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QT
아침 8시 매일 큐티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qt1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다른 사람들의 칭찬
2018-11-19
잠언 27장 2절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거만한 사람, 곧 항상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최근에 이룬 성공을 떠벌리며, 과거의 승리를 거듭 되뇌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자랑하며 모든 대화를 지배하려 든다. 그는 칭찬에 중독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칭찬한다.우리가 교만한 사람을 멀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겸손의 미덕을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벧전 5: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겸손한 마음을 길러야 한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게 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칭찬하게 만든다.물론 스스로를 칭찬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모든 형태의 자랑을 일체 금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가르친다(롬 12:3).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을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적절하기만 하다면 스스로 얼마든지 높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교만을 독려하는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인 자기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재능과 성공에 관해 말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입사 면접과 같은 경우에는 우리의 능력을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이사야도 하나님이 옛 언약의 공동체를 향해 자신의 진리를 선포할 능력과 의지를 갖춘 사람을 찾으실 때 선뜻 그분 앞에 나섰다(사 6:8).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오직 나만을 이야기의 중심 화제로 삼으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묻거나 묻지 않거나 상관없이 항상 우리가 이룬 성공을 모두에게 알리려고 애쓸 때에 발생한다.시편 147편 6절은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고"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마음이 겸손할 뿐 아니라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도와주신다. 나 자신을 칭찬하기에 급급하면, 내가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곧 나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런 우상 숭배는 나의 인간 관계에 많은 갈등을 야기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구원을 원한다면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스스로를 높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신뢰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옳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코람 데오겸손과 온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참 성도의 특징이다. 이런 덕성을 연약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겸손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다. 이런 덕성을 지닌 성도들은 스스로의 재능과 약점을 옳게 평가한다. 그들은 필요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의지하고, 모든 염려와 필요를 주님께 맡긴다.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자. 나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겸손히 낮추는가?출처: www.ligonier.org원제: Praise from Other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쾌락과 가난
2018-11-16
잠언 21장 17절“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성경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다양한 일들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그 중에서도 잠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일상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특히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해설하고 있다(잠 1:7).잠언은 우리가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일들에 대해 가르침을 베풀기 때문에, 재물과 부에 관한 교훈 역시도 풍부하다. 그 중 검소함과 인내를 권장하는 내용은 매우 중요한 교훈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잠언 13장 11절은 "망령되이 얻는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라고 가르친다. 잠언은 단번에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꾸준히 절약하며 지혜롭게 투자하는 태도를 권장한다. 잠언은 번 돈을 단번에 다 쓰지 않고, 꾸준히 재물을 모으라고 권유한다. 간단히 말해, 잠언은 오늘의 본문에서처럼 쾌락을 자제하라고 가르친다.이 본문은 쾌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리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전한다. 만일 단기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면 일시적인 기쁨을 얻게 될 뿐이다. 금전적인 여유가 생길 때마다 마음껏 쾌락을 누리는 삶을 좋아하면, 항상 돈에 쪼들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미래를 위해 비축해 둘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지혜롭게 투자해 재산을 꾸준히 늘려가는 일이 불가능해진다.‘술과 기름’은 하나님의 복을 상징한다(신 33:24; 시 104:14-15; 사 61:3). 그러나 하나님의 복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그 복을 발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복은 그 자체로써 우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라고 주어지는 선물이다(시 17:15).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재물로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전 5:10),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도 쾌락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늘 더 큰 쾌락을 원하다가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나 영적으로 파산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분 안에서 온전한 만족과 안전한 삶을 발견할 수 있다.코람 데오오늘의 문화는 육신의 만족을 자제하지 않을 때 미래에 대가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고 당장의 즐거움을 찾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생각하며 더 큰 행복을 위해 쾌락을 자제하도록 이끄신다. 하나님의 선한 선물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그런 선물 자체만으로는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Pleasure and Povert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경건한 결심
2018-11-15
시편 101편 2-3절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하나님의 나라에서 내 위치를 안전하게 확보할 목적으로 그 분을 힘써 섬기겠다고 다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그 나라의 시민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며 섬기기를 원하는가? 크리스천은 날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우리는 공로를 세움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성향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동기가 선을 쌓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라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거룩한 행위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와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오늘의 본문에는 경건하게 살며 성실하게 나라를 다스리려는 다윗 왕의 결심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찬양한 후, 비로소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우리를 대신해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해야만 성화의 기초, 곧 거룩한 성장을 위한 토대가 확립될 수 있다. 죄를 피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건함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고, 또 성령을 통해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며,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 거룩하게 하려는 계획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빌 2:12-13).오늘의 본문은 경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다짐해야 할 각오를 다룬다. 그러나 이 각오는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적용된다. 한 주석학자가 설명한 대로, 지도자들은 악을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무익한 것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3절), 좁은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요인들을 미워해야 한다(3절). 