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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기독교 문화일까?
기독교 문화 점검을 위한 세 가지 질문
by 서나영
2024-04-15
선한 것을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뮤지컬 벤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려던 열심당의 역사적 스토리를 배경으로 하는데, 기마전차를 타고 대결하는 화려한 장면, 카타콤에 숨어 작은 촛불을 들고 조용히 소망을 노래하는 강력한 음향 효과, 노예에서 장군의 양아들이 되는 드라마틱한 순간 등 수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는 모습에서 오열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가장 의아했던 순간은 빌라도가 남창들의 화려한 춤을 즐기는 장면인데, 관중석에서 가장 크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 일이다. 두 시간 반가량 이어졌던 수많은 곡 가운데 압도적으로 가장 큰 환호와 박수 소리였다. 관중에게는 예수님의 골고다 길보다, 빌라도의 은밀한 파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새삼 놀랐던 경험이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기독교 소설로 큰 성공을 거뒀다. 사탄의 계급사회에서 선배 마귀가 신참 마귀에게 멘토링을 하는 이야기인데,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고민 상담을 통해 “믿는 자를 어떻게 쓰러트리는지” 전략을 제시하는 서른한 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에필로그에 루이스는 이 소설에 대해 시대에 맞게 확대 개정을 하자는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개정판을 쓰지 않은 이유와 함께, 소설 속 편지를 서른한 편밖에 작성하지 못한 이유를 밝힌다. 그가 실제로 마귀의 입장이 되어 글을 쓰다 보니 영적으로 거의 녹다운이 되어 더 쓸 수 없었으며, 다시는 그런 영적 시련을 겪을 수 없어 개정판을 쓸 수 없다고 말이다. 루이스는 마귀 입장에서 썼듯이 천사들의 입장도 써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만약 마귀 ‘스크루테이프’가 아니라 천사장 ‘미가엘’의 편지로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련하게도 본성이 죄인인 인간은 선보다는 악이 더 매력적으로 끌리는 마음의 자석을 장착하고 있다. 동시에 영적 거장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이런 마귀 입장의 편지 소설을 쓰며 마음과 삶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도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복음 사역 중에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 고백하며, 이에 대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3)라고 설명한다. 바울의 전통을 따라 세상과 소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많은 문화적 노력이 있어 왔다. 그들과 비슷한 모양이 되어, 이질감을 없애고 복음을 전할 틈새와 기회를 엿보는 노력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삶을 나누고 그들의 삶을 고칠 권능의 사역을 꿈꾼다(마 9:10-13).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민요 가락을 빌려 힘찬 찬송가를 만들었을 당시, 그가 받았을 종교적 공격은 상상하기 힘들다. 웨슬리 형제가 서정적 찬송을 만들고 개혁을 꾀했을 당시, 그들은 매일 달걀을 맞아 멀쩡한 양복이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일컫는 찬송들은 문화전쟁을 이기고 마침내 울려 퍼지는 승리의 나팔과도 같다. 그뿐이 아니다. 오랫동안 타락한 매개체인 줄로만 알았던 추상화, 영상예술, 판타지 소설 등의 장르는 오늘날 복음을 나르는 중요한 수단이 된 듯하다. 문화와의 동행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었음을 쉽게 부인할 수 없다.최근 한국의 유명한 워십팀의 ‘게임방 시리즈’ 편곡을 들었다. 게임 슈퍼마리오와 카트라이더의 음원 또는 BTS의 다이너마이트의 음원 등을 전통 찬송의 간주에 넣어, “장로님들 뒷목 잡고 쓰러지는 편곡”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려 수준 높은 공연 실력을 보였다. 또 다른 잘 알려진 CCM 그룹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가 편곡이 화제다. 기존 찬송가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재즈 화성의 반주에, 악기팀과 보컬 전원 선글라스를 끼고, 메인보컬은 미니스커트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다리를 흔들며 부르는 영상이 ‘세상 힙한 찬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인 감독이 만들고 그리스도인 배우들이 참여했다는 흥행 가도에 진입한 무당 주제 영화도 있다. 큰 이슈가 된 워십팀들의 담당 목사의 간증들, 감독과 배우들이 매번 기도하고 시작했다는 오컬트 영화의 뒷이야기들이 기사와 영상으로 그들의 작품의 ‘선교적 마인드’를 뒷받침한다. 복음을 위한 세상과의 소통, 복음을 위한 젊은 세대의 문화와의 소통, 아름다운 표현이다. 소통의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고,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기독교와 세상과의 소통이 막히지 않고 오해가 없으며 뜻이 서로 통한다’는 명제는 참으로 이상하다. 세상 문화가 기독교를 탄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가고 있다면, 세상과 소통이 너무 잘 되는 것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눈을 보고 육성으로 말씀하셔도 종교주의에 물든 세상은 듣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설교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을 귀가 없었다. 복음은 소통이 아니라 선포해야 하는 엄청난 소식이다. 이 세대는 문화 점검을 위한 모든 처방을 혐오한다. 윤리, 사랑, 선, 진실, 질서, 희생 등의 의미들로 기준을 세우는 것을 유독 싫어한다. 성과 생명의 자기 선택권 주장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는 논리로는 이길 수 없다. 예술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s for Arts’ Sake) 사조는 종교와 정권과 윤리도덕의 참견을 막아낼 기가 막힌 방어막이다. 이 세대와 닮은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 속에, 그들이 가진 생각의 틀을 닮겠다는 결심만은 하지 않아야 한다.우리는 기독교 문화의 변화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듣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문화에 대한 모든 종류의 태도에 깊게 머물러봤던 학자의 양심으로, 소란스럽지 않더라도 강력한 에너지를 들여 점검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싶다. 그 첫걸음으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 함께 변하는 기독교 문화를 점검할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1. 복음 전파인가, 종교적 구걸인가?최근 중고등학생 학습과 세례 문답 교육에서 한 학생이 뛰쳐나오고 싶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세례와 입교를 위해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억지로 앉아 있고, 담당 교역자 목사님이 이제 대답해야 한다고 구걸하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가장 큰 기쁨과 은혜의 순간,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못한 응답을 구걸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 같아 듣는 순간 함께 참담함을 느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바보 취급을 당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고 악한 말을 할 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차라리 바보로 불릴 때가 좋았다. 바보라는 말이 듣기 싫은 현대인들은 언제부턴가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자처했다.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하시며 “그 지아비 대신에 외인과 사통하여 간음하는 아내”(겔 16:32)로 비유했다. 창기는 오히려 선물을 받고 값을 받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선물을 줘가며 행음하고,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겔 15:33) 한탄하셨다. 차라리 값을 받는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물을 줘가며 생명과 같은 귀한 것을 내준다는 의미다. 최근 유행하는 “힙하다”라는 표현은 유행을 따르면서도 개성이 돋보이는 모습에 대한 칭찬이다. 힙한 퍼포먼스와 함께 펼쳐지는 찬송가는 선교적 도구인가, 아니면 귀한 것을 포기하며 내어주고 세상 문화의 관심을 구걸하는 행위인가,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한 번 들어달라고 사정하며 대중의 인기를 위해 포기한 것이, 그리고 얻은 문화와의 소통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대중의 안목이 두려워 장착한 ‘힙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함보다 앞서지는 않았는지, 진지하게 주님께 물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루터와 웨슬리는 아니며 바울과 루이스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지만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선한 것을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든 노력이 최고로 귀하신 예수님의 이름과 그 위상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지를 않기를, 정말 소중한 것을 자존심 없이 내어주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2. 기쁨인가, 엔터테인먼트인가?성경에서 최고의 기쁨 표현은 ‘할렐루야’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의 할렐루야는 시편에 23번, 계시록에 4번 나오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보여준다.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외쳤던 ‘할렐루야’는 그 편지를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함께 외칠 것을 요구했고, 그들은 고난과 핍박과 환란 속 매일 죽음의 위협을 받는 자들이었다. 바울이 호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쇠고랑을 차고 찬양했듯이(행 16:25), 할렐루야의 기쁨은 그런 것이다. 상황에 관계 없는 영원한 구주와의 연합으로 인한 기쁨이다. 반면 엔터테인먼트, 즉 오락성 기쁨은 다른 종의 기쁨이다. 물론 오락성 놀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핵심 신학이 담긴 그의 놀이의 신학(Theology of Play)을 읽어보라. 즐거움과 희락은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할 귀중한 가치다. 다만 좋고 신날 때 춤추며 노래하는 단면적인 기쁨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게임 음원을 넣어 신나게 놀며 찬양하는 모습에 오락성이 보인다고 비판하는 경우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고난 속 피어나는 기쁨을 아는 자들의 우려일 것이다. 