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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용서받았다고 느껴지지 않아 슬플 때
by Jason James2022-07-12

우리가 은혜의 위로를 받으려면, (죄를 용서받았다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우리 슬픔이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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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때 처음으로 포르노를 봤다. 이미지가 심장에 구멍을 낼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정말 몰랐다. 예수님이 내 영혼을 구해 주신 후에도 그 독성이 남아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스물네 살 때, 복음과 공동체와 회개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마침내 나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만 같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 일은 2007년에 일어났다. 지금 되돌아보니 나는 그 씨름을 10년이나 했다. 유혹을 물리치려는 씨름이었지만 또한 내가 용서받았다고 믿으려는 씨름이기도 했다. 씨름에서 이겼을 때는 산 정상에 올라선 느낌이었지만, 실패의 벼랑 끝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 많았다. 그렇게 질 때마다 나는 용서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고,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다고 믿었다.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왜 고통이 가시지 않는 걸까? 왜 용서받았다고 안 느껴지지?


“너 자신을 용서해.” 어떤 친구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너를 죄책감이라는 감옥에 가둔 건 너 자신이고, 널 풀어줄 열쇠를 쥐고 있는 교도관도 너 자신이야.” 또 이런 조언을 바로잡아 주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용서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며, 감정은 중요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라고 격려해 줄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조언을 모두 받았다. 후자에 동의하면서도, “더 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 이 진리가 왜 와닿지 않는 것이지? 왜 위로가 안 되지? 정말 이상했다. 우리가 은혜의 위로를 받으려면, 우리 슬픔이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알게 된 것은 이렇다. 

   

우리 슬픔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기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우리가 슬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 우리가 유혹에 넘어갔고 죄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해 정직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슬픔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깨닫게 된다.


슬픔이 흔히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을 어디일까?


1. 하나님을 거슬려서 생기는 슬픔: 친밀감의 상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느끼는 경건한 슬픔은 합당한 슬픔이다. 우리가 짓는 죄는 모두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할 때 우리는 마땅히 슬퍼해야 한다(엡 4:29-32). 우리가 하나님을 슬프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맺고 있던 친밀한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친교가 회복되고 나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전만큼 따뜻하게 대해 주시지는 않을 거라고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슬프게 했을 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위로가 있다.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일 4:19). 우리가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가 아니라 최악의 상태에 있을 때 아버지가 우리에게 오셨고 아들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롬 5:8).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받은 은혜 때문에 생기는 슬픔: 정의의 상실을 앎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되어야 하는 경건한 슬픔이 때로는 우울증의 회전문이 될 수도 있다. 정의감이 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릴 때마다 더 깊은 절망에 빠져들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차라리 벌을 받고 슬픔에 잠겨 있는 게 낫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위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위로도 필요하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죗값을 모두 치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우리 죄의 정당한 심판이 임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요일 1:9).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며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시다(롬 3:26). 


3. 은혜가 필요해서 생기는 슬픔: 자신만만했던 능력의 상실


하나님의 은혜의 위로와 정의의 위로를 안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슬픔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아상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가 드러내기도 하지만 우리 죄 자체가 드러내기도 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는 고결하지도 않고, 우리가 짐작하는 것만큼 우리는 강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유혹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우리의 무능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런 사실이 우리 슬픔의 출처가 되지 않을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죄를 알고 계시는데도 우리는 지금도 우리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질하고 있다는 현실이, 우리가 약하다는 진실 곧 우리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이 필요한 존재하는 진실이 말이다.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우리를 가장 심하게 괴롭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된 자아상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러한 상실감을 느껴야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구주가 필요한 망가진 죄인임을―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기


자기 힘을 과대평가하고 그래서 비통에 젖은 첫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마 26:75).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만만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 26:31-35). 베드로는 예수님의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 5:8). 하지만 그 뒤로 언제부턴가 베드로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풀려진 자아의식을 사탄이 밀 까부르듯이 농락할 때(눅 22:31)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가 있을까? 우리는 자신만만했던 우리 힘의 상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우리의 죄에 우리는 여전히 충격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충격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아니,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응시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식과 영적 허세를 꿰뚫어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풀려진 장담에 넘어가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와 약점과 죄를 똑바로 보시며(눅 22:61),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와 힘과 능력을 보여주기로 자비롭게 결심하신다.


예수님은 그가 부르시는 사람들을 아신다는 진리에 우리는 기댈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의 크기와 한계를 아신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이 무한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다.




원제: When I Don’t Feel Forgive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김은홍


우리는 자신만만했던 우리 힘의 상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평화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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