그들은 죄의 외양만 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뿌리를 근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악을 제거해야 한다(4절). 그들은 은밀한 죄까지 모두 제거하고 온전히 거룩함을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5절), 악이 자신의 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힘써야 한다(6-8절)."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우리 모두 사도의 경고를 가슴에 새기자. 우리의 힘을 의지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면, 유혹을 물리치기가 어렵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기억하면 만족스러운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그것을 잊는다면 곧 넘어지고 말 것이다.코람 데오처음 회심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을 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좋은 경험과 묵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야만 성령의 감화를 통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반드시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심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기억해야만,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죄에 맞서 싸울 힘이 생겨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ly Resolve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기쁨이라는 양약
2018-11-14
잠언 17장 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성경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오늘 본문의 전반부 내용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육체의 건강을 해롭게 한다는 조사 결과나, 즐겁게 사는 사람이 항상 우울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소식이다.그런 조사 및 연구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진리, 곧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라는 진리를 사실로 확증한다. 즐겁게 사는 삶은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이 잠언은 경박하게 들뜬 삶을 살라는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다. 혹은 어려운 삶의 상황을 무시한 채 항상 웃으며 살라는 뜻도 아니다. 매튜 헨리는 이 잠언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기쁨으로 섬기면서 외적인 즐거움, 특히 즐거운 대화를 통해 위로를 얻으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석했다. 영혼과 육체를 유익하게 하는 기쁨은 먼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다음으로 그분이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단순한 즐거움을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전도서는 "기쁨으로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같이 피조 세계의 평범한 일들을 통해 기쁨을 누리라고 권고한다(전 9:7). 시편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라고 거듭 강조한다(시 32:11, 53:6).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또 그분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만드신 것들을 기뻐해야 한다(고전 10:31).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즐거운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기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유익하게도 한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또한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즐거운 마음의 반대는 ‘뼈를 마르게 하는 심령의 근심’이다. 여기에서 ‘뼈’는 인격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즐거운 마음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크게 유익하게 하지만, 심령의 근심은 심신을 해롭게 만든다. 뼈를 마르게 하는 심령의 근심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는 다르다(시 51:17). 회개는 우리를 회복시켜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만드는 생명의 수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마음은 냉소적인 특성을 띠기 때문에 단순한 것들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 우리 가운데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이 없기를 기도한다.코람 데오즐거운 마음은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가는 척하지 않는다. 즐거운 마음은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할 줄 안다(전 7:2). 즐거운 마음은 주어진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하고, 지속적인 평강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 나아가 그분이 영원하고 참된 기쁨의 근원이라고 확신한다. 즐거운 마음은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짓고 다니지는 않지만,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 닥치더라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후 4:17)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었다고 확신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Good Medicine of Jo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서로를 날카롭게 하라
2018-11-13
잠언 27장 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서로 정확하게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꿔 말하면 두 명의 친구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과 관계를 맺는 법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을 일을 기꺼이 도와주는 친구도 있고, 매우 친하면서도 당신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유익한 의견을 전혀 건네지 않는 친구도 있다. 만약 당신이 관계의 복을 누리고 있다면 최소한 정직함으로 조언해 줄 친구, 곧 나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을 친구가 한 명은 있을 것이다. 잠언 27장 17절은 그런 친구를 묘사하고 있다. 이 본문은 서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두 명의 충실한 우정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에 비유했다. 이 비유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 그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후반부를 히브리어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또렷하게 하다"라고 번역한다. 전투를 하는 데 적합하도록 칼날을 철에 갈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충실한 친구는 건설적인 조언을 통해 상대가 성공할 준비를 갖추도록 도와준다. 고대 사회에는 전기숫돌이나 다른 연마 기구가 없었던 탓에 연장을 날카롭게 갈기 위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은 인내심과 주의력이 필요했다. 잠언은 칼을 연마하는 비유를 통하여 친구 관계에서 인내심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명확하게 강조한다. 올바른 때에 건네는 말은 상대방의 발전을 돕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 말이나 한순간의 대화로 상대방을 단번에 뛰어나게 만들 수는 없다. 서로의 발전을 돕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수년 동안 인내를 가지고 우정을 쌓아가며 충실하고 정직하게 다른 의견과 조언을 건네야 한다. 친구가 자신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서 한 번만 노력하고 포기하는 것은 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인격의 성장과 영적 성장은 상호협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태초에 하나님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27).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있었고, 나단은 다윗을 회개로 이끈 충실한 친구였다(삼하 12:1-15). 예수님은 한 명의 감독만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 분은 많은 장로와 집사를 세워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게 하셨다(행 6:1-7). 우리 모두는 서로의 발전을 돕고, 더욱 용기를 내어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끌어 줄 친구가 필요하다. 코람 데오 자신을 날카롭게 만들어 줄 다른 철들이 당신의 삶에 함께 하는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바람직한 조언을 할 줄 아는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진정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삶 속에 그런 친구가 없다면, 반드시 찾아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비판적인 조언을 건넬 수 있고, 친구들과 이웃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주님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힘과 도우심을 구하자.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Sharpening One Another 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모든 것이 헛되다