할렐루야를 가장 진지하게 외쳤던 다윗과 요한의 상황적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진정성을 점검하기에 적합하다. 기쁠 때 찬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한다. 기독교의 참된 기쁨은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최고의 감정 상태다. 우리가 대하고 만드는 기독교 문화 콘텐츠가 요한이 말했던 할렐루야의 기쁨인지, 아니면 이방인이 단순히 춤추게 하려는 오락성 도구인지 점검하자. 3. 사랑과 인내로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 보통은 두 가지의 태도 중 하나를 택한다. 첫 번째 태도는 부정하고 보지 않는 것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잃어버리려고 애써 무시한다. 두 번째 태도는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화를 쏟아낸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사실, 그렇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땅도 단 한 평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다. 이 땅에 무균실은 있어도 죄 없는 땅은 없다. 우리가 성화를 이뤄야 할 곳은 먼지가 쌓인 땅 위며, 아무리 더러워도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땅이다. 한 그리스도인이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엡 4:13)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랑하고 인내하기 위해서다(살후 3:5). 참고 기도하며 기다리며 지혜롭게 성령 안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무시와 비판이 아닌, 사랑으로 단호함과 겸손함을 지키는 것은 에너지가 아주 많이 드는 일이다. 바울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1:31) 호소했다. 한국의 교회는 비판이 아니라 바울처럼 인내함으로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가르칠 그리스도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의 문화를 꿈꾸며, Soli Deo gloria!
전쟁이 터지고 반년, 이스라엘인 목사는 고백한다. “나는 ...
by Sarah Eekhoff Zylstra·David Zadok
2024-04-12
전 이스라엘 육군 장교이자 개혁파 목사인 데이비드 자독은 그날 받은 아내의 전화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0월 7일 이른 아침에 그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이스라엘에 있는 집을 떠나 밤새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에 도착한 지 불과 한두 시간 뒤였다. 그의 여행은 스칸디나비아 교회들과 맺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다.“여보, 들었어요? 전쟁이 일어났어요.” 머리가 멍해지며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그리고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를 떠올렸다. “여기 핀란드에서?”“아니요, 이스라엘이에요. 가자에서요.”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자독은 귀국 편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은 대부분이 폐쇄되었다. 보통 400달러 정도 드는 베를린에서 텔아비브까지의 비행이 1,200달러로 올랐지만, 그것도 바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 했고, 그동안 핀란드에서 두 번 설교했다. “호세아 1장을 설교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 짧은 장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발견되는 것처럼 성경의 전체 이야기는 다른 게 아니라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죽음과 삶에 관한 것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많은 국가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랐습니다. 그건 사실상 영적인 싸움입니다.”하마스와의 전투도 영적인 싸움이라고 그는 말했다.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돈에 하마스가 만족할 리 없었다. 하마스는 여호와를 미워하고 아브라함 시대부터 그의 이름과 연관된 사람들을 멸망시키고 싶어 했다. 자독은 십 대 때 이란을 떠나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예수를 믿었고,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방위군(IDF)에서 복무했다. 그런 그에게 육적인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영적 전쟁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복음연합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처음 들었는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마지막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포함해서) 그의 사역을 위한 문을 어떻게 여시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하마스와의 전쟁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았는지 물었다.이스라엘에서 태어나서 이란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요? 우리 가족은 아마도 바빌로니아 유대인의 후손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이라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바그다드의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특히 파르후드의 밤(Farhud Night)에 집과 회당이 불탔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란 국경을 넘어 탈출했습니다. 전쟁 내내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아랍 국가에서 이스라엘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는 사실상 나중에 IDF로 알려진 조직의 일원이었습니다.전쟁이 끝난 후 부모님은 이스라엘에 정착했고 나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나와 남동생, 여동생을 데리고 이란에 있는 가족을 방문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도 없고 결혼 생활도 어려운 삼촌, 이모네에 나를 맡겼습니다. 아마도 아이가 있으면 결혼 생활이 괜찮아질 거라 여겼던 거 같아요. 그들의 결혼 생활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내가 같이 있음으로 다행히 이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이모, 삼촌과 함께 이란에서 자랐습니다.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 일 년 넘게 인질이 억류되었던 거 기억합니까? 글쎄요, 우리는 이스라엘인이 미국인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영사관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삼촌 부부는 나를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거기서 신앙을 가진 건가요? 친구 하나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에서 열린 성서 연구에 나를 초대했습니다. 네비게이토가 주최하는 거였어요. 내 영어 실력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날 내 평생 들었던 거보다 더 많이 예수의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몇 명이 창세기 3장을 나와 공유했고, 나는 그 이야기에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할머니가 전에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오실 메시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약성경에 오더니, 거기서 만나는 예수님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거기에 관해서 별로 듣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벌써 열일곱 살인데,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물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요한복음을 읽으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내게는 주말에 유학생을 초대하는 가족으로부터 받은 기독교 성경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의상 받았던 겁니다. 나중에 버릴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는 구약도 들어 있어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거룩한 성경은 버리면 안 되니까요. 우리는 절대로 성경을 버리지 않습니다. 성경이 오래되면 묘지 입구의 특별한 장소에 놓아두거나 어딘가에 묻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요한복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정도 읽었습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마치 하나님께서 새로운 퍼즐을 하나씩 맞추는 거 같았습니다. 결국 나는 회심했습니다.가족이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메시아를 찾았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편지로 전했습니다. 그때까지 이란에 있던 삼촌과 숙모에게 히브리어와 페르시아어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편지가 분실된 게 아닌가 싶어서 한 번 더 썼습니다. 이번에는 답장이 왔지만, 회심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다른 내용에만 답을 썼더군요. 내 믿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나는 왜 그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몇 주 후에 삼촌이 미국에 왔습니다. 우리는 몇몇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디저트가 나오자 삼촌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데이비드, 아마도 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구나. 우리 생각을 지금 솔직하게 전달하마. 네가 마약 중독자나 감옥에 갇힌 범죄자가 되었다면, 차라리 우리는 훨씬 덜 부끄러웠을 거다.”그는 나를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가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수줍음이 많았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냥 이렇게만 말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내가 계속 미국에 머물게 허락했고, 나는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요? 학사 학위를 받고 군 복무를 위해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나는 IDF에서 약 구 년을 복무했고, 국방부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에서 수석 엔지니어링 및 시스템 분석가로 일했습니다.삼촌과 이모는 이란을 탈출해서 이스라엘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자 두 분이 나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들이 없다. 너는 이제 우리에게 죽은 사람이다.” 