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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와플 QT_견해
2020-03-02
고린도전서 1장 1-17절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열면서 흠이 많은 고린도교회를 ‘거룩함을 입은’ 성도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거룩함입니다. 그들의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거룩하다고 여겨 주신 것입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행위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거룩해집니다.  

1.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믿음의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함을 입어 성도가 된 사람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각처의 모든 사람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4.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5. 이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말과 지식을 포함하여 모든 일에 풍성한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6. 그래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 말씀을 굳게 믿고
7. 모든 영적인 축복을 누리면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은 재림하시는 날에 여러분이 흠 없는 자가 되도록 끝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9. 여러분을 불러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부디 서로 갈라지지 말고 의견을 모아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연합하십시오.
11. 나는 글로에의 집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여러분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2.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고 말한다니
13. 그리스도가 그렇게 나누어졌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4.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15. 그래서 여러분은 아무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16. 하기야 스데바나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긴 했지만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기억이 없습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난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 방식에 대해서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까, 과하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의 거주지 주변에 스타벅스나 백화점, 전철역 대신 장애인센터나 정수장, 장례식장 등의 시설이 들어오는 것에 찬성입니까, 반대입니까? 당신의 회사에 정직하지 못하더라도 확실한 성과를 내는 사람이 필요합니까, 정직하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필요합니까? 낙태와 존엄사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너무 부담스럽다고요? 당신의 속사람과 직면해야 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렇다면 조금 더 편안한, 취향 차이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짜장입니까, 짬뽕입니까? 아침잠입니까, 아침 식사입니까? 방탄소년단 콘서트입니까, 나훈아 콘서트 입니까? 무한도전입니까, 1박 2일입니까? 적극적으로 성장시켜주는 리더십과 믿고 맡겨주는 리더십 중에 더 선호하는 상사 유형은 무엇입니까?


과연 위 문항 중 나와 온전히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정보를 자기 편의대로 취사선택하는 인간의 본성상 인간은 공동체 내에서 완벽하게 일치하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모습과 역할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가집니다. 그러면서도 단 하나 우리의 구원자이자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 교회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이웃을 사랑하는가 말이죠.


17세기 멜데니우스가 선언한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in necessaris unitas, in unnecessaris libertas, in omnes charitas)”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거스틴 역시 그리스도인의 행할 바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Dilige, et quod vis, fac)!” 분쟁과 분열은 어느 곳에도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사랑과 평화도 반드시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시며 오늘도 조용히 우리의 발걸음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작성자 : 문종성(작가)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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