 대한 모든 정당한 주장에 종속됩니다. 청지기. 청지기직은 본래 경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 4에 나오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부당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잘 알려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경제/경제학economic/economics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단어가 가정 관리인의 책임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고, 또한 노모스nomos와 어원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가족이 보존될 수 있도록 지켜야 하는 규범이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오이코노미아라는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도 그 본래의 의미가 잘 설명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코노미아-기술의 취득’과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돈의 축적’을 구별합니다. 오이코노미아란 자신에게 맡겨진 재산을 잘 관리하여 열매를 맺고 그 과실을 생산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레마티스티케는 자기 풍요의 추구, 나아가서는 필요시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더 큰 금전적 소득을 얻으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경제는 크레마티스티케와 동의어가 되었고, 청지기직을 의미하는 오이코노미아는 점차 약화해 갑니다.책임. 하웃즈바르트는 소명의 원리를 가지고 책임의 문제를 설명합니다. 소명의 원리는 루터와 칼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칼뱅이 이 원리를 제도적 차원(가정, 교회, 국가 등)으로 확대함으로써, 오늘날 신칼빈주의 진영에 영감을 불어넣어 영역주권 사상을 형성시켰습니다. 이 소명의 원리에는 두 가지의 통찰력이 있습니다. 첫째,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보편적인 것이므로 거룩의 정도에 있어서 신자들 간에 차별이 없습니다. 이 통찰력은 한 영역이 다른 영역에 종속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둘째, 이 원리는 삶의 각 영역 내에서 인간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보다 더 우월합니다. 이 두 가지 원리들이 영역주권의 진정한 규범적 특징들입니다. 영역주권에서 주권은 특정한 영역이나 인간의 의지의 자율성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주권으로 하나님과 동료에게 봉사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소명은 가족 및 학교 내 아이들을 돌보는 사랑의 방식으로;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의 진실한 사랑의 방법으로; 경제적 봉사의 유용성과 청지기 직분으로; 노조의 경우 근로자를 정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하는 방식으로; 공적 정의를 국가 전체의 특정 규범으로 사회 전체에 가져오는 방식으로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연대. 하웃즈바르트는 책임의 나눔으로서 연대성을 다룹니다. 이 연대성은 공동의 책임을 전제하기 때문에 ‘사회 규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연대성으로서의 사회 규범은 참여와 협력으로 구체화합니다. ‘참여’는 국민이나 국가가 자신의 목적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함을 의미합니다. 이 규범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각 사람을 창조함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참여는 직접적인 공동 책임을 포함합니다. “협력은 서로를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상을 포함한다. 협력하지 않으면 함께 사는 모든 형태가 결국 붕괴할 것이다. 협력은 공동으로 부담할 수 있는 책임들에 답함으로써 인간 사회 형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협력은 인간의 책임의 보완이다.” 이상원은 연대의 개념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관점을 제시합니다. 연대성은 인간의 행위 전체를 위한 규범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행 17:26)라는 말씀이 연대성의 출발점이 됩니다. 연대성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수직적 차원과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차원으로 상호 연결됩니다. 또한 이상원은 이웃에 대한 책임은 유기체로서의 사회 개념을 통해 더욱 강화되고 지지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연대성-유기체 개념은 사회 안에 소외 계층도 우리가 도와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정리하자면, 중요한 것은 역시 실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힘들게 만든 규범들이 도구화되고 간접적인 규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윤리와 규범은 뒷마무리하는 정도의 유효성만 지닐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의, 청지기, 책임, 그리고 연대라는 모든 규범의 동시적 실천만이 답입니다!
세계관
기독교세계관
규범
성경
인간마음
창조질서
정의
청지기
책임
변혁, 세계관의 목표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위한 세 가지 제안 1: 변혁
by 김경호
2023-03-17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더욱 적합한 이론과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변혁transformations, 규범norms, 역학dynamics에 대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변혁이 적용의 목표라면, 이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 규범과 역학입니다. 여기서 규범이 어떤 옳고 그름에 대한 이론적 판단이라면, 역학은 실천에 반대하는 힘의 작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규범적 판단이 아니라 역학을 이겨낼 때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 변혁과 규범과 역학이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과 적용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요소, 세계관의 목표로서의 변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다양한 유형들 변혁은 세계관 적용의 목표입니다. 변혁을 위한 세계관은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문화 유형론’에서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니버는 다섯 가지 유형을 제안합니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 위의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는 문화와 그리스도를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봅니다. 이 입장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냐?”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가 한 말입니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취한 입장을 들 수 있습니다. “문화 위의 그리스도”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교회를 위로, 자연을 아래로 도식화한 이원론적 위계질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보다 교회가 우선입니다.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처럼, 역설paradox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마지막으로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는 구조와 방향으로 구분하여 악은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왜곡된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칼뱅John Calvin 등이 있습니다. 니버는 이 다섯 가지 유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다양한 견해들니버의 다섯 가지 유형론 이후 다시 세 가지 형태의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신-재세례파 전통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자신들의 대안적 입장을 교회론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하우어워스는 문화에 대한 태도를 세 가지, 행동주의 교회-회심주의 교회-고백주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 특징을 각각 설명합니다. 행동주의 교회는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다가 종교로 치장된 자유주의가 되었습니다. 