나는 교회 근처의 아파트에 세를 얻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가족과의 관계가 좋아졌고요. 하지만 결코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어요. 약 십사 년 전, 형이 뇌종양으로 죽었습니다. 나는 형이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데이비드, 네 형이 왜 죽어가는지 알아?”“아니요?” “네가 예수를 믿어서 그래.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족에게 복수를 하시고 계셔. 너 때문에 말이야.” 어머니의 말은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 삼촌, 그리고 이모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고 또 보살피기 위해서 나는 이스라엘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했습니다.그리스도와 동행한 이후 당신은 거의 처음부터 개혁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을 통틀어서 내가 속한 건 단 두 교회가 전부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다녔던 교회는 뉴라이프 장로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교회는 Grace & Truth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은혜의 교리를 배운 이스라엘 그리스도인에 의해 1976년에 개척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가까운 선교사님의 추천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니까요. Grace & Truth Church in Kanot, Israel / Courtesy of David Zadok 아내와 두 번째 데이트할 때 나는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TULIP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두 번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신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처음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히브리어로 번역했습니다. Robert Godfrey가 서문을 썼습니다.당신이 번역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HaGefen 출판사에 대해서 알려주세요.로버트 맥체인(Robert M'Cheyne)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그가 이스라엘에 온 건 1839년입니다.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보고하기를 유대인을 위한 기독교 선교 단체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CWI(Christian Witness to Israel) 가 되었고, 그 단체는 1974년에 HaGefen Publishing을 시작했습니다.히브리어로 책을 내는 기독교 출판사는 전 세계에 두세 군데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나마 규모가 가장 크지만 한 해 동안 인쇄하는 책은 고작해야 8-9종이고 350부씩 정도만 인쇄합니다. 그렇지만 그 필요성은 엄청납니다. 성경 66권 중 14-15권만 히브리어 주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어 주석을 다 출판했습니다. 우리는 매튜 헨리 주석, 스펄전의 Checkbook of Faith, R. C. 스프로울, 그리고 존 맥아더와 폴 워셔의 책 몇 권을 출판했습니다.우리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책 제작에는 보조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또 책을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재고의 약 25퍼센트를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모든 프로젝트 전에는 모금이 필요합니다. 막 완료한 대규모 프로젝트 중 하나는 (무려 이십 년이 걸렸습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를 위해서 단어별로 또 구절별로 모든 구약을 현대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잠깐만요. 구약이 원래 히브리어인데, 구약을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있다고요? 다윗 왕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지금 약 3000년 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언어는 발전하고 변형되었습니다. 게다가 지난 2000년 동안 히브리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어요. 히브리어는 사실상 19세기 후반에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iezer Ben Yehuda)에 의해서 “부활”했을 뿐입니다. 거기서 출판한 책을 누가 읽나요? 이스라엘에도 개혁파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인구가 9백만이 조금 넘는 나라입니다. 신자 수는 최대한 잡을 때, 삼만 명 정도에요.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어 더 폭넓은 그리스도인 독자를 대상으로 출판합니다. 수년 동안 Grace & Truth는 유일한 개혁 교회였습니다. 지난 5-6년 동안 개혁교회연합 (Fellowship of Reformed Churches)이라는 네트워크에 속한 교회는 아홉 개로 늘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 교회는 러시아어를 사용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대규모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했거든요. 교회 중 한 곳은 북부에 있었는데 하마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대피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전쟁이 다른 부분에서는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그리고 당신에게는요? 전쟁이 시작되고 첫 삼 주 동안 내 안에는 엄청난 투쟁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마스가 행한 일, 여성을 살해하고 강간하고, 아기를 오븐에 넣고, 임신한 산모의 자궁을 여는 만행을 보았습니다. 나는 우리 공군이 가자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모두를 죽여 버리길 바랐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고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이해하는 데에까지 몇 주가 걸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겪어서 기쁩니다. 왜냐하면 그 덕분에 나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원수와 대적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우리는 이스라엘에 있는 그리스도인 아랍인과 팔레스타인인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스무 가족에게 수백 달러 상당의 상품권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군인들을 위한 구명 장비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삼천 개 이상의 식료품 팩을 제공했습니다.우리 교회 성도는 백칠십 명쯤 되는데, 우리 딸을 포함해 서른다섯 명이 예비군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 아들은 예비군 과정을 밟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일찍 지난주에 입대했습니다. 아내와 나는 지난주에 병원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 군인을 심방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구하셨지만, 그는 부상을 입었고, 몇 주 동안 입원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치료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그의 부모에게 거의 만 달러를 보냈습니다.북부 지역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 어느 에티오피아 가정의 큰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습니다. 몇 달 전에 어머니는 신장과 간 이식을 받아야 했고, 남편은 아내를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다섯 있는데,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가서 자금을 제공할 예정입니다.10월 7일 우리 교회의 다섯 가족이 집에서 대피했습니다. 한 가족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예비군이고, 아내는 어린 자녀를 돌보고 있는데 임신 중이어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가족도 돕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사역을 이어가고 있나요? 내게 정말 도움이 되고, 지금도 나를 이끄는 것은 심판과 구원의 큰 그림을 보는 눈입니다. 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 50:20).나는 어떤 면에서 그 사실을 이미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지금 도움이 너무나 절실하기에 작은 도움이라도 큰 힘이 되는 시기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육군 고위 간부들 그리고 병원장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왜 기부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전쟁 전에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화입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이라크에서 유대인들이 흩어지는 일, 1973년 전쟁, 이슬람 혁명, 코로나19, 심지어 이번 하마스와의 전쟁까지 세계적인 수많은 사건이 스쳐 지나갑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이 모두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봅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다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항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 즉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인 사건을 하나님께서 전 세계 사람들의 삶에서 그분의 개인적인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성경은 심판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지만, 찬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류에게 가장 끔찍한 재앙이 닥친 바로 그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슬픔, 죽음, 심판에서 구원, 갱신, 찬양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동일한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삶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심판과 죽음, 그리고 부활, 무엇보다 지금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 관한 것입니다.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출처: 6 Months Later, Israeli Pastor Says, ‘I’m Commanded to Love My Enemies’
불신자에게도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라고 말해도...