2018-11-12
전도서 1장 1-11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1절)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니"(1:2)라는 유명한 문구로 시작한다. 이 문구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오늘의 본문을 비롯해 전도서 전체의 가르침을 옳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해석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문구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니와, 타락한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가 모두 궁극적으로 헛되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문구는 우리의 삶을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도와준다.전도서 1장 2절의 "헛되다"는 "증기," 또는 "숨결"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벨"을 번역한 것이다. 전도서에서 이 말은 한 줄기의 증기나 숨결과 같이 잠깐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내 힘으로 붙잡기가 어렵다. 따라서 전도서의 "헤벨"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현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이해력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온전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삶은 이해하기 힘든 측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전도서 저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우리의 삶은 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로 채워져 있을까? 그 이유는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피조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우리가 항상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삶 속에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측면이 있다는 개념은 오늘의 본문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전도자는 3절에서 인간이 수고를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 말은 노동이 무의미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도자가 말하려는 요점은 스스로의 노동으로 지속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노동은 세상의 많은 좋은 것을 누리는 데 필요한 재물을 벌어들이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은 덧없다. "재물은 무덤까지 지고 갈 수 없다"라는 명언은 진리다. 그 누구도 죽을 때 재물을 가져갈 수는 없다. 재물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된다. 물론 그것이 그 자체로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기를, 선한 사람은 그 기업을 "자자손손"에게 물려준다고 하였다(잠 13:22).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 줄 것을 쌓기 위해 그토록 수고롭게 노동하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만 삶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전도서는 "해 아래에서"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함으로써 "해 아래" 있지 않은 삶으로 우리의 생각을 이끈다. 즉,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불어 다른 현실의 존재 가능성을 생각하도록 이끈다.코람 데오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전도서가 말하는 삶, 곧 "해 아래" 있는 삶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이 세상에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롬 8:28).출처: www.ligonier.org원제: Vanity of Vanitie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용서의 축복
2018-11-10
시편 32편 1-2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순수한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나서 이 시편을 기록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기뻐하며 영혼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의 시편은 고백과 회개와 용서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교훈을 전한다. 아울러 그가 쓴 이 시편은 칭의라는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는 핵심 본문 가운데 하나다.다윗은 용서받은 사람의 복스러움을 묘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그는 용서가 죄를 가려주어 더 이상 정죄를 당하지 않게 해준다고 말했다(1-2절). "가려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용서라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수치를 가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일단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면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들의 수치를 가려 자기 앞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다.3-5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나서야 비로소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한다. 회개와 용서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냥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그분의 은혜로운 주권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지만, 죄를 고백하고 난 뒤에는 오히려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다(6-11절).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면 죄인의 죄가 그의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그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는 삭제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그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 행위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공로가 될 수 있다. 존 칼빈은 시편 32편 1-2절을 주석하면서 "다윗이 찬양한 죄 사함은 행위의 의를 철저히 무너뜨린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에 근거해 우리의 의를 내세우려고 하면, 용서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만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흔들릴 수 없는 확실한 교리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라고 말했다.코람 데오우리의 칭의를 위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 가지 축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충실한 복종으로 인해 주어진 그분의 온전한 권리와 특권에 동참한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믿음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런 믿음은 폭풍우 속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닻과 같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lessing of Forgivenes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지혜롭게 행하라
2018-11-09
잠언 28장 26절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언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특성을 설명하며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치는 내용이 많다. 오늘의 본문도 스스로를 의지하는 어리석음과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그런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물론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도 여러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지 않고 우리 자신의 능력을 올바로 평가해서 활용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믿음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능을 올바로 활용해 생산적인 일을 하고 선한 증거를 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살전 4:10-12).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그런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려면,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해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훈계를 달게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잠 9:9).어리석게 자신을 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이 최고의 권위를 지녔다고 믿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을 할 때 자기를 치켜세우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스스로의 생각과 견해만을 고집한다. 잠언은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여 가르침을 받기를 원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런 태도를 지닌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가르침을 거부한다(잠 15:32; 19:8). 어리석은 사람은 악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알면서도 배워 복종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사 26:9-10). 