회심주의 교회는 오직 내적 변화만을 추구하다가 역시 종교로 치장된 보수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백 교회는 십자가의 교회가 되어 타협하지 않는 증언으로 세상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우어워스는 이 세 번째 유형만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같은 진영의 요더의 목표는 옛 질서의 무기로 그 목적을 이루려 하지 않는 새 질서, 즉 비폭력이 내포한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요더는 예수님을 통한 새 질서의 규범에 근거한, 교회가 가지는 질적 차이성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둘째, 역설형 유형에서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은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대안은 ‘자연법’과 ‘두 나라 국민’입니다. 여기서 반드루넨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비판합니다. 두 나라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과 같이 개혁신학 전통에서 규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카이퍼가 등장하면서 그 연속성이 끊어졌고 특이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 특이한 형태란 기존의 ‘자연법과 두 나라’에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반드루넨은 이에 반대하여 자연법과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를 제안합니다. 반드루넨이 말하는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란 구체적으로 노아 언약에 근거한 ‘일반나라’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구속의 나라’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같은 삶, 즉 이방인, 나그네,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은 이런 것입니다. “그 두 나라는 고유한 독특성을 지니며 이 세상에서 별개의 목적에 기여하지만, 두 나라 모두 주권자 하나님의 윤리적 권위 아래서 움직인다. 하나님은 두 나라 모두에서 자신을 섬기도록 신자에게 명령하신다.” 셋째, 포스트 모던 유형에서 리차드 미들톤J. Richard Middleton과 브라이언 왈쉬Brian J. Walsh는 포스트모던적 대안을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변혁적 세계관이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기 위한 다섯 가지 대안입니다. 하나. 세계관이 전체 체계로 간주될 때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둘.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을 대표할 때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셋. 세계관이 성경의 역동성을 잃어버릴 때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역동성이란 방향, 방향 상실, 재-방향입니다. 구체적으로, 방향 상실 없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계속 가고 있다면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향 상실을 인정하고 방향을 다시 재설정할 때, 즉 성경의 역동성을 인정할 때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넷. 세계관은 변화하는 문화적 맥락에 부적절하거나 비일관적일 때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다섯. 세계관은 자신의 공동체가 폐쇄적이며 방어적일 경우에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변혁적 세계관의 대안 제시 지금까지 경쟁하는 변혁의 의미들에 대한 대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에서 변혁의 의미를 정의해야 할까요? 카슨D. A. Carson은 변혁을 위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생각할 때,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창조, 타락, 구속—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환점을 지침으로 매우 다른 유형들을 고안해 내는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다른 맥락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복합적인 실재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카슨은 가장 중요한 단서를 “성경적인 구속사의 전환점들을 통합하려는 입장이 깊이 있는 기독교 입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나는 구속사의 전환점—창조, 타락, 구속—을 통합하는 모범적인 연구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기독교 세계관, 야곱 끌라베이크Jacob Klapwijk의 기독교 철학, 고든 스파이크만Gordon Spykman의 기독교 신학입니다.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의 포괄성을 회복하기 위해 구조와 방향의 차원에서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월터스는 이원론이 두 방향을 두 구조로 환원시킨 결과이기 때문에, 창조를 구조로, 타락과 구속을 창조의 구조 위에서 살아가는 두 방향으로 구분합니다. 따라서 개혁이란 외적 갱신을 의미하는 성별이 아니라 내적 갱신을 의미하는 성화이고, 전면적으로 제거하는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갱신이라고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창조구조는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구조의 항존성Perseverance of the structure of creation으로 인해 개혁은 구조로 인해 ‘혁명’을 반대하고, 방향으로 인해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때문에 ‘보수주의’를 반대합니다. 끌라베이크도 창조, 타락, 구속을 중심으로 비판적 원용critical appropriation으로서의 변혁 철학transformation in philosophy을 추구합니다. 클라베이크는 철학과 문화의 관계에서, 반정립(대립)과 종합(연결) 사이에 변혁(비판적 원용)을 제안합니다. 이는 교부들이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면서 이 과정에 ‘약탈’이 일어났습니다. 이 약탈한 금과 은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무비판적으로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비판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성막 제작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끌라베이크는 예배와 성막 제작을 위한 사용이 바로 올바른 사용이며, 이를 비판적 원용으로서의 변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무비판적 방식으로 변혁을 추구할 경우에 그 반대인 역-변혁inverse transformation이 일어납니다. 역-변혁은 외면적 차원에서만 무비판적으로 기독교화가 일어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외면이 아무리 기독교의 용어, 모양을 가졌다고 해도 내용으로는 세속화된 개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스파이크만도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도식을 따라 기독교 신학을 추구합니다. 스파이크만은 창조를 형성formation, 타락을 변형deformation, 구속을 재형성reformation, 그리고 완성을 회복restoration이라고 표현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질서 있는 우주를 존재케 하셨습니다. 창조질서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종교적 중심인 마음을 가진 전인입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형상 개념은 관계적, 역동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창조주를 드러내거나 형상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타락은 창조의 변형입니다. 죄는 본래 창조에 속한 것(실체)이 아니고, 선의 결여이며, 분열입니다. 타락 이후 구조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방향에 급격하고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원죄는 전 환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은 인류의 전적 부패의 보편성 가운데서도(반정립) 일반은총을 통해 창조구조를 유지하셨습니다(일반은총). 구원은 재형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하고 교회의 안과 밖에서 구속과 관련된 사역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세상 안에는 억제와 보존으로서의 일반은총이 작동하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증인, 모델, 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완성은 최종적 회복입니다. 스파이크만은 대표적으로 무천년설, 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소개하며, 이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무천년설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깨어있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변혁은 기독교 세계관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모델이자 대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대안들도 존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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