by Justin Dillehay
2024-04-11
이 글 제목을 보고 의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일반 속죄(general atonement,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교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애초에 지금 제기하는 질문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는 정해진 또는 제한된 속죄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한다.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란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의 구원은 아버지께서 미리 그에게 주신, 나라마다 있는 한정된 (그러나 아주 많은) 숫자의 죄인에게만 해당한다(요 6:38-39).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 누구라도 최후의 심판에서 정죄를 받지 않는다(롬 8:34). 그리스도가 대신해서 죽은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롬 5:10).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주시지 않았다(요 17:9)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코 모든 사람을 위한 게 아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죽은 건 그의 양을 위해서이고,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양은 아니다(요 10:11, 26). 예수님은 신부를 위해 죽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신부는 아니다(엡 5:25; 계 19:7-8). 구원받는 믿음의 증거 없이는 예수님의 양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지금 불신자에게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여기에 관해서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까다로운 질문솔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제한 속죄를 고수하는 목사이다. 나는 방금 요약한 주장을 믿는다. 더 나아가 나는 설교할 때나 개인적인 대화에서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까다로운 질문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하나님의 선택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복음 전파가 가능하겠지만, 믿지 않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예 이야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건 쉽지 않다(고전 15:1-3; 딤전 1:15; 벧전 3:18).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믿지 않는 죄인이 누구인데요?”라는 질문이 나오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누군가는 “속죄에 당신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걸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런 속죄가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라고 물을 수도 있다.이것이 아마도 내가 읽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제목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해서 단호하게 “안 된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보통은 “안 된다. 하지만”(또는 심지어 “괜찮다. 하지만”)과 같은 식으로 대답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도할 때 이 특정 문장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이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를 전도할 때 사용하는 경우먼저, 이 문장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대단하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라. 예를 들어, 사도행전 속 그 어떤 전도 설교에도 이런 구절이 들어간 사례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었다면, 이 문장을 정통 복음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아서는 안 된다. 둘째, 분명히 회개하고 믿을 때까지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불신자에게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그리스도인도 그렇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는 말 때문에 불신자가 자신의 죄와 불신앙에 대해서까지도 안정감을 느낀다면, 그 결과는 심각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5)라고 상기시키셨다. 마지막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진노까지 느끼도록 도와야 한다. 놀랍게도 나는 어떤 전도하는 사람이 불신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당신에게 진노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요한일서 2:2이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 (즉, 진노를 없애는 희생)”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 그리고 그 제물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진노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복음 3:36의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와 완전히 모순된다. 믿기 전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불신자를 향해서 진노하신다. 사실상, 그분의 사랑이 단순한 감상적 사랑으로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를 전도할 때 사용하지 않는 경우첫째, 그 말을 하면서 전도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화내지 말라. 비록 그들이 제한 속죄는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사실상 이런 의미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건 당신이 그를 믿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당신도 동의하지 않는가? 둘째, 언어 사용에 있어서 사도들보다 더 조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성경보다 더 신중하다면, 칼뱅주의야말로 전도를 죽인다는 혹자의 우려를 정당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불신자에게 “예수께서 너희를 위해 죽으셨다”라고 말하지 않은 건 맞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전도를 하면서 그와 비슷한 호소를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 “이 약속은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즉, 성령의 약속과 죄 사함의 약속)(사도행전 2:39).·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주시려고 …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3:26).·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10:43).·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그대가[단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6:31).그러므로 비록 “알미니우스주의”처럼 들리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실상 찰스 스펄전만큼 제한 속죄를 확고하게 받아들인 설교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를 향해 무척 자유롭게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는 하이퍼 칼뱅주의자들로부터 자주 공격받았다. 그것은 스펄전의 목표가 결코 강성 칼뱅주의자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란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사랑까지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라. 복음은 경고인 동시에 구애이다. 젊은 개혁파 설교자들로부터 불신자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해도 괜찮냐는 질문은 받은 D. A. 카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나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안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것은 사실이다.) … 성령께서는 진리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 그러나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죄에 대한 확신은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할 뿐, 죄인에게 하나님의 용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 그것을 위해서는 더 많은 진실이 필요하다.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준비와 의지가 있음을 확신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길뿐이다. … 사랑은 큰 매력이다. 복음을 호소하는 데에 있어서 사랑은 가장 중요하다. … 그리고 이 사랑은 누군가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언제나 ‘좋은 소식’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구원은 하나님의 능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회개의 자리로 이끌 수 있다(롬 2:4). 제한 속죄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의 부정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더 분명하게 인식함으로 그 사랑을 더욱 심화시킨다. 남자가 아내를 특별하게 사랑하면서 모든 여자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신부를 독특하게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실 수 있다(막 10:21 참조).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5:25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제한 속죄의 복음은 예수님이 신부를 위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죽으셨지만, 그 후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모든 사람을 그 관계로 초대하신다고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계 22:17). 우리가 그런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데도 예수님께서 정말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나 하면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출처: Can I Tell an Unbeliever ‘Jesus Died for You’?
본회퍼에게서 배우는 ‘맹점’의 진실
by Devin Maddox