매튜 헨리는 오늘의 본문을 주석하면서 어리석은 자의 특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마음과 지혜와 생각, 자신의 힘과 역량, 자신의 공로와 의를 신뢰하며, 스스로를 선하게 여긴다. 그런 태도를 지닌 사람이 어리석은 이유는 만물보다 거짓될 뿐 아니라 종종 그를 속이기까지 하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다른 무엇보다 더 신뢰하는 일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면, 그 반대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일 것이다.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견해와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잠 3:5-6).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피할 길을 찾으면 유혹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전 10:13). 하나님을 신뢰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코람 데오사람들은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치우치기 쉽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지혜로운 사람들의 훈계에 귀를 기울이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지혜롭게 행하려면 우리의 어리석음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께로 돌이켜 그분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 또한 우리는 주님과 오랫동안 동행해 온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 그들을 본보기로 삼으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alking in Wisdom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는 하나님
2018-11-01
잠언 3장 5-6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에서 발견되는 지혜에 관한 가르침은 주변 세상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 할 때가 많다(예를 들면, 잠 6:6-11). 잠언의 가르침은 항상 창조주에 대한 관심을 직접적으로 촉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과 다른 저자들이 세속적 세계관을 의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길 때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잠언의 기본적인 전제다. 오늘의 본문도 그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많은 성경 본문 가운데 하나다.잠언 3장 5절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신뢰하라고 권고한다. 이 구절은 단지 지성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길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말고 천지의 창조주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지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는 것이 지혜롭게 되는 길이라면(잠 13:20), 참되고 지속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혜 자체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와 동행하는 자들을 축복하신다(요일 1:5-10). 하나님이 그들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지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왕상 3:1-15; 잠 2:6; 28:5).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분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그분의 은혜와 인도를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스스로의 재능과 지식만을 의지하며 홀로 인생의 길을 헤쳐 나가려는 것은 그와는 정반대되는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잠 3:5). 아담의 죄는 자기 자신을 의지했던 것, 곧 하나님의 계시와 상관없이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 지혜는 우리의 계획이나 생각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께 명철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창조주를 신뢰하면 그분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유익을 얻는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삶의 길을 인도해 줄 지혜를 허락하신다. 따라서 그들은 죄의 길로 치우치지 않고,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 나감으로써 결국에는 유익을 얻는다. 불과 구름 기둥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은 비록 겉으로는 그것이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이끌고 다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올바른 길을 통해 무사히 가나안에 안착한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삶의 길은 굴곡이 심하고, 울퉁불퉁하게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그분의 관점뿐이다) 그 길은 곧고 평안하다. 그 길은 그분이 우리가 있기를 원하시는 곳으로 정확하게 우리를 인도한다.코람 데오나중에 뒤를 돌아보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있기를 원하시는 곳에 도착했을 때 뒤를 돌아보면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했던 구불구불했던 길이 실상은 너무나도 곧고 완벽한 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에는 힘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길이 꼭 필요했던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그분은 항상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는 반드시 그 점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traightening Our Paths 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
2018-11-01
시편 23편 1-3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편은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시편 가운데 하나다. 자기 백성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위로가 넘치는 표현을 사용해 묘사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이 시편은 고대 근동 지역의 목자를 비유로 삼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한다.목자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매우 흔했다. 심지어는 그 지역의 이방 나라들도 목자를 비유로 활용해 왕들이 제공하는 보호와 통치를 묘사할 정도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목자'로 일컬었다(삼하 5:2; 겔 34:23). 그러나 시편 23편과 같은 성경 본문은 그런 목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일에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궁극적인 목자이신 주님을 섬기는 작은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 점은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벧전 5:1-4).시편 23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1-3절은 물질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모두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영혼과 육체의 휴식을 허락하신다. 다윗은 사울과 압살롬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도 있었고, 또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삼상 21:1-9; 삼하 17장). 그러나 다윗처럼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그가 누렸던 삶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얼마든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존 칼빈은 이렇게 주석했다. "모든 사람이 다윗과 똑같은 축복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통해 그분의 돌보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자상하게 보살피시는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다윗은 하나님이 원수들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여 주실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 시편을 마무리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만찬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날을 기대했다(시 23:5-6). 그러나 그는 그러기에 앞서 하나님이 막대기와 지팡이로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고 말했다(4절). 고대 세계의 목자들은 맹수들을 때려 쫓아내는 데 사용하는 막대기와 양떼가 흩어지기 않게 잘 몰고 다니는 데 사용하는 지팡이를 지니고 다녔다. 양들을 좁고 협착한 길로 인도하면서 지팡이로 톡톡 치기도 하고 콕콕 찌르기도 했던 목자의 행위가 양들에게는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징계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코람 데오다윗은 시편 8편에서 다른 피조물의 장엄함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인간을 왜 그토록 생각하고 돌보시는 것이냐고 하나님께 물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은 영광스런 특권이자 크나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Lord , Our Shepherd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처음
이전
열린
191
페이지
192
페이지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