2024-04-09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 - 1945년 4월 9일)에릭 메탁사스의 디트리히 본회퍼가 출간되자 일부 본회퍼 전문가들이 이 책을 비판했지만, 디트리히 본회퍼의 이름을 이보다 더 널리 알린 책이 있는지 따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 독자들은 오랫동안 본회퍼의 Discipleship, Life Togeth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을 읽었지만, 메탁사스의 이 대작은 본회퍼를 다시금 알려주는 전례 없는 영향을 끼쳤다.메탁사스의 많은 독자가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본회퍼의 삶에 대한 세부적인 부분들을 알게 되고서는 놀란다. 에버하르트 베트게의 비길 데 없는 걸작 디트리히 본회퍼가 영어로 번역되어 나오면서 대중이 접할 수 있었던 본회퍼의 삶에는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많았지만, 메탁사스의 책이 본회퍼 학자나 역사가들이나 알 수 있던 그런 것들을 일반 독자들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메탁사스에게 큰 빚을 졌다. 본회퍼가 걸어간 삶의 여정을 읽어 알게 된 독자들은 본회퍼가 미국에 체류하던 시기, 특히 그가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본회퍼가 할렘(Harlem)에 있는 [미국 흑인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상징이 된] 아비시니안 침례교회(Abyssinian Baptist Church)에서 예배하고 청소년 사역에 참여한 경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흥미를 느낀다. 사람들은 또 본회퍼가 프랭크 피셔(Frank Fisher)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과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눴다는 사실에 감명받는다. 프랭크 피셔는 본회퍼를 하워드 대학교(Howard University, 워싱턴 D.C.)에 데려갔었는데, 그 지역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피셔는 입장을 거부당했다(본회퍼는 그곳에서 식사하는 것을 거절했다). 사람들은 본회퍼가 미국 남부 딥 사우스(Deep South) 지역을 방문하고 흑인차별의 실상(Jim Crow)을 그의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충격을 받는다.본회퍼의 이러한 경험은 그의 삶에서 인종차별에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그의 이해력이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본회퍼에게도 맹점이 있었다.예를 들어, 디트리히 본회퍼가 미국에서 박사후과정을 공부하는 동안에 그의 형 카를 프리드리히(Karl Friedrich)와 주고받은 다음 편지를 살펴보자.카를-프리드리히 본회퍼에게:남부 주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기차 여행에는 분리가 아주 사소한 데까지 퍼져 있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흑인들의 자동차가 대체로 다른 자동차들보다 더 깨끗해 보였습니다. 백인들이 객차 안에 붐빌 때도 흑인 전용 객차 안에는 흑인이 단 한 명만 타고 있기도 해서 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남부 사람들이 흑인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혐오스럽기만 합니다. 이 점에서 목회자들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건 없습니다. 나는 남부 흑인들의 영가가 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진 가장 위대한 예술적 성취라고 확신합니다. 형제애, 평화 따위를 외치는 구호가 엄청나게 많은 나라에서 아직도 이런 것들이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DWE 10권, 269)디트리히 본회퍼, 1931년 1월 2일본회퍼의 형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답신했다.디트리히 본회퍼에게:네가 흑인 문제를 이렇게 철저하게 탐구할 기회를 얻었다니 기쁘다. 내가 거기에 있었을 때 나는 그것이 적어도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하버드 임명 취소 통보를 받았을 때 내가 그곳으로 완전히 이주하기를 꺼린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나 자신도 그런 유산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내 장래의 아이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 문제가 어떻게 바로잡힐 수 있는지 정말로 알 수 없고, 이게 수학에서처럼 실제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 것만 같다. 어쨌든 우리의 ‘유대인 문제’는 그것에 비하면 농담에 불과하다. 여전히 이곳에서는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적어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그렇지 않다. (DWE 10권, 276)카를 프리드리히 본회퍼, 1931년 1월 21일돌이켜보면 독일의 상황에서 인종차별과 싸우는 데 직접 헌신하게 될 두 사람이,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기 불과 2년 전에는 어떻게 진실을 보는 데 맹점이 있었는지 놀랍다. 소위 유대인 문제는 사실이지 농담이 아니었다.그러나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은 농담이 아니었다. 본회퍼 형제는 자기 나라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의 심각성은 과소평가했지만, 미국의 심각한 문제는 분명하게 보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두 나라 상황 모두에서 인종 편견은 끔찍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다. 우리는 다른 상황에서는 맹점을 쉽게 식별해 내면서도 우리 자신의 맹점은 키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맹점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이게 바로 맹점이라는 적절한 이름이 붙은 이유이다).맹점을 극복하는 방법을 본회퍼에게서 배울 수 있는 세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1. 나에게 맹점이 있다고 가정하라.그가 감옥에서 쓴 글로 보자면 본회퍼는 평균 이상의 자기 인식 수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중 가장 자기 인식이 강한 사람조차도 맹점을 키운다. 맹점을 극복하는 첫 단계는 이렇게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볼 수 없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래야 우리는 회개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2. 외부인을 초대하여 나의 맹점을 진단하라.그리스도인들은 외부 책무성(external accountability)을 원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이것이 맹점을 극복하는 데 고통스러운 부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에 (그리고 교리에) 맹점이 있는지 검토해 달라고 청해야 한다.3. 자기 인식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하라.마지막으로, 본회퍼와 같은 삶을 이어가려면 자기 인식의 성장에 높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 자기 평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로부터 배움을 통해 우리가 자신과 이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하는 삶(Life Together)의 복을 누릴 수 있다.출처: Bonhoeffer and Blind Spots번역: 김은홍
성찬식과 우상숭배
by 박혜영
2024-04-08
고난주간 수요일 저녁에 모이는 성찬식(주의 만찬) 참석을 위해 매번 성도들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시간을 내는 일도, 가장 붐비는 퇴근 시간에 모임 시간에 맞추어 안양에 도착하는 일도, 동네를 돌고 돌면서 차 댈 데를 찾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가 수요일 저녁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찬식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을 얻고자 하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귀한 것을 얻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살펴보니 제가 성찬식에 대한 글을 다섯 편이나 썼습니다. 여러 번 강조한 셈입니다. 20년 전 분립개척을 시작하면서 성찬식에 대한 저의 질문은 이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성찬식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면, 신자들은 성찬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적이 있는가? 애조 띤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음이 좀 짠해지는 그런 순간 말고, 진정 믿음이 견고해지고,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용기를 얻고,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고, 심지어 몸과 마음에 치유가 일어나는 그런 은혜의 경험이 있는가? 성찬식이 진정 은혜의 방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그렇다면 교회의 성도라면 질문해야 합니다. 성찬식에서 “참된 양식” “참된 음료”를 먹고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린도 교회가 하나의 반면교사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 11:20). 좀 더 정확한 번역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먹은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니”(ESV). 그들은 주의 만찬이라고 하여 먹었습니다. 그런데 참된 주의 만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원하는 신자들끼리 모여 먹고 마신 일에 불과했습니다. 성찬 신학이 빠져 있고, 성찬 신앙이 빠져 있는 주의 만찬은 그냥 음식을 먹고 마신 시간에 불과합니다.고린도 교회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우상숭배 문제, 곧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고전 10:21)하는 것인데, 저들은 겸하여 참여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내에 분쟁이 있었고, 차별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 11:22).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성찬식은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찬의 말씀으로 그 첫 번째 문제,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거나,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는 문제를 살짝 다루었습니다.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식을 자랑하며 강한 척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참고. 고전 8:1). 그러면서 이방신의 신전에서 열리는 연회나 친목 모임에 참석하여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친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 다음 교회로 모여서는 주의 잔을 마시고 주의 상에서 받아먹었습니다. ‘뭐, 어때!’ 하면서…. 오늘날 교회 신자들 가운데 다른 신전에 가서 절하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취직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 월급을 받고,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 먹고 마시면서 그렇게 해야만 만나주는 거래처가 주는 돈으로 먹고산다면, 그 신자의 주인은 과연 누구입니까? 우상숭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직접 규명했습니다.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나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마음과 관심은 어느 것 하나를 중히 여기거나 경히 여기기 마련이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소득이 많아지면 생활 규모를 늘리고, 생활 규모를 늘리면 유지하거나 더 늘리기 위해 더 많은 소득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더 바쁘게 더 많이 일해야 하고, 그러면서 신앙은 점점 경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냐고. 우리가 그런 상승기류에 사로잡혀 있다면, 성찬식이 은혜의 방편이라는 말은 아마 경험하기 힘들 겁니다.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2) ‘복음주의’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
by 문대원
2024-04-05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인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로잔 운동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한 두 번째 키워드는 ‘복음주의’입니다.근대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과 존 웨슬리의 부흥 운동에 그 역사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지역과 교단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이는 복음주의를 정의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영국 스털링 대학의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 교수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네 가지 핵심 요소로 규정했습니다. 이른바 “베빙턴의 사각형”이라 불리는 복음주의의 네 가지 특징은 성경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회심주의, 행동주의입니다. 복음주의 운동으로서 로잔의 공식 문서들은 이 네 가지 복음주의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성경주의(biblicism)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관으로, 고등비평에 기반한 자유주의 신학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자 절대 권위로 강조하며,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기적과 부활을 무오한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로잔 언약 2항은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무오한 척도임을 믿는다”라고 고백합니다.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이 구원의 유일한 방편임을 강조합니다. 로마가톨릭과 WCC가 타 종교 안에도 구원의 은혜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 것과 대조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단언합니다. 로잔 언약 3항은 “유일한 신인(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한 유일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회심주의(conversionism)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회심의 경험을 강조합니다. 구원은 바른 교리를 머리로 믿는 지성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 전인적인 경험입니다. 마닐라 선언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전도에 있어서 절대 필요하며, 따라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이는 중생이나 새로운 삶이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합니다.행동주의(activism)는 아직까지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전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20세기 초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판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사회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합니다. 로잔 언약 6항은 “우리는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비그리스도인 사회에 스며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 할 일 중에서 전도가 최우선이다”라고 강조합니다.19세기 이후로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D. L. 무디, A. T. 피어슨, R. A. 토레이 같은 복음주의 부흥사들은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대형집회를 열었는데, 이들의 사역은 당시 교회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례로, “케임브리지 7인”(The Cambridge Seven)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젊은 선교사들은 무디의 부흥집회를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깨닫고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미국과 영국의 사회, 교회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확산하는 방식 또한 달랐습니다. 국교회(state church) 개념이 없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주류 사회에서 분리되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개혁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국 사회의 개혁 운동을 이끌었던 클래펌회(Clapham Sect)는 투철한 복음주의자 윌리엄 윌버포스를 중심으로 세계에서 최초로 노예제도를 철폐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진리를 가려버리는 그 알약
by Peter Gurry
2024-04-04
2016년 여름, 한 과학자 그룹이 새로운 세계 지도책을 출판했다. 그 지도는 새로운 운송 경로에 관한 것도 또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심해 지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의 빛 공해 지도였다. 끔찍한 소식이었다. 그 지도에 따르면 미국인의 80퍼센트는 인공조명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은하수를 볼 수 없다. 인공조명은 여러 측면에서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이상 은하수를 볼 수 없게 된 우리는 뭔가를 잃어버렸다. 그 지도를 만든 수석연구원의 말이다. “문학, 종교, 철학, 과학은 물론 모든 예술도 하나같이 밤하늘을 보면서 고민하던 인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제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볼 가능성이 없이 자란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그리스도인에게 문제는 더 심각하다. 다윗이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밤하늘이었다(시 8:3-8).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곳도 하늘이었다(시 19:1). 별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보편성 때문에 오히려 특별하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별을 볼 수 있다(3절; 롬 10:18). 산이나 바다, 동물을 누구나 다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빛 공해가 이런 현실을 바꾼다. 그렇다고 실수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다윗이 들었던 것과 똑같은 메시지를 보내신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우리가 과학기술로 가려버렸다. 우리의 차이를 가려버리는 소음하늘과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우리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이다. 그리고 하늘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하나님에 관해서 증언한다. 몸은 우리 자신에 대해(잠 19:13-14; 벧전 3:7),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서(창 1:27; 시 8), 그리고 우리의 구속에 대해서(엡 5:31-32)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성-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전등이라는 기술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모호하게 만든 것처럼, 인간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인간의 성적 차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주요 기술은 1960년 FDA의 승인을 받은 경구 피임법이다.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경구피임약이 수많은 약 중에서 우리가 단순히 “알약”(the Pill)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약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기술은 여성에게 전례 없는 독립의 시대를 열었고, 따라서 출산을 연기하고 교육을 추구하며 정규직 고용을 추구하는 여성의 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세대의 머릿속에 있던 섹스와 출산 사이의 연관성을 단절시켰다. 경구 피임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무과실 이혼, 동성결혼, 그리고 오늘날의 트랜스젠더 운동의 초석이 놓였다. 더불어서 ‘임산부’ ‘수유’ ‘생리하는 사람’ 등의 용어에도 새로운 뉘앙스가 더해졌다. 피임약이 이를 가능하게 한 이유는 Mary Harrington이 쓴 것처럼 “남녀 간에 가장 줄일 수 없는 차이, 즉 임신 여부라는 차이를 사라지도록 약속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어떤 의미에서 교육학이며, 피임약은 여성의 출산 능력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출산을 고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성관계를 하고 싶은 남성의 욕구에 더 적합한 환경을 만들었다. 이런 역사는 광범위한 피임법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예상치 못한 결과의 하나인 혼외 출산의 극적인 증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George Akerlof와 Janet Yellen은 거의 삼십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다소 갑작스럽게 낙태와 피임의 증가가 목격되고 있다. 이를 생식 기술의 충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혼외 출산의 증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낙태와 피임으로 인해 미혼모가 줄어들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기가 생겨도 굳이 결혼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2014년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무려 40퍼센트가 결혼이라는 보호의 테두리 바깥에서 태어났다. 1960년에는 그 비율이 고작 5퍼센트에 불과했다. 과거에는 남자가 임신시킨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느꼈지만, 그런 의무감은 피임약의 보급과 함께 줄어들었다. 아니, 여자가 피임약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생식 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남자가 임신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초기 많은 여성 권리 운동가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남자는 이제 섹스에 대한 책임감에서 점점 더 해방감을 느낀다. 피임이 실패하는 경우, 남자는 조용히 낙태를 설득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얼마든지 아기 아버지의 동의 없이, 심지어 알리지도 않은 채 낙태가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낙태에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피임약이 초래하는 다른 효과에도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빛 공해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피임은 성적 차이의 찬란함을 보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때로는 욕망을) 흐리게 한다. 어느 때보다도 남자와 여자의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거기에 동의한다. 일에서든, 생활에서든, 교회에서든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여자의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 딸들이 어렸을 때 나도 이런 사고방식의 피해자였다. 나는 가끔 딸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고, 그런 다음 교사, 작가, 의사 등 온갖 멋진 직업을 제시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곧 엄마를 제외한 모든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를 깨끗하게 하자기술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무기력하거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건 아니다. 하늘의 경이로움을 보고 감상할 방법이 여전히 있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놀라운 차이를 보고 감상할 방법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1. 주의를 기울이자피임이 남자와 여자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한 내 이야기를 듣는 그리스도인은 하나같이 놀란다. 처음에는 피임이라는 게 그토록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못한다. 바로 그 사실, 피임에 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피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가르쳐야 한다. 오랫동안 개신교인은 피임이 가톨릭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로해 왔다. 순진한 착각이다. 피임약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봐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이다. 우리는 사실상 위험하다고 할 정도로까지 피임의 위력을 무시한다. 피임약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견해(책임감 있게 사용할지, 아니면 아예 쓰지 않을지)가 무엇이든, 이 작은 알약이 가져온 변화를 이해하지 않고서 현재의 문화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는 마셜 맥루한이 신기술에 대해 제기한 네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이 증진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이 쓸모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로 인해서 우리가 찾게 된 것은 무엇인가? 그 기술이 극단적으로 사용될 때 반전되거나 뒤집히는 것은 무엇인가?피임을 포함한 모든 기술의 사용이 우리의 가치를 어떻게 반영하고 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에게 피임이 필수품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 자율성과 자급자족이 그토록 높은 지위로 높아진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가 되는 것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 인생의 방해가 된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인 젊은이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 모든 질문은 가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피임약 사용은 내가 가진 어떤 가치를 드러내는가? 인간의 기술이 가려버린 창조의 선함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가치는 어디에서 수정되어야 할까?2. 경외로움으로 다시 바라보자그렇다고 피임약이 임신의 기적이나 출산의 고통스러운 승리를 바꾼 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아기는 언제나 그래왔듯 여전히 잠재력으로 가득 찬 눈을 깜빡이며 세상에 나온다. 로맨스 또한 그 깊은 매력을 잃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서로에게 끌리고 또 불꽃을 튀긴다. 매우 다른 두 피조물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매력, 고통, 희극은 여전히 훌륭한 이야깃거리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부활이 필요하다면, 그건 좋은 러브스토리가 주는 마음졸임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진부해졌기 때문이다.성경은 우리에게 창조의 이러한 측면에 경탄하라고 요구한다.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기이한 일이 셋,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넷이 있으니, 곧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와, 뱀이 바위 위로 지나간 자취와,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하였던 자취이다.” (잠 30:18-19).젊은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하는 방식은 날아다니는 독수리나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움직임만큼이나 경이롭고 설명하기 어렵다. Lindsay Wilson은 “인생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탐험할 수 있는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라고 쓰면서 이 잠언 구절의 역동성을 포착한다. 우리는 인생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우리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기뻐해야 한다. 성적 차이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면 어떨까? 남자와 여자의 특성을 모은 목록이 환원주의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 차이가 단순한 목록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오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성적 차이에 이렇게 접근할 때, 우리는 누군가 자신이 “잘못된 몸”으로 태어났다고 말할 때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다. 더 나은 이야기현대 문화는 종종 젠더에 대한 서사를 억압의 형태, 버려야 할 부담, 기술(피임 기술은 물론이고 호르몬, 성전환 수술 등)로 극복해야 할 자연의 장애로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훨씬 더 나은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사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하셨다는 이야기이다. 결혼이 무엇인가? 서로 대조되는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서 우주의 중심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고유한 축복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현대 기술이 우리의 비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그림은 여전히 우리가 보고, 기뻐하고, 또 선포할 수 있도록 남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출처: How the Pill Obscures God’s Truth in Creation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
by 고상섭
2024-04-0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 중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하지 말고 삼위일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설교에서 그리스도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본문에 맞춰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신학적으로 더 균형 있는 말인 것처럼 들리지만 이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이 곧 삼위일체 중심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설교여야 한다는 명제가 증명되려면, 먼저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이 아니다”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적이지 않은가? 프레스 샌더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에서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더욱 삼위일체적이 된다고 설명한다. “만일 성육신이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세 위격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 위격은 계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차이점에 의해 서로를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에서는 하늘에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고, 오직 익명의 셋만 있게 될 것이다.”이 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만 삼위일체의 구분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양자됨으로 우리가 성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부와 성령과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사역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적일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가 더욱 찬란하게 계시된다.센더스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은 성부를 망각하는 것도 성령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 히브리서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는 말씀이 있다면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예수를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가 보내는 성령에 대해 생각한다. 즉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도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모든 설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자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신약의 서신들은 처음에 시작되는 인사말과 끝에 나오는 축도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다. 11개의 신약의 서신서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언급한다. 자세히 보면 성령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 서신이 ‘성령님’을 뺀 잘못된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자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설교한다는 것이고, 설교를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심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리스도 중심 설교야말로 최선의 삼위일체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설교가 존재하는가?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표현은 듣기에는 좋지만 학술적 정의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다양한 신학 근거를 가진 책들과 실용서들이 출판되었지만,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설교학 교과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삼위일체 설교’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가? 모든 설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반드시 다 거론해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본문에서 성부가 나올 때는 성부만, 성자가 나올 때는 성자만, 성령이 나올 때는 성령을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 본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오지 않는 본문을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에서 말하는 것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 중심 설교라면, 삼위일체가 모두 등장하지 않는 본문은 늘 인간의 스토리만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 본문이 포함된 문맥과 각 책, 구약과 신약의 전체 속에서 설교할 본문을 바라보는 숲속의 나무로 본문을 보는 성경신학의 눈이 생길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말은 명확한 실체가 없는 표현이기에 실례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않고 삼위일체적으로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삼위일체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삼위일체 중심 설교인지 구체적인 설교문을 보고 싶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주장은 많지만 정작 삼위일체 설교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학문 근거도 실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일 뿐이다. 삼위일체 설교는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삼위일체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극단적으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는 설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프래드 샌더스도 삼위일체를 깨뜨리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이 유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보내신 성부의 사랑을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의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존재 그대로를 보는 데 실패하게 된다.”결론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 요점을 살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곧 삼위일체 중심 설교이다. 둘째, 삼위일체 중심 설교의 구체적인 예와 원리가 명확하지 않다. 셋째, 그러함에도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고려하지 않는 설교를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삼위일체 중심 설교는 결국 그리스도 중심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의 풍성함이 더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라는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욱 아름답고 찬란하게 드러내어서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이 선포되도록 더욱더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삼위일체 중심이 된다.
비극의 소비자가 되지 말라
by Caroline Stoltzfus
2024-04-02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쟁, 무차별 총격 사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연예인, 정치극, 그리고 재판받는 첨단 기술 관련 억만장자들 등등. 오늘날 사회에는 끊임없이 뉴스가 쏟아지고, 그 모든 뉴스를 챙겨봐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보를 얻는다는 건 사회와 연결되었음을 확인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 및 역량을 강조하는 현대 문화의 미덕을 발휘하는 모습이다. 물론 탄탄한 저널리즘을 기반으로 한 역사적이고 시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건 가치가 있다. 창작자가 정직하게 이야기를 전할 때 정의가 구현되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를 대변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뉴스를 통해서 각 세대가 이웃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자원을 사용하도록 영감을 받는다. 개인과 공동체로서 서로 배우고, 연결하고, 또 성장하는 데에 뉴스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나쁜 뉴스에 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둠스크롤링(doomscrolling: 뉴스 스크롤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과 더불어 쉬지 않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또 속보가 뜰 때마다 오는 알림을 강박적으로 클릭하는 게 과연 그리스도의 왕국을 잘 섬기는 데에 도움이 될까? 우리는 정말로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쏟는 걸까? 아니면 비극이 우리의 오락이 되었기 때문일까?참여냐 도피냐?솔직하게 말해서, 쉬지 않고 새로운 소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나와 이웃의 고통을 피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비난하는 게 바로 앞 모퉁이에 있는 노숙자를 돕는 거보다 훨씬 쉽다. 리얼 범죄 팟캐스트에 몇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가상 작업의 단조로움에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는 아드레날린 해독제이다. 가족과 함께 가치 있는 대화를 나누는 대신 인스타그램 릴(Reel)이 제공하는 정치 드라마의 토끼 굴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치 내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정신 건강과 내 공동체에 초래하는 피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정보 소비 행태는 주로 혼자 이뤄진다. 둠스크롤링은 굳이 육체를 갖춘 인간과 구원의 관계를 맺는 복잡하고 헌신적인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애초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벗어나게 된 과거의 절망에 다시 빠지고,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그 절망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 시청에서 행동으로무력하게 멀리서 지켜보는 대신, 이사야 58:10-11에 귀를 기울이자.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라고 하신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우리가 부름 받은 건 단지 배고픈 사람들을 돕자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포스팅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바램을 보며 답답하다며 고개를 흔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을 쏟아부음으로 궁핍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름받았다. 타인의 불행을 보다 보면 종종 두려움과 우울함이 생기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때 주님은 모든 우울함을 밝게 하시고, 계속해서 인도하시며,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까지 만족시켜 주신다. 우리가 만족을 찾아야 할 행동은 스크롤링이 아니라 진짜 봉사이다. 하나님이 끊임없는 주시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흐름 이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이야기로 초대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의 필요에 부응할 때 우리에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복지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육체적 필요를 채우며 고통과 싸울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감정적, 영적 어려움을 만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시고 우리가 기쁨의 증언을 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결코 뉴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취약계층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비극은 결코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극은 단지 인간의 죄가 모든 개인과 사회에게 어떤 끔찍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주변 고통에 대한 정보를 알라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그 고통 속으로 발을 디디라고 부르신다. 성령의 열매를 고려하라어떻게 해야 주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돕는 방식으로 정보를 접할 수 있을까? 일단 뉴스 소비가 우리 삶에 어떤 열매를 맺는지 생각해야 한다. 게시물을 스크롤하고, 기사를 읽고, 또 팟캐스트를 들을 때 당신 속에 일어나는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라. 거기에 성령의 열매라는 특징이 있는가(갈 5:22-26)?• 이웃 사랑•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 당신의 삶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여부에 달린 평화• 학습 과정에서 필요한 인내심• 행동에서 드러나는 친절• 의롭고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함• 봉사하는 데서 드러나는 신실함• 마음과 몸의 한계를 향한 너그러움•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에 대한 자제력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도리어 두려움, 불안, 죄로 특징지어진 반응이 주로 나타난다면, 당신의 뉴스 소비 습관은 재고되어야 한다. 보니 크리스티안은 Untrustworthy에서 단지 정보를 얻는 것보다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공부하는 자세를 갖는다는 건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이 모든 걸 다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굳이 모든 헤드라인을 다 읽으려고 하지 말고, 적은 수의 기사를 깊이 신중하게 읽으라는 충고이다. TV 뉴스, 앱 알림, 일일 뉴스 요약 이메일의 단식부터 시작하라. 적어도 몇 주 동안 소음을 제거하고 이런 변화가 당신의 관계, 기분 및 불안 수준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읽으라. 일기를 쓰고, 기도하고, 또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며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 보라. 혹시라도 더 개선하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라. 이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와 돕는 손길과 재정을 어떻게 바치라고 요구하시는지를 고민하라. 그런 다음에 뉴스 피드를 새롭게 구성하라. 당신은 이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새롭게 정보를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주제에 대한 온갖 정보를 다 얻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오늘 터지는 뉴스와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영원한 구원 스토리의 일부가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원제: Tragedy Isn’t for Consump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파괴되기 전에, 다시 세워야 한다
by 전재훈
2024-04-01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보게 되는 표지판이 ‘아시안 하이웨이’다.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는 아시안 하이웨이 1번 도로이며 6번 도로의 경우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릉-원산-청진으로 북상해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모스크바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지만 북으로는 철책이 놓여 있어 일본처럼 섬이나 다름없는 형국이다. 자연스레 이 땅의 젊은이들은 세계관이 다른 나라에 견주어 좁은 편이다. 하지만 이 하이웨이가 개통되고 오토바이 타고 유럽을 갈 수 있게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젊은 친구들이 꿀 수 있는 꿈의 크기가 달라지고 세계관의 스케일이 달라진다. 미국은 50년 동안 달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달에 깃발 꽂고 사진 한 장 찍은 것이 전부였다. 이것마저도 사기라며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개의치 않고 달 탐사에서 한 발 더 나가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달 탐사 프로젝트가 가져온 결과는 비단 사진 한 장만이 아니다. 달에 가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무수히 많은 기술적 진보를 이뤄냈고, 그 혜택을 우리가 누리며 살고 있다.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혔고, 이는 다양한 문화적 확장을 이뤄냈다. 스타워즈의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인식의 한계를 지닌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는 세계는 매우 좁다.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너무 멀리 있거나 혹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의 귀는 20~2만 헤르츠 사이의 주파수대에서 소리를 듣고, 우리의 시야는 120도를 넘지 못한다. 0.03초 이내의 순간은 전혀 볼 수도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우리의 한계 속에서 규정된 세계였다. 하지만 과학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매우 넓어진다. 광학 현미경으로 나노 크기의 원자를 보고, 천체 망원경과 우주탐사선으로 도움으로 화성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소리는 키워서, 큰 소리는 줄여서 들을 수 있는 기계들도 많다. 야간에는 적외선 탐지기로 어둠 속을 보고, 엑스레이나 MRI로 몸속을 볼 수도 있다. 배 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손가락을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 더 확장된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SNS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앞집 아저씨의 근황은 몰라도, 인도에서 선교하는 친구의 근황은 잘 안다.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무한대로 넓어졌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선물도 받았다. 페이스북의 친구들을 파도타기 하면 불과 다섯 번 만에 전 세계인을 다 만날 수 있는 시대다. 번역기는 언어의 한계를, 구글은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준다. 지금까지의 과학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앞으로 수년 내에 펼쳐질 미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지금 상용화를 앞둔 다양한 기술들은 불과 1, 2년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술들이다. 과학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이는 삶의 편의성만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사고의 변화를 일으킬 것이고,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게 되며, 가치관의 혼돈도 생겨날 것이다. 과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신학과 철학이 인간의 생각을 주도해 왔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철학적 사고보다 과학적 사고가 더 환영받는다. 어떤 신이 참 신인가에 대한 논쟁은 신이 있기는 한 것인가의 논쟁으로 바뀌었고, 진부한 싸움은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신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되었다. 이런 생각들은 다시 한번 변화의 기회를 맞고 있다. 화성탐사프로젝트로 빅뱅이론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원자 단위로 물체를 분리 추출하는 기술은 물체 에너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를 정리하고 데이터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선도하는 기술은 이미 가동 중이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자동차는 양산을 앞두고 있다. 3D 프린터는 가정용으로 만들어 판매되고 있다. 화상캠을 통하여 집에서 교회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제어하며, 미국 출장 가서 한국 집에 있는 보일러를 조작할 수 있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대화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공간과 시간 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생각들은 무한의 세계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4차원’이라는 말이 더 이상 바보를 뜻하는 말이 아닌 진보적이며 창조적인 의미로 바뀌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은 더 이상 설 곳을 잃어가고, 엉뚱한 상상은 인류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가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로 종교의 울타리가 무너졌듯, 다가올 미래는 신학의 파괴를 부채질할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종교적 마인드로는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설득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AI가 인간을 대체하기 전에 재림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묶어 두었던 종교적 세계관, 가치관, 인간관, 신관을 모두 재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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